기독교 교리개요 2025년 4월 4일 수정
1. 하나님의 존재하심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첫걸음이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정리해보자. 자연만물의 증거 첫째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자연만물에 의해 증거된다. 집 한 채나 기계 한 개도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자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와 같이 그것들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크고 놀라운 우주와 자연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다. 지구는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공과 같다. 지구의 무게는 약 6섹스틸리온 톤이라고 한다(1섹스틸리온은 10의 21제곱). 이렇게 큰 지구는 팽이처럼 돌고 있는데, 한 바퀴 도는 시간이 하루 즉 24시간(23시간 56분 4.09초)이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데, 한 바퀴 도는 시간이 1년 즉 365일(365일 6시간 9분 9.54초)이라고 한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해와 같은 별 1,000억개 이상으로 구성된 은하수가 그것이다. 또 이 우주에는 약 1,000억개의 은하수들이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런 놀라운 자연만물의 존재와 그것의 신비한 질서, 또 지구상의 다양한 동식물들과 특히 사람의 신비한 기관들의 움직임들은 결코 우연하게 생긴 것일 수 없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시편 19:1-4에서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 자연만물의 증거는 모든 사람들이 핑계할 수 없는 증거이다. 성경말씀의 증거 둘째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성경말씀에 의해 증거된다. 성경은 처음부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심을 전제(前提)하고 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은 자기를 낳은 부모를 증명하려는 것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힘있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 말씀은 직역하면 “나는 ‘나는 있다’이니라” 혹은 헬라어 70인역과 같이 “나는 ‘있는 자’니라”이다. ‘여호와’(הוהי)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계신 자, 즉 영원 자존자(永遠自存者)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풍성한 증거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와 같이 생활했을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들을 기이하게 구출하셨고, 그들이 시내산 아래 도착했을 때 그는 불 가운데서 그 산꼭대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다(출 19장). 모세는 신명기 4:32-35에서 그 일들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힘있게, 풍성하고 확실하게 증거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를 알 수 있다. 다윗은 시편 19:7-8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경험의 증거 셋째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성도의 일상생활의 경험에 의해서도 증거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렘 10:10).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활동하신다. 그는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와 인도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사실상,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에 대한 증언들의 기록이다. 노아는 홍수 심판과 구원을 경험했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 성취를 경험했다. 모세는 특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많은 기도 응답을 경험했고,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히스기야는 유다 왕들 중 놀라운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을 침공했을 때, 그는 위협하는 산헤립의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펼쳐놓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그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 5천명을 쳐서 죽임으로 그 군대가 물러가는 일을 경험했다(왕하 19:14-19, 35). 시편의 많은 내용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체험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무신론(無神論)의 어리석음 오늘날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 그러나 무신론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증거들, 즉 자연만물의 증거와 성경말씀의 증거들과 경험의 증거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어리석다. 무신론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는 무슨 증거들을 제시하는가? 무신론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나 반론을 내놓지 못한다. 무신론은 실상 그 자체가 큰 죄요 죄의 뿌리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 죄이며, 거기에서 그 외의 모든 죄악들이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위의 규범으로 명하신 계명들을 어기는 악을 담대히 행한다. 그러므로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행하는 바가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고 믿고 그를 경외하고 섬겨야 한다.
2.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 기독교는 스스로 유일한 진리임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사람이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였다(딤전 2:5).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하신 구주이시며 중보자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은 과연 정당한가? 기독교 진리가 확실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증언들의 진실성 첫째로, 기독교 진리가 확실함은 성경의 기록자들,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들의 진실성을 통하여 증거된다. 사실, 기독교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십계명의 제9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0:16). 진실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잠언 6:16-19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를 말하면서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포함시켰다. 반면에, 마귀의 세계는 거짓의 세계이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저자들은 그들이 증거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썼다(눅 1:1-4).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1:24에 보면,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써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고,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전했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헬라어의 ‘증인’이라는 단어(마르튀스)는 ‘순교자’(martyr)라는 뜻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들은 순교의 피로 인쳐진 증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고난과 순교는 그들의 증언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세상에 거짓 증거를 위해 목숨을 버릴 자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증거한 말들 때문에 죽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흘린 순교의 피는 그들의 증언들의 진실성에 대한 힘있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는 진실한 증인들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진실한 증언들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확실하다. 기적과 능력의 일들 둘째로, 기독교 진리가 확실함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과 능력의 일들을 통해 증거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많은 기적과 능력의 일들을 주셨다. 그는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를 믿게 하기 위해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져 뱀이 되게 하셨고 그의 손을 품에 넣을 때 나병이 발하게 하셨고 나일강 물을 조금 떠서 땅에 붓게 하실 때 그것이 피가 되게 하셨다(출 4:1-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주신 기적들을 행한 자이었다(신 34:10-1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도 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주셨다(왕상 17~왕하 13장). 또 그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풀무불 기적을 경험케 하셨고(단 2장) 다니엘 자신에게는 사자굴 기적을 경험케 하셨다(단 6장).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들을 주셨다. 요한복음 14:11에 보면, 주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했다(행 2:22). 예수님의 기적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는 바이었고 그들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30-31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8개 기적)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했고(히 2:3-4), 마가복음 16:20은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의 확실함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의 많은 일들을 통해 증거된다. 그러므로 누가 성경에 기록된 풍성한 증거들을 외면하고 다른 하나의 증거를 구한다면, 그는 아주 믿음이 없는 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의 일들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충분히 확증하기 때문이다. 죄 문제의 해결 셋째로, 기독교 진리의 확실함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증거된다. 이것은 경험적 증거이다. 죄는 사람의 근본적 문제이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왔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진리가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기 죄를 깨닫고 구원 얻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진리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확실하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의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실, 사람은 죄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마태복음 5:3-5에 보면, 예수께서는 구원을 위한 준비의 덕으로 보이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며 베드로의 권하는 말들을 듣고 믿기로 결심하였고 놀랍게도 그 날에 3천명이 세례를 받았다(행 2:37-41).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사함 받는 체험을 통해, 즉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확실함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그 진리의 확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계시(啓示)와 성경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초기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셨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1:1-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원하시는 바를 말과 행위로 나타내시는 것을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고 특히 그 내용들을 책들에 기록케 하셨다. 일반계시 우선,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해, 사람의 양심을 통해, 또 인류 역사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을 창조자와 섭리자로 나타내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계시라고 말한다. 다윗은 시편 19:1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또 사도행전 17:24-28에 보면,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며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그 안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로마서 2:15에서 사람의 양심을 “사람의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매우 어렴풋이 알게 할 뿐이다. 사람은 범죄한 후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방법을 알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1: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에베소서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 진리를 깨닫거나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특별계시 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상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들은 세 가지이었는데, 첫째, 그가 직접 나타나시는 것, 둘째, 말씀하시는 것, 셋째,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번 직접 나타나셨다. 그는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전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이나 구름 가운데, 또는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다. 출애굽기 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심이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주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의 모습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혹은 영광 중에 불과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19:19,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는 사무엘에게도 음성으로 말씀하셨다(삼상 3:10). 그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음성으로 말씀하셨고(마 3:17), 예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꿈과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창세기 15:1,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또 그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특별한 감동으로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성경에는 기적을 위해 표적(sign), 기사(奇事), 능력이라는 세 단어가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네 시대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첫째,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신 34:10-12; 수 10:12-14)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은 시대이었다. 둘째,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는 심각한 배교의 시대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때 열두 가지, 엘리사 때 스물네 가지 기적들을 주셨다(왕상 17장-왕하 13장). 셋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시대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의 시대이었다(풀무불 기적(단 2장), 사자굴 기적(단 6장)). 마지막으로 넷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으로 완성된 시대이었다(마 4:23; 요 20:30-31; 21:25; 행 2:43). 히브리서 2: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께서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성경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많은 특별계시들을 주시면서 그것들을 선별하여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네 가지의 성격을 증거한다. 첫째로, 성경은 매우 필요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기 위해 매우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하셨다(출 24:4; 신 31:24). 모세의 율법책은 모세 시대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었다(수 1:8; 느 8:1-8).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성경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4).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눅 24:27, 44-45; 요 5:39; 20:30-31). 사도 바울은 성경의 유익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과 구원 얻은 성도들로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딤후 3:15-17). 둘째로,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유일한 저장소’이며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다(딤후 3:16).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책이다. 셋째로, 성경은 명료한 책이다. 성경에 어려운 내용들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은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해 우리가 믿고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달한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고 일반 사람들이 읽으면 이해할 만한 책이다. 넷째로, 성경은 충족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또 마지막으로(히 1:2) 주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을 통해 그의 뜻을 충분히 말씀하셨고, 그 모든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성경은 이제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 증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족한 말씀이다(눅 16:29, 31). 신약성경 맨 마지막에는 이 책에 무엇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는 엄숙한 경고가 있다(계 22:18-19).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외에 하나님의 다른 계시를 구할 필요가 없고 구해서도 안 된다.
4. 성경의 신적 권위 우리의 믿음의 내용인 기독교 교리들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유일한 저장소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다(딤후 3:16).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책이다. 성경은 이처럼 객관적 신적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나누어 좀더 생각해보자. 구약성경 우선, 우리는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로, 모세와 선지자들의 역할과 권위는 그들의 기록물인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도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셨다. 민수기 12:5-8, “여호와께서 구름기둥 가운데로서 내려오셔서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異像)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신명기 34:10, “[모세가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런 사실에서 모세의 글들의 신적 권위가 나온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도구들이었다. 이사야 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異像)이라.” 예레미야 1: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에스겔 1:3,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호세아 1:1,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던 이스라엘 왕 아합 시대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하였는데(왕상 22:14), 그것이 참 선지자의 권위의 근거이었다. 참 선지자의 표는 그가 전하는 바가 모세의 율법에 맞는 것과 그가 하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과 또한 기적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신명기 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열왕기상 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통 유대교인들처럼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하셨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구약성경을 거듭 인용하셨다. 마태복음 4:4, 7, 10,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또 요한복음 10:35에 보면,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하셨다. 셋째로, 사도들은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하였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그것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사도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임이니라”고 말했다(벧후 1:21). 신약성경 그러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로,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라는 성격이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신약성경의 첫 구절(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이루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해 증거했다. 요한복음 5:39,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들을 성취하셨다(눅 24:27, 44). 그러므로 예언인 구약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진다면, 그 예언의 성취인 신약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과 동등된 인격이시다. 그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30), 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35).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중의 특별계시이시며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시다(히 1: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기록하고 그에 관해 증거하는 신약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로,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는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비슷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께로부터 말씀을 선포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들은 또 주 예수께로부터 성령의 지도하심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 요한복음 14:26,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더욱이, 그들은 주 예수께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특별한 표를 받았다. 사도행전 2:43과 5:12는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증거하였다. 기적은 사도들의 권위의 표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2에서 “사도의 표들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 중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주께로부터 특별한 명령과 특별한 약속과 특별한 표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의 교회의 기초를 닦는 자들이 되었고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고 말하였고(살전 2:13), 또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다(살후 2:15). 또 그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증거했다(엡 2:20). 이와 같이, 사도들이 쓴 글들과 그들이 인정한 자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며 유일한 저장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시는 유일한 수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사람의 본성은 영적으로 어둡고 불신앙적이며 죄악되지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깨닫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고 성경의 신적 권위도 믿게 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 큰 평안과 복을 얻게 된다.
5.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이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내용들과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과 생활 원리들이 참되고 확실한 진리들이요 어떤 오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원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본들이나 번역본들에 약간의 부정확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사본들이나 번역본들의 차이점들이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용상 심각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성경 원본의 본문은 거의 확정된다고 본다. 특히 신약성경의 경우, 우리는 성경원본의 본문이 변질되거나 변개됨 없이 전통적 다수 사본들을 통해 잘 보존되고 전달되어 왔다고 본다. 20세기에 교회를 크게 부패시키고 혼란시킨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믿을 만하지 못한 오류투성이의 책으로 간주하며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현대신학자들 중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하는 칼 바르트도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고 말했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아담의 창조와 타락부터 사가(saga) 즉 신화라고 보았다. 성경에 오류처럼 보이는 부분들은 있으나, 많은 경우 그 구절들에 대한 가능한 설명이 있고 그것들은 난제(難題)일 뿐 오류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백히 확증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그런 오류는 없다고 본다. 성경의 어떤 난제들은 역사상 고고학의 발달로 해명되었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믿음과 기도로 겸손히 그 뜻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경의 신적 권위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신적 권위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며 성경말씀으로 물리치셨다(마 4:4, 7, 10). 또 요한복음 10:35에 보면,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성경의 영감뿐 아니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또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의 신적인 권위를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책이다. 만일 성경이 어떤 오류가 있는 책이라면, 그것은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류가 있는 책에 신적 권위를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부분의 오류라 할지라도,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며 성경의 신임성과 권위를 파괴시키고 말 것이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의 자유주의 신학이 해온 바이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면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은 마침내 성경의 기본적 사실들과 교리들과 윤리적 교훈들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성경의 축자(逐字)[단어] 영감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축자(逐字, verbal)[단어] 영감을 믿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주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점(י)(요드)과 획(ו)(와우) 같은 글자가 있다. 실상,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주님의 표현은 성경의 축자[단어]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 영감, 축획 영감을 보인다. 주께서는 성경의 일점일획, 즉 성경의 작은 부분까지 다 영감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내용임을 잘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다(딤후 3:16). 이 말씀은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모든 책과 각 책의 모든 부분들에 미침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3:16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신 약속에 대해(창 22:18)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서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명사인가 단수명사인가를 가지고 예언을 해석하고 논한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작은 부분, 즉 단어에까지 미치며 심지어 그것이 그 단어가 복수인가 단수인가 하는 문제에까지 미침을 증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성경의 모든 책들, 각 책의 모든 부분들, 심지어 단어들까지도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배려 가운데 주어졌고 기록되었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축자 영감, 단어 영감을 믿으며, 이런 성경의 축자 영감, 단어 영감의 사실은 성경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한다. 성경의 독특한 목적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독특한 목적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시편 19:7-8은 성경의 독특한 목적과 그 목적을 위한 네 가지의 성격 즉 완전성, 확실성, 정직성, 순결성을 증거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과 생활 교훈들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다. 시편 12:6도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말하며, 성경이 오류 없는 순결한 말씀임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15-17에서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며, 또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그들을 온전케 한다고 증거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그 구원의 요점은 주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즉 칭의(稱義)와, 거룩해지고 온전케 되는 것, 즉 성화(聖化)이다. 이것은 영원한 죽음에서 영생으로, 지옥 형벌에서 천국 복락으로 이끄는 구원이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신앙과 행위, 즉 교리와 윤리의 객관적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들과 생활의 원리들은 확실하고 무오(無誤)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성경이 오류가 있는 책이라면, 그 구원의 목적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이 배교와 불신앙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이 성경을 통해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믿어야 한다.
6.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 즉 하나님께 돌려지는 여러 성품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영이심 우선,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그것은 그가 사람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뜻이다. 영은 물질이 아니며 따라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주께서도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하셨다(눅 24:39).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과 팔,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등, 하나님의 귀와 눈(출 3:20; 6:6; 33:20, 23; 사 37:17) 등의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며 그것을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anthropomorphism)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고(요 1:18),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물질적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했고(창 18장, 32장)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보았다(출 24:9-10)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것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뜻이며 그의 본체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살아계시며 인격적 존재시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 10:10, “여호와께서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시다. 지혜와 능력이 크심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그는 전지(全知)하시다. 시편 139:2-4,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아시며 종말도 처음부터 아신다(사 46:10). 하나님께서는 또 지극히 능력이 많으시다. 창세기 17:1,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했다(렘 32:17).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반대되는 일은 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를 부정하실 수 없고, 자기를 죽이실 수 없고, 죄를 지으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작정자, 섭리자 하나님이시다. 그는 특히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주권적이시다(마 19:26).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심 하나님께서는 또 지극히 거룩하시다. 출애굽기 15:11,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신 자가 누구니이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이 초월해 계심과 또한 모든 도덕적 불결로부터도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지극히 의로우시다. 신명기 32:4,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의(義)란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을 가리킨다. 그 도덕적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로우심은 그의 도덕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고, 그의 뜻을 거스르는 악인들에 대해 진노하시며 벌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적 공의에 대해 분명히 가르친다. 로마서 2:5,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나훔 1:2, “여호와께서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점에서도 분명히 이단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지극히 선하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은혜, 긍휼, 자비, 사랑 등으로도 표현된다. 출애굽기 34:6,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仁慈)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절정은 만세 전에 택한 죄인들의 대속 제물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지극히 진실하시다. 시편 86:15, “[주는]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진실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신명기 7: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무한, 영원, 불변하심 하나님께서는 또 무한하시다. 그는 어느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고 동시에 어느 곳에나 계시다. 시편 145:3, “하나님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예레미야 23:24,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며(마 6:9) 하늘이 그의 보좌(사 66:1)라는 말씀들은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한 처소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열왕기상 8:27은 하늘의 하늘이라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모시지 못한다고 증거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체뿐 아니라, 그의 속성들에서도 무한하시다. 그는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다. 그는 그의 속성들에서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영원하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1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가 영원하신 분이심을 보인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영원하시다. 시편 90:2, “주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니이다.” 사실,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께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신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 존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불변하시다. 시편 102:27, “주는 여상(如常)[동일]하시고.” 말라기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와 속성들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뜻에서도, 불변하시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지만(출 32:14; 욘 3:10 등), 그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모양과 같은 성정을 가진 존재처럼 표현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시다.
7. 하나님의 삼위일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란, 하나님께서 그 본체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세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진리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매우 신비한 진리이지만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 자이며 신앙 사상에 큰 결함을 가진 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알지 못하며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유일하심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다. 출애굽기 20:3,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디모데전서 2:5,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신구약성경은 이와 같이 온 세상에 오직 한 하나님께서 계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여러 신(多神)이나 세 신(三神)을 믿지 않고, 오직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 한 분 이상의 하나님들이 계신가? [답] 오직 한 분 유일하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하나님의 본체의 단일성을 말한다. 그것은 종류적 동일성뿐 아니라, 수적 단일성을 말한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영원하시고 아들께서는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는 영원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자들이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 . . . 이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께서 하나님이심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세 인격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되신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그 세 인격들은 다 참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 하나님께는 몇 인격들이 계신가? [답] 하나님께는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계시는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이심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그의 신적 명칭, 신적 속성,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통해 증거된다. 이사야 9:6,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계시록 5: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나님 아버지만 하나님이시며 예수는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높임을 받은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다. 오늘날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여호와의 증인,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심 또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심도 그의 신적 명칭, 신적 속성,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통해 증거된다. 사도행전 5:3-4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님을 속인 아나니아가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증거했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께서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창세기 1:2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물 위에 운행하셨다고 증거했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령님의 신성은 또한 그의 인격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인격적 명칭과 인격적 특성들을 가지신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남성 지시대명사)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원어에서 중성명사인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로 남성 지시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삼위(三位, 세 인격)의 상호 관계 어떤 이들은 삼위(三位)의 구별을 부정하면서 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것을 양태론 혹은 사벨리안주의라고 함).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서로 구별되신 삼위께서 존재하심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심으로 삼위의 구별을 증거하셨다(마 3:16-17).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삼위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아들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시며,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시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요한복음 15:26,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실 때에.”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성령께서는 ‘아들의 영’이라고도 불리시고 그 명칭은 성령께서 아들로부터도 나오심을 보인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 삼위일체의 신비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 세 분께서 어떻게 하나가 되시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직접 관계된다.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또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영원토록 그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삼위의 이름으로 축도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8. 하나님의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 종말까지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셨으며 특히 구원 얻을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며 놀라운 진리이다. 창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작정하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을 따라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유롭게 또 불변적으로 작정하셨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37:26, “이 일들은 내가 . . .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이사야 41:4,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다니엘 5:23, “왕[벨사살]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 원인의 자유나 우연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숙명론과 다르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생각과 결심이 있다. 에스겔 36:37,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이스라엘의 회복)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또 세상에는 우연한 일들도 있다. 룻기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이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룻은 다윗의 할아버지의 모친이 되었다.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이 우연한 일로 아합 왕은 전사하였고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하셨던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도덕적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는 동시에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고 실천해야 한다. 특히, 작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과 죄까지도 작정하셨으나, 죄를 짓게 한 자는 아니시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그에게는 불의나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45:8,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사무엘상 2:25, “이는(엘리의 아들들이 죄를 짓고 회개치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누가복음 22:22, “인자(人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사람의 도덕적 약행의 책임을 함께 인정하고 증거한다.
창세 전에 사람들의 구원을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사람들의 구원도 예정하셨는데, 하나님의 예정은 두 가지 요소, 즉 선택하심과 버려두심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신의 전적 긍휼과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인류 가운데 어떤 이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 사실,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회개나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사람의 선택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내게 주신 자”와 “내 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10:26-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예정을 증거했다. 로마서 9:15-16, 18,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디모데후서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물론, 하나님의 선택하심 안에는 구원의 수단들, 즉 예수 그리스도이 속죄사역을 비롯해 전도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죄와 멸망 가운데 버려두셨다. 선택의 진리는 버려두심의 진리를 포함한다. 그러나 버려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들로 인해 멸망을 당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 출애굽기는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고 증거한다(출 4:21; 7:3; 9:12 등).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로마서 9:22,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 사무엘상 2:2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엘리의 아들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누가복음 22:22, “인자(人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베드로전서 2: 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무조건적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선택하셨다는 증거는 그가 진실히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이 선택의 증거이다. 예정의 진리는 우리로 겸손케 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찬송케 한다. 또한 예정의 진리는 구원이 사람의 변덕스런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근거하므로 확실하고 안전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구원 얻은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부지런히, 힘써 순종해야 한다.
9. 창조와 섭리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예정은 설계, 창조는 건축, 섭리는 관리이며, 출산에 비유한다면, 예정은 계획, 창조는 출산, 섭리는 양육이다. 창조 창조는 우주와 세상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창 1: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 사실이며 성도에게 가장 기본적 신앙이다. 우주가 영원하고 생명체는 우연히 시작되었으며 단순한 낮은 단계의 것들로부터 복잡한 높은 단계의 것들로 오랜 세월 동안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소위 진화론은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 즉 창조를 부정하는 사상으로서 교회에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6일은 각각 24시간의 하루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를 증거하는 기록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여섯 번 나오는 표현이 하루에 가장 적합하며 일곱째 날의 구별(창 2:2-3)과 안식일로 지키라고 명하신 것(출 20:11)이 이 견해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6일을 각각 일상적 하루로 보면, 천지만물이 창조된 창세기 1:1의 ‘태초’는 창세기 5장과 11장, 출애굽기 12:40, 열왕기상 6:1을 참조할 때 주전 약 4115년이다. 진화론은 인류의 오랜 연대를 주장하지만, 그 주장은 단지 불확실한 가설에 근거할 뿐이다. 예를 들어, 방사성 탄소(C-14)에 의한 연대 측정은, 모든 생물체가 수천 년 전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양의 방사성 물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사성 물질의 양의 줄어드는 기간(반감기)도 어느 시대나 똑같다는 가설에 근거한다. 그러나 누가 지금부터 몇 천 년 전의 세계에 가서 생물체의 방사성 물질의 양을 측정해보았는가? 그것은 단지 오늘날과 같을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할 뿐이다. 창조를 믿는 자연과학자들은 우주의 오랜 연대설에 반대해 우주의 짧은 연대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도 제시했다. 예들 들어, 그들은 지구의 회전속도의 줄어듦, 지구에 떨어지는 우주진(미세한 돌이나 철, 니켈 미립자)의 양, 지표 흙의 두께 등은 지구가 약 만년 미만의 나이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며 그것은 성경의 연대에 접근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의 원시 상태와 물과 빛, 그리고 아마 천사들을 창조하셨고, 둘째 날에 하늘을, 셋째 날에 땅과 바다와 식물들,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 다섯째 날에 물고기들과 새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짐승들과 기는 것들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특징들 몇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가라사대’라는 말이 열 번, ‘이르시되’라는 말이 한 번 나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식물들과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과 기는 것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다. 1장에 ‘종류대로’라는 말이 열 번 나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시편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사야 43:7, 21,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 .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섭리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온 세상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관하시며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느헤미야 9:6,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시편 93: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시편 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섭리하실 때 주로 자연법칙을 사용하신다. 이것을 일반섭리라고 부른다.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께서 그들[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세기 3:23,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사도행전 27: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뱃사공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성적이 오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 즉 특별계시들을 직접 주시던 시대에 때때로 자연법칙을 초월해 섭리하셨다. 이것을 특별섭리 혹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했고 손을 품에 넣자 나병이 발했고 강물을 땅에 부을 때 피가 되는 등의 기적을 체험했다(출 4장). 또 그는 애굽에 가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하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홍해가 마른 땅같이 갈라지는 일을 경험했고 그 많은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먹는 기적을 체험하였다(출애굽기, 민수기). 성경은 엘리야 때 갈멜산에서의 불의 응답과 사르밧 과부의 집의 기적 등 12가지의 기적들과 엘리사 때 24가지의 기적들을 증거한다(왕상 17장-왕하 13장). 다니엘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불무불 기적과 다니엘의 사자굴 기적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나병, 중풍병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은 자들(야이로의 외동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을 살려주셨다(복음서들). 사도들도 기적들을 행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며 인류 구원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포함하는 세계적 계획이다. 신약시대는 이방인들의 구원 시대이지만, 그 말기에 유대인들의 민족적 회심이 예상된다(롬 11:25-26).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 창조도 섭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10.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 오순절에 내려오신 성령님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 거듭나게 하시고 날마다 더욱 거룩해지게 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또 부수적으로,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 여러 은사들을 주셔서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을 섬기게 하셨다. 성령님의 은사들 중에는 일반적 은사들도 있지만(롬 12:6-8) 초자연적 은사들도 있었다(고전 12:4-11). 하나님께서 사도시대에 주셨던 초자연적 은사들 중에는 예언, 방언, 병 고침 등의 은사들이 있었다. 사도시대에 주셨던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있는가? 은사운동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셨던 목적 하나님께서 사도시대에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셨던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그것들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바이다.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활동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히브리서 2:3-4, “하나님께서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님의 나눠주신 것[은사들]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으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행전 2:43과 5:12는 사도시대에 특히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받고 기적들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셔서 전하고 가르치게 하신 말씀에 권위를 주신 것이었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거두어졌음 성령께서는 사도시대가 끝났을 때 초자연적 은사들을 거두셨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거두어졌다는 것은 사도 시대 이후 교회가 경험한 바이었고 교회의 전통적 견해가 되었다. 주후 4세기의 유명한 교부(敎父) 크리소스톰은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주후 5세기 초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이었던 어거스틴은 그의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말했다. 벤자민 워필드는 이 문제에 관해 초대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한 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들의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했다. . . .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명백하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사라진 것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과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이었다고 본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고, 그것은 신약성경의 충족한 기록과 완성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에 사라졌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8-11에서 예언과 방언이 부분적인 것들에 관계되며 어린아이 때의 것들이요 청동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것들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에 그칠 것이라고 증거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신약시대에 계속 있을 영속적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을 가진 것들임을 증거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끝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계 22:18)라고 말했는데, 이 책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한 평가 20세기 초에 일어난 방언 운동에 뿌리를 둔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이나 회복을 주장하지만, 은사운동의 주장은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고 본다.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 혹은 회복을 주장하는데,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에는 예언이나 방언 통역 등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의 은사들이 포함되며, 그것은 결국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잘못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사도 시대에 사도들을 통해 신약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이전의 계시 방법은 이제 중단되었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주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기를 기뻐하셨고, 그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기 위해, 또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그 동일한 내용을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나, 성경 외의 하나님의 직접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실제로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29, 31,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신구약성경으로 충족하며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성경 외의 예언과 특별계시를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다. 둘째로, 은사운동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말씀 중심 즉 성경말씀의 바른 지식과 실천보다 방언, 예언, 병고침 등의 초자연적 은사 체험에 의존시키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잘못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은사운동은 기독교 본질에 대한 이런 왜곡 때문에 CCM을 중시하며 매우 감정적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속죄의 복음을 중심한 바른 교리와 바른 삶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마태복음 7: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셋째로, 오늘날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실제로 있지 않다고 본다. 오늘날 방언 현상들은 외국어의 특징을 가지지 않고 병 고침들도 모든 질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은사운동의 예언, 방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은 거짓과 허풍이 많아 보인다. 또 주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행할 기적들을 경계하셨고(마 24:24), 또 사도들도 말세의 거짓 기적들을 경계했다(살후 2:9-12; 계 13:13, 15). 넷째로, 은사운동에는 교리적, 윤리적 탈선이 많다. 심각한 교리적 탈선은 그것의 이단성을 드러내며 윤리적 탈선도 그것의 거짓됨을 드러낸다. 특히, 은사운동은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며 세계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 회개와 순종 가운데 성령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은사운동은 확실히 성도들이 경계해야 할 운동이다.
11. 사람의 본래의 상태 사람은 범죄하기 전, 본래의 상태가 어떠하였는가? 성경은 사람이 범죄하기 전, 본래의 상태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몸과 영혼으로 구성됨 우선,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이분설(二分說)이라고 한다. 이분설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사람의 창조 사건에 대한 서술에 있다. 창세기 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生靈)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이야)는 창세기 1:20에는 ‘생물’로 번역된 말로서 ‘생명체,’ ‘산 존재’라는 뜻이다. 영과 영혼(혼)을 구별하여 사람이 몸과 영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을 삼분설(三分說)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과 영혼이 구별 없이 사용되기 때문에, 영과 영혼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예들을 들어보자. 첫째, 성경은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어떤 때는 몸과 영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몸과 영혼이라고 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둘째, 사람의 죽음을 묘사할 때, 어떤 때는 혼이 떠난다고 하고, 어떤 때는 영이 떠난다고 한다. 창세기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셋째, 죽은 자의 부활을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혼이 돌아온다고 하고, 어떤 때는 영이 돌아온다고 한다. 열왕기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누가복음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야이로의 외동딸)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넷째, 죽은 자들을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영들’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영혼들’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 하나님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요한계시록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이처럼 성경에서 영과 영혼은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다. 또, 삼분설은 흔히 영은 고등한 것으로 여기고 혼은 저급한 것으로 여기지만 이런 생각도 성경에 맞지 않는다. 성경은 동물의 영에 대해 말한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루아크)[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크)[영](원문)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또 성경은 하나님의 영혼에 대해서도 말한다. 아모스 6: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그의 혼을]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성경은 또 사람의 종교적 활동을 영혼에게도 돌린다. 누가복음 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삼분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구절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강조를 위해 영과 혼을 반복한 경우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히브리서 4:12,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사람은 범죄함으로 몸의 기능이 악화되고 죄악된 충동이 강해졌다. 그러나 사람은 단지 육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사람의 본래의 상태의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어떤 영적 특성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지혜와 지식, 의와 거룩의 도덕성을 포함했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후 이 하나님의 형상은 크게 손상되었다고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신약성경의 두 구절은 그 회복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지식과 의와 거룩을 가리킨다고 증거한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런 의와 거룩을 ‘본래의 의’라고 부른다. 사람은 범죄함으로써 창조 때 받았던 본래의 의를 잃어버렸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써 그것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한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린도전서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는 지혜와 지식, 의와 거룩 외에 다른 어떤 독특성도 포함된다고 보인다. 예를 들어, 사람의 지정의의 인격성, 양심의 도덕 의식, 영혼의 표현기관으로서 눈, 귀, 입, 머리, 손, 발, 얼굴, 팔 등 몸의 기관들, 및 생물통치권 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특히 창세기 1:26은 사람의 생물통치권을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시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이런 요소들을 다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라고 보인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음 또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었다. 그것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이었다(창 2:16-17). 이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후손에게 순종에 근거하여 생명을 약속하셨다. 이것을 ‘행위 언약’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이 첫 명령과 언약에서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었으므로 그의 순종은 인류의 순종으로, 그의 불순종은 인류의 불순종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로마서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이 순종 관계는 영속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것이었다(신 10:12-13). 사람의 본래의 상태는 확실히 매우 복되었고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그 행복과 영광의 상태로부터 죄와 비참의 상태로 떨어졌다. 사람은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을 잃어버렸고, 영적인 것 대신 육신적,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로 타락했다. 이제 구원은 사람이 잃어버린 그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12. 죄와 형벌 사람은 본래의 상태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범죄함으로 죄와 형벌의 상태에 떨어졌다. 그러면 죄는 무엇이며 죄의 형벌은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죄의 시작 사람의 죄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되었고 첫 사람의 범죄는 하와가 뱀 곧 사탄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이루어졌다. 사탄은 본래 천사이었으나 교만하여 먼저 범죄했다고 보인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에덴] 동산의 각종 나무의 과일은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6-17). 그러나 뱀 곧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하였고 하와는 그것을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다. 뱀은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했었다(창 3:4-5). 사탄은 하와의 마음에 의심과 교만을 충동질하였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었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아내의 말을 따랐다. 즉 첫 사람의 범죄는 불신앙과 교만에서, 불신앙과 교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죄의 정의(定義) 죄는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처음 명령을 어긴 것이 죄이었다. 요한일서 3:4, “죄는 불법이라.” 죄와 죄 아닌 것을 판단할 기준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다. 비록 인간 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죄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와 영광에 대한 모독이요 손상이요 침해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했고(창 39:9),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게 한 죄를 회개하며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였다(시 51:4). 죄의 요소 죄는 죄책(罪責, guilt)과 죄성(罪性, 부패성)의 두 요소를 가진다. 죄책이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야 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벌을 받아야 할 법적 책임을 가리키며, 죄성이란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 즉 죄악된 성질을 가리킨다. 죄는 이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죄는 죄악된 행위뿐 아니라 죄악된 마음 상태와 습관도 포함한다. 탐심이나 음욕이나 미움도 죄이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마태복음 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로마서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처음 명령(창 2:16-17)을 어긴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죄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처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로 그 죄의 법적 책임(죄책, 罪責)과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죄책과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은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고 죄의 형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19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실상, 모든 사람)이 죽었고(15, 17절) 정죄(定罪) 되었고(16, 18절) 죄인 되었다(19절)고 증거한다. 죄의 보편성과 정죄(定罪)의 보편성과 죽음의 보편성이 원죄의 죄책의 전가를 확증한다. 로마서 3:11,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요한복음 3:5-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죽음은 사람에게 보편적 현상이다. 죄가 없어 보이는 어린 아기도 죽는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죄성(罪性)도 그의 후손인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이 원죄의 죄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죄악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의와 선을 행하기에 완전히 무능하다.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누더기] 옷 같으며.”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자범죄(自犯罪)란 원죄의 죄책과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살면서 짓는 모든 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모든 죄들이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는 모든 불경건과 무신론과 이방 종교들과 우상숭배와 이단들이며, 또 인간 관계의 계명들을 어기는 모든 죄들, 곧 부모에 대한 불효와 불순종, 미움과 살인, 간음과 음행, 도적질, 거짓말, 탐심 등의 온갖 죄들이다.
죄의 형벌 죄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보응, 형벌)은 사망이요.” 이 죽음은 영적 죽음과 육신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포함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 모든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는다. 창세기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 자손의 계보에는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하여 나오는데,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의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셋째, 사람들은 죄로 인해 장차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죄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부수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마음의 슬픔과 근심, 몸의 수고와 각종 질병과 고통, 그리고 땅의 저주도 사람의 범죄의 결과로 왔다. 창세기 3:1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며 사람이 평생토록 땀 흘려 수고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또 그는 여자에게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창 3:16). 죄와 슬픔과 고통과 저주와 죽음 아래 살고 있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을 얻었다.
13.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은 무엇이며 율법과 복음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방법으로 인류를 대하시고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대표자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그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처음 명령을 가리킨다(창 2:16-17).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에서 아담의 완전한 순종의 행위를 조건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을 경고하셨다. 이것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영생을 위해 택하신 자들을 위해 아들 예수님과 속죄사역에 관한 언약을 맺으셨다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에 의해 증거되며 택자들의 구원의 기초가 된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3:11,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이었다.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이 언약을 구속언약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시고 부르시는 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구약--율법 이 은혜언약은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해 율법의 형태로 주어졌다. 이것을 구약이라고 부른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주신 십계명을 받았다. 출애굽기 20:1-3,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애굽기 24:4-8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을 책에 기록했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피를 취하여 단에 뿌렸고 또 그 언약의 책 곧 율법을 백성에게 낭독하고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는 세 가지 내용이 있었다. 첫째는 도덕법이다. 도덕법은 십계명에 간략히 증거되어 있는데(출 20:1-17),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마가복음 12:29-31,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도덕법은 사람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것은 겉으로는 행위언약처럼 보인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도덕법의 목적은 삼중적이었다. ① 도덕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목적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도덕법은 영속적이며 신약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영적이다(롬 7:12, 14). 디모데전서 1:8,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② 도덕법은 사람의 죄악됨을 깨닫게 한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③ 도덕법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어린아이들을 인도하는 선생)이 되어.” 둘째는 의식법(儀式法)이다. 그것은 성막 예배, 제사, 절기, 정결 부정결의 음식 등의 법이다. 의식법은 일차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로마서 3:21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구약성경에 증거된 바라고 말하였고, 골로새서 2:16-17은 음식법과 절기법 등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의식법은 구약시대의 율법이 은혜언약임을 잘 증거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고 단지 그 법에 내포된 도덕적 교훈이 오늘날에 교훈이 될 뿐이다. 셋째는 재판법이다. 재판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신정(神政) 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법, 즉 민법, 상법, 형법 등의 법이다. 이것은 성격상 오늘날 세속국가나 교회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 신약--복음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의 형태로 주어졌다. 이것을 신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31:31-34에서 이미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하셨다. 그 예언에서 그는 새 언약의 네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다. 첫째,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둘 것이다. 둘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셋째,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다. 넷째,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기억지 않을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마태복음 26:26-28과 누가복음 22:19-20과 고린도전서 11:23-25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또 잔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의 의식법에서 예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다. 신약시대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소식이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히브리서 9:12, “[예수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의 율법(의식법)도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였고 신약시대의 복음도 율법 즉 행위 규범을 강조하지만(마 5:19; 7:21; 롬 6:1-2, 15; 8:13; 갈 5:13), 율법과 달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된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또 율법과 비교할 때, 신약의 복음은 내면적이며 영적이며 세계적이다. 고린도후서 3:6, “의문[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으로 함이니.” 히브리서 8:10,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마가복음 16:15,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약속하셨고(요 3:16)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았다.
14.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는 책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주신 구주이시다. 죄악으로 인해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다. 예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간략히 정리해보자. 마태복음 16:13-18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는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시몬 베드로가 깨달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회의 기초가 되는 바른 지식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지식이다. 참 사람과 참 하나님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께서는, 말씀이라고 불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독특한 인격이시다. 그는 참 사람이시지만 또한 참 하나님이시다. 우선, 예수께서는 참 사람이시다. 그는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아기로 태어나셔서 유아 시절과 소년 시절을 거치며 자라셨다. 누가복음 2:40, 52,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는 30세쯤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셨다.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주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즐겨 부르셨다. 인자(人子)라는 말은 마태복음에 48회, 마가복음에 19회, 누가복음에 34회, 요한복음에 15회 나온다. 그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잘 증거한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주무셨고 배고프셨고 목마르셨다. 그는 사람의 몸과 영혼, 즉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지셨다. 그는 참으로 사람이시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그는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셨다. 마태복음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는 사람 이상의 존재이시다. 그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없는 속성과 능력을 가지셨고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다. 그는 각종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 소경과 앉은뱅이를 고쳐주셨다. 그는 12년된 혈루병 환자와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다(야이로의 열두 살 먹은 외동딸, 나이성 과부의 외아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 이것들은 다 그가 사람 이상의 존재,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성경은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요 1:1) ‘참 하나님’이시며(요일 5:20)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그 안에 신성(神性)의 충만함이 있으시며(골 2:9) 모든 피조물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심을 증거한다(계 5:12-13).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와 찬양과 기도를 받으실 수 있고 또 받으셨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예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히 낮추신 사건이며 신비 중의 신비이다. 사람이신 그는 할례를 받으셨다(눅 2:21). 그는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눅 2:51). 그는 율법을 지키셨다. 그는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다. 그는 낮아질 수 있는 만큼 가장 낮아지셨다. 빌립보서 2:7-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는 하늘로 올리우셨다(행 1:9).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히브리서 1:3,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는 장차 하늘로부터 이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三職)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의 직분과 사역을 잘 나타낸다. ‘예수’라는 말은 ‘구주’라는 뜻이고(마 1:21),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 이 세 직분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였다고 본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께서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지시고 그의 사역을 행하실 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선지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신다(요 12:49-50). 그는 지상 생애 동안 가르치시는 일에 힘쓰셨고, 지금도 천상에서 그의 영을 통해 그 일을 계속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된 선생님이시다(마 23:8-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히 4:14) 택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친히 자기 몸을 제물로 주셨고(마 20:28; 히 9:12; 10:12),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가 구속(救贖)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이미 구원 얻은 사람들의 영적 성장과 성화를 위해 계속 중보(仲保)의 일을 하신다(롬 8: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왕이시다(마 2:2; 27:11). 그는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지키신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며(계 17:14) 특히 우리의 주님이시요 교회의 머리이시다. 사도행전 2:36,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22,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 되심을 감사하며 오직 그를 믿고 그에게서 배우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15.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이다(고전 15:3). 속죄(贖罪)의 원인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하였다.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창세 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었다.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출 34:7).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또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속죄(贖罪)의 의미 성경은 속죄의 의미를 네 가지 단어로 증거한다. 첫째는 제사이다. 히브리서 10:12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고 말한다. 구약시대 제사의 핵심적 의미는 속상(贖償, expiation)이라고 본다. 속상은 제물이 죄인 대신 벌을 받음으로써 죄인의 죄책과 형벌을 보상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다는 뜻이다. 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안수는 죄책의 전가를 상징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상(贖償)의 뜻을 가졌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둘째는 구속(救贖, redemption)이다. 이 말은 값을 주고 사서 건져낸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주 예수께서 자기 핏값으로 우리를 우리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져내셨음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도행전 20:28,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셋째는 유화(宥和, propitiation)이다. 이 말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제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혀졌고 제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iJlasthv- rion)[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히브리서 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유화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유화제물]이니.” 요한일서 4:10,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넷째는 화목(reconciliation)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적대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뜻이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고린도후서 5:18, “저[하나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16,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속죄의 성격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다음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역사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객관적이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앞에서 말한 속죄의 네 단어가 보이는 의미는 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대리적(代理的)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 정확히 말하면 ‘모든 택자들’을 대신한 일이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택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넷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완전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義)가 되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고린도전서 1:2,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완료시제).” 히브리서 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완료시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완료시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그의 속죄를 완전케 했고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할 만한 가치가 있게 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많은 영혼들의 죄를 대속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나는 아무 공로 없으나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것이 나의 의가 되었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이것이 복음이며 여기에 구원이 있다. 성도는 이 감격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
16. 제한속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는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보편속죄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제한적이었다고 믿는다. 이것을 ‘제한속죄론’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제한속죄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 첫째로, 사람의 구원은 긍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섭리자이시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는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마태복음 19:24-26,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리라.”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그에게 있다고 믿는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인류 전체가 구원 얻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임 둘째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다. 또 성경에 밝히 증거되어 있는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외에도 사도행전 13:48과 로마서 8:30도 대표적 구절들이다. 또 성경에 빈번한 ‘우리’ 또는 ‘많은’이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 의지를 암시한다. 이사야 53:5, 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보편속죄론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크심을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어떻게 선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만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나머지를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그런 믿음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할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멸망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옹호하는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을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보편속죄론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든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분명히 계시하기 때문에, 그런 구절은 이런 빛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 18:23,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회개를 명하시는 것은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공평하며 아무도 그것을 불평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4, 6,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고 제한적 혹은 대략적 의미의 ‘모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모든’이라는 말은 제한적 혹은 대략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2:1; 4:15; 5:20; 딤후 1:15; 4:16 등 참조).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든 사람’은 ①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틀어 모두를 가리키든지, ②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든지, ③ 엄밀한 의미에서 택함 받은 사람들 모두를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너희’는 구원 얻은 신자들을 가리키므로 제한속죄론과 충돌되는 것이 없고 또 이 구절이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볼 수도 없다. 속죄는 실제로 죄의 형벌을 받는 것 셋째로, 속죄의 본질 때문이다. 즉 속죄(贖罪)는 가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실제로,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대리적으로, 완전하게 우리의 죄책(罪責)을 담당하셨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으며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신 것이었다. 히브리서 10:12,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사도행전 20:28,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러므로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셨다면, 모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최종적 지옥 형벌은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보편속죄론은 보편구원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믿고 구원 얻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멸망에 이를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마 7:13). 그러므로 속죄의 본질상, 속죄는 제한적이다.
17. 중생(重生)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하신 자들을 성령께서 실제로 구원하신다. 성경은 구원을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은 구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이미 얻은 은혜이다. 그것은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며 성령의 첫 열매이다. 중생의 의미 중생(重生, 거듭남)이란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로 인해 그 영혼이 죽어 있었다. 에베소서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중생(거듭남)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 3:5).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며(요 1:13)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중생의 새 생명은 ‘하나님의 씨’로서 다시 범죄할 수 없는 생명이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중생의 새 생명 곧 하나님의 씨가 영혼에 심어짐으로써, 사람의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거룩해진다. 거듭난 자는 새 마음, 새 성향을 얻는다. 에스겔 36:26,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중생한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불린다. 옛 사람은 무지(無知)와 도덕적 불결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사람은, 비록 옛 죄악성이 아직 남아 있지만, 여실히 변화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새 성향을 가진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에베소서 4:22-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 .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중생의 방법 중생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요한복음 3:5-6, 8, “물과 성령으로(에크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 . . 성령으로 난 것은 . . . 성령으로 난 사람.” 성령께서는 중생의 원인자이시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죽은 자는 스스로 살지 못하며 살리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하지도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고 결심하고 협력함으로써 중생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데(알미니안주의), 중생에 있어서, 죄인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그러나 비록 유아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죄인의 구원과 거듭남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이다. 야고보서 1:18,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중생의 내면적 이치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즉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며 죄 씻음은 생명이다. 베드로전서 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며 그것은 세례 의식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은즉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는 구원에 필수적 과정이다. 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구주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5:32,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를 회개하는 것은 중생의 증거이며 새 생명의 구원을 얻은 증거이다.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요한일서 2:29,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회개는 중생의 증거이다.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요소를 포함한다. ① 회개는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② 회개는 자신의 죄들에 대한 슬픔과 미워함을 포함한다. ③ 회개는 자신의 죄들을 청산하고 돌아서는 결심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회개는 죄악되었던 옛 생활 방식, 즉 불경건과 부도덕한 삶을 청산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는 믿음은 중생의 또 한 증거이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믿음도 지정의(知情意)의 요소를 포함한다. ①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지식 없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가진 믿음이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②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마서 6:17,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③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의지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 얻은 자요 중생한 자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구원 얻지 못한 자요 중생치 못한 자이다.
18. 칭의(稱義) 성경은 구원을 또한 칭의(稱義)라는 말로 표현한다. 칭의(稱義)는 중생(重生)과 함께 구원 얻은 성도들이 과거에 받은 은혜이다. 그러나 중생은 성도들의 영혼 속에서 내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칭의는 성도들의 몸 밖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칭의의 의미와 성격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3문답,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신다.” 칭의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 즉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선언이다.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이 없어지고 죄인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이 없어지는 것이며, 성화는 부패성이 극복되는 것이다.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변화이지만, 칭의는 사람의 법적, 신분적 변화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이신칭의 以信稱義). 이것이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원어(디카이오덴테스, 부정과거분사)는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가 아니고 단순한 사건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전통본문).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 완료시제).” 칭의의 방법 칭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을 수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라디아서 2:16,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칭의는 죄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믿음은 믿음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거나 믿음 자체가 어떤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한 사람 편에서의 방편일 뿐이다. 물론, 구원 얻은 성도에게 행위도 중요하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지만, 율법의 행위 없이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와 열매로서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7, 2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심지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약 2:21, 24).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의를 얻기 위한 율법적 행위가 아니고 산 믿음의 증거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도 큰 오류이지만, 반율법주의도 큰 오류이다.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은혜의 복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의롭고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갈라디아서 5:6, 13,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칭의의 결과 로마서 5장은 칭의의 세 가지 결과를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교제한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누리느니라](전통본문).” 구원 얻은 성도는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한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확신하며 기뻐한다. 로마서 5: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9,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영생을 소유하며 장차 누릴 것이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죄의 형벌은 죽음이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결과는 영생이다. 의롭다 하심의 결과는 이와 같이 복되다.
19. 성화(聖化) 중생과 칭의는 우리가 과거에 이미 얻은 구원의 은혜이며, 성화는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구원의 은혜, 즉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다. 성화(聖化)의 의미와 성격 성화는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실제로 거룩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소요리문답 제35문답,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義)에 대해 살 수 있게 된다.” 성화는 성도의 죄성(罪性)이 극복되는 것이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죄의 법적 책임)의 제거이며 성화는 죄성(부패성)의 극복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칭의)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성화)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성화는 성도의 전인(全人)의 실제적 변화이다. 중생한 성도는 영육의 전체, 즉 지정의의 전인격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점점 더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안의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었다. 창세기 1:27,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나 이제 그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화의 목표는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다. 골로새서 3:10, “[이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3-24,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은 의와 참된 거룩함 즉 온전한 도덕성의 사람이며 이것은 칭의를 통해 법적으로는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성화를 통해 실제적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점진적이며 세상에서는 불완전하다. 죄책은믿을 때 단번에 제거되지만, 죄성은 전생애를 통해 비록불완전하지만 조금씩점진적으로 극복된다.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중생은 영적 출생이요 성화는 중생한 영혼의 성장이다. 출생된 아기가 자라듯이, 중생한 성도는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성화는 점진적이며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섭리 과정을 통과한다. 베드로전서 2:1-2,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과 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전통본문)”. 성화의 중요성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 단계로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성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성경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은 복음의 핵심인 중생과 칭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에 대해서도 힘써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는 책인 동시에 구원 얻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책이다. 성화는 설교자의 중요 설교 내용이어야 한다. 성화는 또한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다. 태어난 아기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아기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며 심각한 문제이다. 영적으로도 그렇다. 중생한 성도는 영적으로 당연히 자라야 하고 거룩해져야 한다. 행위의 변화가 없는 구원은 참 구원이 아니다. 성화 없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처럼 중생의 새 생명은 새 생활로 증거된다. 성화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보답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복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화의 방법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안의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성화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셔서 그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에스겔 36:27,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13-14,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성도에게 아무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나 성화는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다. 중생에서 사람은 수동적이지만, 성화에서는 자발적, 능동적, 협력적이어야 한다. 성도는 성화를 위해 게을러서는 안 되고 더 많이 힘쓰고 부지런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 “더욱 많이 힘쓰라.” 빌립보서 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베드로후서 1:5, 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하나님께서는 성화의 수단으로 성경과 성례와 기도를 주셨다. 우리는 이 수단을 사용하여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시편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20. 성도의 견인(堅忍) 우리가 믿는 교리 체계를 개혁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특징적 교리들은 첫째로 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둘째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셋째로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넷째로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다섯째로 성도의 견인(堅忍)이다. 이것을 개혁주의의 5대 교리라고 부른다. 이것들 중에, 성도의 견인에 대해 정리해보자. 성도의 견인의 의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이란, 중생한 성도, 곧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교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또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속량하셨고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중생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교리이다. 어떤 이들은 이 교리를 반대하면서,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했거나 무능력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 믿을 것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셨고(예지예정론(豫知豫定論), 조건적 선택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셨고(보편속죄설),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고, 구원 얻은 성도도 이 세상 사는 동안 중도에 실패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을 알미니우스주의라 부른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와 일부의 침례교회의 교리가 이러하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성경적 증거 성도의 견인 교리는 성경적 진리이다. 우선, 성경에 명백히 가르친 구절들이 있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 영생을 주신 양들은 다 영생을 얻을 것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께서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확증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에독사센 ejdovxa- sen)은 부정과거시제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 없이 다 영화롭게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仲保) 사역의 완전함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로마서 8:34, 38-39,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완료시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하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 안에 거하심을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인치심은 성도가 얻은 구원이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는 보증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1:13-14, “그를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직역).”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도가 받은 영생과 천국 상속자의 약속도 이 구원의 보증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반론들의 반박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다 그 교리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첫째로,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등의 성화의 권면에 반대된다고 주장하지만, 두 내용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성화와 견인을 위해 성도들의 자발적 행위를 권면하시고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하나님께서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1)는 말씀이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 등 배교에 대한 경고와 반대된다고 주장하지만, 배교의 경고가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성화를 위해 교훈하시고 또 그 교훈 속에는 경고도 포함될 뿐이다. 셋째로, 어떤 이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믿음에 관해 파선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예(딤전 1:19-20)나, 또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는 말씀(딤전 4:1) 등에 반대된다고 하지만,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 얻은 자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들었고 3년간 예수님을 따랐으나 배신하였던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가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은 자이었고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고 말씀하셨다(요 6:64; 13:10-11). 넷째로,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지만, 성도의 견인은 우리편의 근면함과 진실한 노력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고 격려한다. 실상, 성도의 견인의 진리는 성도들에게 연약 중에서도 성화를 위한 큰 위로와 힘이 된다.
21. 교회의 기초, 본질, 속성, 표지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교회의 기초 우선,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고,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시본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6-18). 예수께서는 자신이 교회의 소유자이시며 이 교회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반석 같은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며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시며 그의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과 삼일 만의 부활하심이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신 일이었음을 밝히 증거한다(고전 15:3-4; 롬 4:25; 히 9:11-12; 10:12). 거기에 교회의 참된 기초가 있다. 택자들을 위해 속죄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기초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고(고전 3:11),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사역이 사도들을 통해 증거되었기 때문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도 말했다(엡 2:20).
교회의 본질 그러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 곧 그의 속죄사역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단지 예배당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 아니고,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구원 얻은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서로 교제하는 것이 교회이다. 에베소서 1:3-14가 증거하는 대로, 성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얻었고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앙고백, 즉 세례와 입교 문답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무형적(無形的)인 동시에 또한 유형적(有形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 받고 거듭난 성도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고 교회의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교회는 무형적(無形的)이다. 참 교회는 무형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무형적, 전세계적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된다(25:1). 그러나 성도들과 그들의 예배와 교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는 또한 유형적(有形的)이다. 유형적인 교회 안에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점들이 있고 심지어 중생치 못한 자들도 있을 수 있다. 천주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성직자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지만, 개혁교회는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두세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참 교회가 있다고 본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단지 부수적일 뿐이라고 본다. 교회는 인류 역사 초기부터 있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의 ‘총회’나 ‘회중’이라고 번역된 말은 신약성경의 ‘교회’라는 말과 뜻이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 이후 온 인류의 유일한 구주요 중보자이시다(딤전 2:5; 요 14:6; 계 13:8). 모든 시대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는 동일하다. 또 신약시대에 이방인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유대인 성도들과 동등한 교회 구성원이다(엡 2:19; 3:6). 신분과 특권에 있어서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 동등하다. 교회의 속성 교회는 세 가지 속성을 가진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 창조 때로부터 세상 종말까지 또 온 세계에 하나이다.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이요.”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은 한 교회가 되었다. 고린도전서 12:13,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다. 또 교회는 교리적으로도 하나다. 교회는 공통적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에베소서 4:4-6은 하나님, 주, 성령, 믿음, 소망, 세례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하나임을 증거한다. 유다서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공통적]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교회는 유형적으로도 가능하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명분 없는 분열은 죄악이다. 둘째로, 교회는 거룩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를 이미 거룩하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거룩하여졌고](원문, 완료분사)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완료분사).” 거룩함은 하나님의 목표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세계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족속들에게 증거되고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는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참 교회의 표 참 교회는 몇 가지 표를 지닌다. 첫째로,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한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은 성도들의 바른 신앙고백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지 않는 곳에는 교인들의 바른 신앙고백을 기대할 수 없고, 바른 신앙고백이 없는 곳에는 구원 얻은 성도들도, 참된 교회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참 교회는 성례를 바르게 집행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의 유형적(有形的) 표현이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바른 신앙고백의 표현이며 증거이고, 거기에 참된 교회들이 있다. 셋째로, 참 교회는 교인들에게 권징을 충실히 실행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강단의 설교와 회중의 신앙고백은 회중의 실생활과 일치해야 한다. 교인들의 충실한 훈련과 권징은 참 교회의 의무이다. 그렇지 못한 교회는 해이해졌거나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교회일 것이다.
22. 교회의 권세, 조직, 임무 교회의 권세와 조직과 임무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회의 권세 교회는 주께로부터 세 가지 권세를 받았다. 교회의 첫 번째 권세는 가르치는 권세 즉 교훈권이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또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17). 또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6:19), 그것은 복음이 죄인들에게 천국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15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했다. 교회는 이 교훈권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하고 신조를 작성하고 신학교를 세우고 성경적 기독교를 보수하고 전수한다. 교회의 두 번째 권세는 다스리는 권세 즉 치리권이다. 이것은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권세이다. 주께서는 권징에 관련하여 마태복음 18:18에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교회의 규칙들을 제정하며 (1) 범죄자의 회개를 위해, (2) 악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3) 하나님의 명예의 옹호를 위해, (4) 하나님의 진노의 방지를 위해 권징을 시행한다. 권징의 단계는 권계(勸戒)(권면과 경계), 수찬(受餐) 정지[성찬식 참여의 일시적 금지], 제명 출교 등이다. 교회의 세 번째 권세는 섬기는 권세 즉 봉사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로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심신으로 병약한 자들을 심방하고 구제하고 위로한다. 이것은 옛날부터 경건한 자들이 힘써 왔던 일이다(아브라함, 욥, 고넬료, 바울 등; 행 6:1; 고후 9:1). 교회의 조직 교회에서 조직은 본질적 요소는 아니지만 필요하다. 역사상 교회에는 세 종류의 조직 혹은 운영형태가 있었다. 첫째, 감독정치는 감독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형태로서 교인들은 교회 운영에 관여치 않는다(천주교회, 감독교회, 감리교회). 둘째, 회중정치는 교인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것으로서 목사는 교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침례교회). 셋째, 장로정치는 교인들이 뽑은 대표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형태이다(장로교회). 장로교회의 조직은 대의정치적 형태이며, 성직권과 일반신도권이 둘 다 존중되는 성경적 형태이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 . . 택하여.” 사도행전 20:28, “성령께서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 성경은 세 가지 직분을 말한다. 목사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직분이고,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자로서 목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나 그를 돕는 역할을 하며, 집사(안수받은 남집사)는 교회의 살림살이, 구제, 병자 방문을 위한 직분이다(행 6:1-6). 그 외의 직분들은 보조적이다. 교회 직분의 자격 요건은 첫째로 인격적 성숙이다(딤전 3:2).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고 봉사직이다(마 20:26-27). 오늘날 여자 목사와 장로를 세우는 일은 옳지 않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주의 명령과 교회의 보편적 규례 때문에(고전 14:34-38) 또 창조의 질서와 범죄의 징벌 때문에(딤전 2:11-14) 그것을 금하였다. 장로교회의 회의에는 공동의회, 당회, 노회, 총회가 있다. 공동의회는 지교회의 세례교인들의 회의로 지교회의 최종적 권위를 가지며, 당회는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회의로 지교회의 치리회이다. 노회는 어떤 지역 안의 목사들과 총대 장로들로,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다. 노회와 총회는 지교회를 견제한다. 교회의 임무 교회는 세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예배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임무로서 교회의 가장 기본적 임무이다. 성도가 창조주와 구주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사야 43:2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3-24).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그의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고 말했다(엡 1:6, 12, 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므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의 이름으로 드려야 하고, ‘신령과 진정’ 즉 참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어떤 시간과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성도들의 헌신의 삶 자체가 예배이며(롬 12:1) 신약교회의 찬송, 기도, 설교의 순서의 공예배도 물론 예배이다. 교회의 두 번째 임무는 양육 혹은 영적 건립이다. 그것은 교회가 교인들에 대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28:20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반복해 말씀하셨다(요 21:15-17). 사도 바울은 승천하신 주께서 신약교회에 목사들과 교사들을 주셔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고 말했다(엡 4:11-12). 신약교회는 모여서 말씀과 기도로 영적 성장을 이루며 교제와 봉사와 구제를 통해 봉사의 일을 행한다. 교회의 세 번째 임무는 전도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이것은 주께서 교회에 주신 특수 임무 곧 사명(mission)이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8,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4:1-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목적은 택하신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심이었다(마 20:28; 요 3:16). 그 목적은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을 위한 공의롭고 선한 사회정치적 활동들은 성도 개인들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임무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런 일에 관여치 않으셨고(눅 12:13-14; 요 6:15), 그런 일을 명하지 않으셨고 오직 전도를 명하셨으며,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초대교회는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일에 힘썼고, 사회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시간과 돈과 힘을 분산치 말고 오직 주께서 명하신 일에 힘써야 한다.
23. 현대교회문제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여러 가지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연합운동과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등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 중 처음 세 가지를 살펴보자. 자유주의 신학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매우 파괴적 이단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자 C. H. 다드는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라고 말하였고, 칼 바르트는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있어서도, 또한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행동에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글에서 실수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라고 말하였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이 아니라 부조리하다”고 말했고, 라인홀드 니이버는 그리스도의 처녀 출산을 후대에 삽입된 신화라고 말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代理的)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말하였다. 또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하였고, 라인홀드 니이버는 “기독교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출산, 그의 기적들, 대속, 부활, 재림 등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한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파괴적 이단 사상이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오늘날 개신교의 역사적 대교단들, 장로교회, 루터교회, 영국교회(성공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무도 그것을 폐할 수 없다(요 10:35). 예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셨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요한일서 4:2-3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또 기적을 부정하는 것은 사두개파적 잘못이다(마 22:29). 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이단이며(롬 3:24-25; 고전 1:22-23), 그의 부활과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과 성도의 복된 소망을 부정하는 것이다(롬 10:9; 계 1:7; 22:20). 기독교는 성경에 계시된 불변적 교리들 위에 기초해 있다. 성경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가 용납해서는 안 되는 파괴적 이단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통적 교리들을 보수해야 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이단들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디도서 3:10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 교회연합운동(The Ecumenical Movement)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교회연합운동이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연합 개념은 너무 포용적이다. 교회연합운동은 모든 교회들이 하나라는 생각 안에서 기독교회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학 사상들을 비평 없이 용납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이 운동의 지도자들의 다수는 매우 자유주의적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다.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 신학자들이 WCC(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분과에 정회원으로 참여해왔고 WCC 프로그램 작성 간사들 중에도 들어 있다. 1999년에, 천주교회는 56개국 NCC(교회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 또 오늘날 은사운동은 교회연합운동을 촉진시키고 있다. 심지어, 교회연합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며 다른 종교들 속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기독교회는 오직 공통적인 기독교 진리 위에서만 하나이다. 또 주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신약교회에 바른 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딤후 1:13-14; 롬 16:17). 자유주의 신학은 파괴적 이단이며 또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그 배교적 성격에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의 이름 아래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와 심지어 이방종교까지 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대항하는 행위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불순종이다. 고린도후서 6:14-18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말하였고 또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말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복음주의이다. 그것은, 자신들은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 교회들과 교제를 끊기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많은 보수적 목사들이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고,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과 단체들이 자유주의 교회들과의 연합 집회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대표적 예는 빌리 그레이엄이었다. 그는 1950년대 이후 각 지역에서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함한 교회들의 후원 아래서만 전도 집회를 열었다. 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은사주의를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한다. 오순절파가 미국 NAE(복음주의자협회) 회원의 절반 이상이 된다. 미국 NAE 회장은 심지어 빈야드 운동을 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사주의적 복음주의의 한 특징은 CCM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천주교회를 용납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 신자들을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사용했다. CCC(대학생선교회)의 빌 브라잇도 비슷한 입장이다. 촬스 콜슨(교도소 선교회), J. I. 패커, 잭 반 임페, 에드 답슨 등 유명한 복음주의자들도 천주교회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적 상황에서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분별력이 없는 것이든지, 다수로부터 고립되기를 싫어하고 좁은 길 걷기를 싫어하는 연약한 생각에 불과하다. 역사적 대교단들이 배교적인 상황이므로, 보수적 교회들이 대교단들과 함께 연합적 활동들을 하는 것은 자유주의 이단을 용납하고 그것과 타협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입장은 옳지 않다. 이런 입장은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불충성과 불순종이요 인간적 연약에 불과하다. 참된 교회는 역사적 기독교, 즉 성경의 모든 교훈들, 전통적, 정통적 모든 교리를 믿고 실천해야 하며,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연합운동을 배격하고 복음주의와 은사주의도 경계해야 하고, 또 윤리적으로도 성경의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한다. 이런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이 옛 길이며 옛 신앙이다. 우리는 그 길과 신앙을 지켜야 한다.
24. 성경적 분리 성경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가르친다. 주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사도들도 형제 사랑을 교훈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악한 자와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참된 사랑은 모든 악과 불의를 멀리한다(고전 13:5-6). 분리에 대한 성경 교훈은 전통적으로 권징의 진리이다. 그러면 성경은 분리에 대해 어떻게 교훈하는가? 분리의 대상 우선, 분리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하는가? 성경은 네 가지 대상자들에 대해 말한다. 첫째는 이방종교인을 포함한 불신자이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불신자들은 성도들에게 사랑과 전도의 대상이지, 친밀한 교회적, 영적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는 이단자이다.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교리)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천주교회는 오래된 이단이다. 천주교회는 성경의 유일한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교황의 무오한 권위를 말하며, 마리아의 무죄 잉태와 승천과 중보사역을 말하고 그를 ‘중보자,’ ‘보혜사’로 부르며 그에게 기도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하고 정죄하고, 미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속죄 제사라고 말한다. 이런 점들에서 천주교회는 명백히 성경에서 이탈한 이단이다. 또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이단 종파들과, 20세기 이후에 교회들을 부패시킨 가장 파괴적 이단인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처녀 출산,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한다. 또 하나님의 직접 계시들과 기적들을 말하는 은사주의도 성경을 넘어서는 이단이다. 참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와 천주교회를 용납해서는 안 되고 이런 이단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셋째는 회개치 않는 범죄자이다. 고린도전서 5:11, 13,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강제로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교회가 성도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확실히 드러난 일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적절한 권징을 시행하고 교제를 끊어야 한다. 넷째는 고의적 불순종자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치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오늘날 이단적 자유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교제를 끊지 않고 계속 교제하고 연합 활동들을 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이단들을 멀리하라는 사도적 교훈 즉 성경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이며 우리는 이런 자들과도 교제를 끊어야 한다. 분리의 이유 그러면, 분리의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가 그런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몇 가지의 이유를 말한다. 첫째,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죄들, 고의적 불순종 등은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 활동은 결실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런 잘못된 교제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교인수나 헌금 액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성경 진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데 있다. 둘째,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며 그 거룩함을 실제적으로도 지켜야 한다. 교회는 교리의 영역에서와 윤리의 영역에서 그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적어도 참 교회는 교리적 오류들과 도덕적 오류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해서는 안 된다. 참 교회는 ‘저주받을 사상’ (갈 1:8)이나 ‘멸망케 할 이단’(벧후 2:1)을 포용해서는 안 되고 윤리적 죄악들도 포용해서는 안 된다. 참 교회는 마땅히 그런 사상을 배격해야 하고, 우리는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도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디모데후서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악은 제거하지 않고 버려두면 점점 퍼져서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고 멸망시킨다. 분리의 방법 마지막으로, 분리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그런 자들과 교회에서 교제를 끊어야 한다. 교회 안에 범죄자가 있으면, 권계, 수찬(受餐) 정지, 제명 출교 등의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 17,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나와서 따로 있으라.” 로마서 16:17,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거절하라.” 유다서 3, “힘써 싸우라.” 고린도전서 5:11, 13, “함께 먹지도 말라,”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만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단을 용납하고 그 잘못을 고칠 가망이 없다고 분명히 판단될 때, 참 성도는 그런 교회를 떠나야 할 것이다. 또 참된 교회들은 성서공회, 찬송가공회, 기독교 방송국, 연합예배 등 자유주의적,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들과 함께 연합 활동들이나 집회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개인적 교제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대하 19:2) 악한 자와 친근히 교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요한이서 10,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교제를 끊을 때 성도로서 덕을 잃지 않도록 성급하지 않고 신중해야 하며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갈 6:1; 살후 3:14-15; 딤후 2:25). 우리는 교만과 미움의 마음도 잘못된 교제나 악의 포용처럼 큰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5. 은혜의 수단들 은혜의 수단들이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혜 주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은혜의 수단들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 즉 성화(聖化)를 위하여 매우 필요하고 유익하다. 그것들은 성도들의 성화의 수단들이다. 성경말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성경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사도행전 17:11-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전통사본)으로 말미암느니라.”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시편 1:2,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적어도 30분 이상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1년에 1회 이상 성경을 통독(通讀)하는 것이 필요하며 유익할 것이다. 욥기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세 끼 식사)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또 교회가 공예배로 모일 때 성경적 설교와 성경강해는 매우 중요하다. 성경적 설교는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성경 연구는 목사들이 전 생애를 바쳐 힘써야 할 일이다. 영혼의 구원과 성장은 성경말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목사의 참된 충성은 일차적으로 충실한 성경 강론에 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전서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성례(聖禮)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또 하나의 수단은 성례이다. 성례는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가리킨다. 성례는 유형적(有形的) 말씀이다. 성경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성례는 그 복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며 상징하는 것이다. 세례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에이스 토 오노마,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 사도행전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로마서 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에이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세례는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속죄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니(전통사본)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성찬에서 떡과 포도즙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거나(천주교회의 화체설(化體說)), 떡과 포도즙 안에, 그 밑에, 그 곁에 그의 살과 피가 함께 있다는 생각(루터교회의 공재설(共在說))은 바르지 않다고 보며, 떡과 포도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하신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성찬을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라고 불렀고(고전 10:16), 성찬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했다(고전 11:27). 기도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도이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보통 성부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만, 삼위 하나님께 다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내용들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이다. 기도의 모범적 내용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마 6:9-15).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는 유익이 많다.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부득이한 이유로 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 4시 반 전후에 일어나는 것은 어려움이 있고 생활 리듬이 깨어질 수 있지만, 규칙적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유익이 많다.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성도들은 성경을 더 많이 배우고 날마다 기도하게 되고 목사들도 성경말씀을 더 많이 연구하게 된다. 기도 방법에 대해,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요 14:13). 둘째,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에베소서 6:18,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셋째, 우리는 겸손히 기도해야 한다(눅 18:9-14). 넷째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마 7:7; 눅 11:5-8; 18:1-8). 또 우리는 기도할 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묵상 기도는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인 공적 모임들에서는 다른 이들의 기도에 방해를 주지 않도록 마음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날마다 적어도 30분 이상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니엘 6:10,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또 기도할 때 기도제목들을 쓴 기도 카드를 보면서 하면 도움이 된다. 기도의 유익은 매우 크다. 어떤 이는 자기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말씀에 합당치 않는 기도 생활의 퇴보에 있다고 말했다. 교회 봉사의 힘도 기도에서 나온다.
26. 세례의 방식과 대상 은혜의 수단인 성례 중 세례에 대하여, 복음적 개신교회들 안에서 세례의 방식과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었다. 개신교회들 대다수는 물을 뿌리는 세례 방식과 유아에게 베푸는 세례를 인정하였으나 침례교회는 그 두 가지를 부정하였다. 물을 뿌리는 세례 방식과 유아세례는 정당한가? 그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침례교회의 주장은 무엇이며 어떤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세례의 방식 우리는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물에 담그는 세례 방식을 다 인정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물 속에 담그는 침수(浸水)만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① ‘세례 준다’는 원어가 ‘물에 담근다’는 뜻이며, ② 세례자를 물에 담그는 것만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삶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침례교회의 그러한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첫째로, 세례 준다는 원어(밥티조 baptivzw)는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 ‘씻는다, 깨끗게 한다’는 뜻도 있다. 마가복음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밥티손타이)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 .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밥티스무스)이러라.” 히브리서 9:10, “여러 가지 씻는 것(밥티스모이스)과.” 둘째로, 신약성경에서 세례의 예들은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이것은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내려가셨음을 보인다. 사도행전 8:38-39,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이 말씀도 빌립과 내시가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갔음을 보이며 내시가 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세례 받았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오순절에 3천명이 받았던 세례(행 2:41)나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밤에 받았던 세례(행 16:33)는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적다. 초대교회의 관습에서도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주후 100년경의 디다케는 흐르는 물이나 다른 물에서 하는 세례뿐 아니라 머리에 물을 세 번 붓는 방식에 대해서도 말한다(7:3). 셋째로, 세례의 의미는 꼭 물에 담그는 것을 요구치 않는다. 세례의 기본적 의미인 죄씻음은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 충분히 표현된다. 구약성경은 피나 물을 뿌림으로 죄를 깨끗게 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5,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나자) 것이며.”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자라크) 너희로 정결케 하되.” 신약성경은 세례가 죄씻음의 의식임을 보인다. 사도행전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사도행전 22:16,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생명은 세례에 내포된 의미일 뿐이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신자의 새 삶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이다. 따라서 세례 자체가 반드시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넷째로,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물에 담그는 것만 정당하다’는 주장에 반대된다. 예컨대, 심각한 병자들, 물이 귀한 사막 지방, 추운 지방의 경우들에 세례 대상자들을 물 속에 담그는 것은 부적합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세례 방식 즉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들이 다 정당하다고 본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상징물이지, 물의 양(量)이 아니다. 세례의 대상--유아세례의 정당성 세례의 대상에 관해, 침례교회는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침례교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아세례의 정당성은 다음 몇 가지의 이유들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은혜언약의 동일성 때문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같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은 난 지 8일 만에 언약 백성으로 할례를 받았고(창 17:12)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갱신할 때도 유아들이 참여했다(신 29:11-12).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성도들인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로마서 4:16,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후에 그들을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이방인이 아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사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이다(요 1:17). 둘째로, 유아들에 대한 주님과 사도 바울의 태도와 증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 백성으로 여기셨다. 마가복음 10:14, 16,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또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7:14, “이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원문 직역).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셋째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족 세례의 예들 때문이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와 그 집[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았고(12-15절),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들도 다 세례를 받았다(32-34절). 이러한 말씀들은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넷째로 그리고 부수적으로, 신약교회의 역사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신약교회의 매우 초기부터 보편적으로 행해져왔다. 사도시대에 유대교는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했고, 이런 풍습은 신약교회에 이어졌다. 이 의식은 종교개혁 때에 재세례파의 반대를 받기 전까지 반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주후 5세기에 어거스틴은, 이 교리가 “교회 회의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 세계 교회가 일반적으로 실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사도들의 권위에 의해 확정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믿음과 함께 유아세례를 받게 한 부모의 책임도 말해야 한다. 부모는 세례 받은 유아들을, 말씀의 교훈과 기도로 또 좋은 본을 보임으로 잘 양육해야 한다.
27. 사람의 죽은 후 상태 몸의 죽음 사람은 몸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친다. 몸의 죽음은, 의학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는 심장의 박동 혹은 맥박이 멈추는 것 혹은 코의 호흡이 그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적으로는 영혼이 몸을 떠나는 현상, 즉 몸과 영혼의 분리를 가리킨다. 영 혹은 영혼은 몸의 생명 원리이다. 영혼이 있으면 몸에 생명이 있고, 영혼이 떠나면 몸에 생명이 없어진다. 전도서 12:7은 사람의 죽음을, 흙이 땅으로 돌아가고 영이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람의 몸의 죽음은 창조 질서에 속한 자연 현상이 아니고, 사람의 죄 때문에 온 것이다. 창세기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5:5, “죽었더라”(창 5장에 반복됨). 로마서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죄사함 받은 성도들이 죽는 이유는 몸의 부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으면 그는 죽지 않고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죽지만, 그에게 몸의 죽음은 두렵고 슬픈 일이 아니고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마지막 훈련 과정이며 천국 소망이 있는 일이며 복되고 영광스런 일이다. 몸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사람의 생애의 마침이며 그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될 것이다. 또 몸의 죽음은 각 사람의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 몸의 죽음은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시킨다. 누가복음 16:26,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영혼의 불멸(不滅)(immortality) 사람의 몸이 죽은 후 그의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존재한다. 그것을 영혼 불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류의 거의 보편적 신념이며 성경도 그것을 증거한다. 성경은 몸의 죽음을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전 3:20- 21; 12:7 등).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한 말씀들(시 73:24; 눅 23:43 등)이나 부활에 관한 말씀들(단 12:2; 살전 4:14 등)이나 심판에 관한 말씀들(마 10:28; 딤후 4:1 등)은 영혼의 불멸을 증거한다. 의인들의 영혼 몸의 죽음 후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의인과 악인의 경우에 다르다. 의인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져서 즉시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안식을 누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1은 “의인들의 영혼들은 죽을 때 온전히 거룩해져서 지극히 높은 하늘로 영접되어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몸의 온전한 구속(救贖)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풍성하게 증거한다.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은 천국의 세계를 증거한다(창 5:24; 왕하 2:11).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의인들이 죽은 후 들어가는 복된 세계가 있음을 증거한다. 시편 16:10-11, “이는 내 영혼을 음부[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잠언 14:32,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신약성경은 의인의 죽은 후 세계를 더 분명히 증거한다. 누가복음 16:22, 25,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브라함의 품이나 낙원은 천국을 가리킨다(고후 12:2, 4 참조). 고린도후서 5:8,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악인들의 영혼 악인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즉시 지옥에 던지워 거기서 고통을 당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1은 “악인들의 영혼들은 지옥에 던지워서 그 곳에서 고초와 전적인 흑암 가운데 지내며 큰 날의 심판까지 갇히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의 영혼은 없어지거나 의식이 없이 잠자거나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던지운다. 구약성경에서 ‘음부’(陰府, 쉐올)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악인들은 죽은 후에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간다고 표현된다. 시편 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잠언 5:5, “음녀의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잠언 23:14, “아이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이런 구절들에서 ‘음부’(쉐올)는 지옥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증거한다. 누가복음 16:22-24, 28,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陰府)(하데스)에서 고통 중에 . . .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본문에서 음부는 지옥을 가리킨다. 베드로후서 2:9, “[주께서]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유다서 6, “자기의 [첫]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성도는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지만, 악인은 죽은 후 그 영혼이 지옥에 던지운다. 성경은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해 이 두 장소 외에 다른 아무 곳도 가르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1, “몸들과 분리된 영혼들을 위해 이 두 장소 외에, 성경은 다른 아무 곳도 인정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 전에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잘 준비해야 한다. 당신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잘못된 견해들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도 간단히 정리해보자. 안식교인들은 악인들의 영혼들이 멸절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0:28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영혼은 멸절되지 않는다. 천주교회는 소죄(小罪)가 있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죽은 후 연옥(煉獄, purgatory)에 가서 일정 기간 동안 혹독한 불의 시련으로 단련을 받은 후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복음 진리에 위배된다. 요한복음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영원한 지옥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들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이며(마 10:28; 마 24:29-30; 요 5: 28-29; 히 6:1-2) 이 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확실히 이단이다.
2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는 시작이 있었듯이 마지막도 있을 것이다. 지구의 종말 곧 세상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再臨)으로 완성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에게는 복된 소망이나, 악인들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가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로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사도신경, “[주께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재림의 확실성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확실한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재림을 약속하셨다. 마태복음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6:64, “이후에 인자가 . .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복음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오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님, 진실로 오시옵소서”(전통사본). 사도들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쳤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베드로후서 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재림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우선, 그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도행전 1: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신 이 예수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은밀한 공중 재림의 생각은 1812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 임마누엘 라쿤자에 의해 최초로 주장되었다고 보이며 그 후 이 사상이 에드워드 어빙, 존 다비, 마가릿 맥도날드, 씨 아이 스코필드 등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밀하게 공중에 강림하신다는 사상은 성경에 없는 잘못된 사상이다. 또 예수께서는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또 예수께서는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4:43, “도적같이”(살전 5:2; 계 16:15). 그러나 ‘갑작스러움’은 주께서 어느 때든지, 어느 순간에든지 오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4:3-14).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재림의 징조들 마가복음 13:32의 말씀대로,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재림 직전에 여러 가지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미혹과 배교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4-5, 11, 24,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3, “먼저 배도(背道)[배교(背敎)]하는 일이 있고.” 오늘날 이단들 가운데는, 역사 깊은 천주교회를 비롯해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등이 있고, 또 특히 20세기에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를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역사상 가장 파괴적 이단이다. 둘째로, 전쟁, 기근, 질병, 지진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들과 온역들과 지진들이 있으리니(전통본문)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요한계시록은 유프라데스 강 주위에서의 큰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했다(계 8, 9, 16장). 20세기에 군인들만 거의 2,700만명의 사망자를 낸 1,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또 20세기에 지구 곳곳에 큰 기근들이 있었고 1998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에 8억 2,800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고 해마다 1,800만명이 굶주림과 이로 인한 각종 질병들로 죽어가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1918년에 시작된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에서 약 1,500만명이 죽었다.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는 2014년까지 30여년간 전 세계에서 약 4,000만명의 사망자를 만들었다. 2019년에 시작된 코로나 전염병은 690만명 이상 사망자를 남겼다. 20세기 이후 대지진들도 더욱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 사망자를 낸 지진들이 24개 이상이며, 그 중에 5만명 이상 사망자를 낸 것이 10개나 된다. 오늘날 전쟁, 기근, 질병, 지진 등 주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교회의 핍박이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정치적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데살로니가후서 2:3- 4, “(주의 재림은)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아마 오늘날 공산국가의 독재자들은 이 징조의 성취가 되리라고 보여진다. 이상의 징조들에 더하여, 세계복음화와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개운동이 있을 것이다(마 24:14; 롬 11:25-26). 오늘날 주의 재림의 징조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주의 재림이 가깝다고 보인다. 우리는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다는 것은 참 믿음을 가지고 거룩과 사랑의 삶을 힘쓰는 것을 말한다(살전 3:12-13). 신약성경 맨 마지막에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 예수님의 약속과 “아멘, 주 예수님, 진실로 오시옵소서”라는 사도 요한의 응답이 있다(계 22:20). 우리도 “아멘, 주 예수님, 진실로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자.
29. 휴거와 천년왕국 죽은 자들의 부활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날 다 부활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경의 근본 진리이다(히 6:2; 사도신경).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증거하셨고(요 5:29),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시며 부활을 증거하셨다(마 22:31-32). 사도 바울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장차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매우 강조하며 확신 있게 증거하였다(12-20절). 부활의 대상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다. 거기에는 의인들뿐 아니라 악인들도 포함된다(계 20:12-14). 의인들은 영생을 위해 복된 부활을 할 것이요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위해 부끄러운 부활을 할 것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앞에서 인용한 주의 말씀도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부활의 몸은 본래의 몸과 동일성을 가질 것이다. 즉 부활은 죽은 자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신앙고백 32:2). 물론 그것은 본래의 몸과 다른, 변화된 특질을 가질 것이다. 의인의 부활의 몸은 강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를 닮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일 것이다(빌 3:21). 그러나 악인의 부활의 몸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부끄러운 몸일 것이다(단 12:2; 요 5:29). 휴거(携去, Rapture) 휴거(携去, rapture)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들리우는 것을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휴거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승리한 신자들만 휴거된다고 생각한다(‘부분적 휴거설’). 그들은 그 근거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人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는 말씀을 든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고전 15:51)고 말씀하여 신자들 가운데 구별을 두지 않음을 증거한다. 다른 이들은 신자들이 대환난 기간 중 처음 3년 반 후에 들리운다고 생각한다(‘환난 중간 휴거설’). 그들은 그 근거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승천을 든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어떤 상징적 사건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교리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신자들이 대환난 전에 들리운다고 생각한다(‘환난 전 휴거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의 은밀한 재림과 지상의 드러난 재림, 두 단계로 나누며 그 사이에 대환난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휴거를 대환난 전에 두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은 어느 때든지 오실 수 있으므로, 만일 그가 대환난 후에 오신다면 대환난 전에는 오실 수 없기 때문에 대환난 전에 오셔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때든지 오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갑작스럽게 오시는 것뿐이며, 그는 예언된 대환난의 여러 징조들 후에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돌연성을 묘사하는 ‘도적같이’라는 말은 대환난 후의 그의 재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마 24:21, 29, 42-23). 둘째, 대환난은 하나님의 진노의 때인데(계 8:13) 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었고 또 구원을 얻을 자들이므로(롬 5:9) 거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8:13의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은 악인들에 대한 표현일 뿐이며, 또 요한계시록 9:4이나 16:2은 환난 중에도 성도들에게 피할 길이 있음을 암시한다. 셋째, 요한계시록 6-19장의 대환난 기간에 관한 예언에 ‘교회’라는 말이 없고 ‘성도’라는 말만 나오며, 이것은 교회가 대환난 전에 휴거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만 환난을 당함을 가리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서 1:7의 말씀대로 신약시대에는 교회와 성도의 구별이 없다. 무엇보다, 성경에 예언된 주 예수님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며, 재림의 두 단계, 즉 은밀한 공중 재림과 영광의 지상 재림은 성경에서나 정통교회의 역사에서 그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성경이 예언한 휴거란 대환난이 지난 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들리워 주를 영접하는 복된 사건이다. 휴거는 은밀한 사건이 아니고 천사의 나팔소리를 동반한 떠들썩한 큰 사건이며(살전 4:16), 그때는 바로 대환난 후 영광스런 주의 재림의 때이다(마 24:29-30). 천년왕국 천년왕국에 대해 정리해보자. 요한계시록 20장은 천년 간 사탄의 결박, 성도들의 부활과 천년 간 그리스도와 왕노릇함에 대해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교회 시대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이것을 ‘무천년설’이라고 한다. 그것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가 없고, 성경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과 심판이 동시에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단 12:2; 요 5:29; 마 13장, 25장; 살전; 살후; 벧후 3장).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종말 예언에 대해 독특한 권위를 가지며(계 1:19; 22:18-19), 특히 요한계시록 20:1-6에 증거된 사탄의 결박은 교회 시대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천년왕국을 교회 시대 말의 기독교 황금 시대를 상징한다고 본다. 이것을 ‘후천년설’이라고 한다. 그것은 위의 무천년설의 근거와 계시록 본문에 좀더 충실하려는 생각에 근거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말세 징조들과 또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현시대적 상황에 잘 조화되지 않는다. 또 이 견해에서는 대환난과 요한계시록 20장의 앞뒤 사건들이 적절히 조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어떤 이들은 천년왕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이것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에스겔 40장 이하의 예언대로 그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고 구약 제사와 절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 예언들과 요한계시록 19장, 20장의 내용들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구약 예언들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은 정당치 않아 보이며(갈 3:29), 특히 히브리서 8:13에 증거된 대로 신약 아래서 폐지된 제사와 절기 등 구약의 의식법들이 회복된다는 주장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본다.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이라는 것이다(‘역사적 전천년설’). 이 견해는 초대교회의 어떤 교부들의 견해이었다(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 문맥에 가장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의 부활과 심판이 동시에 있을 것처럼 보이는 다른 여러 성경구절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은 이 견해가 가진 어려운 점이다.
30.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마지막 심판 주 예수께서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 중 하나이다(히 6:2; 사도신경). 심판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증거했다(마 3:12).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고(요 5:22), 또 그가 다시 오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 영생할 자들과 영원한 벌을 받을 자들을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1-48).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께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심판자이심을 증거하였고(행 10:42),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고 증거하였다(행 17:31). 천사들은 주 예수님을 돕는 자들이 되며(마 13:41-42) 성도들도 심판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고전 6:2-3). 심판의 대상들은 사탄과 악령들과 모든 사람들, 즉 그때 살아 있는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을 다 포함한다. 마태복음 25:41, [재림하실 주의 말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사도행전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요한계시록 20:12-13,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심판의 대상인 모든 사람들 속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전통본문).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심판의 때는 죽은 자들의 부활 후 어느 때이다(요 5:28-29). 마지막 심판은 단일한 사건, 즉 ‘날들’이 아니고 ‘날’이다(행 17:31; 롬 2:5, 16; 벧후 3:7; 유 6). 세대주의자들은 ‘세 차례의 마지막 심판’을 주장한다. 첫째 심판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심판으로 대환난 전 휴거 후에 있고, 둘째 심판은 이방 민족들을 위한 심판으로 대환난 후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 때 있고, 셋째 심판은 악인들을 위한 심판으로 천년왕국 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심판을 세 차례로 구분하지 않고 단지 ‘심판의 날’에 이루어질 일로 증거할 뿐이다. 심판의 근거는 사람들의 행위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전 12:14; 롬 2:6; 고후 5:10; 계 20:12-13). 사람의 행위에는 세상에서 그가 품은 모든 생각과 그가 한 모든 말들이 포함된다(마 12:36). 또 그 심판은 사람들이 가진 진리의 지식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눅 12:47-48). 또 심판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부이다(요 3:18, 36; 5:24). 마지막 심판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지극히 공의롭고 철저한 심판이다(롬 2:5, 16).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할 확실한 이유이다. 또 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부당하게 비난과 고난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천국 마지막 심판의 결과, 천국과 지옥이 열릴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단계이며 최종적 상태이다. 그것은 영원한 세계이다. 의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성경에서 천국(天國)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단계와 미래적 단계가 있다. 천국의 현재적 단계는 교회와 거의 동일시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같이 뿌려졌고 이미 시작되었고(마 13장) 사람들은 중생(重生)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요 3:5; 골 1:13).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불린다. 누가복음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러나 천국의 영광은 아직 미래에 있다. 영광의 천국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 초자연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 마태복음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베드로후서 1:11,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성경은 미래의 영광의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만물의 회복이라고 표현한다(벧후 3:12-13; 계 21:1; 행 3:21).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이다(롬 8:18; 고후 4:17; 계 21:2-27). 요한계시록 21:1-22:5는 천국을 죄와 눈물과 죽음과 병과 저주가 없고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한다. 천국은 단지 영적 세계가 아니다. 그 곳은 부활한 몸이 영원히 살 처소이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의 열두 가지 열매를 증거한다. 성도들의 부활체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영화된 성도들은 천국에서 충만한 영광의 삶을 누리며 영생할 것이다.
지옥 그러나 악인들은 지옥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옥 형벌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가복음 9:43, 45,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25:41, 46,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은 지옥 불못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지옥은 “영영한 불”(마 25:41)이며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천국과 영생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 지옥 교리는 매우 중요하며 또 유익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언하신 바이다(마 10:28; 막 9:43, 48-49). 교의신학자 윌리암 쉐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멸망의 교리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할 분이시다”라고 바르게 말했다. 또 지옥 교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한 바른 개념을 알게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게 한다. 또 지옥의 교리는 죄인들에게 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 1.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 기독교 진리의 확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특별계시의 방식들은 무엇인가? 4.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이란 무엇인가? 7.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8.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들을 열거하라. 9.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무엇인가? 10.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어떻게 증거되는가? 11.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자유나 우연함의 관계는 무엇인가? 12. 예정의 두 요소는 무엇인가? 13. 섭리(攝理)란 무엇인가? 14.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셨던 목적은 무엇인가? 15.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언제 사라졌는가? 16.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왜 사라졌는가? 17. 오늘날의 은사 운동에 대해 평가하라. 18.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이 무엇인가? 19. 사람의 구성 요소에 관하여, 삼분설은 왜 잘못인가? 20. 죄가 무엇인가? 21. 죄의 두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 22. 마음의 상태도 죄가 된다는 성경구절을 들라. 23. 원죄(原罪)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무엇인가? 24. 죄의 형벌은 무엇인가? 25.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라. 26. 구약과 신약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라. 27. 모세의 율법의 세 가지 내용은 무엇인가? 28.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29. 구약이 은혜언약인 증거는 무엇인가? 30.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31.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은 무엇인가? 32. 속죄(贖罪)의 성경적 의미들은 무엇인가? 33. 속죄는 어떤 성격들을 가지는가? 34. 제한속죄(制限贖罪)의 근거는 무엇인가? 35. 중생(重生)의 의미와 증거를 간략히 서술하라. 36. 칭의(稱義)의 의미와 방법을 간략히 서술하라. 37. 성화(聖化)의 의미와 방법을 간략히 서술하라. 38. 성도의 견인(堅忍)에 대한 증거들을 들라. 39.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란 무엇인가? 40. 교회는 어떤 속성들을 가지는가? 41. 교회는 어떤 성격에서 하나이어야 하는가? 42.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가? 43. 교회의 세 가지 권위들이란 무엇인가? 44. 교회의 세 가지 임무들이란 무엇인가? 45. 사회정치활동는 왜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닌가? 46. 역사상 나타난 세 종류의 교회정치형태는 무엇인가? 47. 교회 직원들의 자격 요건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48. 여자 목사나 여자 장로가 성경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49. 은혜의 수단 세 가지는 무엇인가? 50.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51. 침례(浸禮)에 대한 침례교회의 주장을 비평하라. 52. 유아 세례의 근거는 무엇인가? 53. 자유주의가 무엇이며 왜 잘못인가? 54. 교회연합운동이 무엇이며 왜 잘못인가? 55. 신복음주의는 무엇이며 왜 잘못인가? 56.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57. 성경은 신자가 어떤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가르치는가? 58. 성경적 분리의 이유들은 무엇인가? 59. 사람은 죽은 후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가? 6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인가? 61. 재림의 징조들은 무엇인가? 62. 환난 전 휴거설은 왜 잘못인가? 63. 천년왕국(千年王國)에 대한 네 가지의 견해는 무엇인가? 64. 의인들과 악인들의 부활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을 들라. 65. 세상의 영원한 상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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