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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2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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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야곱 벤 카임에 의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본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사랑의 고백

2장: 신랑의 초청

3장: 신부의 사모함

4장: 신부의 아름다움

5장: 신랑의 아름다움

6장: 신랑의 사모함

7장: 신부의 아름다움

8장: 사랑은 죽음같이 강함

 

 

 서론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이다. 그 증거들은 본서의 서두의 말씀(1:1, “솔로몬의 아가라”) 뿐만 아니라, (1) 21가지의 식물들의 언급, (2) 15개 이상의 동물들의 언급, (3) 왕궁 사치품들의 언급, (4) 남북의 구별 없는 지명들의 언급 등이다(아춰, 구약총론, 562쪽).

본서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사랑이다. 구약성경에서 본서는 어려운 책이다. 주석가들은 본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본서도 하나님의 영감된 책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책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볼 때, 본서는 단지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교훈하는 책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사랑의 관계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 책이라고 본다. 박윤선 박사의 말과 같이, 이것이 본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바른 열쇠라고 본다.

 

본문 혹은 각주에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

               menti Libros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Faussett-Brown, A Commentary.

 

1장: 사랑의 고백

1-4절, 신랑의 사랑을 사모함

[1절] 솔로몬의 아가(雅歌)(쉬르 핫쉬림)[노래들 중의 노래]라.

아가서의 인간 저자는 솔로몬 왕이다. 그러나 본서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며(딤후 3:16) 구약성경의 일부분이다. 본서를 성경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정통 유대교의 견해이며 그것은 주 예수님의 견해이었고 또 초대교회의 견해이었다.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이다. 본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와의 사랑을 통해(3:11; 6:13) 이상적 부부의 사랑을 증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의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背敎)를 음행으로 표현한다(렘 3:6-8, 14; 호 1:2; 3:19 등). 주 예수님과 신약교회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되었다(엡 5:22-33).

[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그로 하여금 그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추게 하라. 이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히브리어 단어에는 남성, 여성, 중성 같은 성이 있다. 아가서에서는 단어의 성(性)을 고려하면 그것이 신랑의 말인지, 신부의 말인지, 혹은 친구들의 말인지 알 수 있다. 2절은 신부의 고백이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음식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다(시 4:7).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이제 신부는 신랑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사모한다. 신부의 사랑은 신랑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사모할 자이시다. 시편 73편의 저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했다(빌 3:7-8).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시다.

[3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 아름다운 기름의 향기 때문에 네 이름이 기름같이 부어졌도다. 그러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네 아름다운 기름’이란 이상적인 신랑의 아름다운 인품을 나타낸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사랑하시고 온유하신 인품은 향기로운 기름과 같다. 주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마 26:6-7). 그것은 값비싼 향유이었지만, 그 여인은 주님께서 그 이상으로 귀하신 분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시편 8:1에서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은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했고, 또 천지만물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화답하였다(계 5:11-13).

그 이름의 향기 때문에 처녀들은 그를 사랑한다. ‘처녀들’은 성도들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 비유에서 성도들을,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에 비유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할 처녀들이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3). 요한계시록 14:4는 성도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처녀들]”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이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의 크신 은혜로 그들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4절]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난다’(도데카 미야인)는 말은 2절과 같은 구절로서 ‘포도주보다 나은 네 사랑’을 가리킨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우리는 포도주보다 나은 네 사랑을 칭송하리라.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우리’라는 말을 ‘나’라는 말로 바꾸어 읽으면 뜻이 잘 통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신부 자신을 포함한 개념이다. 아가서에서 신부는 한 개인으로 나타나지만, 그는 성도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 같다. 즉 하나님과 어떤 한 개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한 개인과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전체와의 관계인 것이다.

본문은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고 말한다. 성도는 주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끌어주시기를 구하며. 또 주를 따라 주께로 달려가겠다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롬 12:11)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딤전 4:7).

본문에 왕인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이다. 그것을 ‘왕이 나를 침실로 이끄신다’는 말로 표현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부부 관계이다. 그것은 마음의 교통과 사랑 그리고 부부의 친밀한 교제를 포함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함은 친밀한 교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것은 영적인 친밀한 교제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를 칭송한다. 시편 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옛날 영어성경은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구절을 “정직한 자들은 너를 사랑하였도다”라고 번역했다(KJV). ‘정직한 자들’이라는 원어(메솨림)는 성경에서 ‘올바른 것’ 혹은 ‘올바르게’라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주를 진실히 믿고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를 사랑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낫고 향기로운 기름보다 낫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속죄사역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더욱 깨닫고 사모하며 그 안에 살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항상 읽고 많이 묵상하며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했고(빌 4:4; 살전 5:16) 성령의 열매는 희락이다(갈 5:22).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또 항상 기뻐해야 한다.

 

5-8절, 참 교회의 모습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이라는 원어는 ‘예루살렘의 딸들’이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특히 본문은 고난 받는 교회의 모습이나 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기 쉬운 처음 믿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내가 비록 검다’는 말은 교회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 연약한 모습, 무질서한 모습,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의 잘못,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거무스름하다.

그러나 교회는 아름답다. 교회는 내면적으로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은 성취되었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마치 게달의 장막과 같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 중 게달의 자손으로서(창 25:13) 아랍 유목민이다. 그들은 검고 투박한 천막에서 생활하는 자들이다. 게달의 장막은 뜨거운 햇볕과 폭우로 거무스름하고 투박해진 모습이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게달의 장막과 같이 보기에 그렇게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내면적으로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 솔로몬의 휘장은 의심할 것 없이 가장 고급스럽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거룩하여졌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 보배로운 자들이며 또 장차 영광스런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들이다.

[6절]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가 일광에 쬐인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 때문이라고 표현된다. ‘포도원지기’는 ‘포도원들을 지키는 자’를 말한다. ‘내 어미의 아들들’은 촌수로는 형제이지만, 실상은 거짓 형제들, 위선적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보이며 그들은 옛날부터 오히려 참 성도들을 괴롭혀왔다. 구약시대에도, 또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도 그랬다. 그들은 실상 마귀의 자식이요(마 23:33; 요 8:44) 사탄의 사자요(고후 11:15) 십자가의 원수이다(빌 3:18). 그들은 참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요 그것을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포도원들을 지키게 한다. 거짓 목사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거짓된 방향으로 인도한다. 신부는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말한다. ‘나의 포도원’은 ‘내 자신의 포도원’ 즉 참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참 성도가 참 교회의 임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참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 온전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함으로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종들과 교인들은 교회의 참된 임무를 버리고 교회가 다른 일들, 곧 헛된 세상 일들에 힘쓰게 한다. 교회는 이것을 반성하고 본래의 모습과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7절] 내 마음[영혼]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이는]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될까 함이라].

성도는 고난과 핍박 중에서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부는 신랑에게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말한다. 신랑은 양떼를 치는 목자로 묘사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 되신 하나님과 주님을 가리킨다. ‘양떼 먹이는 곳’은 양들을 위한 양식이 있는 곳 즉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성도는 주님의 말씀의 교훈을 사모하며 주님의 말씀의 교훈이 있는 곳을 찾는다.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은 오정 곧 가장 더운 시간, 즉 환난의 시간에 쉴 수 있는 그늘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성도는 환난 중에 주님께로 피한다. 주께서는 그의 피난처요 쉴 만한 곳이 되신다.

성도는 참 목자 되신 주님을 찾으며 그의 교훈과 피난처를 찾는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의 모습은 감취어 있고 참된 교회의 모습도 감취어 있다. 참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네 친구들’은, 주를 안다는 이름만 가진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의 양떼들은 거짓 교회들이다. 거기에서는 주를 뵈올 수 없다. 그래서 신부는 그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슬퍼하며 방황하는 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주를 만나지 못한 자, 참 교회를 찾지 못한 사람은 이처럼 슬퍼하며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 교회를 만날 때 기쁨을 얻고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것이다.

[8절] 여인 중에 어여쁜(하이야파)[가장 어여쁜](KJV, NASB, NIV)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 거무스름한, 별로 예쁘지 않은 자들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여인 중에 가장 어여쁜 자’로 여기시며 그렇게 부르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본문은 또 우리가 그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다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라고 말한다. 첫째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이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은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고 배우며 따르라는 뜻이라고 본다. 성경의 또한 역사의 경건한 인물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가 진실한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고 살피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훈과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본문은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목자들’은 신실하고 충성된 목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외에도 역사상 신실한 목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했고 바른 삶을 본보였다.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금은 보석으로 교회를 설립한 일꾼들이다(고전 3:10-12). 우리는 그런 목사를 만나고 그런 교회에 속하여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여야 한다. ‘염소 새끼’는 자녀들, 어린 신자들, 연약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성숙한 성도는 어린 성도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외적 모습으로 인해 낙심치 말고 또 교회 안에 악한 자들이나 위선자들이 있다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내면적 모습과 영광을 보아야 한다.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지교회나 전체 교회도 그러하다.

둘째로, 교회는 환난과 핍박, 부족과 연약 등으로 인해 때때로 외적 영광을 잃어버리고 검게 되지만, 참된 교회들은 항상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피 흘려 사신 교회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온전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약 중에서도 자기의 본분과 임무를 다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참된 말씀의 교훈과 참된 평안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교회를 분별하고 거기서 슬퍼하며 방황하지 말고, 참 교회를 찾아 나아가고 거기에서 참된 말씀의 교훈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어여뿐 자로 여기심을 알고 감사하며 더욱 분발하여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해야 하고, 또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며 신실한 목사들의 교회로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9-17절, 아름답고 사랑스런 부부

[9절]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駿馬)(수사시)[나의 암말]에 비하였구나.

신랑은 신부를 바로의 병거의 암말에 비교하였다. 말은 짐승 중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쓰기에 매우 유익하다. 말은 힘이 있고 용맹스러워서 잘 길들여진 말은 전쟁에 필수적 장비이다.

주께서는 교회를 그러한 말(馬)에 비유하셨다고 본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교회는 그가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다. 또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서 잘 길들여져서 영적 전쟁에서 힘있고 용맹한 사역자로 쓰이기를 원하신다.

[10절]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토림)[장신구](BDB, KJV, NASB, NIV)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신부의 두 뺨은 땋은 머리털 혹은 장신구로, 그의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다고 표현된다. 여성의 뺨과 목은 아름다운 부분이며 거기에 장신구와 구슬 꿰미가 있을 때 더욱 더 아름다울 것이다. 신부의 아름다운 단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들과 거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덕과 선한 행실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의 온유와 겸손과 선행이 그러한 덕들의 일부이다(벧전 3:4; 딤전 2:10).

[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우리가’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 같다. 주께서 교회를 위해 은 단추로 장식된 금사슬을 만드시겠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 아름다운 복을 예비하시고 허락하신다는 뜻 같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죄씻음과 중생(重生)과 의롭다 하심과 양자됨과 성령을 주셨을 뿐 아니라, 또 훌륭한 목사들과 성도들, 의로운 법들과 거룩한 규례들을 주셨고 또 계속 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욱 아름다운 은혜로 채우실 것이다.

[12-14절]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몰약 향낭(향유 주머니)이니 내 품에서 밤을 새우도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나도 기름’은 매우 값비싼 향유로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마가복음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한복음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또 몰약은 맛은 쓰지만 냄새는 좋아서 고급 향유로 간주된다. 또 고벨화라는 원어(코페르)는 향기가 있고 약간 흰색의 꽃들이 포도송이같이 피는 떨기나무이며, 또 ‘몸값, 속전(贖錢)’이라는 뜻도 있다.

본문은 신랑이 신부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인가를 세 번이나 말한다. 상에 앉은 왕에게 신부의 나드 향유가 부어진다고 표현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구주 예수께 이루어졌다. 또한 신랑은 밤새도록 신부의 품에 있는 몰약 향유 주머니이며, 또 그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향기로운 고벨화 꽃송이라고 표현된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가장 값비싼 향유이시며 몰약과 고벨화이시다.

[15절] 내 사랑아, [보라(힌나크)] 너는 어여쁘고(야파) [보라(힌나크), 너는] 어여쁘다(야파).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신랑이 신부에게 하는 이 말은 주께서 교회를 어떻게 예쁘게 보시는지 말해준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 개개인과 개교회나 전체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이며 많은 결함과 연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성도 개인이나 교회를 예쁘게 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공로일 뿐이다.

주께서는 또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말씀하신다. 비둘기의 눈은 매나 독수리의 눈과 다르다. 그것은 아름답고 온유하고 순결한 눈이다. 눈은 단지 신체의 외형적 기관일 뿐 아니라 또한 내면적 성향을 가리킨다. 눈은 마음을 반영한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한 눈’(잠 6:17), ‘악한 눈’(잠 23:6) 등의 표현을 한다. 아가서의 신부는 이상적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다. 성도의 눈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결한 눈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상적 성도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우리 개개인의 삶이나 교회는 온유와 겸손과 거룩함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16-17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야페)[아름답고] 화창하다(나임)[사랑스럽다, 기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서까래]로구나.

신부는 신랑에게 “당신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대답한다. 주께서 교회를 예쁘다고 보시지만, 실상 아름다우신 자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 자신이시다. 그는 본래, 본질적으로, 완전히 아름다우시다. 또 그는 사랑스러우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가 누구인가? 또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누구인가?

신부는 또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라고 말한다. 침상은 교제를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이 푸르다는 말은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도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에게 힘과 기쁨을 주고 생명력을 공급한다.

또 우리의 집은 교회를 가리킬 것인데, 그것의 들보가 백향목이며 서까래가 잣나무라고 말한 것은 그 집이 튼튼하며 향기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그가 친히 세우셨고 지키시고 보장하시는 집이며 우리가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집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튼튼하고 향기롭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부족과 연약이 많은 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예쁘게 여기신다. 우리를 그렇게 여기시는 것은 주의 은혜일 뿐이다. 주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우리는 그의 의(義)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로 간주된다.

둘째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인격적 덕과 선행으로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디도서 2:1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한 순결한 처녀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죄악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존귀를 소망하며 사모해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존재이시다. 그는 나드 향유같이, 몰약 향낭같이, 고벨화 송이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향기는 그의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선하신 인격과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속죄의 사랑을 통해 확실하게 증거되었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 즉 그의 선하신 인격과 선하신 행위의 향기를 깨닫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살기를 결심하며 우리의 가장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며, 또 우리의 생애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시고 온유하시고 아름다우신 인격과 행위를 본받으며, 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귀히 여겨 밤낮으로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 날마다 새 힘과 기쁨을 얻어야 한다. 이상적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드리며 그를 본받고 말씀과 기도로 그와 늘 교제하는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견고하며 늘 활기찰 것이다.

 

2장: 신랑의 초청

1-7절, 사랑의 교제

[1-2절]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1절은 신부의 말의 계속이라고 본다(NASB, NIV). 신부는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표현한다. ‘수선화’(카바첼레스)는 크로커스(crocus)나 사프론(meadow-saffron) 꽃나무(BDB), 혹은 수선화 종류 아스포델(asphodel) 꽃나무(KB)라고 한다. 사프론꽃은 오렌지색 점이 있는 자주색 혹은 흰색 꽃이라고 한다. 사론은 갈멜산 남쪽의 비옥한 목초지역이며 사론의 수선화는 들판에 핀 예쁜 꽃이다. 성도는 들판에 핀 꽃과 같다. 또 골짜기는 보통 눈물과 고난의 세상을 상징한다. 과연 성도는 눈물과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피어난 백합화와 같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

2절은 신랑의 말인데, 신랑도 신부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표현한다. 가시나무는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킬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다. 그러나 가시나무에 찔릴수록 꽃향기는 더욱 주위에 퍼진다.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신부는 신랑이 남자들 중에 사과나무같이 독특한 존재라고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독특하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신 10:17),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딤전 6:15).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라고 불리신다(계 17:14).

또 신부는 사과나무 같은 신랑의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나무 그늘에 앉는다는 것은 거기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 쉰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가 세상의 환난과 핍박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며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또 신부는 그 사과 열매가 입에 달았다고 말한다. 사과는 과일들 중 대표적 과일이며 몸에 대단히 좋은 과일이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 사역과 그 은택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고 (엡 1:7),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롬 3:24). 주께서 십자가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된다(요 6:53-55). 또 이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은택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새 생명은 성도들에게 큰 기쁨과 유익을 준다. 그것은 맛있는 사과보다 더 달고 유익하다.

[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신부는 신랑이 자기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가게 했다고 말한다. 잔칫집은 맛있는 음식이 풍성하고 기쁨의 교제가 있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 모임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난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 열린 마음, 깨닫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잠 27:7). 하나님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시 19:10).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다(행 2:42). 오늘날 우리는 서로 권면하며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또 신부는 사랑이 그의 깃발이라고 말한다. 깃발은 무리의 특징을 나타내거나 한 무리를 다른 무리와 구별하는 표식이다. 교회의 깃발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사랑의 확증이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또 주 예수님의 제자들의 표는 서로 사랑함에 있다(요 13:34-35).

[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이는]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너희’는 잔칫집에 모인 사람들 곧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주의 종들과 제자들을 상징할 것이다. ‘건포도’라는 원어(아쉬솨)는 ‘건포도떡’이라는 뜻이다. 건포도떡은 큰 행사나 잔치 때 만들어 먹었던 떡이었다.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에 들여온 후 제사를 마치고 모든 백성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을 나눠주었다(삼하 6:19; 대상 16:3). 건포도떡은 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은 떡이다. 또 사과는 대표적 과일이다. 신부는 건포도떡으로 힘을 얻고 사과로 시원함을 얻기를 원한다. 건포도떡과 사과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의 은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의 심령을 시원케 하신다.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므로 병이 났기 때문에 건포도떡과 사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가 5:8도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라고 말한다. 성도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없어 보일 때 주와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병이 나기도 한다. 시편 42:1, 3,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119:20, “[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6-7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그 여자가] 원하기 전에는 [그 사랑을]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신부가 신랑에 대해, 즉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고백한다. ‘손’은 주의 사랑과 배려와 보호를 가리킬 것이다. 보통 ‘왼손’은 약한 손, ‘오른손’은 힘있는 손이다. 주께서는 교회를 위해 은밀하게 섭리하기도 하시고 드러나게 섭리하기도 하신다. 신명기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7절의 ‘노루와 들사슴으로’라는 말이 신랑에 대한 묘사에 적절해 보이기 때문에(2:17) 7절을 신부의 말로 볼 수도 있지만(KJV, NIV), “원하기 전에는”이라는 원어(아드 쉐테크파츠)가 “그 여자가 기뻐하기까지”라는 뜻이며 ‘그 사랑을’(하아하바)이라는 말도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신랑의 말로 볼 수도 있다(NASB). 본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를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는 뜻이 중요하다. ‘노루’라는 원어(체비)는 영양(羚羊)이다. ‘노루와 들사슴으로’라는 표현은 그 짐승들의 사랑스런 모습을 가리킬 것이다. 신부가 신랑의 팔벼개를 베고 잠든 모습은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사람이 노루와 들사슴의 그런 모습을 보면 그것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조용히 관망하는 것이 좋듯이, 신랑은 잠든 신부를 흔들거나 깨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그가 혹시 깨어 싫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는 셈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는 들판에 피어난 수선화 같고 골짜기에 피어난 백합화와 같다.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말과 행위로 아름다운 모습을 항상 나타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으며 오직 그 품안에, 그 그늘 아래 거하며 그가 이루신 대속 사역과 그 은택들, 즉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을 맛보며,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셋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잔칫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기를 힘쓰며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교회의 모임들이 영적 유익을 주고 기쁨의 교제가 있는 모임이 되게 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고 응답이 없으신 듯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사모하며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건포도떡으로 힘을 얻고 사과로 시원함을 얻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은혜와 성령의 힘을 얻고 심령에 시원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손으로 우리를 늘 안으시고 지키실 것을 굳게 믿고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8-14절, 신랑의 초청

[8절]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신부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성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성경말씀 안에서와 성경말씀을 통해서 듣는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 안에서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신부는 또 신랑이 산과 언덕을 넘어 달려오는 것을 본다. 주께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해 신속히, 즐거이 달려오신다. 산과 언덕은 난관이나 장애물이다. 그러나 세상의 여러 가지 난관과 장애물은 주께서 성도들에게 오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

[9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신부는 신랑을 노루와 어린 사슴에 비유한다. 노루와 사슴은 민첩한 짐승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자나 표범같이 사납지 않고 순하다. 노루와 어린 사슴의 모습은 주 예수님의 온유하신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주께서는 여러 장애물들을 넘어 민첩하게 성도들을 도우러 오시지만 사납지 않으시고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또 신부는 신랑이 신부의 집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본다고 표현한다. 매튜 풀은, 이런 표현이 구약시대의 제사와 절기 같은 그리스도의 예표적 활동들을 암시하거나, 신약시대의 비록 불완전하지만, 평안, 기쁨, 건강, 의식주 공급 같은, 장차 올 천국에 비교된 현세의 그리스도의 예비적 활동들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10-13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는]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사랑하는 신랑은 신부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한다. 13절 끝에도 그 말을 다시 반복한다. 그가 함께 가자고 말하는 까닭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기 때문이다. 유대 땅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때인데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쳤고 땅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 소리, 비둘기의 소리가 들리며 무화과나무는 푸른 열매의 향취를 내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고 말한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다’는 원어(카나트)는 ‘[푸른 열매의] 향취가 난다’는 뜻이다(BDB). 무화과는 1년에 2-3번 열매를 맺는데 초여름에 첫 열매를 거둔다. 그러면 봄에 푸른 열매의 향취가 날 것이다. 포도나무도 봄에 꽃을 피고 늦여름부터 열매를 딴다.

비가 많고 추운 겨울은 환난 많은 세상에서 죄책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들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봄이 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주시는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죄책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다. 비둘기의 소리는 비둘기 같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감화, 감동하시는 것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성도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세상의 얽매이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일어나서 그와 좀더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와 동행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라는 요청일 것이다.

[14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신랑은 신부를 ‘나의 비둘기’라고 표현한다. 비둘기는 순결함, 온유함,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것은 참 성도의 모습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순결함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 . .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16).

그러나 성도는 또한 비둘기같이 연약한 존재이다. 성도는, 독수리나 사나운 짐승을 피하여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살고 있는 외로운 비둘기로 묘사된다.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악한 자들을 피하여 불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비둘기와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실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피신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안전한 피난처이시다.

신랑은 신부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며 그 음성을 듣기 원한다. ‘부드럽다’는 원어(아레브)는 ‘달다, 감미롭다, 기쁘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목소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그들의 얼굴을 아름답게 여기시며 그들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목소리를 주께 들리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주께 찬송할 때 주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주께 기도할 때 주께서는 기뻐 들으신다. 우리는 세상의 환난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 숨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며 찬송과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라고 말했고(히 13:15),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다(살전 5: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우리를 도우러 신속히, 기쁘게 달려오실 것이다. 그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온유와 겸손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부르심을 듣고 이 세상의 얽매이는 것들, 죄책과 두려움과 세상 사랑 같은 것들을 다 버리고 일어나 주께로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그와 교제하고 그와 동행하고 그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환난을 피해 숨어 있지 말고 주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주께 항상 찬송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15-17절, 신랑을 사모함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본문의 ‘우리’는 성도들을, ‘포도원’은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아가서의 이런 말씀들은 아가서가 단순히 부부의 사랑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임을 잘 나타낸다.

봄이 와서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 신약시대가 되어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꽃들이 피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며 인격과 삶의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포도원에 그것을 허무는 여우들이 있다. 원문에는 ‘여우들’(슈알림), ‘작은 여우들’(슈알림 케탄님)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다. 여우들은 포도나무의 잔가지들이나 잎사귀를 씹고 꺾고 땅굴을 파서 뿌리를 상하게 하고 포도열매가 맺히면 그것을 따먹는다고 한다. 그것들은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자들이다.

포도원의 여우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허무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자같이 드러나게 교인들을 해치는 핍박자들이 아니고 간교한 꾀와 속임수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에스겔 13:4,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그들은 참된 교인이 아니고 사탄의 일꾼이요 사탄이 심은 가라지요 쭉정이요 쓴뿌리이다. ‘작은 여우들’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있는 악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단 사상이나 악행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본질상 여우이다. 교회는 그런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제거해야 한다.

[16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신부는 신랑과의 일체감을 고백한다. 사랑은 연합과 일치를 가져온다.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를 소유한다. 그러나 미움은 서로를 배척하고 마침내 분리를 가져온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적으로 연합되었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4-5). 주 안에 거하는 생활이란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2:13, 27,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에베소서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신부는 또 신랑이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고 있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고 계신다. 백합화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다. 백합화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아가 2:2에서 신랑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고 말했었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교훈하시고 인도하신다.

[17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야푸아크 하이욤)[날이 새고]1) 그림자가 갈 때에[때까지] 돌아와서 베데르 산[갈라진 산들]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지금은 날이 어두우나 날이 새는 시간이 올 것이다. 성경에서 밤은 죄와 슬픈 일들이 많은 세상을 상징하며 낮은 영광의 새 세계를 상징한다. 로마서 13:11-12,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현실은 어두운 밤 같을지라도 머잖아 아침이 올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역사의 시간표이다.

또 신부는 날이 새어 아침이 될 때까지 신랑이 베데르 산으로 노루와 어린 사슴같이 돌아오기를 소원한다. 베데르 산[갈라진 산들]은 고난의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4:6에 보면 그 산은 ‘몰약산, 유향의 산’이라고 불리웠고 8:14에는 ‘향기로운 산’이라고도 불리웠다. 주께서는 고난의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을 주신다. 그러나 이제 천국에 계신 주께서는 세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그는 노루와 사슴같이 속히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고 사모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 안에는 교회를 허무는 여우와 작은 여우같은 자들이 있다. 참된 교회를 허무는 자들은 실상 사탄의 일꾼들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갈 5:9).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은 작은 이단과 오류도 용납하지 말고 잘 살피고 제거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그와 연합되었음을 깨닫고 그 연합을 잘 유지해야 하고 또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신앙 인격과 선한 삶의 향기를 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죄와 슬픔과 불행의 일들이 많은 어두운 세상의 여정이 끝나고 날이 새고 밝은 낮이 올 것을 기대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시고 속히 재림하실 것이다.

 

3장: 신부의 사모함

1-5절, 교제의 회복

[1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신부는 밤에 침상에서 그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보통, 남편이 낮에는 일하러 나가고 밤에는 집에 있는데, 남편이 있어야 할 시간에 그가 없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것이 정상인데 그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음을 나타낼 것이다. 혹은 고난과 환난의 때에 주께서 함께 계시지 않음을 나타낼지도 모른다. 주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까닭은 여러 가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불경건과 죄,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에 빠질 때 그가 우리를 떠나신다. 또는 때때로 단순히 우리의 신앙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가 우리를 잠시 떠나신 듯한 때도 있다.

[2절]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신부는 일어나 성중에 돌아다니며 그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 찾으려 하였다. 성은 예루살렘 성, 곧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또 거리나 큰길은 교회 안에서의 생활 즉 교제나 활동들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가 거기에서 신랑을 만날 수 없었듯이, 성도는 때때로 교회 안에서의 교제나 활동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성도들이나 교회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으나 또한 성도 자신의 부족이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3-4절]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쇼메림)[지키는 자들, 경비하는 자들, 파수꾼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성중에 순행하는 자들 혹은 파수꾼들은 교회의 목사들이나 장로들을 가리킬 것이다. 신부는 그들에게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에게서 시원한 대답을 들은 것 같지 않다. 때때로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도 주님에 대해 잘 알려주지 못한다. 아마 그들의 불경건과 불충성과 부족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그들을 떠나자마자 그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 성도가 주를 사모하며 그를 애타게 찾았고 금방 만나지 못했지만, 주께서는 멀리 떠나 계신 것이 아니었고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를 사모하며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죄악된 것을 버리고 그만 의지하는 자들에게 만나주신다. 성도는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다(렘 29:12-13). 이것은 약속과도 같은 말씀이다. 또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신부는 신랑을 꼭 붙들고 그의 어머니 집, 그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집’은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성도는 주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때의 슬픔과 고통을 알고 또 주님을 찾고 그를 만난 것이 때때로 힘든 과정임을 체험하였으므로 이제는 그를 꼭 붙들고 그를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체비)[영양(羚羊)]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하아하바)가 원하기 전에는(아드 쉐테크파츠)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2:7의 말씀과 같다. 본문을 신부의 말로 볼 수도 있지만(KJV, NIV),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여성명사이며 “원하기 전에는”이라는 원문이 “그 여자가 기뻐하기까지”라는 뜻이기 때문에 신랑의 말로 볼 수도 있다(NASB). ‘노루와 들사슴으로’라는 표현은 그 짐승들의 사랑스런 모습을 가리킬 것이다. 신부가 잠든 모습은 사랑스럽다. 사람이 노루와 들사슴의 그런 모습을 보면 놀라게 하지 않고 조용히 관망하는 것이 좋듯이, 신랑은 잠든 신부를 흔들거나 깨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유지되도록, 그가 혹시 깨어 싫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늘 유지하기를 원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는 때때로 주님을 잃어버린 것 같은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거나 신앙 인격의 훈련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를 굳게 믿고 의지할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둘째로, 오늘날도 전심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성도는 그를 만날 것이다. 실상 주께서는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늘 우리 곁에 계신다. 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마다 이제는 그를 믿고 순종하며 그를 꼭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 안에는 참 평안이 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동행하고 주께서 주시는 평안 안에 늘 거해야 한다.

 

6-11절, 왕의 영광을 사모함

[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본문은 친구들의 말로 생각된다(NASB). 이 친구들은 예루살렘의 딸들이든지 신랑의 친구들일 것이다. 원문은 “이 여자가 누구인가?”라는 말로 시작된다. 본문에 거친 들에서 오는 자로 묘사된 사람은 신부로 생각된다. 거친 들은 고난의 세상을 상징할 것이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많고 어려운 일들과 혼란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세상에서 구원 얻은 자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고(행 2:4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했다(갈 1:4). 성도는 거친 들에서 나오는 자들과 같다.

본문은 신부를 ‘연기 기둥’ 같다고 묘사한다. 광야에서의 구름 기둥같이 그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은 천사가 든 금향로의 연기가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계 8:3-4).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날마다 성소에서 올려지는 분향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며, 그가 은혜로 구원하신 성도들도 날마다 찬송과 기도를 하나님께 올린다.

또 본문은 신부를 몰약과 유향과 여러 가지 향품으로 단장된 자로 묘사한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향기로운 제물로 자신을 드리심으로(엡 5:2) 거듭나고 성화되어 아름다운 인격이 되고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는 자이다(호 14:5-7; 갈 5:22-23). 그들이 참 성도이다.

[7-8절] [보라](힌네) 이는 솔로몬의 연(輦)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60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본문은 신부의 말이라고 생각된다(NKJV, NIV). 신부는 친구들의 말을 가로막으며 신랑의 가마를 바라보라고 말한다고 본다. ‘연’(輦)은 왕이 타는 가마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주나 옹주(첩의 딸)의 가마는 ‘덩’이라고 하고, 왕의 가마는 ‘연’이라고 하였다. ‘연’이라고 번역된 말(밋타)은 ‘침상, 소파’라는 뜻이다. 가마는 왕이 편안히 이동할 수 있는 침상이다. 본절은 왕이 가마에 신부를 태우고 혼인식장으로 가는 것을 묘사한 것 같다. 솔로몬의 가마는 이스라엘 용사 60인이 옹위하고 있다. 그들은 왕의 가마를 들고 그것을 경호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밤의 두려움 때문에 각기 허리에 칼을 찼다고 묘사되어 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의 가마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태우시고 밤 같은 세상을 통과하여 천국에 이르려 하신다. 그 수행원들은 능력의 천사들과 그의 충성된 종들이다. 세상은 악하며 악령들의 활동이 많은 두려운 밤이지만, 주의 천사들과 종들은 유능한 용사들이다. 교회는 능력의 천사들이 옹위하고 있고 또 주께 헌신한 충성된 종들이 있기 때문에 밤 같은 세상에서도 안전하다. 주의 충성된 종들은 주 안에서 강건하여 마귀와 악령들의 세력과 싸워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다(엡 6:10-13; 딤후 2:3; 몬 2).

[9-10절]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輦)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毯)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본문은 신부의 말(NIV)이든지 친구들의 말(NASB)일 것이다. 본문은 솔로몬 왕의 연(輦)을 묘사한다. 여기에 ‘연’이라는 번역된 원어(압피레욘)는 ‘가마 혹은 마차’라는 뜻이다. 솔로몬 왕은 자기의 연을 레바논 나무 곧 백향목으로 만들었다. 백향목은 고급 목재이다. 그 연의 기둥은 은이었고, 그것의 바닥 혹은 밑받침 또는 등받이는 금이었고 그것의 자리 곧 좌석은 자색 담(毯) 즉 자색 천이었다. 또 그 가마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 아마 그들을 위한 장식품들이 입혀져 있다고 묘사된다.

왕이나 왕의 신부가 탄 연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 교회는 레바논 백향목 같은 향기 나는 성도들로 구성된다. 교회의 기둥은 순은(純銀) 같은 순수한 진리의 말씀(딤전 3:15)과 그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기둥같이 충성된 종들이다(갈 2:9). 교회의 기초는 금 같은 보배롭고 불변적인 언약의 말씀이다(마 16:18). 또 교회의 좌석은 자색 천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만들어진 좌석이다. 그 안에는 성도들의 풍성한 사랑이 입혀져 있다.

[11절]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신랑은 혼인날, 곧 모두들의 마음이 기쁜 날에 머리에 면류관을 쓸 것이다. 성경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에 대해 말한다(계 19:7). 그 날에 교회는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는 거친 들 같은 세상, 슬픔과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구원 얻은 자들로서 항상 찬송과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구원을 얻었으므로 이제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둘째로,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을 위해 양육자와 같은 교회를 주시고 천사들의 옹위와 충성된 종들의 호위로 그 교회를 마귀와 악령들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의 풍조로부터 지키시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 무사히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의 거룩한 영광(엡 5:26-27)과 마지막 날의 주의 영광을 보고 그 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기뻐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교훈하였다(롬 12:12).

 

4장: 신부의 아름다움

1-6절, 신부의 아름다움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신랑의 말이다.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여기에 묘사된 신부는 모든 면에 완전한 자이다. 그것은 영광의 상태에 이른 이상적 성도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의 모습이다. 그것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엡 5:26-27). 신랑은 신부에게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교회를 심히 아름답다고 여기신다. 그것은 교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워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그것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랑은 신부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말한다. 비둘기 눈은 순결함과 온유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마 10:16). 성경에서 눈은 인도자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10:31). 교회의 목사가 순결하고 온유하다면 그 교회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눈은 마음의 의향을 가리키기도 한다(마 6:22-23). 교인들의 마음의 의향이 온유하고 순결하다면 그 교회는 또한 비둘기 눈과 같다고 할 것이다.

또 신랑은 신부의 머리털이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같다고 말한다. 그 염소는 검은색 염소일 것이다. 신부의 가지런하고 단정한 긴 머리털은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가리킬 것이다.

[2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운 이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 그것은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같다. 목욕시키기 전에는 몸에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묻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것들의 털이 희고 깨끗하다. 둘째, 그것은 털 깎인 암양 같다. 암양은 털을 깎인 후에는 털이 곱고 단정할 것이다. 셋째, 그것은 새끼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다. 그것은 서로 쌍을 이루는 가지런한 이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신부의 이는 깨끗하고 곱고 가지런하다.

이(齒)는 음식을 씹어 위(胃)로 넘기는 역할을 한다. 앞니, 송곳니, 어금니 등 이의 기능이 약간씩 달라도 음식을 소화시킨다는 목표는 동일하다. 매튜 풀이나 매튜 헨리 같은 성경주석가들은 그것이 교회의 양무리를 먹이는 목사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과연 충성된 목사들은 교회에서 어린양을 먹이는 좋은 이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을 음식을 먹는 것으로 비유하였다(요 6:47, 51). 구약 율법에 말한 새김질하는 짐승(레 11:3)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가리키는 뜻이 있어 보인다. 성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역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각 성도는 좋은 이를 가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음미하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3절]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신부의 입술은 홍색 실 같은 입술, 즉 붉고 가는, 아름답고 건강한 입술이며, 그의 입도 예쁜 입이라고 묘사되었다. 입이나 입술은 말에 관계될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입술과 입은 성도들의 선한 말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반영하므로, 성도는 선한 말과 덕스러운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잠 10:20; 엡 4:29).

의인의 선한 말은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게 씻음 받은 말을 상징하는 것 같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속죄의 복음 전파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또 너울 속의 신부의 뺨은 석류 한 쪽과 같다고 묘사된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며 애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너울 속에’라는 말은 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남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과 자기 양심만 아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이 맑은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다(사 66:2; 딤전 1:15).

[4절]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신랑은 신부의 목이 무기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한 다윗의 망대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반듯하고 견고한 망대이다. 신랑은 그 망대에 일천 방패 즉 용사들의 모든 방패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용사들이 전쟁에 나갈 때 쓰는 방패들이든지 아니면 용사들의 승전 기념 방패들일 것이다. 신부의 목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신자들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믿음뿐이다. 또 성도의 믿음은 망대와 같고 방패와 같다.

망대와 같은 교회에 일천 방패가 달린 것은 참 믿음이 완전한 방어의 길임을 나타낸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 일천 방패가 과거의 용사들의 승전 기념 방패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교회 역사는 많은 믿음의 용사들, 믿음의 승리자들의 역사이다(히 11장). 그들 중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등이 있다.

[5절]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유방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교회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주로 목사들의 사역이다. 목사들의 일차적 임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고 경계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인격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목회는 곧 목양(牧羊)이며(요 21:15-17) 그것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교훈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주께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엡 4:11-12).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몸을 세우는 것이 목사들의 임무이며 목회의 목표이다. 그것은 목사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어진 임무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는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

[6절] 날이 기울고[새고](KJV, NIV)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계속 신랑의 말이다. ‘날이 새고 그림자가 갈 때’라는 말은 슬픔과 고통의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고난의 세상이 끝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천국이 임함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천국은 신약시대에 영적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마 13장). 그러나 천국은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며 이루어질 것이다.

2:17에서는 ‘베데르산’이 언급되었고 그것은 고난의 세상을 상징한 것 같다고 보았다. 본절의 ‘몰약과 유향의 산’은 신약교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몰약과 유향은 관유와 향을 만드는 재료들이다(출 30:23-25, 34-35). 관유는 성령의 은혜를, 향은 하나님께 올리는 성도들의 찬송과 기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계 8:3-4; 히 13:15). 성도들의 선한 행위들도 성령 안에서 올려질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빌 4:18; 히 13:16). 또 이렇게 향기로운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 우리의 마음도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본문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신부의 눈은 비둘기 같고 그 머리털은 아름답다고 묘사된다. 교회는 온유하고 순결한 목사를 인도자로 세우고 성도들도 온유하고 순결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또 교회는 거룩함과 순종함으로 단장해야 한다.

신부의 이는 가지런하고 희고 깨끗하다고 묘사된다. 이상적 교회는 목사가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목사를 가진 교회이다. 좋은 목사는 양무리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 이상적 교회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일 것이다. 교회의 목사도, 일반 성도들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신부의 입술과 입은 붉고 예쁘며 그 뺨은 석류 한 쪽 같다고 묘사된다. 성도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서 선하고 덕스러워야 하며, 또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만방에 전파해야 하며, 또 우리에게 어떤 실수와 부족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고쳐야 한다.

신부의 목은 방패가 달린 망대와 같다고 묘사된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도들의 복음 신앙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자신을 연합시킨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일천 방패와 같다. 그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지상에서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고한 망대와 같은 목 곧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부의 유방도 아기들을 먹일 만한 좋은 유방으로 묘사된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이 어린 신자들을 양육한다. 목사들이 말씀을 잘 가르치고 성도들도 서로 권면하고 위로할 때 교회는 튼튼하게 성장할 것이다.

날이 새고 그림자가 갈 때가 올 것이다. 구약시대가 지나고 신약시대가 왔으며, 고난의 세상이 지나고 영광과 안식의 새 세계가 올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대망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한다. 주께서는 피 흘려 사신 교회 안에 성령으로 이미 오셨고 세상 끝날까지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요 14:16-18; 마 28:20).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완전한 교회답게 주의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7-11절,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7절]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주께서는 우리를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신다. 그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엡 5:2).

또 신랑은 신부에게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자신 속에 부족과 결함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러한 완전은 장차 천국에서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그의 인격과 삶에 있어서 흠 없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며 성령께서는 그 일을 도우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돕기 위해 우리 속에 오셨다. 베드로후서 3: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8절]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아라(슈르)[산으로부터 떠나가라(BDB), 내려오라(NIV)].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나의 신부’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주의 사랑 속에 구원의 모든 은혜가 있다.

또 주께서는 우리에게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레바논’은 삼림이 울창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산을 가리킨다. 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은 레바논산의 봉우리들인 것 같다. 성경에서 스닐과 헤르몬은 같은 곳을 가리켰다(신 3:9). ‘사자굴과 표범산’은 레바논산의 특징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그곳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사는 험한 산이다.

레바논산은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들이 많고 악한 자들이 많은 위험천만한 세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산은 앞절의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북방의 레바논산과 남방의 시온산이 대조를 이루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대조와 같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으로부터 떠나가라”고 말한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을 죄악의 소굴을 떠나 주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 함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신랑은 신부를, 함께 자란 여동생을 부르듯이 ‘나의 누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신랑은 신부가 자기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그는 신부의 한 눈이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은 ‘네 한 눈’이라는 뜻 같다(KJV). 옛날의 신부는 얼굴 가리개를 하고 겨우 한 눈으로 신랑을 조심스레 보았다. 그것은 신부의 겸손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랑은 신부의 한 눈만 보고도 그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그 마음이 신부에게 사로잡혔다는 뜻일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렸을 때 그들은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을 쳐다보고 고침을 받았다. 믿는 자만 놋뱀을 쳐다볼 수 있었다(요 3:14-15).

또 신랑은 신부의 목의 구슬 한 꿰미가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목의 구슬 꿰미는 말씀 순종의 행위들을 가리킬 것이다.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말씀 순종의 선행과 덕은 성도에게 아름다운 장식물과 같다.

[10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신랑은 신부의 사랑이 심히 아름답고 그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말한다. 포도주는 맛이 있고 즐거움을 주는 음료를 가리킨다. 참된 성도들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0:29-30).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으려 함이라”고 했다(빌 3:7-8).

신랑은 또 신부의 기름의 향기가 모든 향품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 기름의 향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성도의 선행과 덕을 가리킬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한 행위와 덕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 5:22-23). 성도들의 선행과 덕은 그 어떤 향품보다 더 향기롭다.

[11절]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입술에서 꿀 방울이 떨어지고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은혜롭고 유익한 말을 가리킨 것 같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다”고 말했고 또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했다.

실상,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음식이다. 시편 19:10, “[그것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젖보다 더 유익한 양식이다. 성경말씀에 근거하고 그것에 합한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는 성도들의 말들은 꿀 방울 같고 꿀과 젖과 같은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친다.

신랑은 또한 신부의 의복의 향기가 레바논의 향기 곧 레바논 백향목의 향기와 같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의복의 향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또 거기에 뿌리를 두고 열매 맺는 성도들의 의롭고 선한 행실들을 상징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하였다(빌 3:9).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가 우리를 완전하게 여기심을 감사하며 완전한 길로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됨을 감사하고 또 죄악된 세상, 마귀의 시험이 많고 악한 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떠나 그 영광의 천국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 곧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히 12:2) 말씀 순종의 선행과 덕으로써 우리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포도주보다 더 나은 사랑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사도 바울같이 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기를 원하며 또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 향기로운 인격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를 믿음으로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일들을 힘써 행해야 한다.

 

12-16절, 신부의 순결함과 선함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신랑은 신부를 잠근 동산이라고 말한다. ‘잠근 동산’은 주인이 직접 아름답게 가꾸고 보호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동산이다. 그것은 이상적 교회의 모습을 가리킨다. 교회는 주께서 직접 설립하시고 관리하시고 아름답게 가꾸시고 보호하시는 곳이요 죄씻음을 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모임이다.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딤전 3:15). 거기에서는 거짓된 사상이나 부도덕한 죄악이 선전되거나 허용되지 못한다. 성경은 거룩한 교회를 순결한 처녀에 비유한다(고후 11:2-3; 계 14:4-5).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교회를 만드시는 것이다(엡 5:26-27). 이러한 교회는 이미 법적으로 만들어졌고 실제적으로도 만들어져가고 있다.

‘덮은 우물과 봉한 샘’도 비슷한 내용이다. 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상징한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요한복음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덮은 우물과 봉한 샘은 더러운 먼지나 오물이 들어가지 않은, 즉 수질 오염이 없는 물을 가진 우물이다. 그 우물의 물은 깨끗하다. 그것은 사람이 마시는 데 적합하고 씻는 데도 적합하다. 이상적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건전하고 유익한 구원의 말씀과 성령의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교훈을 공급하고 그들의 죄를 깨끗케 하며 또 서로에게 선한 권면과 위로와 격려를 준다.

[13-14절]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果樹)[과일나무]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향나무]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신랑은 신부에게서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일나무가 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인들의 선한 인격과 행위의 열매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 신랑은 신부에게서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향나무와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 난다고 말한다. 여기에 열거된 것들은 향나무들과 향품들이다. 그것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붓는 향유로 쓰인 관유의 재료들을 포함한다. 출애굽기 30:23-25,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500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250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과 계피[계수나무 껍질] 500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향나무들과 향품들은 신자들의 선한 인격과 행위들이 주께서 기뻐하실 만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만하며 기쁨을 주는 것들임을 가리킬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는 선한 인격과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선행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을 삼으시려고 구원하셨다(딛 2:14). 요한복음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에베소서 5:9, “빛[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18,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디도서 3:14,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15절]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신부는 또 ‘동산의 샘,’ 곧 동산의 풀과 나무들, 과일나무들에 물을 공급하는 샘이라고 묘사되며, 또 ‘생수의 우물,’ 곧 사람들을 시원케 할 생수를 길을 수 있는 우물이라고 묘사된다. 또 그는 레바논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시내, 곧 맑고 시원한 물을 공급하는 마르지 않는 시내라고 묘사된다. 샘물과 우물과 시내물은 성령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요 4:14), 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7:38-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롬 8: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자는 이미 오신 성령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고 오직 성령의 충만하심을 따라 살아야 할 뿐이다(엡 5:18).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북풍은 시원하거나 추운 바람이다. 그것은 좋은 기후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추위를 가져온다. 남풍은 따뜻하거나 더운 바람이며 때때로 파종을 위해서나 추수를 위해서 시기 적절한 비를 동반한다. 바람은 하나님의 섭리나 성령의 활동을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때로 고난을 주기도 하시고 때때로 기쁨을 주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바람 같은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바람같이 우리 안팎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신다.

신부는 바람이 ‘나의 동산’에 불어와 향기를 날리기를 원한다. 성도의 향기는 아름다운 덕과 선행이다. 그것은 때때로 고난을 통해서도 증거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난의 전도 여정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었다고 증거했다(고후 2:14-16). 성도에게는 죄성이 남아 있어서 그 죄성을 따라 살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게 되지만, 성령을 따라 행하면 몸의 죄악된 욕심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며 그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갈 5:16, 22-23).

신부는 신랑에게 ‘그의 동산’으로 오라고 말한다. 그 동산은 신부의 동산이지만 실상 신랑의 동산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회이지만 실상 주님의 교회이다. 신부는 신랑이 그 동산에 들어와 아름다운 열매를 드시기를 원한다. 교회 안에 오셔서 거하시는 주께서는 성도들의 선행들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행실이 선하고 덕스럽고 칭찬할 만하면, 주께서는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이상적 교회는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과 같고 각종 과일과 향품이 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아름답게 가꾸시고 보호하시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교회에는 순수한 교훈이 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있다.

둘째로, 이상적 교회는 동산의 샘, 생수의 우물,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와 같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우리 속에 생명의 샘물과 시냇물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이제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성도는 때때로 북풍 같은 추운 바람 즉 고난의 바람을 맞을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덕으로 성도의 향기를 발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선한 행실로써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5장: 신랑의 아름다움

1-5절, 신랑의 방문

[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우유]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본절은 신랑의 말로서 신부의 말(4:16)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그의 동산에 들어왔고 그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었고 그의 꿀송이와 꿀을 먹었고 그의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고 말한다. 그의 동산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랑되신 주께서는 성령으로 교회 속에 즉 성도들 가운데 오셨고 지금 그들 안에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했다(고후 13:5).

‘몰약과 향 재료’는 성도들의 선하고 덕스러운 행실을 상징하고 ‘꿀송이와 꿀’은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는 음식이다(시 19:10; 119:103). ‘포도주와 우유’도 생명과 영양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사 55:1-3; 계 22:17). 주께서는 속죄의 은혜를 먹는 음식과 마시는 음료수에 비유하셨고(요 6:53-56)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유에 비유했다(벧전 2:1).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나의’ 것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다 주님의 구원의 결과이며 주의 영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신랑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 사랑하는 자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와 고백이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천사들과 모든 신자들이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을 나타낸다.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본절 이하의 여러 절들은 신부의 말이다. 신부는 육신적으로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고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신랑을 얼마나 사모하였던지 잠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었고 그의 문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섭리로 깨우치시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른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은 친근한 사랑의 대상임을 말하고, ‘나의 비둘기’는 이상적 교회의 온유함과 순결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마 10:16). ‘나의 완전한 자’라는 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비록 부족투성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로 여기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문을 열어 달라’는 신랑의 말은 요한계시록 3:20에 있는 주의 말씀과 비슷하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사람의 마음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신다. 문을 여는 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상징할 것이다.

또 신랑은 자기의 머리에 이슬이, 그의 머리털에 밤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께서 범죄하고 연약해진 성도의 마음 밖에서 그가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심을 상징할 것이다.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사람이 낮에 일할 때는 옷을 입고 주로 발로 뛰지만, 밤에 쉴 때는 옷을 벗고 발을 씻는다. 지금 신부는 밤이 되어 쉬기 위해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다. 비록 사모하는 신랑이 찾아왔으나 일어나 옷을 입고 맞기에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 신랑을 맞을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를 주저한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적 평안이나 안일에 빠져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연약하고 무능하여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초청에 즉시 응답지 않고 때때로 응답을 지연하거나 주저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나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신다. 그것은 주께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찌르듯이, 손을 들이밀듯이, 감동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손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되신다. 마태복음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혹은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의 심령을 찌르시는 것이 성령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행 16:14). 주께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주셔야 우리가 주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를 수 있다.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떨어지는구나].

신부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저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상징할 것이다. 주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심히 빈곤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으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굳게 결심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눅 15:20). 사도 바울도 처음 믿을 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행 22:16).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3:19).

신부가 문을 열 때 몰약이 그의 손에서, 몰약의 즙이 그의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졌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향기가 좋은 식물이며 성경에서 관유의 재료로 쓰였고 그 외에도 진통제와 방부제로 쓰였다. 신부는 몰약 향유를 손에 풍성히 바르고 신랑을 맞이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손에서, 손가락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일 것이다.

신부의 손과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몰약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회개와 순종의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회개와 순종은 자기 부정의 고통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행위이다. 죄와 불순종은 추한 모습이며, 회개와 순종은 향기로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합당한 마음과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성령의 감동으로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행 11: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기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의 의(義)를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육신적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지 말고 때때로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의 음성에 응답하고 그를 영접하며 그를 따라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꿀송이와 꿀로, 포도주와 우유로, 몰약과 향 재료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성경말씀에 합한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 그 말씀에 근거한 선한 인격과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6-9절, 신랑을 만나지 못함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신부가 뒤늦게 깨달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물러갔고 떠난 후이었다. 때가 늦었다. 신부는 문 앞에서 신랑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신부의 더디 응답함과 주저함, 즉 그의 안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같았다. 사람이 그의 초청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외면하시는 경우도 있다. 잠언 1:24-26,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찾아야 한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는 말은 2절에서 신랑이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할 때 그가 정신이 나가서, 바른 정신이 없어서 즉시 응답하여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다는 신부의 자책의 말이라고 본다. 신부는 정신이 없어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 바른 정신이 있었다면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하였을 것이나, 기회를 잃었다.

신랑이 이미 떠난 후이었기 때문에 신부는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그를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 마지막 날에 천국문이 닫힌 후에도 늦게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눅 13:24-25).

[7절] 성중에서 행순(行巡)[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신부는 신랑을 찾으러 문밖에 나갔고 성중에서 성을 돌며 지키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를 상하게 하였다. 성벽을 지키는 자들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의 웃옷을 벗겨 취하기까지 하였다. ‘순찰하는 자들’이나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를 사모하는 진지한 신자를 돕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고 핍박한 것이다.

이런 일은 교회역사상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많이 있었다. 땅 위에 이상적 교회가 없었다. 지상 교회들은 항상 많은 연약을 보였고 때때로 심히 부패했다. 선한 직분자들은 경건하여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돌아보지만, 악한 직분자들은 경건하고 진지하기보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경건한 교인들을 멸시하고 비방하고 중상모략하였으며 그들을 낙심시키고 핍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을 자기만 먹이고 약한 자들을 강포로 다스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겔 34:2, 4).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왕이나 제사장들은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다. 예수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다. 사도 바울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교회의 부패는 그 지도자들, 그 직분자들의 부패에서 잘 드러났다.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아가 2:5에서도 그는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신랑을 너무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병이 났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나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보지 못하여 병이 날 때도 있다. 시편 41편 저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주위의 조롱 때문에 주야로 눈물까지 흘렸고 그의 영혼은 낙망하고 불안해 하였다(시 41:1-3, 5).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함으로 그의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0).

그러나 이런 때에도 성도는 낙심치 말고 주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갑자기 멸망당한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덫과 같이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눅 17:27-28; 21:34). 그러나 참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눅 18:1; 마 24:42-43).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하야파)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신부는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불리운다. 이 표현은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은 극히 아름답다. 그것은 영적, 도덕적, 인격적인 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적 신자들은 경건하고 성결하며 선하고 진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형제들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반 교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의 뛰어나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홀로 창조하셨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제물이 되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는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계 5:12).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금은보화도 주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불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따르려는 성도가 때때로 교회 안에서 비방과 핍박을 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금방 얻지 못하지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거나 비방과 핍박을 당할 때 낙심치 말고 주님을 찾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를 찾고 찾으면 그를 만나고 응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 더 사랑할 만한 것, 더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10-16절, 신랑의 아름다움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신랑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가장 사랑해야 할 분이시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엡 5:2), 우리도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희다’는 원어(차크)는 ‘눈부시다, 맑다’는 뜻이다(BDB, KB). 그것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붉다’는 말은 그의 건강하심 즉 그가 쇠하지 않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다. 그는 아무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두 번이나 그의 무죄하심을 증거한다(히 4:15; 요일 3:5).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하였고(고후 5:21), 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고 증거하였다(벧전 2:22).

또 예수께서는 항상 건강하시고 약하지 않으신다. 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25). 그는 약함이 없는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다(계 1:17-18). 히브리서 13:8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했다.

그는 만 사람에 뛰어나신다.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시며(빌 2:6-11) 만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16) 그 분과 비교할 자는 아무도 없다.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11절부터 16절까지에서, 신부는 신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고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신부는 신랑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한다. 정금은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낸다. 만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는 가장 귀하며 금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시다(계 14:14).

또 신부는 신랑의 머리털이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다고 말한다. ‘고불고불하다’는 원어(탈탈림)는 ‘흔들리는 야자나무 가지들’을 뜻한다(BDB).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원기왕성함을 뜻한다. 사람이 젊고 건강하면 머리털이 많고 새까맣지만, 노약해지면 머리털이 적고 희어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월이 흐른다고 쇠약해지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신 생명의 주님이시다.

[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신부는 신랑의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으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순결함의 상징이다(마 3:16; 10:16). 그것은 짐승의 사체(死體)를 먹는 까마귀가 불결함을 상징하는 것과 대조된다. 더욱이 시냇가의 비둘기는 시냇물에 씻은 것처럼 깨끗함을 나타낸다. 신부는 그것이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거룩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13절]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돋운 화단]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향기로운 풀들과 나무들이 있는 꽃밭과 화단은 아름다운 풀과 꽃 때문에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향기롭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다운 주님이시며 그의 인격은 참으로 향기롭다. 주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히브리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증거하였다(히 7:26).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벧전 1:18-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으시다.

또 신랑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듯이 은혜로운 말씀이 가득하시다. 누가는,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증거했다(눅 4:22). 또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고(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다(요 1:16-17).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신부는 신랑의 손이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말한다. ‘황금 노리개’라는 원어(갈릴)는 ‘원통 막대, 혹은 막대기’라는 뜻이다(BDB). 옛날 영어성경은 ‘반지(ring)’라고 번역했고(KJV)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막대기(rod)’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손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지체이며, 특히 무엇을 나누어줄 때 꼭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은혜와 능력의 손이다. 그는 그 손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손이 황옥에 물린 황금 원통 막대와 같다는 것은 그의 행하시는 일들과 은혜를 나누어주심이 부요하고 순수하고 존귀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에베소서 4:7, 11,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몸이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다고 말한다. ‘몸’이라는 원어(메에)는 ‘창자, 배, 몸’ 등의 뜻을 가진다. 특히 ‘창자’라는 뜻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상징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아름답고 지극히 존귀한 몸이며 특히 그의 마음에 가득한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15-16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대리석] 기둥 같고 형상[모습]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신부는 신랑의 다리가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다리는 몸을 이동하고 지탱하는 지체이다.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어디든지 잘 다닐 수 있고 높은 계단도 잘 올라가며 또 오랫동안 서 있어도 피곤치 않는다. 그러나 다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어디 다니기도 힘들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처럼 아름답고 튼튼하시다. 그는 많은 죄인의 죄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요 1:29). 그는 솔로몬 성전 앞 낭실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왕상 7:21-22) 그의 나라와 교회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악한 세력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견고히 서 있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모습이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아름답고 크고 위엄 있음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주 예수님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시고 그의 모습을 본 사도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졌었다(계 1:17).

또 신부는 신랑의 입이 심히 달다고 말한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그의 입이 심히 달다는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심히 은혜스럽다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성도들에게 심히 은혜가 된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부는 신랑의 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신랑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러하시다. 그는 조금도 흠과 점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지극히 사랑하며 기뻐해야 한다(벧전 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희고 머리는 정금 같으시며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우유로 씻은 듯이 아름답고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으시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우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를 따라 항상 거룩하고 선하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하고 또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해야 하고 결코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붉고 머리털이 검으시며 그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으시다.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시고 쇠하지 않으시고 튼튼하게 행하신다. 우리는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받아 늘 힘있게 그를 믿고 따라가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입술이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입의 말씀은 심히 달다. 그는 오늘날도 성경말씀 안에서 성령의 감동 속에 풍성한 은혜의 말씀, 꿀같이 단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그 말씀을 늘 사모하며 받아 누리고 전해야 한다.

 

6장: 신랑의 사모함

1-7절, 서로에게 속함

[1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부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돌이켰는지 그와 함께 그를 찾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며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며 그의 사랑과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2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신부는 신랑이 어디 있는지 알았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다고 말한다. ‘자기 동산’은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참된 성도들 안에, 또 그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 계신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향기로운 꽃밭’은 참 성도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셨고(요 15:8)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갈 5:22-23). 주께서는 ‘동산들’(원문)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시며 백합화를 꺾으신다. 그는 양들을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시 23:1-2). 또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참 성도를 만드시고 그들에게서 선한 열매들 즉 변화된 인격과 행위의 열매들을 거두신다.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2:16에서 신부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때는 ‘내’가 중심이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그’가 중심인 것 같다. 신부는 자신이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에게 속하였다고 먼저 말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소속된다.

그런 종류의 소속과 소유는 완전한 연합을 나타낸다. 사랑은 완전한 연합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랑으로 연합되었다. 주께서는 우리를 피로 사셨고(행 20:28; 계 5:9),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핏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19-20). 신약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롬 1:6).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 되었다(엡 1:22-23). 우리는 견고한 믿음과 순종으로써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요 15:4-5). 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롬 14:7-8).

주께서는 백합화들 가운데서, 즉 선한 인격과 행위의 열매를 맺는 참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 가운데서 의의 말씀으로 교훈하시며 그들을 양육하신다. 만일 그들이 악을 행하면 주께서는 그들을 멀리하실 것이다(시 5: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악을 떠난 요셉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그와 동행하시고 그를 형통케 하셨듯이 오늘날도 그를 의지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들과 함께하신다.

[4절]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증거한다. 디르사는 후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정도로(왕상 15:33; 16:8, 23) 아름다운 도시이었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 왕의 궁궐이 있었던 도시이다. 시편 48:2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라고 말한다.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선하고 아름다운 행실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신랑은 신부의 엄위함도 증거한다. 그는 신부가 전쟁터에서 기를 높이 들고 전진하는 군대 같다고 묘사한다. 주의 교회는 과연 군대와 같다. 교회가 높이 들고 전진하는 깃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이다. 옛날부터 성도들은 마귀와 죄와 세상과 싸워왔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교회의 목사들과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성경은 에바브로디도나 아킵보를 바울 일행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들이라고 부른다(빌 2:25; 몬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딤후 2:3-4).

[5-7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라카)[관자놀이, temples]은 석류 한쪽 같구나.

5-7절의 말씀은 4:1-5의 말씀과 비슷하다. 신랑은 신부에게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다. 신부의 아름답고 엄위하기까지 한 모습에 압도되기 때문에, 신랑은 그에게 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아가 4:9에서 신랑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말했었다. ‘눈’은 회중의 인도자를 상징하기도 하고 회중의 마음의 의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께서는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너무 기뻐하신다.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혹은 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떼 같은 ‘머리털’은 신부의 가지런하고 단정한 긴 머리털을 묘사한 듯하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은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가르치고 회중은 그 말씀을 잘 받고 그것을 묵상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 같다. 석류 한쪽 같은 너울 속의 ‘뺨’은 겸손함과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애통하는 회중의 모습을 상징할 것이다. 이것은 다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5장에서 말한 대로 신부가 게을러 더디 응답함으로 신랑을 놓쳤으나 신랑은 여전히 신부를 이처럼 사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자들이지만,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영생으로 인도하신다(요 6:39; 10:28; 13:1).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는 향기로운 꽃밭 같고 하나님 앞에서 디르사와 예루살렘같이 곱고 아름다운 교회이다.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성도들의 교회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고 예쁘게 보신다.

둘째로, 주님과 우리는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주 안에 속하였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속하셨다.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에게 속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들이다.

셋째로, 교회는 기를 든 엄위한 군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전쟁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씩씩하게 싸워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아름다운 동산, 향기로운 꽃밭같이 참된 믿음과 회개, 거룩과 말씀 순종으로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간직해야 한다.

 

8-14절, 신랑의 사모함

[8-9절] 왕후가 60이요 비빈(妃嬪)[빈첩]이 80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바르)[순결한](NASB)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들]와 비빈[빈첩]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솔로몬 왕은 왕후가 700명이요 빈첩이 300명이었지만(왕상 11:3), 아가서를 쓸 당시에는 왕후가 60명이요 빈첩이 80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13절에 그 여자를 ‘술람미 여자’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술람미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나라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속하셨고 거룩한 교회를 만드시기로 뜻하셨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신부는 그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순결한 자라고 묘사된다.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다. 요한계시록 14:4-5는 땅에서 구원 얻은 14만 4천명으로 상징된 자들에 대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증거하였다.

[10절]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신부는 아침빛 같다고 표현된다. 아침빛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될 때 동녘에서 밝아오는 빛이다. 교회는 아침빛과 같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이 가득한 어두움의 세상이지만, 구원은 어두움의 세상에 비취는 빛과 같다. 교회는 빛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했다(엡 5:8).

신부는 또 달같이 아름답다고 표현된다. 밤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아름답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달과 같다. 물론 달은 일시적으로 그 일부가 가리워지다가 다시 회복되곤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족과 연약이 있지만 천국에서 그 영광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신부는 또 해같이 맑다고 표현된다. ‘맑다’는 원어(바르)는 9절에서도 나온 말로서 ‘순결하다’는 뜻이다. 해는 달과 달리 빛이 충만하여 사람이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흠과 점이 없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이다(엡 5:27). 지금은 법적으로만 그러하고 실제적으로는 부족과 연약이 없지 않지만, 장차 천국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부는 또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다고 표현된다. 이것은 4절에도 나온 표현이다.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와 마귀와 세상과 싸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어려운 시대가 왔으나,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딤후 4:3-5; 계 2:10).

[11-12절]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본절은 신랑의 말로 생각된다.2) 골짜기는 평지가 아니고 낮은 곳이다. 그것은 평안하지 않은 곳 즉 고난으로 인해 겸비해진 환경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낮은 곳에는 흔히 물이 넉넉하듯이 고난 중에 겸비해진 심령에는 선한 인격의 순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푸른 초목이나 포도나무 순이나 석류나무 꽃 등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여러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다. 아직 초보적인 상태에서부터 상당히 성장한 상태까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는 다양하다.

신랑은 자신이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호도는 겉에는 딱딱하고 볼품 없는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고소하고 맛이 좋고 향기도 있다. 성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고 그의 인품과 내면적 덕성은 맛과 향을 가진다. 진실한 성도들은 다 그러하다.

12절은 다시 번역하면, “부지중에 내 영혼은 나를 암미나딥(혹은 나의 존귀한 백성)의 수레들처럼 되게 하였구나”이다(KJV). 암미나딥은 아마도 잘 알려진 수레 운전자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로 신속히 달려오심을 묘사하는 것 같다. 우리가 주를 멀리하고 죄 가운데 머물면 주께서 얼마 동안 얼굴을 감추시지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를 앙망하고 의지하고 사모하면 주께서는 잘 달리는 수레들처럼 신속히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친구들은 신부를 향한 신랑의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돌아오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술람미 여자라는 히브리어는 솔로몬의 아내라는 뜻을 가진 말인 것 같다. 마치 길이 엇갈린 두 사람처럼 신랑과 신부는 지금 서로 길이 엇갈려 있다. 신부가 신랑을 찾았을 때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신랑이 신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신자들에게 적절하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신다.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마하나임은 ‘두 군대’라는 뜻인데, 옛날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다가 천사들을 만났던 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 말이다(창 32:2). 그때 그가 마하나임, 즉 ‘두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자기 가족들을 두고 표현한 것 같다.

본문은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술람미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고, 교회는 마하나임에 비교할 수 있다.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지만, 땅 위의 성도들과 천상의 성도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다. 신앙의 선진들은 땅 위의 성도들을 ‘싸우는 교회’라고 불렀고 하늘에 있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을 ‘승리한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의 모습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과 같다. 춤은 전쟁에 승리했거나 매우 기쁠 때 추는 것이다. 천상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상의 교회도 대장 되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귀와 죄와 사망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며 그로 인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춤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의롭다고 하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되었으므로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들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 사랑의 주께서는 우리를 보시기 위해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지금 우리의 신앙인격은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포도나무나 석류나무의 순인가, 꽃인가, 열매인가? 우리는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 빠진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불경건과 의심, 온갖 죄악들과 불결의 죄를 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주 안에 순종하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7장: 신부의 아름다움

1-6절, 신부의 아름다움

[1절]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넓적다리의 곡선은]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7장 전반부는 계속 신랑의 말로서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는 신부를 ‘귀한 자의 딸’이라고 부른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자의 딸,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신랑은 첫째로 신을 신은 신부의 발을 심히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옛 시대에 신은 자유인의 신분을 나타낸다. 종은 맨발로 생활하였고 자유인만 신을 신었다(눅 15:22). 성도는 신을 신은 자와 같다. 그는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다. 발은 사람의 행위를 상징한다. 죄에 종노릇하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의와 선을 행하는 성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아름답다. 특히 성도가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전도의 발걸음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다(롬 10:15).

신랑은 또 신부의 넓적다리의 곡선을 공교한 장인의 만든 보석들 같다고 표현한다. 사람의 넓적다리는 걸음을 걷는 데 아주 중요하다. 넓적다리의 관절(고관절)이 어긋나면 다리를 절뚝거리게 된다. 사람은 선하고 바르게 걷는 걸음이 튼튼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단정하고 선하고 바르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히 12:13).

[2-3절]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혹은 배]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신랑은 신부의 배꼽을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과 같다고 표현한다. 사람의 배꼽은 어머니에게 연결되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탯줄은 생명줄이었다. 그 줄을 통해 태아(胎兒)는 어머니를 통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다. 성도들의 배꼽, 즉 탯줄의 흔적은 회개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요 3:3, 5), 성도에게 있어서, 성령의 중생케 하신 은혜의 증거는 참된 회개와 믿음이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적이 없다면 그는 중생의 표가 없는 자, 즉 배꼽 없는 자와 같다. 그러나 그가 죄를 버리고 주를 믿었다면 그는 중생의 표를 가진 참 신자이다.

신랑은 또 신부의 허리 혹은 배가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다고 말한다. 밀단은 둥글고 통통할 것이다. 그것은 아기를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여성의 가장 고귀한 기능은 아기를 출산하는 데 있다. 신부의 허리 혹은 배를 ‘백합화로 두른 밀단’이라고 묘사한 것은 신약교회가 많은 생명들을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며 그 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사역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 같다.

또 신부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고 묘사된다. 유방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는 어린 신자를 양육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목사들의 일차적 임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고 경계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인격을 온전케 하는 일이다. 모든 성도는 어느 정도 비슷한 의무를 가진다.

[4절]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또 신부의 목은 상아 망대 같다고 묘사된다. 4:4에서는 신부의 목이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다윗의 망대 같다’고 묘사되었었다. 목은 머리와 몸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도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도의 믿음은 생명과 같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과 연결되지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다. 또 성도의 믿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방편이요(롬 3:28) 세상을 이기는 힘이요(요일 5:4-5)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방패와 피난처가 된다(엡 6:16). 그러므로 성도의 견고한 믿음은 상아 망대 같다.

신랑은 또한 신부의 눈이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다고 묘사한다. 4:1에서는 신부의 눈을 비둘기 같다고 묘사했었다. 그것은 그의 순결함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본문은 그것이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다고 말한다. 헤스본은 요단 동편에 있는 도시로 옛날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나라의 수도이었다.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은 아마 맑고 잔잔하고 물이 풍부한 못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함과 통찰력을 상징할 것이다.

신랑은 또한 신부의 코가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다고 묘사한다. 다메섹은 북방 아람 나라의 수도이었다.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는 이스라엘 북쪽 국경지역에 세워진 망대로 이방나라의 움직임을 살피는 망대이었을 것이다. 신부의 코를 그것에 비유한 것은, 코가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분별하듯이, 참된 교회가 선과 악을 분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함을 나타내는 것 같다.

[5절]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신랑은 또한 신부의 머리가 갈멜산 같다고 말한다. 머리는 생각과 정신을 가리키고 갈멜산 같다는 말은 뛰어나게 드러나며 비옥하고 초목이 무성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은 교회 혹은 성도들의 생각과 정신이 뛰어나게 드러나며 성경의 바른 지식과 기타 성령의 은사들로 가득하며 아름답게 단장됨을 상징하는 것 같다.

또 신랑은 신부의 머리털이 자주빛이 있다고 말한다. 4:1에서 신랑은 신부의 머리털이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다”고 말했었다. 이 표현은 신부의 가지런하고 단정한 머리털을 묘사한 것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문은 그 머리털이 자주빛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신부의 머리털의 존귀한 모습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자주빛은 옛부터 왕들과 부자들이 사용했던 색깔이었다. 또 왕은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다고 말한다. 즉 신랑은 신부의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마음이 사로잡히었다.

[6절]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그것이 그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교회를 아름답게 여기신다. 물론 교회의 아름다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 법적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흠이 없는 아름다운 교회로 단장되어 간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는 참된 교회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스바냐 3:17은,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신고 바르고 단정하게 의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중생의 표인 배꼽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잃은 영혼을 구원하는 배와 어린 신자를 양육하는 일을 잘 수행하는 유방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견고한 믿음의 목을 가져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며 의심치 않았던 아브라함처럼(롬 4:17-21)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또 순결하고 통찰력 있는 눈과,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는 날카로운 코를 가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머리의 생각과 정신이 성경의 모든 진리로 바르고 뛰어나고 풍성케 되고 또 우리 모두가 주 앞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무리가 됨으로써 존귀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7-13절, 선한 열매, 소속, 교제

[7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키가 종려나무 같다고 말한다. 종려나무는 줄기가 곧고 잎사귀가 항상 푸르고 무성한 나무이며 그 가지는 기쁨과 승리의 상징물로 사용된다(계 7:9). 성도들은 항상 곧게 하나님만 바라야 하며 교회는 많은 고난과 핍박 중에도 쇠잔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성장하며 확장된다. 교회는 승리자들의 모임이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하였고(롬 8:35, 37), 또 그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하였다(고후 2:14).

또 신랑은 신부의 유방이 열매 송이, 즉 종려 열매나 다음절에 말한 포도송이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교회가 성숙하여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기능을 잘 수행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8절]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신랑은 종려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를 잡으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열매를 따기 위함일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교회와 밀접히 교제하시고 성도들의 열매를 기뻐하시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또 신랑은 신부의 유방이 포도송이 같고 그 콧김이 사과 냄새 같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교회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기뻐하신다. 또 그는 교회와의 교제 속에서 성도들이 가진 새 생명의 신선한 숨결을 느끼시며 그것을 사과 냄새같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9절]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같도다].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메솨림)[부드럽게](NASB) 흘러내려서 자는 자[자는 자들]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움직이게 한다’는 원어(다밥)는 ‘부드럽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설명한 사전도 있고(BDB) ‘말하게 한다’는 뜻으로 설명한 것도 있으나(KJV, Langenscheidt), 입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말하게 하는 것이므로 본문에서는 뜻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고대의 여러 역본들은 “입술과 이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도다”라고 번역하였다.3)

본문은 신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좋은 포도주 같고 신랑을 위해 부드럽게 흘러내릴 뿐 아니라, 잠자는 자들의 입으로 움직여 말하게 한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좋은 말들을 묘사하는 것 같다. 성도의 좋은 말은 바른 신앙고백의 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말, 주께 헌신을 다짐하는 말, 거룩하고 선한 말이다. 에베소서 4장은 우리가 더러운 말을 입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선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가르치며(엡 4:29),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상스러운 농담도 버리고 감사하는 말을 하고 항상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가르친다(엡 5:4, 19-20). 히브리서 13장은 우리의 찬미의 제사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말한다(히 13:15).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우리가 피차 권면하고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살전 5:11, 14).

[10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신부의 이 고백은 자신의 소속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오직 신랑에게 소속시킨다. 그 자신은 없고 오직 신랑만 있다. 아가서는 세 번 이런 고백을 기록한다. 2:16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말하며 아직 ‘내’가 강조되고 있고, 6:3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말하는데 거기에서는 ‘나’보다 ‘그’가 강조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라고만 말함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그에게 소속시킨다고 보인다.

‘성도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은 그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따라서 자신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목표이시며 기준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 중심으로 살 자들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자들이다.

또 분문은 주께서 우리를 사모하신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다. 그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사랑에 합당하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투는 대신에 화목하며, 조급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이기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며, 죄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며, 악하지 않고 선하며,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원수를 갚지 않고 용서하며, 세상을 사랑치 않고 경건하게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우리를 더 사랑하실 것이다.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신부는 신랑에게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 유숙하자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떠나 신랑과 조용하고 친밀한 교제를 원하는 것이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듯이(막 1:35), 우리도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 즉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교제를 힘써야 한다.

[12절] 우리가 일찌기[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신부는 이전에 주님을 따르기를 주저하고 지체하기도 하였으나, 이제 그는 게으르거나 주저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부지런하다. 그는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기를 원한다. 포도원은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또 포도 움이나 꽃술이나 석류 꽃은 성도들의 신앙의 성장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신부는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주리라고 말한다. 성도들의 신앙의 성장과 선한 행위들은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표가 될 것이다.

[13절] 합환채(두다임)(mandrake, 흰독말풀)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신부는 합환채(흰독말풀)가 향기를 토한다고 표현한다. 합환채는 향기가 좋은 꽃이다. 그것은 신부가 신랑에게 주는 사랑의 꽃이다. 또 신부는 신랑을 위하여 문 앞에 각양 귀한 실과들, 곧 새것과 묵은 것을 구비하여 쌓아두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성도들의 신앙 인격의 열매들, 즉 선행들이요 목회의 열매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종려나무같이 튼튼해져야 하고 또 어린 신자들을 권면하고 잘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하나님만 바라고 강건해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포도주 같은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 사랑과 헌신의 고백, 거룩하고 선한 말, 감사와 찬송의 말, 권면과 위로의 말을 해야 하고 신앙의 잠을 자던 자들의 심령을 깨워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기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사모함을 받는 자답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함과 깊은 기도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와 친밀히 교제하기를 힘써야 하고 신앙의 성장과 선행들로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8장: 사랑은 죽음같이 강함

1-7절, 사랑은 죽음같이 강함

[1절]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라는 표현은 어릴 때부터 한 가정에서 같은 부모 밑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형제 관계를 말한다. 그런 관계의 형제는 가족의 정이 깊고 두터울 것이다.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과 그런 관계였다면, 그가 밖에서 그를 만나 입을 맞추어도 그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다. 신부가 신랑에 대해 그렇게 표현한 것은 신랑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사모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는 시골 처녀였고,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이었다. 술람미 여자가 감히 왕인 솔로몬에게 접근하여 입을 맞추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를 자기 처지와 분수를 모르는 자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며,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자유로이 접근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도 비슷하다. 주 예수께서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비천한 인생이요 죄인이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주님과 교제하며 주의 사랑을 입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며 우리와 친근히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요 20:17; 롬 8:29; 히 2:11).

[2절]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본절 전반부는 영어성경들처럼 “내가 너를 이끌어 나를 교훈한 내 어미 집에 들였으리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NASB, NIV). ‘나를 교훈한 내 어미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갈라디아서 4:26, “위에 있는 예루살렘[신약교회]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출산하며 교훈하며 양육한다. 신부는 신랑을 이끌어 그를 교훈한 어머니의 집과 같은 교회 안으로 가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교회에 있다. 세상에 복잡한 많은 일들이 있어도, 주님의 마음과 눈길은 그 무엇보다 교회의 일들에 있다. 그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신부는 그의 어미의 집에서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로 신랑에게 마시울 것이라고 말한다.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은 그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음료수를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신랑을 위한 신부의 최선의 봉사와 섬김을 가리킬 것이다.

신명기 6:5는 우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으로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깨닫는 자마다 그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 할 것이다.

주님의 귀하신 인격과 사랑을 깨달은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그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요 12:3). 그가 부은 향유는 가격이 300데나리온 즉 오늘날 우리 돈으로 약 3천만원의 가치이었다.

[3-4절]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 2:6-7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손’은 주의 사랑과 배려와 보호를 가리킬 것이다. 보통 ‘왼손’은 약한 손, ‘오른손’은 힘있는 손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은밀하게 섭리하기도 하시고 드러나게 섭리하기도 하신다. 성도들은 주의 사랑과 섭리의 손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보호함을 받는다.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증거했고(신 33:27),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23:4).

주 예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28),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말하였고(롬 8:35), 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라고 말하였다(살후 3:16).

4절은, 본서의 앞부분의 구절들에서와 같이(2:7; 3:5), 신랑의 말이라고 보인다(NASB). 신랑은 친구들에게 잠든 신부를 흔들거나 깨우지 말라고 말한다. 신랑은 신부의 사랑스러운 잠든 모습이 유지되도록, 신부가 혹시 잠에서 깨면 싫증이나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5절]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해산의 고통을 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신부는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로 묘사된다. 거친 들은 나무 그늘이나 샘이 없고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가 있고 사나운 짐승들이 있는 곳이다. 그것은 고난의 세상을 상징한 듯하다. 이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많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세상에서 ‘그 사랑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구원을 얻었고 지금도 그를 의지하며 산다.

본절 후반부는 신랑의 말(NASB, Poole)이라기보다 신부의 말(NIV, JFB)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네 어미,’ ‘너를 낳은,’ ‘너를 깨웠노라’는 말들의 ‘네’ 혹은 ‘너’라는 말이 원문에서 남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신부가 신랑에 대해 하는 말이라고 본다.

본문은 사과나무 아래서 그의 어미가 그를 낳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하였다고 묘사한다. 여기의 ‘그의 어미’는 구약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사과나무는 아가 2:3에서 신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구약교회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약속된(창 3:15)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사모하여왔고 마침내 때가 되어 그가 오셨다(요 1:14). 구약교회는 큰 고통 중에 약속된 메시야를 낳은 것과 같았다.

신부는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 신랑을 깨웠다고 말한다. 그는 신랑과의 교제를 사과나무 열매를 먹는 것으로 비유하였었다(2:3). 그가 신랑을 깨웠다는 말은 기도로 그의 위로와 도움을 구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주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큰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처럼(막 4:38), 성도는 주께 기도하며 그의 도움과 위로를 구한다.

[6-7절] 너는 나를 인(印)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圖章)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무덤]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家産)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것은 신부의 소원과 고백이다. 도장은 사람에게 귀중한 것이다. 신부는 신랑이 자신을 도장같이 마음에 혹은 팔 혹은 손가락에 가장 귀중하게 간직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이 부자도 권세자도 지혜자도 다 이기듯이, 사랑은 그렇게 강하다. ‘투기’는 뜨거운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성격상 소유욕을 가지며 질투는 그것의 한 단면이다. 뜨거운 사랑은 무덤같이 모든 것을 삼키며 불같이 모든 것을 태우며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전 13:7).

신부는 사랑의 강인함과 가치에 대해 계속 말한다.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한다고 말한다. 많은 물과 홍수는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 그 사랑은 온 가산(家産)을 주고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 사랑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또 그 사랑을 깨닫고 응답하는 성도들의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죽음까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고(고후 5:15),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 우리를 형제같이 여기심을 감사하며 우리는 담대히 그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히 4:16).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능력과 사랑의 손으로 우리를 항상 지키시고 품으시며 때마다 일마다 평안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친 들 같은 이 세상에서 구주 예수님만 의지하고, 또 많은 고난 중에서도 구주 예수님의 도움과 위로를 구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특히 주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우리를 인같이 마음에 품으셨고 도장같이 팔에 두셨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사랑을 본받아 그를 사랑하며 그를 따라가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일에 힘써야 한다.

 

8-14절, 포도원 같은 교회

[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본절은 친구들의 말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오래된 신자들이 볼 때 초신자이거나,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볼 때 장차 교회에 편입될 이방인들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그는 어리며 결혼할 만큼 성숙되지 못하다. 그는 자녀를 출산하거나 양육할 만하지 못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초청받을 때 오래된 신자들 혹은 유대인들의 교회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나오는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눅 15:1-2). 유대인들의 교회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원망하고 불평할 것인가? 오래된 신자들은 불신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올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들은 그에 대해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도리어 그를 기뻐하고 사랑하고 영접하고 그를 위로 격려하며 그의 약한 믿음을 북돋우어 주어야 할 것이다.

[9절]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티라)[흉벽=톱니자국 난간)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초신자가 굳게 믿었다 할지라도 마귀의 시험과 공격이 예상되므로 성벽에 은 망대를 세우듯이 그를 영적으로 더욱 견고케 해야 할 것이며 마귀와 악한 자들이 그의 마음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의 마음 문을 백향목 판자로 튼튼하고 견고하게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먼저 믿은 자들, 오래된 신자들이 힘써야 할 의무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히 3:13)고 말하고, 또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4).

[10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솰롬)[평안]을 얻은 자 같구나.

본절은 신부의 말이라고 본다. 신부는 교회를 상징할 것이다. 신부는 자신을 성벽이라고 표현한다. 성벽은 도시를 원수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는 벽이다. 옛날의 도시들 중에는 성벽 있는 도시도 있고 성벽 없는 도시도 있었다. 성벽으로 묘사된 교회는 견고한 교회이다. 그것은 확실한 지식과 굳센 믿음과 견고한 소망을 가진 교회이다.

신부는 또 그의 유방이 망대 같다고 표현한다. 신부의 유방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들, 즉 어린 신자들을 교훈하고 양육하는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신부의 우뚝솟은 유방은 망대에 비유되었다. 망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고 분별하여 대처하는 용도로 쓰이는 곳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목사들은 굳건한 믿음과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양들을 교훈하며 지키며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신부는 이제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평안을 얻은 자와 같구나”라고 고백한다. 주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평안을 풍성히 주신다. 이사야 26:1-3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신실함]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요 14:27).

[11절]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1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신부는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큰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맡기고 그들로 그 실과를 인해 은 1천을 바치게 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7:23은 포도나무 1주에 은 1개씩의 가치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그의 포도원은 포도나무가 1천 주나 되는 포도원일 것이다. 그의 포도원은 크고 거기서 일하는 농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솔로몬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본다. 교회는 큰 포도원과 같고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께 풍성한 실과를 바쳐야 한다.

[12절] 솔로몬 너는 1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2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신부는 솔로몬이 1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들이 2백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과 지키는 자들 혹은 포도원 농부들은 교회의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풍성한 선한 열매들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은 1천 개로 표현된다. 그러나 포도원의 농부들에게도 은 2백이 돌아간다고 표현된다. 그것은 교회의 일꾼된 주의 종들에게 주어질 상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했다(고전 3:8).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라는 말은 신랑의 말일 것이다(매튜 풀, 매튜 헨리, 박윤선). 교회는 주 예수께서 친히 피흘려 사신 그의 특별한 소유이며 영원토록 그러하고(행 20:28; 요 10:28) 밤낮 또 세상 끝날까지 그의 보호와 돌보심을 얻을 것이다(사 27:3; 마 28:20). 주 예수께서는 오른손으로 일곱 별[교회의 목사들]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교회들] 사이로 다니신다(계 2:1).

[13절] 너 동산(간님)[동산들]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본문은 신랑의 말이다. 신랑은 신부를 ‘동산들에 거한 자’라고 표현한다. 신부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의 황량한 들판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구원함을 얻은 자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그러므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곳,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지키시고 돌보시는 곳, 즉 하나님의 동산과 같다. 교회들은 하나님의 포도원 동산들과 같다. ‘동산들’이라는 복수명사는 많은 개체 교회들, 즉 각 지역의 회중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는 하나님의 동산들이 많이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

신랑은 친구들이 신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한다. 친구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시 34:7) 또 모든 천사들은 봉사하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신 자들이라고 말한다(히 1:14). 그들은 성도들이 주께 올리는 찬송과 기도의 소리들을 듣고 기뻐한다.

이제 신랑은 신부의 목소리를 듣기 원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우리의 진심의 예배를 원하신다(요 4:23). 그는 우리의 찬송을 원하신다(히 13:15). 그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기도의 목소리, 복음 전파의 목소리를 기뻐하신다. 그는 우리의 회개의 기도를 원하신다(시 51:17).

[14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본문은 신부의 말이다. 신랑은 신부의 ‘사랑하는 자’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세 번이나 그 질문을 반복하셨고, 베드로는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였다(요 21:15-17).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이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 어린 사슴같이 빨리 달려오기를 원한다. 아가 2:17에서 신부는 베데르 산을 말했었는데, 그것은 고난의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아가 4:6에서 신랑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 말한 향기로운 산들과 같이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께 올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와 선한 행실들의 향기로운 제물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신약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

신부는 사랑스런 신랑을 노루와 어린 사슴에 비유한다. 아가 2:9, 17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노루와 어린 사슴은 그 짐승들의 예민하고 민첩함과 순진함을 나타낸다고 본다. 신랑은 온순한 인격자이시며 민첩하게 오실 수 있는 자로 묘사된다.

신부는 신랑이 빨리 달려오기를 원한다. 신랑은 지금 신부를 떠나 있으며 신부는 그를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교회를 떠나 계시며 교회가 그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갈망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이다(딤후 4:8). 주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고(계 22:7, 12, 20) 우리는 그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소망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먼저 믿은 자들은 처음 믿는 자들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벽같이 믿음과 소망을 굳게 갖고 원수 마귀의 궤계와 악한 일들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주 예수께서 친히 소유하시고 보호하시고 관리하시는 포도원과 같고, 우리는 그와 그의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음성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 회개와 신앙고백, 찬송과 기도, 전도의 목소리를 올려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고전 15:22; 롬 14:7-8) 또 그의 재림을 사모해야 한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는 진실로 다시 오실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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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날이 샘’ ‘아침의 시작’이라고 번역됨(KJV, ASV, NIV). Harris, Archer, &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II, 719.

2) Matthew Poole, 박윤선, NASB, NIV 등이 그렇게 본다. 그러나 ASVJamieson-Fausset-Brown 주석 등은 신부의 말로 본다.

3) LXX, Aquila, Vg, Syr. 오늘날 NIV 영어성경은 이 번역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