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강해
2023년 3월 30일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고 보인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서론 데살로니가후서의 저자도 사도 바울이다(1:1; 3:17). 디다케는 본서를 인용하였고 터툴리안도 본서를 사도의 서신으로 인용했다. 이레니우스는 본서를 처음으로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언급하였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51년경일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나타난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태가 비슷하고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살후 1:1) 등을 고려할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지 몇 달이 되기 전에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의 특징적 주제도 데살로니가전서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본 서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많이 증거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재림의 엄위성. 2장, 재림의 징조. 3장, 재림 신앙의 균형. 본서는 주께서 엄위한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하고, 특히 재림의 징조로 ① 배교(apostasy, 교회의 전체적 변절)와 ② 불법의 사람(독재적 국가 혹은 인물)의 나타남을 든다. 본서는 마지막으로 재림 신앙과 소망을 가진 자들이 치우치지 말고 일상생활에도 충실해야 함을 교훈한다.
1장: 재림의 엄위성 1-4절, 사도 바울의 기원과 감사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이다(행 15:22).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시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만난 제자로서 그의 동역자가 되었다(행 16:1-3; 17:14; 18:5; 19:22; 20:4).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시 설립되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세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하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2, 3절). 그들의 전도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사도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4절).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창조자의 의미이다. 이사야 64: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둘째는 구원자의 의미이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사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셋째는 보호자와 양육자와 공급자의 의미이다.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이고 또 성도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도 보인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한 가족이며 식구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께 사용된 ‘주’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의미로 약 667회 사용되었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명칭은 헬라어 70인역에서 퀴리오스[‘주’]라고 번역되었다. ‘주’라는 단어는 온 세상의 주인, 왕, 통치자, 즉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크신 하나님’(딛 2:10)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구원이 연합의 관계임을 나타낸다. 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하였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과 분리되었지만, 구원은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존귀한 특권이며 놀라운 행복이다. [2절] 하나님 [우리](전통본문)1)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매번 나오는 의미심장한 기도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뿐 아니라, 계속적 용서와 성화와 위로와 새 힘을 주시는 것을 포함한다. ‘평안’은 죄사함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을 비롯하여,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및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기 때문이었다. ‘더욱 자란다’는 원어(휘페르아욱사노)는 ‘크게 자란다’는 뜻이다(KJV, NASB).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또 성경말씀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단지 어떤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적 지식과 인격적 신뢰이다. 그 교리적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다(마 13장). 땅에 심긴 씨는 싹을 내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받은 말씀과 믿음도 자란다. 어린 나무는 강한 바람을 견디기에 힘들지만, 다 자란 나무는 강한 바람도 잘 견디어 낸다. 그것은 깊이 내린 뿌리와 굵어진 나무 둥치와 가지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도 성경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려 견고한 지식을 가지고 순종으로 단련되면 어려운 시험과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믿음이 된다.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성전 건립 혹은 교회 건립의 비유로도 표현된다. 성전의 건립은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슥 4:6).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물론 인간편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의 견고한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눅 1:1-4; 롬 10:17; 딤후 3:14). 두 번째 감사 이유는 그들의 사랑의 풍성함 때문이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풍성하게 실천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거룩한 교제와 서로를 돌아보는 수고를 통해 표현된다. 사랑하려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또 사랑은 수고를 동반한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였다(행 2:44-45). 구제는 형제 사랑의 구체적 행위이다. [4절] 그리고(호스테)[그래서]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셋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많은 핍박과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하나님의 교회들 중에서 그들을 자랑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핍박받을 것도 각오해야 한다(딤후 3:12). 환난의 때에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 14:2). 주께서는 우리의 당하는 고난들을 다 보시고 알고 계신다. 또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과 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후 4:17).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운 환난과 핍박을 잘 참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구하며 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크게 자라기를 기도해야 한다.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며 우리편에서도 성경 읽기와 기도, 교회의 공적 모임 참석, 순종 등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간의 사랑이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고 병든 자들을 심방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모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행복에 비하면 잠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의 고난을 잘 견디어야 한다.
5-12절, 주께서 심판자로 재림하심 [5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참은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며 또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표이었다. 성도의 바른 신앙고백과 의롭고 선한 삶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일차적 증거이지만, 그가 핍박과 환난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것들보다도 더 확실하고 귀한 증거가 된다. [6-9절]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2)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로]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롬 2:6-8). 그는 성도들을 학대한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고 학대받은 성도들에게는 위로와 안식을 주실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의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시며(막 16:19; 눅 24:51) 거기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주 예수의 재림을 나타내는 단어는 ‘강림’(파루시아)과 ‘나타나심’(아포칼륍시스 혹은 에피파네이아)인데, 본절에서는 ‘나타나심’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말은 ‘불로 형벌을 주시리라’(TR, MT, KJV)는 어귀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심판을 받는 날이다. 우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므로 그 외의 죄들을 짓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요 명철이다(잠 9:10).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고전 1:23; 15:3). 그러나 이 복음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의 벌을 받을 것이다(요 3:16, 36). 재림하시는 주 예수께서는 악인들에게 불로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벧후 3:6-7). 바울은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얼굴과 심판의 능력과 영광으로 악인들을 향하실 것이며,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을 받고 성도들을 부활시킬 그의 힘의 영광을 경험치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 곧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지옥은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장소이다. 마태복음 25:41, 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10절]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자들 가운데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시는 날에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며 찬송할 것이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서 기이히 여김을 받으실 것이다. 주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믿었던(벧전 1:8) 모든 신자들은 재림하시는 주 예수님을 실제로 볼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며, 더욱이, 재림의 주께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우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다’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를 믿었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엡 2:8-9). [11-12절]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5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 전체에 관계된다고 본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공의의 심판이 되어 그런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믿는 성도들에게 재림의 주님을 영광과 찬송과 놀라움 가운데 영접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의 재림이 이런 일들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구원의 확실함을 위해 항상 기도하였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통하여 성도의 표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살전 1:2-4).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믿음의 행위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가 있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곧 구원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일을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기를 기도했다. ‘모든 선을 기뻐함’이라는 원어(파산 유도키안 아가도쉬네스)는 ‘[하나님의] 모든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의미하든지(KJV), ‘선한 것에 대한 [그들의] 모든 소원’(NASB)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기뻐하시는 선한 뜻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그의 뜻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시작하신 이 구원을 능력으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보면, 이 말은 선한 것에 대한 그들의 모든 소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하심이다(엡 2:10; 딛 2:14). ‘믿음의 일’이란 믿음의 행위를 가리킨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참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신 믿음과 구원을 능력으로 온전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선한 것에 대한 모든 소원과 믿음의 행위를 온전케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힘 주심으로 가능하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그들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되기를 기도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큰 구원이며(히 2:3) 완전한 구원이며(히 10:14) 영광스러운 구원이다(롬 8:30).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또한 성도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럽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의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잘 준비해야 한다. 바른 신앙고백과 순종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표이지만,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바른 믿음을 지키며 참고 견디는 것은 그것들보다 더 확실하고 귀한 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 사역을 믿고 성경 교훈대로 바르게 선하게 살아야 하고 환난과 핍박 중에도 잘 참고 견디어야 한다. 둘째로, 주께서 재림하신 후에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벌이 있을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벌, 곧 지옥 불못의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과 지옥 불못의 벌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셋째로, 성도들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이며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성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에 그들은 영광스럽고 완전하게 변화될 것이다.
2장: 재림의 징조 1-8절, 재림 직전의 두 가지 징조 [1-2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그리스도]3)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마음이 쉬 동요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모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30-31절).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계시나, 혹은 자기에게서 받았다 하는 말이나 편지를 통해서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렀다고 마음이 쉬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주의 재림 직전에 징조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도 그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셨었다(마 24장). [3-4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아무도 너희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배도(背道)[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죄](전통본문)4)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하나님처럼](전통본문)5)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 중에 특히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배교(背敎)이며, 둘째는 죄의 사람의 나타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두 가지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르렀다고 마음에 쉽게 동요하거나 당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첫 번째 징조는 배교이다. ‘배교’라는 원어(헤 아포스타시아)는 ‘그 배교’라는 말로서 절정적 배교를 암시한다. 배교(apostasy)는 ‘믿음의 변절 즉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역사상 교회가 믿음에서 떨어진 때가 있었다. 중세시대 천년은 신앙적으로 변절된 시대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 전 교회는 배교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를 배교한 단체라고 보았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개혁,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성경과 복음에 기초한 개신교회가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세계 교회들 속에서 다시 배교(背敎) 곧 믿음의 변절이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백여년이 지난 오늘날, 개신교회는 또다시 배교의 상태에 떨어져 있다. 이것은 교회역사상 없었던 심각한 배교이다. 개신교회 대교단들의 대다수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신성(神性), 기적들, 대속(代贖), 부활, 재림을 부정한다. 세계의 대다수 개신교단들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천주교회와의 화합과 교제와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포용주의적 입장은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지도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분명한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또 하나의 징조는 죄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죄의 사람’은 심히 부도덕한 자를 가리킨다. 그는 죄와 불법으로 가득한 자이다. 그는 결국 멸망할 것이므로 ‘멸망의 아들’로 표현된다. 또 그는 ‘대적하는 자’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복음 진리와 참된 교회들을 대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요한계시록 13장에 예언된 첫 번째 짐승, 곧 하나님을 훼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할 자를 가리킨다고 보인다(계 13:1-7). 그는 악한 정치가나 악한 나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높여 하나님 성전에 하나님처럼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시킬 강력한 독재자나 독재 국가일 것이다. 세계는 다시 한번 인간 숭배의 시대와 강력한 독재 국가의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5-7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불법의 비밀은 이미 활동하였다. ‘불법의 비밀’이라고 표현한 것은, 장차 죄의 사람이 나타나 공공연하게 행할 불법에 비교해 볼 때 아직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불법의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역사상 많은 죄의 사람들이 있었다. 옛날 로마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현대의 히틀러나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도자들이 불법의 활동들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 절정적 인물인 그 죄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본다. 아직 그의 나타남을 막는 자가 있다. 그는 성령이실 것이다. 그는 저 예언된 죄의 사람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고 있으시다.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막는 일을 놓으신다면, 그 죄의 사람, 즉 악한 독재자나 독재적 국가는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8절]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저 불법자가 나타나면 주 예수님의 재림도 있을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강림하여 나타나셔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 불법자를 죽이시고 그를 폐하실 것이다. ‘나타나심’이라는 말은 주의 재림을 묘사하는 말로서 그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실 것을 암시한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듯이, 극심한 배교와 불법의 때 후에 주께서 밝은 빛 가운데 오실 것이다. 장차 개신교회들은 천주교회와 연합할 것 같다. 개신교회의 세계적 협의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로마 천주교회(RCC)와 즐거이 교제하며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때 천주교회 교황은 다시 온 세계교회를 지배하는 자가 될 것이다. 또 온 세계는 강력한 독재자 혹은 독재 국가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마 공산주의 독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 예수께서는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악한 종교지도자나 악한 독재자를 멸하실 것이다(계 19:19-21).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쉬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소망하면서 날마다 평안 중에 충실히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징조들을 기억해야 하며 특히 배교하는 일과 죄의 사람의 나타남을 기억해야 한다. 배교의 징조는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천주교회(RCC)와의 교제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또 죄의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강력한 공산주의 독재자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성도들은 이런 징조들을 주시해야 한다. 셋째로, 재림하시는 주 예수께서는 악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다 죽이시고 폐하실 것이다. 우리는 재림의 징조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하며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9-12절, 사탄의 속임수 [9-10절] 악한 자의(후)[그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불법[죄]의 사람의 활동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죄의 사람의 활동의 근원은 사탄이다. 그는 사탄의 역사(役事)를 따라 올 것이다. 사탄은 악한 천사들 즉 악령들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많은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그를 따라 살았었다.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엡 2:2).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요일 5:19).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용 곧 사탄은 짐승 곧 불법한 자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계 13:1-2). 둘째로, 죄의 사람의 활동 방법은 기적주의와 불의와 속임이다. 그는 우선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행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2-23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24:24에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계시록 13:13, 15는 마지막 때에 사탄이 이적을 행하는 거짓된 종들을 사용할 것을 예언하였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우리는 오늘날 은사주의를 주목하고 그것이 죄의 사람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신비한 은사 체험들을 구하지 말고 성경적 기독교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죄의 사람은 또한 불의와 모든 거짓으로 행할 것이다. 그는 죄악된 일을 담대히 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도덕성과 양심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는 속이는 일에 능숙할 것이다. 그와의 대화에는 진실이 없고 그와의 약속은 헛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도덕성이 없는 이념과 정치인들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공산주의는 하나님과 도덕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과 세상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고 경제적 평등을 위해 먼저 노동자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고 이 사회주의 혁명에 이익이 되면 거짓말도 선이라고 본다. 셋째로, 죄의 사람의 활동 대상은 멸망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구원 얻은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멸망하는 사람들이다. 구원 얻은 자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을 얻고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은 자들이다. 그러나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죄 중에 버려두셔서 그들의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받게 하신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한 적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은 적이 없다. 죄를 회개치 않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할 것이다. 장차 나타날 저 죄의 사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활동할 것이다. 넷째로, 죄의 사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 활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사랑은 복음 진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지만, 멸망하는 자들은 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죄의 사람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11-12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미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하는 자들은 진리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저 죄의 사람에게 속아 거짓된 것을 믿고 따르며 불의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섭리 가운데 허용하실 것이다. 진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곧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복음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이며 성경적 기독교이며 옛신앙이다. 그 개요는 개혁신학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 멸망하는 자들은 성경 진리를 믿지 않고 거짓 것을 믿고 따를 것이다. 거짓 것이란 가짜 기독교, 성경 진리에서 이탈한 기독교, 변질된 기독교, 속화된 기독교, 거짓 기적을 추구하는 은사주의 기독교이다. 오늘날의 적지 않은 교회들은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지키지 않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거나 포용하고, 우상숭배적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심지어 이방종교들을 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히 두렵게도, 이것은 교회들이 구원받은 표를 상실하고 멸망의 표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지켜야 한다. 멸망하는 자들은 또한 불의를 좋아한다. 사상과 윤리는 같이 간다. 진리를 저버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도 타락한다. 불신앙, 배교, 자유주의, 신앙적 변질과 해이 등은 불의, 탐욕, 음행, 포용주의, 타협 등 윤리적 부패와 해이로 나아간다. 그 결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이며 멸망이다. 우리는 오늘 시대의 이런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죄의 사람의 활동들의 근원과 방법과 대상과 이유에 대해 증거한다. 죄의 사람의 활동들은 사탄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그 방법은 거짓된 기적과 불의와 속임이며, 그 대상은 멸망하는 자들이고, 그 이유는 저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거짓된 기독교를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진리를 부정하는 사이비 기독교회들이 많다. 우리는 역사 깊은 이단인 천주교회, 또 특히 19세기 중반에서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각종 이단종파들, 또 20세기 초부터 퍼져나간 배교적 자유주의 신학, 타협적 복음주의, 혼란한 은사주의 등을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은 진리에 대해 충실하지 않다. 그들은 신앙의 선진들이 강조했던 신앙의 근본 교리들을 저버리고 있다.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이 포용되고 은사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것들은 다 말세의 징조들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거짓된 기독교를 배격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한 바른 교리와 바른 윤리이다. 우리는 바른 교리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또 성경적 기독교의 교리들을 잘 정립한 사상 체계인 개혁신학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바로 서야 한다. 바른 믿음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으로 나타나며 또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로 깨어 있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진리들을 다 믿고 개혁신앙을 지키고 또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말세를 사는 참된 성도들의 바른 신앙생활이다.
13-17절, 성경적 교훈을 지키라 [13-14절]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 즉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구원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근원과 그 구원의 방법과 그 구원의 목표에 대해 증거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원을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즉 태초에, 창세 전에(엡 1:4) 우리를 택하셨다. 선택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행위이다. 로마서 9:16, “[선택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았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3:5). 사도 바울은 디도서 3:4-5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했다. 구원(중생)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이다. 그러나 인간편에서 구원은 진리 곧 ‘구원의 복음’(엡 1:13)을 믿음으로 얻는다. 복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이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복음 안에서 부르신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성화의 완성 곧 부활의 영광을 가리킨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하나님의 선택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도, 복음 진리를 믿음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도, 또 장차 얻을 부활의 영광도 다 놀라운 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해야 한다. [15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 ‘이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이 놀라운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성화(聖化) 생활을 위한 모든 교훈과 권면들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구원과 약속된 영광에 대하여 그들편에서 마땅히 응답하고 실천하고 행해야 할 바인 것이다. 우선,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지식과 믿음이 부족한 자는 넘어지고 낙심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확신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신약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경책을 주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에 견고히 설 수 있다. 누가복음 1:4, “이는[누가복음을 쓴 목적은]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에베소서 6:10-11, 13-14,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대적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 .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또 우리는 굳게 서서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사도적 유전(遺傳), 곧 사도들을 통해 전해 받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말로’ 직접 들은 것이든지, ‘편지로’ 받은 것이든지 다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 사도들의 교훈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엡 2:20).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적 교훈은 개혁신학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며 옛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구원의 복음 진리와 모든 교훈들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다. 갈라디아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로 표현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누가 다른 것을 전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1:8-9). 또 요한계시록 22:18-19는 그 책에 기록된 종말 예언에 무엇을 가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들이 교훈한 이 역사적 기독교, 개혁신학, 옛신앙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보수신앙의 본질이다. 기독교는 새 것을 만들어 내는 종교가 아니고 옛 것을 지키는 종교이다. 우리는 이 옛신앙을 귀히 여기며 보수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탈한 사람들의 모든 전통들을 버려야 하고 성경을 떠난 모든 종류의 이단들을 용납하지 말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즉 사도적, 전통적, 정통적 기독교만을 믿고 보수해야 한다. [16-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말과 일에](전통사본)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세상의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 곧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은혜로 주셨다. 그러나 세상은 요동하는 바다 같고 인생의 행로는 고생과 수고가 많으며 우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불안하거나 낙심치 않기 위해 시시때때로 위로가 필요하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선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엡 2:10; 딛 2:14). 우리는 말과 행위에 있어서 선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말과 일에 우리를 굳게 하시기를 기원한 것이다.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만세 전의 은혜의 선택에 근거하였고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얻었고 장차 부활과 변화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보답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믿음에 굳게 서서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성경적 교훈, 개혁신학, 옛신앙을 확신하고 보수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성경적 교훈을 지키는 보수 신앙과 보수적 바른 교회의 건립과 교제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바로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개혁신학의 유산을 열심히 연구하고, 성경적 교훈, 즉 전통적, 정통적 바른 교훈을 확인하고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 날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시고 모든 선한 말과 일에서 우리를 굳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때때로 심신으로 연약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아 힘을 얻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굳게 서 모든 선한 말과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3장: 재림 신앙의 균형 1-5절, 기도의 교제 [1-2절]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트레코 trevcw)[빠르게 퍼지고](NASB, NIV)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목사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나, 성도들도 목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체험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위해서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한다. 특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후원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탁한 기도 제목은 두 가지이었다. 첫 번째는, 주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와 같이 빠르게 퍼지고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바울이 전한 주의 말씀은 그들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한 능력의 말씀이었다(살전 1:5). 이제 그는 그 말씀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힘있게 역사하고 빠르게 퍼지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주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서 영혼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말씀의 힘있는 역사, 그것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말씀의 일꾼들이 간절히 소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가 교인들에게 부탁한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바울 일행을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달라는 것이었다. ‘무리하다’는 원어(아토포스)는 ‘악하다, 부당하다’는 뜻을 가진다(BDAG). 바울이 이런 기도를 부탁한 것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고 복음 전파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주께서 바울에게 맡겨주신 사도의 직무는 악한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의 직무를 완수하기를 원하고 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믿는 것이 아님을 증거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은 그를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 6:66). 사도행전 28:24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날을 정하고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을 때 그 말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지금 믿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구원하신 자가 아니면 어느 날 교회를 떠나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3).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방해나 핍박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주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이었고 사도들이 행한 바이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0:14에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18:6-7에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였을 때 바울은 옷을 떨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비록 우리가 지금 믿지 않는 사람을 완전히 포기해 버려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그에게 얽매이지 말고 또 다른 곳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3-4절] 주는 미쁘사(피스토스)[신실하셔서]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너희가 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앞으로도 행할 줄을](전통본문)6)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사도 바울은 주께서 신실하셔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을 확신하였다. ‘굳게 하신다’는 말은 믿음의 견고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그 믿음이 자라고 견고케 하신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성장과 견고함은 다 신실하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빌 1:6). 또 히브리서 12:2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했다. ‘악한 자에게서 지키신다’는 말에서, ‘악한 자에게서’라는 원어(아포 투 포네루)는 ‘악으로부터’(KJV)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마귀에게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신다. 구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죄악에 빠지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잠시 연약에 떨어질지라도 그는 즉시 우리를 일깨우셔서 그 연약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로 그 연약에서 떠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가 명한 것을 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도 행할 줄을 확신하였다. 이것은 그가 ‘주 안에서’ 가진 확신이었다. 즉 그는 신실하신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굳게 하시고 그들을 악한 자에게서 혹은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말씀을 순종케 하실 것을 확신한 것이다. 사도들의 명령과 교훈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말씀을 순종케 하실 것이다.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안으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헛된 데 두지 말고 선한 일에 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이신 사랑과 그가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사랑을 다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9-10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인내와 또 우리 속에 주시는 인내를 다 가리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다. 또 그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참게 도우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특히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 속에 힘있게 역사하고 널리 퍼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저도 여러분에게 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되 부족한 저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힘있게 역사하고 또 빠르게 널리 퍼지도록 기도해 주기를 부탁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성도들을 굳게 하시고 그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며 성경의 교훈을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죄성을 가진 우리 자신에게 맡겨져 있지 않다. 교회는 인간 목사들의 손 안에 있지 않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의 구원과 교회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이루시는 신실하신 구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셋째로,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께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안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은 기도하지 않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도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믿음이 주위에 힘있게 전파되고 굳세어지는 것은 기도의 교제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또한 목사의 말씀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성도들의 강건함과 순종과 사랑과 인내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의 일이 더 흥왕할 것이다.
6-18절, 무질서한 형제들에 대한 교훈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아탁토스)[무질서하게(KJV), 무법하게(NASB)]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遺傳)[교훈]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명하기를,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한다. ‘명한다’는 말은 ‘권면한다’는 말보다 강한 뜻이다. 권면하는 바도 순종해야 하지만, 명령하는 바는 더욱 순종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는 말은 이 명령을 인간 바울의 권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하는 것임을 보인다. ‘규모 없이,’ 무질서하게, 무법하게 행한다는 것은 ‘사도들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유전’(遺傳)이라는 말(파라도시스)은 ‘받은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은 교리적 내용과 윤리적 내용을 포함한다. 사도 바울은 2:15에서도 그들이 받은 교훈을 지키라고 말하였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유전 즉 사도들이 교훈한 내용이다. 신약성경의 교훈을 순종치 않는 것이 규모 없이 즉 무질서하게, 무법하게 행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교회 안에는 사도들의 교훈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당시에 그들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이 없었고 단지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 사도의 교훈을 순종치 않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런 고의적 불순종자들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떠나라’는 말은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어떤 형제가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가 바른 신앙을 가진 형제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사도의 명령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은 권면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를 따로 세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 안에 한두 명의 형제의 잘못 때문에 새 교회를 따로 세워서는 안 된다. 성경과 교회 헌법의 규정대로, 교회는 잘못을 행하는 자를 권면, 책망하고, 성찬 교제에서 그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그를 제명, 출교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권징 순서이다. 칼빈의 말대로, 권징은 교회의 힘줄과 같다. 교회가 권징을 충실히 행할 때 교회는 튼튼한 교회가 되지만, 교회가 바른 권징을 포기하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권징을 포기한 교회는, 비록 그 교회에 교인수가 많고 재정이 넉넉할지라도, 진리의 수호자와 전파자로서는 무능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일 때도 있다. 물론,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하고 변질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참된 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참된 성도들이 깨어 있기만 하면 그들은 교회의 타락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징을 포기한 교회는 서서히 타락할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교회는 전체적으로 배교적이었고 진리를 붙드는 자들은 매우 소수이었다. 오늘날 기독교계도 16세기 종교개혁 때와 비슷하게 상당히 배교적이고 해이해져 있다. 세계적으로 역사적 대교단들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고 불신실하고 권징이 없는 교회가 되고 있다. 오늘날 성경적 교회들이 직명한 매우 중요한 한 문제는 ‘교제’의 문제이다. [7-9절] [이는]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알기 때문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는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도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명령을 위해 자신을 예로 들었다. 그는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주야로 수고하고 일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이었고 친히 그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성도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그가 물질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연약한 교인들에게 시험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었다. 바울의 모범은 목사가 세상일을 하고 교회 사례를 받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성전 봉사자들인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로 생활하게 정하셨고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의 십일조로 생활하게 정하셨다. 이와 같이 십일조 헌금은 구약시대에 성전 봉사자들의 생활비로 쓰였다. 그것이 성전 봉사에 전념하는 자들의 생활비를 위해 정하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뜻하셨다. 고린도전서 9:14,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5:17-1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전임 봉사자들은 교회에서 생활비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알고 감사히 받고, 교인들은 그들에게 의식주와 자녀 교육을 위해 필요 적절한 비용을 드려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모범은 단지 목사들과 교회 봉사자들이 전도 활동이나 목회 사역에서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처신해야 함을 보인다. 그들은 돈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그런 문제 때문에 교인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특히 목사는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와 성경말씀이 귀하기 때문에 목사가 된 자이어야 하며 그 귀한 진리를 세상의 돈과 바꾸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0-12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우리는 일하지 않고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노인들도 힘든 일은 못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청년들은 무슨 일이든지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무슨 일이나 죄 아닌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사람은 게으르면 안 된다. 게으른 자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데살로니가교회 안에는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일만 만드는 자들’(페리에르가조메노이)이라는 원어는 ‘남의 일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자들’(busybodies)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자기 일은 충실히 하지 않고 남의 일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기 일을 충실히 하고 남의 집은 자주 방문하지 말고 남에게 쓸데없이 자주 전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조용히 일하라는 말은 야단스럽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 나타나 남의 일이나 참견하지 말고 자기 일을 조용히, 충실히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 [13-15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와 같이 권하라.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말은 열심히 일하며 사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문은 ‘그를 지목하고 교제를 끊고 그를 부끄럽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한 태도는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다. 그와 교제하고 그를 인정하면 그가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와 교제를 끊는다면 그가 깨닫게 될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버려두면, 교회의 기강이 흐려지지만, 그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잘될 것이다. 그가 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와의 교제를 끊고 그를 책망함으로써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지키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해야 한다. [16-18절] 평강[평안]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평안]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7) 하나님께서는 ‘평안의 주’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나 평안을 주실 수 있는 자이시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일마다’라는 원어(엔 판티 트로포)는 ‘모든 상황에서’라는 뜻이다. 평안의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또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평안을 구해야 한다. ‘편지마다 표적이기로’라는 말은 편지가 기적이라는 뜻이 아니고 단지 ‘편지마다의 표시’라는 뜻이라고 본다. 바울은 다른 이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한 후에 편지 끝에 친필로 ‘바울’(파울로스)이라고 서명하여 그것이 그가 쓴 편지임을 표시했던 것 같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도적 교훈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도적 교훈들을 주께서 주신 교훈으로 알고 순종해야 한다. 본문에 담긴 사도적 교훈은 우선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것과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과 일만 만드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소득을 얻고 그래서 스스로 자기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도적 교훈을 따르지 않는 형제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이것도 본문에 담긴 사도적 교훈의 내용이다. 사도적 교훈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규모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런 자를 용납하면 사도적 교훈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무질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를 원수같이 여기지 말고 형제같이 권해야 한다. 사도적 교훈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것이므로 교리나 윤리나 다 힘써 지켜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특히 자유주의자들, 천주교인들, 은사주의자들, 여자 목사들, 또 기독교 록음악, 동성애 등을 용납지 말고 그런 자들이나 그런 것들을 용납하거나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타협적 복음주의자들)도 용납지 말고 그들의 타협적 언행을 지적하고 책망해야 하고 만일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과도 교제를 끊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믿고 사모해야 한다. 16절, “평안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심을 알고 믿고 감사하며 그의 평안을 늘 사모하며 누리며 살아야 한다.
미주 1) Byz א A vg syrp copsa-mss arm Origenlat 등에 있음. 2) Byzpt א A TR 등에 있음. 3) Byz 본문임. 그러나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은 ‘주’라고 되어 있음. 4) Byz A itd vg syrp Irenaeuslat Origengr-6/7 lat Tertullian 등이 그러함. 5) Byz syrp Irenaeusarm 등이 그러함. 6) Byz (B) vg (copsa) 등이 그러함. 7) Byz A D itd vg syrp copbo arm eth geo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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