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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2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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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요한복음 서론

1장: 사람이 되신 독생자

2장: 처음 표적

3장: 거듭남

4장: 생수를 주시는 자

5장: 생명의 양식

6장: 생명의 떡

7장: 생수의 강을 주심

8장: 죄에서 자유케 하심

9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10장: 선한 목자

11장: 죽은 자를 살리심

12장: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13장: 새 계명을 주심

14장: 성령을 약속하심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16장: 성령의 사역

17장: 제자들을 위한 기도

18장: 잡히심

19장: 십자가에 못박히심

20장: 부활하심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서론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그는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의 측근에 있었던 세 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주 표현하였다(13:23; 19:26; 20:2; 21:7, 20).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이후에 주의 제자, 주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친히 하나의 복음서를 내었다”고 했다.1) 정경에 대한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이 그의 동료 제자들의 권고로 복음서들 가운데 제4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증거한다. 본서는 아마 주후 85-90년경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보충적 성격을 가진 복음서이다. 본서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 복음서들에 있는 내용을 많이 생략하였고, 그 대신 거기에 없는 것들을 많이 보충하고 있다. 복음서들 중 본서만 유월절을 3번 언급한다(2:13, 23; 6:4; 11:55). 또 요한복음 5:1의 ‘유대인의 명절’은 유월절이거나 오순절을 가리킬 것이며, 그러므로 유월절이 또 한번 지나는 셈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공적 활동 기간에 유월절이 네 번 지난다. 그것은 만 삼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또 본서만, 예수님의 초기 사역을 포함하여 그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지방에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에 대해 증거한다. 요한복음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는 말씀을 비교하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생략한 예수님의 초기사역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공관복음서들은 마지막 유월절 전까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만 증거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몇몇 부분(2:1-12; 4:1-54; 6:1-71; 7:1-9) 외에는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증거한다(1:35, 43; 2:13, 23; 3:1, 22; 5:1; 7:14; 8:1; 9:7; 10:23; 11:1).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이었으므로, 요한복음은 목격자적 증거의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저자는 어떤 사건의 발생한 시각을 종종 언급한다(1:39; 4:6, 52; 19:14). 요한복음의 시간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달리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을 따랐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39에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10시쯤 되었더라”는 말씀에서 ‘제10시’는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 방식대로 오후 4시를 가리키기보다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대로 오전 10시를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제10시가 오후 4시를 가리킨다면, ‘그 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이 적절해 보이지 않으며, 또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는 것도 시간적으로 적절해 보이지 않으며, 또한 무엇보다 요한복음 19:14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제6시에 심문하였다는 말씀과 마가복음 15:25에 예수께서 제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말씀을 조화시키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을 따랐다는 생각은, 로벗슨의 말대로, 요한복음 19:14과 마가복음 15:25을 조화시킬 ‘유일한 해결책’이다.2)

또 요한은 베드로가 귀를 자른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을 말고라고 언급하였다. 본서에는 ‘증거한다’는 말이 33번, ‘증거’라는 말이 14번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21:24에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는 말씀이 쓰여 있다. 이 모든 점들은 본서의 신빙성을 더하여준다.

다른 복음서들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서는 특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나 본서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대한 증거들도 분명하다. 4:6,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9:28, “내가 목마르다.” 물론, 공관복음서들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심을 밝히 증거하였다. 특히 마태복음 11:27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간의 특별한 신비적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백한 증언(證言)이다.

덧붙여, 요한복음에는 기록의 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본서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들의 공통적 목적이며 모든 성경의 일차적인 목적이다(딤후 3:15).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1장: 사람이 되신 독생자

1-5절, 태초부터 계신 말씀

[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증거한다. 사람이 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되신다. ‘태초’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맨 처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창조의 시작 때를 가리킨다.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계시니라’는 말은 ‘계셨더라’고 번역할 수 있다.3)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이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다. 물론 태초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보충한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즉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심을 뜻한다. 이와 같이, 본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한다. ‘말씀’이라고 표현된 이 분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과 똑같이 시간에 속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본절은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이 또한 하나님과 구별되심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두 번이나 그 말씀과 하나님을 구별하여 말한다. 여기에 두 분의 관계성이 나타난다. 주께서는 후에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세 전의 관계, 즉 영원적인 관계이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표현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물론 인격적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구별되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으로 표현된 그 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물론 그가 인격이시라는 것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시는 것과 동시에 그 두 분이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구약성경 처음부터 신약성경 끝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기본 진리이다. 기독교는 다신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신비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아들 간에는 신비하게도 숫자적으로 본질적 하나 됨이 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일체의 신비이다. 이것은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밝히 증거한다. 이사야는 신적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사도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했다(요일 5: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다. 그는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분이셨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 즉 하나님과 구별되시지만,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 즉 참 하나님이셨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고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여기에 모든 인생이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신적 영광이 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천지만물과의 관계를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에 매개자이시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창조물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16에서 같은 진리를 증거하였다: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브리서 1:2도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증거했다. 만물 속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요 우리의 창조자이시다.

그를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1장에는 ‘가라사대’나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히브리서 11:3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다.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4-5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의 관계를 증거한다. 그것은 생명과 빛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영적인 생명, 몸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다 포함한다. 생명은 밝고 기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생일을 축하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과 우울함이며 거기에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축하하지 않는다. 무덤은 쓸쓸하고 적막한 곳이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밝고 기쁘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해 “나는 생명이다”라고 증거하셨다(요 11:25; 14:6).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그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했고(요일 1:1) 또 ‘영생’이라고 말했다(요일 5:20). 그에게는 죄사함으로 인한 죽음의 정복과 영원한 생명이 죄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다. 빛은 지식과 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킨다. 무지와 죄는 어두움이요 그것은 또한 슬픔과 고통과 죽음, 곧 영원한 지옥이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참된 지식과 의는 기쁨과 즐거움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는 과거에 다 어두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구원을 얻었다(엡 5:8). 우리는 지식과 의,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고린도후서 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에게는 이 빛이 비췬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감사하게도, 우리들 속에 이 빛이 비치었다. 또 지금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에게 이 빛이 비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라고 불리신다. 그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과연 그는 하나님이라고 불리신다(1절). 물론 그는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본문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다. 온 세상과 우리의 존재의 뿌리는 그에게 있고 우리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도, 또 우리의 행위의 가치 기준도 그에게 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그에게 질문하고 그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과 생명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 기쁨과 즐거움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는 우리가 죄인인 것과 그가 죄인의 구주이심을 알려 주셨고, 그를 믿는 우리에게 실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주셨으며, 또 구원받은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내세의 천국과 영생의 복을 주셨다.

 

6-13절, 참빛으로 오심

[6-8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본문의 ‘요한’은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던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주는 자 요한’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에 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그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 보내졌다.

둘째, 세례 요한은 참빛에 대해 증거하려고 왔다. 그의 사명은 참빛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사도 요한은 본문 8절에서도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다시 말한다. 주의 종들은 다 참빛을 증거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셋째,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해 그 참빛을 믿게 하려고 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다(마 3:5-6, 11-12).

[9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 참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빛은 지식과 의, 또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킨다. 참빛은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에 대한 참 지식이며 완전한 의이며 거기에서 나오는 참 기쁨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에 대해 바른 지식을 주지 못하며 완전한 의를 주지 못하며 참 기쁨을 주지 못하는 거짓된 빛들이 많다.

참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다. 빛은 장롱이나 상자 속에 두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물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 태양은 온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비추기 위해 하늘 높이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과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과 완전한 의를 주시고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사람으로 출생하여 세상에 계셨고 세상에서 약 33년 사셨다. 그러나 그는 실상 세상을 창조하신 자이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시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요 1:2-3).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세상이 그를 몰랐던 것은 이 세상을 주장하는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하였다.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만든 온 세상에, 특히 자신이 특별한 소유로 택한 유대 땅에서 탄생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2:1의 증거대로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는 유대 땅에서 그의 생애를 보내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된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대로, 유대인의 공회는 그를 사형에 합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겼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지도자들의 충동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러 외쳤고 마침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게 하는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하나님의 옛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거절하였다.

[12절] 영접하는(엘라본)[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신비적 주문을 외우거나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진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었으나 범죄한 후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 죄인들은 죄의 종들이며 마귀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사도 요한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을, 의(義)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구별하였다(요일 3:10).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참으로 귀하다.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다(잠 17:6). 귀한 부모의 자녀들은 부모의 존귀를 함께 누린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존귀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럽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이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언제든지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응답하심을 받아 누린다. 또 그들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하였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과 중생(重生)은 혈통적 개념이 아니다. 부모가 구원받았다고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구원과 중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중생의 새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죄로 인해 죽었던 영혼들, 즉 참된 지식과 도덕성을 상실하였던 우리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받아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구원과 중생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무지와 많은 죄와 슬픔과 죽음으로 어둡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빛을 비추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은 그를 배척했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그 빛이 비추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었고 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참된 기쁨을 얻었고 영생을 소유하고 기대하고 있다.

둘째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소유자이시고 또 참빛으로 세상에 오신 자이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심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분들은 지금 그를 영접하라. 지금 그를 믿고 참빛을 받으라.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사도 요한은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했다. 그것이 구원이고 중생(重生)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실로 존귀하고 영광스럽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과, 현세에서의 보호와 공급과 기도 응답의 보장과, 또 내세의 천국과 영생의 보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특권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 특권을 감사히 누린다.

 

14-18절, 말씀이 육신이 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며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인류의 생명과 빛이시다. 본문은 그 ‘태초부터 계신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사실을 증거한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者)5)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의 ‘말씀’(로고스)은 1:1-3에서 증거된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 즉 ‘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또한 하나님이신 말씀’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이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한 인격적 존재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에 ‘육신’은 단지 사람의 몸만 가리키지 않고 영육으로 구성된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몸과 영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이라고 불리시고(딤전 2:5)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의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26:38). 그는 인간의 몸만 가진 하나님이 아니시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한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변하셨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하여 두 구별된 본질(natures)과 한 인격(one person)을 가지신 하나님과 사람이셨고 영원토록 계속 그러하시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는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성장하셨으며 인간의 특성과 연약성을 다 가지셨다. 그는 가난과 질병과 불행의 세상 속에서 죄인들 가운데서 생활하셨다. 창조주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 세상에서 약 30여년간 사셨다. 그러나 그에게 죄는 없으셨다. 인간은 연약하나 신성(神性)이 그 속에 계셨기 때문이다. 죄 없는 인간이어야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성육신하신 독생자(獨生者)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특히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나타났다(요 2:11). 그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셨다. 독생자는 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과 다른 뜻이다. 그것은 그의 참된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신비하다. 그것은 시간 세계에서의 관계일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시간 세계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의 신성(神性)에 근본적 결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적 관계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가 사람이 되신 까닭은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서이었다.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였다. 사람이 범죄했는데 짐승이나 천사가 벌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대신 받으실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되셨다. 그것은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무한자이신 그가 유한자가 되셨고, 영광의 주께서 비천한 종의 몸을 입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그에게는 은혜가 충만하였다. 그는 또 진리로 충만하셨다. 그는 항상 진리만 말씀하셨다. 그는 악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셨고 악을 용납하지 않으셨고 악과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셨고 선포하셨다(요 12: 49-50). 그는 자신을 진리라고 부르셨다(요 14:6).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역사상 하신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은 기적들 중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중의 특별계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긍휼의 방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회개하고 그를 믿는 죄인들이 그를 통해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앞선 자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앞선 자’라는 말은 신분이나 권위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이라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나으시다.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58). 미가 선지자도 메시아에 대하여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에니라”고 예언하였다. ‘태초에’라는 말은 ‘영원 전에’라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은혜로운 말씀을 풍성히 들었을 뿐 아니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성령을 받음과 영생과 기도의 응답 등 충만한 은혜를 누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런 모든 은택들을 받아 누린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과 은혜는 각각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특징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되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풍성히 주셨다. 물론 구약의 율법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신약의 복음에도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 로마서 7:12, 14,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형식과 강조점의 차이라고 본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정죄받은 자임을 보여준다(롬 3:19-20).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정죄(定罪)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6, 9).

한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며 사람들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신약의 복음을 ‘살리는 것’이요 ‘의의 직분’이라고 말했다(고후 3:6, 9).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의 복음 안에서 밝히 증거되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진리를 받았고 그 은혜와 진리로 구원을 받았다.

[18절] 본래(포포테 pwvpote)[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獨生子)](전통본문)6)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아무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지만(딤전 6: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라고 불리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자이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며 그의 은혜로운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셨고(요 1:1) 또 독생자라고 불리셨다(요 1:14, 18).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곧 인격적 관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었다. 요한복음 17:5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었다. 성육신은 기적 중의 기적, 곧 최고의 기적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이시다. 또 그는 사도들을 통해 풍성한 진리를 신약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는 오늘날 성경 진리의 교훈과 성령의 감동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성화(聖化)의 은혜를 죄인들에게 풍성히 허락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말씀과 성령으로 은혜와 진리를 풍성히 받는다.

 

19-34절, 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다.

[19-21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엘리야냐?”고 물은 것은 구약성경 말라기 4:5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선지자냐?”는 말은 신명기 18:18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라”고 하신 말씀에 예언된 인물을 가리킬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을 알고 자기 위치를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자기를 과대평가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것이 교만의 시작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성을 가진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항상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22-23절]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선지자들의 일차적 임무는 외치는 소리 즉 설교 사역에 있다. 오늘날 목사들의 일차적 임무도 그러하다. 목사는 자신이 회중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만 바르게 전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외칠 내용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하여 길을 닦고 길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온유함으로 구원을 사모함을 가리킨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모든 죄인들이 거쳐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다.

[24-28절]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그는 바로 내 뒤에 오시나 나보다 앞선 자시니].7) 나는 그의 신들메[신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가 신적 인격이시며 자신은 연약한 인생에 불과함을 바로 알고 인정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로마서 12:3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첫 번째 증거는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메시아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보인 대로 속죄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을 가리킨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은 유월절 어린양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고린도전서 5:7의 증거대로, 유월절 양의 죽음이었다. 그는 세상 죄, 정확히 말해 세상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제물로 죽으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구약성경에 암시된 이런 놀라운 진리를 알았는지 신기스럽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보다 앞선 자’이시며 ‘자기보다 먼저 계신 자’임을 증거하였다. 이것은 이미 15절과 27절에서 증거된 바이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신적인 존재이시다. 그는 요한복음 1:1에 증거된 대로 ‘태초에 이미 계셨던 자’이시다.

[31-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 요한은 물 세례를 통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를 드러내고 증거하려 했다. 그의 임무는 두 가지이었는데, 하나는 사람들로 죄를 회개케 하여 메시아께 대한 믿음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물세례는 죄사함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그 실체이다(엡 5:26). 성령께서 실제로 죄인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새 생명을 주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중생(重生)의 사역이다(요 3:5; 딛 3:5).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이 책의 서두에서부터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께서는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1:1)이시며 ‘사람이 되신 독생자’이시다(1:14). 물론 이것은 신비한 사실이다. 세례 요한이 이 놀라운 진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대속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지금도 성령을 통해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고 새 생명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모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분 안에 우리의 모든 죄 문제의 해결이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자이시다. 그는 실제로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주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건져주신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고 지옥 형벌을 면하고 천국과 영생의 복을 얻는다. 죄를 회개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

셋째로, 이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제 모든 죄를 버리고 신구약성경에 교훈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교훈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는 자의 삶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살자.

 

35-42절, 처음 제자들

[35-37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속죄제물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평안과 영생의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속죄제물로 오셨다.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다. 요한이 어제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을 때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 그가 예수님에 대해 다시 증거했을 때 그의 두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고 따랐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가 증거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준비된 자는 때가 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도구이다(고전 1:21). 우리는 한 번 전도하여 반응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때까지 계속 전도해야 한다.

[3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는 돌이켜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사람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를 따라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죄사함과 영생을 얻고 그를 섬기며 따르기 위해 교회에 나왔는가?

그들은 말하였다. “선생이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아직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알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10시쯤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함께 지내보면 다 알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을 보고 그 날 주님과 함께 지냈다. 때는 제10시쯤 되었다. 그것은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유대인의 시간 계산방식을 사용했으나, 요한복음은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방식을 사용한 것 같다(NASB).8) 그 제자들은 그 날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었다. 그 교제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던 상태에서 ‘메시아’라고 부르는 상태로 변하였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더욱 알고 더 깊이 교제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했다(딤후 3:14 -15). 또 성도의 경건한 교제는 예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40-42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요나]9)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마 본서를 쓴 요한이었을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자신을 항상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으나 이 모든 일을 본 자임이 틀림없다. 그들은 그 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케 되었다.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말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그는 그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확신한 자는 그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먼저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읽기와 듣기, 성경 묵상과 연구를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를 전하거나 또 그들로 하여금 성경책을 읽고 공부하게 하거나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게 함으로써 예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시몬을 게바 곧 반석이라는 부르신 것은 그의 믿음과 인격이 반석과 같이 견고해질 것을 암시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는 비록 부족이 많을지라도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 즉 메시아이시다.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그의 제자들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랐다. 둘째로, 처음 제자들은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믿음의 성장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적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기도 응답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을 알고 믿고 믿음이 자라고 확신케 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은 바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가까운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부터 알려주어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

 

43-51절,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심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튿날’은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랐던 날로부터 계산된다. 처음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날은 뜻 깊은 날이었다. 2:1에는 그 날부터 계산하여 ‘사흘 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셨고 그를 제자로 삼으셨다. 그는 아직 유대 지방에 계셨던 것 같다. 이 일들은 아직 세례 요한이 사역했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부근에서 되어진 일일 것이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자마자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보기에 갑작스럽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 작정하신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편 115:3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증거하였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아마 모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1:21-22에 보면, 그들은 후에 가룟 유다 대신 한 명을 보선할 때, 그 자격 요건으로 “세례 요한 때부터 함께 다니던 자”를 언급하였다. 빌립도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이 세례주는 곳 부근에 있었고 그의 심령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회개함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기다림이 있었다(45절). 예수께서는 이런 빌립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준비된 자들을 그의 제자와 사역자로 부르실 것이다.

[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의 마을이었다. 야고보와 요한도 갈릴리의 어부이었다(마 4:21-22). 다음에 언급될 나다나엘도 갈릴리 가나 사람이었다(요 21:2). 주께서는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 출신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그것은 아마 당시의 교회가 매우 부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사람들은 그 종교적 부패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사람은 대체로 환경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교회들이 부패되어 있을 때는 홀로 떨어져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유익하다. 여하튼, 갈릴리 사람들 중에 순박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참된 경건을 가졌던 자들이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부르셨고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 자신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무렵에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갈릴리 사람이셨다(마 4:13).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 마을로서 벳새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어릴 때에도 흠이 없는 인격이셨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어릴 때부터 보고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악한 인물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결코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그 날 친구 나다나엘을 찾았고 그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다. 빌립는 메시아에 대한 성경 지식이 있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메시아께서는 모세가 율법에서 예언하였고 유월절과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 등에 예표(豫表)된 인물이며 또 그 후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확신있게 말하였다.

[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의 처음 반응은 많은 사람들의 반응처럼 부정적이었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성경에 예언된 바가 있지만(미 5:2; 말 3:1), 나사렛은 예언된 바가 없었다. 그에게 나사렛은 메시아의 나오심을 기대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자 빌립은 “와 보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를 알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와 보라’는 말은 언제나 최선의 전도 방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성경말씀 가운데서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증거하신다. 또 성경적 설교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방편이다.

[47-48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그에 관하여]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경건하고 진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의 제자가 되기에 적합한 준비된 인물이었다. 나다나엘은 아마 그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의 중심을 보시고 받으신다. 그는 바로 그를 경외하는 그의 마음과 모든 죄를 버리고 흠과 점 없이 살고자 하는 그의 진실한 중심을 보셨을 것이다.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주님의 말씀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모든 의심을 떨쳐버리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하였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그의 중심을 보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였다. 안드레와 아마 요한과 베드로와 빌립에게 생겼던 동일한 믿음이 나다나엘에게도 생겼다. 이 믿음과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도 있고, 우리 뿐만 아니라 오늘도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성경적 설교를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50-5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10)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人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나다나엘 뿐만 아니라, 여러 제자들이 장차 그의 신적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다니엘 7:13-14는 메시아를 ‘인자(人子) 같은 이’라고 불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에 예표되었고 예언된 그 메시아이시다. 빌립은 전부터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고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사모하였고 그의 친구 나다나엘도 그러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다 경건한 자들이었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둘째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기가 만난 메시아를 즉시 소개하였고 그에게 나오도록 초청하였다. 그는 그에게 ‘와 보라’고 말하였다. ‘와 보라’는 초청은 좋은 전도 방법이다. 우리도 우리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성경말씀을 소개하고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믿었다면 그렇게 하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보시고 아시는 자이시다. 그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 아마 거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한 것을 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왕이시며 구주와 주님이시다.

 

 

2장: 처음 표적

1-11절,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1-2절]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안드레와 한 제자가 맨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날부터 세어서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 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갈릴리 가나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깝고 나다나엘의 고향이었다. 누가 혼인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거기 계셨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며 하인들에게 무엇을 지시한 것을 보면, 그 집은 예수님의 어머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집이었던 것 같다. 혼인 잔치는 인간사 중에서 매우 기쁘고 즐거운 일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그리고 아마 본서를 쓴 요한도 그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 그들은 혼인하는 집과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혼인 예식을 존중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과 제도를 존중하셨다. 그는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그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셨고 또 며칠 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이제 혼인 예식과 잔치에 참여하신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셨다.

[3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런데 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랐다. 혼인 잔치를 준비한 집이 물질적으로 유여한 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집은 혼인 잔치를 하면서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하였다. 기쁘고 즐거워야 할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흥과 즐거움이 깨어질 처지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예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가 한 말은 포도주가 떨어진 그 어려운 문제를 예수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그의 믿음, 즉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 대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아마 예수님을 잉태할 때부터 그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천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에게 잉태되어 나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위를 잇는 왕이라고 일러주었다(눅 1:32-35). 또 그가 아기 예수를 출산했을 때 그 지경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찾아와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나셨다고 했다고 말했고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기억하였다(눅 2:11, 17, 19). 그는 예수가 소년 시절을 거쳐 자랄 때 줄곧 그를 주목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을 것이다. 이제 그 믿음을 가지고 마리아는 예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4-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자여’라는 원어(귀나이)는 당시에 여자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었으며 무례한 호칭이 아니고 때때로 존중과 사랑을 가진 호칭이었다(마 15:28; 눅 13:12; 요 4:21; 19:26).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은 그의 공적 전도사역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부터 공적인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것이다(마 4:12, 17; 요 3:24).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있다.

그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은 확고하였다. 그는 예수가 그 어려움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기를 사모하며 성경 읽는 일과 설교 듣는 일을 금은 보화를 얻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6절]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그 집에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손발을 씻거나 몸을 씻었다(막 7:3-4). ‘통’(메트레테스)이라는 단위는 약 40리터 정도이다. 그러므로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약 80 내지 120리터 정도 물을 담을 수 있는 김장독 같은 돌항아리이었다(아주 큰 쓰레기 봉투가 100리터임).

[7-8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어머니 마리아의 확신대로, 예수께서는 그 혼인 잔치의 어려움을 동정하셨다. 그는 혼인 잔치를 무시하지 않으셨고 혼인 잔치의 즐거움과 흥이 깨어질 처지에 있는 것을 동정하셨다. 이제 그의 일하실 때가 되었다. 아직 공적으로 일하실 때는 아니었으나,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실 때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아구까지 채웠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에 성실히 순종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하면서 불평한 것 같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또 “이제는 떠서 연회장(宴會長)(알키트리클리노스), 곧 잔치 인도자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갖다 주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기적은 믿고 순종하는 데서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후에 자기 고향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막 6:5-6).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데 무슨 기적을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를 믿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실천할 때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9-10절] 연회장[잔치 인도자]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것은 맛이 좋은 포도주이었다. 그것은 그 하인들과 제자들이 본 기적이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하였다(욥 42:2).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자연법칙은 그가 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소가 풀을 뜯어먹고 우유를 내며, 포도나무가 비와 땅의 양분을 섭취하여 포도송이를 맺히며 사과나무가 똑같은 조건에서 사과를 맺히는 이치를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비이다. 인간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 자는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예수께서 만드신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이었다. 그것은 맛이 좋은 포도주이었다. 예수께서 술을 만드셨는가? 그것은 재미있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깨닫는다면 그것은 당황스러운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서 술은 좋은 의미로서 쓰일 때가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성경은 술을 한두 잔 마시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으나, 술취하는 것은 지옥에 던지울 만한 큰 죄이다(고전 6:10). 술취함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술은 몸에 나쁘고 재정 지출이 크고 중독성이 있고 술취함은 큰 죄이며 오늘날 술의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다는 것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술을 안 마시는 것이 유익하다. 완전 금주는 우리가 지켜야 할 교회의 좋은 전통이다.

[11절]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처음 표적이었다. 그는 갈릴리 가나에서 이 기적을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고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이 기적의 목적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요, 또 그것을 통해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은 결코 단순히 사람일 수 없고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달았고 예수님을 믿었다. 기적은 믿음에 도움이 되는 보조물이다(출 4:8; 막 16:20; 히 2:4).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고 믿자.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처음 나타내신 일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얻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목적이 여기에 있다(눅 1:1-4; 요 20:30-31).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을 알자.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그 유여치 못한 집의 혼인 잔치를 배려하신 일이었다. 주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기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내세의 천국과 영생뿐 아니라 현세에서의 평안과 기쁨도 준다.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시다.

 

12-25절, 성전을 청결케 하심

[12-13절]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예수께서는 그 모친과 동생들(마 13:55; 막 6:3)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다. 가나는 산지에 있는 마을이며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여러 날 계시지 않으셨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때는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웠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적 전도활동 기간 중 첫 번째로 맞는 유월절이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이것 외에 세 번 더 유월절을 지나셨음을 증거한다(요 5:1; 6:4; 11:55).11)

[14-16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다. 그곳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처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며 주의 일을 의논하고 교제하는 것 외에, 성전 안에서 세상적인 행사들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종교적 행위를 빙자하여 돈벌이를 하는 행위는 성전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참된 경건과 너무 거리가 먼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지 않고 순수한 성전이 되기를 원하셨다.

[17절]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언급된 성경은 시편 69:9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을 낼 것이다. 그래서 시편 137편 저자는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37:6).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권위 있는 행위는 성전을 위한 그의 사랑과 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18-21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은 46년 동안에 지은 이 성전을 예수가 어떻게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는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이었다. 로마서 1:4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증거하였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예표(豫表)하였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는 번제단, 물대야, 떡상, 촛대, 향단, 속죄소 등이 있었다.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리적 형벌을 나타내었고, 물대야는 그의 성결케 하심을, 떡상은 그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이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단번 대속(代贖)의 사역을 상징하고 예표하였다. 이처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그가 그 몸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성전은 또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된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러므로 성전의 청결은 신자 개인의 성화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물론, 구약의 성전은 부수적으로 오늘날 예배당을 가리킬 수 있다. 신약교회의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건물이며 하나님을 위해 거룩히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은 시편 16:10이다: “이는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제자들의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을 확신한다.

[23-25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여러 표적들, 아마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들을 행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를 믿었다. 기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돕는 보조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추가적인 기적들이 없어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들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가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며 또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해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의 종들도 이 점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인간은 다 연약하여 넘어지기 잘하고 변하기 잘한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드온 3백명 용사 같은 신실한 일꾼들과 동역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성전의 청결은 신자 개인의 성화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거룩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 즉 바른 교리와 바른 생활교훈을 전파하며 가르쳐야 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선함과 진실에 어긋나는 모든 윤리적 죄악들을 용납하지 말고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을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성전 청결을 위한 열심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교회를 원하신다(엡 5:25-27). 우리는 온갖 오류들로 더러워지고 혼란해져 있는 교계의 상황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건립하고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성경적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예수님을 본받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의 일에 동감하며 따른다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또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고 배척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일해야 한다.

 

 

3장: 거듭남  

1-15절, 거듭남에 대해

[1-2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경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으나 경건한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유대인의 관원이었다. ‘관원’이라는 말은 공회원같이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지도적 인물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자이었다. 니고데모는 아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왔던 것 같다. 그는 경건한 사람들을 대변하듯이 예수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곧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 근거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상 선지자 이상이셨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부족함을 아시고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우선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그는 천국을 볼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었다(창 3:24).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인 채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6:9-10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4-5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영적 의미이며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물은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로 더러움을 씻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씻는다. 세례 의식의 물은 그것을 상징한다. 그것이 복음의 중심 내용이다(요 15:3; 엡 5:26; 히 10:22).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사람의 심령에 적용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구원 활동이다(고전 6:11; 딛 3:5). 모든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6-8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거듭남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사람의 영혼의 변화를 가리킨다. 사람의 출생은 육적인 일이었다. 영혼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의와 선을 행치 못하였다.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으므로 그 기능인 지식과 감정과 의지는 매우 어두워졌고 약해졌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나고 지정의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영은 바람과 같다. ‘영’이라는 원어(프뉴마)는 ‘바람, 숨’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을 볼 수는 없으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은 볼 수 없으나,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과 변화된 삶을 통해 그를 확인할 수 있다.

[9-13절]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12) 인자(人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거듭남은 비록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땅의 일’ 즉 땅에서 일어나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거듭남은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건이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경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이미 경험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한 자신의 말이 진리임을 강조하셨다. 그는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구별된 인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계시된 명확한 진리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또 ‘하늘의 일’에 대한 말씀도 암시하시는 것 같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같은 책에 기록된 천국에 대한 말씀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본절은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을 증거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요한복음 1:1의 증거대로 ‘태초부터 계신 자’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라는 원어(호 온 엔 토 우라노)는 그가 땅에 내려오신 후에도 여전히 ‘하늘에 있는 인자’ (KJV) 즉 신성(神性)으로 항상 하늘에 계심을 나타내든지, 아니면 단순히 ‘하늘에 계셨던 인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는 사람이시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말씀은, 비록 에녹(창 5:24; 히 11:5)과 엘리야(왕하 2:11)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고 모든 의로운 성도들의 영들(히 12:22-23)이 그러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의 구원 계획을 이해한 자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전통본문)13)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죄를 뉘우쳤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봄으로 죽지 않고 살게 하셨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것을 가리켰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이 몇 번 나온다(요 8:28; 12:32, 34.).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아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고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천국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둘째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속죄의 복음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음으로 거듭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에게 대속의 의(義)를 적용하셔서 새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셋째로, 사람이 거듭난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4-15).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며(요일 5:1) 참 믿음은 참 회개를 동반한다고 말했다(요일 3:9-10). 우리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된 거듭난 자인지 스스로 물어보자.

 

16-21절, 믿음과 구원

[16절]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14)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세상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택하신 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9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섰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는 외아들이 있으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제 낳으셨는가? 그것은 영원 전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라는 성경 진리에 근거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본질적 일체와 수적 하나 되심의 신비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주셨음을 뜻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부른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의 영과 육체를 취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주셨다’는 말은 또 아버지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죽음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할 처지에 있었다. 죄인들의 마지막 상태는 지옥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롬 3:20).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1-22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8-9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내가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만세 전의 선택과 이끄심이 없이는 내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는 요한복음 6:44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0:26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증거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롬 5:8), 또 사도 요한도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9-10).

[17-18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심판하다’는 원어(크리노)는 ‘정죄(定罪)하다’는 뜻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결코 정죄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롬 8:1).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19-21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구원을 받은 증거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정죄받았다는 증거는 빛을 멀리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죄하셨다는 증거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 그 행위가 드러나고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적이나 간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는 낮을 두려워하며 밤을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희생시키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 독생자는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사람은 종교적 고행이나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 얻지 못한다. 사람의 행위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그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빛으로 오지 않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뉜다.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이다. 그 둘 외에는 없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22-36절, 세례 요한의 증언

[22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예수께서는 유대 땅으로 가셔서 거기 머무시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요한복음 4:2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었다. 세례는 구약의 결례(潔禮) 즉 정결 의식에서 나왔다. 구약의 결례는 물로 씻거나 피를 뿌림으로 이루어졌다(레 14:7-8).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다(행 2:38). 그것은 복음 진리의 핵심을 표현한다. 누구든지 죄씻음을 받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죄의 대가는 죽음과 멸망이다.

[23-24절]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애논은 요단강 상류 쪽이다.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갈릴리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마 4:12-13; 막 1:14).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지금까지 내용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의 일들이며 공관복음에서 생략된 것들이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예루살렘 부근에서의 예수님의 초기 사역들에 대해 증거하며 이런 점에서 공관복음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진다.

[25-27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불평스런 보고는 분명히 아직 30세 가량밖에 안 된 젊은 사역자 요한에게 인간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일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지혜와 은혜와 능력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그러하다. 우리의 지혜, 건강, 돈, 환경 여건은 물론, 우리의 믿음, 구원, 성화, 지식, 분별력, 능력, 충성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고전 4:7).

[28-30절]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 앞에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는 자에 불과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과 사명을 바로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가 신랑이지만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신랑 친구들이 크게 기뻐하듯이, 자신은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귀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젊은 사역자로서의 인간적인 쓸쓸함이나 우울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불필요한 인간적 연약성이 없었고 또 경쟁심이나 시기심 같은 추한 모습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기쁨이 충만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좋은 모습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또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이며 자신은 사명을 다했으므로 쇠해지고 사라져야 할 자임을 고백한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직분자와 봉사자에게 본이 된다. 직분자는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하며 또 다른 이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아 그를 격려하며 그의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지 말고 그에게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시기와 교만, 미움과 다툼은 무서운 악이다.

[31-34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은 땅이나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신적 인격이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미 증거했었다(요 1:34). 예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다. 그는 그 근원과 본질,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신다. 그는 단순히 땅 위에 사신 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단순히 한 훌륭한 인간 선생이 아니시고 위로부터 오신 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이, 만물 위에 계신 이이시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가 보시고 들으신 것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하신 내용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들, 그 어떤 인간 스승의 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는 친히 하나님 아버지를 보시고 그의 뜻을 들으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간은 온 세상에 아무도 없고 인류 역사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증거하신 내용을 받는 자들이 없었다. 그것이 어두운 세상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실상,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또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하였다.

[35-36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 없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영광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그의 근원과 본질은 땅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중보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풍성한 말씀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풍성한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주셨고 그것들은 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오류와 섞인 것 없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 충만히 거하자.

셋째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4장: 생수를 주시는 자

1-18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1-5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과 일찍부터 충돌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는 때가 되면 그들과 충돌하게 되실 것이며 바로 그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셨다. 사마리아는 남쪽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지방이었다.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 지방에 수가라는 한 동네에 이르렀다. 수가성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 가까웠다. 그 땅은 세겜을 가리켰을 것이다(수 24:32).

[6-9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6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제6시 즉 저녁 6시는 여인들이 물길으러 우물에 나오는 시간이었다(창 24:11).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는 하루 종일 걸으셔서 피곤하셨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건장한 체력을 가지신 것 같지 않다. 예수께서 여행에 피곤하신 것은 그가 참으로 사람이셨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자,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 피곤해 하시는 사람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신 독특한 인격이시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의아한 마음으로 예수께 반문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의 참된 관심은 물을 얻어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여자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롬 6:23).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안다면, 그 여자는 도리어 그에게 생명의 물을 구하였을 것이다. 이 생수는 성령께서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떤 물질적 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그 우물의 물과 자신이 주는 물을 대조시키셨다. 그가 주시는 물은 영적인 물이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 요소이다. 사람이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을 느끼듯이,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사람에게는 영혼의 갈증이 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생긴 여러 가지 슬픔과 불안과 불만족이다. 죄인에게는 안식과 만족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슬픔과 불만을 해소하는 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과 힘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그 물은 그가 주시는 성령을 가리킨다(요 7:37-39). 성령께서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

[15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을 아직도 물질적 차원의 물로 이해하였다. 그는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을 필요도 없는 그런 물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달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영적인 물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며 그 사마리아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6-18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실상 그 여인에게는 영적인 갈증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그것을 일깨우기를 원하셨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은 그 여자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러나 병자가 자신의 병을 알아야 살 길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여자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으나 그 남자도 그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자이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여자의 문제는 결혼 관계에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였다. 그런 중에 그가 터득한 것은 인생이란 만족이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혼의 불만족과 갈증만 더 얻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께 나오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청산해야 구원을 받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고 참 평안을 얻고 새 삶을 시작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그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요 3:31)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행로에 피곤하여 사마리아의 수가성 야곱의 우물곁에 앉으시는 사람이시다. 우리는 놀라우신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알자.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그것은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생명은 우리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심어진 새 생명을 통하여 우리 속에 영원히 샘솟는 생수를 주신다. 구원받은 성도는 다 그 생수를 마신 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성령 안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셋째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고 영생을 얻어야 한다.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절하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신약성경에 풍성하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9-26, 참된 예배

[19-20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훤히 아시는 예수가 선지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것은 평소에 그 여자가 가졌던 관심거리이었던 것 같다. 예배에 대한 관심은 경건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여자의 마음 속에는 경건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즉 세겜 서쪽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즉 성전이 있는 시온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그 둘 중에 어느 말이 옳은가라는 질문이었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구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또 그가 정하신 방식으로 행해져야 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가리켰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조용한 장소이면 어디나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고 정숙한 방식이면 된다. 이방종교는 옛날부터 광란적 방식으로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예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인격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 형식이나 찬송이 세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는 보다 정숙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23절에도 두 번 그런 호칭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그가 만물의 근원이 되심과 그의 권위와 위엄, 또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아버지이신 동시에 자녀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역대하 15:3은 “[북방]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다”고 말했다. 그들이 앗수르에 멸망하여 온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이 남아 있었다.

또 이사야 2:2-3 같은 성경은 구원이 유대 땅에서 나올 것을 암시하였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 . .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참된 예배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께서 참된 예배자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는 형식적 혹은 위선적 예배자들도 있음을 암시하신다.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예배 방식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이다. ‘신령’이라는 원어(프뉴마)는 ‘영’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인간의 영을 다 가리킬 수 있다. ‘신령으로’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도 되고 ‘심령으로’라는 뜻도 된다. 또 ‘진정’이라는 원어(알레데이아)는 ‘진리, 진실’을 다 가리킬 수 있다.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라는 뜻도 되고 ‘진실하게’라는 뜻도 된다. 둘 다 좋은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하고,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드려져야 한다. 형식적, 가식적, 위선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참된 예배가 시행될 시기는 ‘이때’ 곧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된 신약시대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상징적 형식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예표하였다. 그러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제 우리의 예배는 단순히 외형적, 형식적 예배가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나 의복의 단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는 깨끗하고 조용한 장소이면 족하고 단정한 복장이면 족하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소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로,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영은 물질이 아니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실체이다. 영은 기운이나 에너지 같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장소 치장이나 의식 단장에 힘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성령의 감동을 구하며 진리의 말씀에 입각해서 드려야 하며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드려야 할 것이다. 또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자유로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십자가 공로를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25-26절]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자에게 메시아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무지와 고난의 긴 과정 속에서도 이런 깨달음과 소원을 주셨다. 과연, 메시아께서 오셔서 속죄사역을 이루심으로 예배의 참된 방식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그 여자에게 증거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예배의 장소나 시간이나 형식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 공로와 그의 완전한 의 안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릴 것이다. 우리는 다 참된 예배자들이 되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수가성 여자에게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갈망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그리스도임을 그 여자에게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들의 첫 번째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다(요 20:30-31). 또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증거들을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증거들에 근거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우리는 이제 이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27-42절, 수가성 사람들의 구원

[27-29절]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제자들이 예수께 묻지 않은 것은 그를 신뢰하고 경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는 물긷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메시아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그 놀라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과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메시아의 발견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가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 즉 신적 구주가 아니고서는 한 사람의 과거를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30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수가성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했고 메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준비되지 않고서는 그 여자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들에게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람의 준비란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3-6).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31-34절]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의 일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요한복음 6:3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행하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요, 그것은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만족이 없어야 할 것이다.

[35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전통본문)15)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유대 땅에서 추수는 4월 초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월 말에는 밀 추수가 시작된다. 추수 시기는 산지나 들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수는 보통 8월 말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추수하기 넉 달 전은 12월이나 1월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은 요한복음 2:13에 언급된 첫 번째 유월절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4월 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22에 “이 후에[이런 일들 후에]”라는 표현에서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 이 말은 요한복음 5:1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을 또 다른 하나의 유월절로 볼 수 있게 만들며 예수님의 전도사역의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만든다. 물론 그 명절을 오순절이나 초막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 해도 유월절이 하나 생략된 것이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이 된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이다. 곡식 추수는 넉 달이 지나야 하지만, 영적인 추수는 이미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뿌리는 자는 모세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씨를 뿌리는 자들이었다. 거두는 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켰다. 씨를 뿌리는 일도 있고 곡식을 거두는 일도 있다. 물론 그 둘은 다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일꾼들은 그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했다(고전 3:8). 거두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이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37-38절]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두는 일을 할 것이다. 이미 앞서간 자들은 심는 일을 많이 하였다. 세례 요한도 심는 일을 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을 거두러 보냄을 받았다. 물론 거두는 일도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이 심느라고 노력한 그것들을 이제 거두게 될 것이다. 심는 자도, 거두는 자도 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전도사역은 심는 일과 거두는 일을 다 포함한다. 심어야 거둘 것이 있다. 그러나 심는다고 금방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39-42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전통본문)16)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수가성에는 낫만 대면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자의 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므로 거기서 이틀을 유하셨고 그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았다.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준비된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믿고 구원을 받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자.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전도의 임무를 부탁하셨다.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다. 그것은 전도와 참 교회의 건립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참 교회의 건립이 오늘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의 첫 번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게 된 과정을 간증함으로 우리의 이웃을 구원하자. 개인의 간증은 구원의 가교 역할을 한다. 간증은 좋은 전도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지 사실 그대로 우리의 이웃과 친지들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책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성경적 설교를 듣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할 수 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사람들과 만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43-54절,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

[43-45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는 수가성에 이틀을 유하셨고 그 후에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원문에는 44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전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었고 그래서 유대 땅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갈릴리에서도 자신을 증거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이르시자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명절은 요한복음 2:13, 23에 언급된 유월절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며 여러 가지 표적들을 행하셨다(요 2:23). 그는 그 후 유대 땅에서 약 8개월 가량 지체하신 것 같다.17)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그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그 후에 시작된 것 같다.

[46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사도 요한은 포도주 기적의 확실함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왕의 신하인 한 사람이 있었다. ‘왕의 신하’라는 헬라어(바실리코스)는 ‘왕에게 속한 높은 관리’를 가리킨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고 아마 부유한 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었다.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경유하여 약 40킬로미터18) 정도 되는 거리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가나에 있었으나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것 같다. 49, 51절에 ‘아이’라는 말(파이디온)[어린아이]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던 것 같다.

[47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가 예수님께 와서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기적 행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소문에 의해 예수께 대한 약간의 믿음이 생겼다. 물론 그 믿음은 아직 매우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고 아들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그는 갈릴리 가나에 오신 예수께 그 일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탄식어린 말투로 사람들 속에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신다.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의 수단이다. 그 왕의 신하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아마 예수께서 내 아들을 고쳐주시면 그를 믿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49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 신하는 자기 아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확신한 것 같지는 않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로 확신하였다면, 아마 한 백부장처럼 “주여, 말씀으로만 하소서. 그러면 내 아이가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수고스럽게 그의 집까지 내려오시기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굳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5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7).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씀을 믿고 갔다. 그가 갔다는 것은 말씀을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가 믿지 못했다면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으로 갔다.

[51-52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7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제7시는 오후 7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어제 제7시’라는 말은 그가 밤을 지나서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종들을 만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인하였고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였다.

[53-54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 신하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체험하였고 그와 그 온 가족이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이런 일들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요 20:30-31).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서 고상하고 부유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게 된 아들처럼, 세상에는 죄로 인해 지옥에 던지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던지우기 전에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의 병고치시는 일은 그 왕의 신하와 그 온 가족들이 그를 믿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육신적으로 죽을 병자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가 아니고, 마귀의 종이 되어 죄만 짓던 자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고 영생할 의인을 만드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셋째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왕의 신하는 단지 아들의 병고침을 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 믿음에는 세 단계가 있어 보인다. 첫째는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간청하였다. 그의 믿음은 비록 약해도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간구하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갔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믿을 수 있다. 셋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와 그의 온 가족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를 확신할 수 있다.

 

 

5장: 생명의 주님  

1-18절,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라는 원어(메타 타우타)는 ‘이 일들 후에’라는 뜻으로 시간의 상당한 경과를 나타낸다(요 3:22; 6:1; 7:1 등). ‘유대인의 명절’은 아마 유월절일 것이다.19) 유월절은 유대인의 절기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절기이며 또 겨울이 지난 다음에 맞는 첫 번째 큰 절기이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들을 생략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들을 증거한다.

[2-4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20)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21)

‘베데스다’는 아람어(벧 케스다)로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행각’ 혹은 ‘주랑’은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 있는 방을 가리킨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일은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베데스다 못은 과연 하나님의 자비의 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긍휼이 많으시나, 웬일인지 병고침을 사모하는 자에게 한 사람씩만 허용하셨다.

[5-7절] 거기 38년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된 병자는 일생의 거의 절반을 그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 그는 병 낫기를 사모하였으나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좌절하고 낙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는 베데스다 못의 움직이는 물보다 더 놀라운 자비의 구주이시다. 그는 그의 영육의 모든 문제를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8-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38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내게 하시는 치료의 말씀이었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그는 38년 동안 익숙했던 자리를 치워버렸다.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하였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충분히 증거되었다.

[10-13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유대인들은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다. 그 날은 온종일 휴식하며 노동이나 세속적 업무를 하지 말아야 했다. 그 날 온종일 쉬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모이기 위해서이다. 공적 예배의 시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병자가 고침을 받아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의 행각에 있을 것이 아니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주일에 영혼 구원의 일, 즉 전도의 일을 할 수 있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죄와 병은 관계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왔다.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4는,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 고침받은 병자는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 했다. 만일 그가 다시 죄를 지으면 그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었다.

[15-18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핍박하고 죽이려 한지라].22)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 즉 전도하는 일이다(막 1:38).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인해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는 그가 안식일만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신적 구주께서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38년된 병자도 쉽게 고쳐주셨다. 그는 몸의 병뿐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38년된 병자를 쉽게 고쳐주셨다. 그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그는 38년보다 더 오래된 인간의 뿌리깊은 죄병을 고쳐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단번에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구주이시다(롬 3:24). 구원은 궁극적으로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롬 8:30).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5-13).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삶이다. 그런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요 중생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시하셨다. 유대인들은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하였다.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의 참된 신성을 밝히 증거하고 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찬송하며 경배한다.

 

19-29절, 아들의 살리시는 사역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거짓말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진리를 말씀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종종 내려보내셔서 베데스다 못의 물을 동하게 하셨고 그때 그곳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보셨고 이제 자신도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이었다.

[20-21절]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하실 것임이니라](원문). [이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살릴 것임이니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신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사랑의 관계이다. 삼위는 세 인격으로서 서로 사랑하신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또 아버지께서는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이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 곧 중생(重生)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말은 예수께서 주권(主權)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보인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7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중생 곧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요 몸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다. 사람의 영혼이 살아야 장차 몸도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은 사람의 영혼을 먼저 거듭나게 하시고 후에 몸도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

[22-23절] [이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맡기셨음이니](원문)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판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이며, 또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보내신 아들을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아들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하신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은 그의 인격과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의 인격과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얻었다’는 원어는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KJV, NIV). 이것이 ‘의롭다 하심’의 복음이다.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메타베베켄)는 말씀은 구원의 확실성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일치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완료시제)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완료시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오켄)(완료시제).”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24)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며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하신다. 주께서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은 구원의 현재적 측면인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한 중요한 단계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다(엡 2:1). 그것이 거듭남이다.

[26-27절]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주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또 사람됨을 인하여 심판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가 한 사람인데 많은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으셨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사람 살리시는 사역의 목표는 몸의 부활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무덤들은 다 열리고 시체들은 부활할 것이다. 장차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이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할 것이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하나 믿음의 증거로서 중요하다. 믿는 자는 죄 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는 다니엘도 증거하기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단 1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영생하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생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죄인들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은 성도가 단지 미래에 얻을 것이 아니고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가 그 믿음 안에 거한다면 그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롬 8:1).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그 누구도 취소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 구원을 결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소망하자. 28-29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성도들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도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 순종과 선행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경말씀을 순종하며 선을 행하다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47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

[30-32절]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께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항상 일치되게 판단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즐거이 복종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듯이, 그의 심판은 항상 바르고 정당하시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지금 단지 자신에 대해 주관적 증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증거할 뿐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지 못하겠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시며 그의 증거는 참되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의미하신 것이다.

[33-35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그 빛을 기뻐하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 요한은 ‘그 진리’(테 알레데이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언급하신 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유대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켜서 비취는 등불과 같았고 유대인들은 그 빛을 기뻐하였다. 바로 그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자’ (요 1:33), ‘하나님의 아들’(요 1:34)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36-38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役事) 곧 나의 하는 그 역사(役事)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자신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가 분명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에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실 일들을 가리킨다. 그 일들이란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가리킨다. 그 일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할 것이다(요 20:30-31; 행 17:31; 롬 1:4).

또, 예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그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온 사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마태복음 3:16-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기록하였다.

[39-43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니라](KJV).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고 있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다. 누가복음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풍성하다. 그것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들, 예수께서 친히 이루실 일들(기적들, 죽으심, 부활), 하나님 자신의 증거,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들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믿기를 원치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교훈하는 자를 영접지 않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와서 자기 사상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를 영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 가운데서는 이단들이 영접을 받을 것이다.

[44-47절]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상적 영광, 즉 인간의 칭찬과 세상적 자랑을 구하였다. 그것은 교만과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누가복음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세는 율법에서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절기들, 할례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들도 믿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는가? 오늘날도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증거들은 풍성하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들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였다. 둘째는 예수께서 이루실 일들, 즉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실 속죄사역의 증거이다. 특히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증거이다(행 17:31). 셋째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 3:16-17). 넷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한다. 사도 바울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했다(딤후 3:15).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풍부하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 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그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영적 어두움과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부귀, 명예,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며 성경말씀을 사모하며 읽고 듣고 배우며 묵상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따라야 한다.

 

 

6장: 생명의 떡  

1-15절, 떡과 물고기 기적

[1-3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그 후에’라는 말(메타 타우타)[이 일들 후에]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을 나타낸다. 5:1의 ‘유대인의 명절’을 유월절로 본다면, 1년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을 말한다.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눅 5:1)라고도 불리었다. 그 바다는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 동서로는 가장 먼 곳이 약 12킬로미터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9:10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 동네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동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큰 무리가 그를 따랐다. 그것은 그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9:11은 예수께서 그를 따라온 무리를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병 고칠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지 않고 몇 가지만 자세하게 기록했으나, 본문이 암시하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마 8:16; 9:35; 요 20:30; 21:25).

[4-7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전도사역 기간 중에 맞으신 세 번째 유월절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던 것 같고, 그 이유는 전후 문맥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요한복음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께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셨지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떡에 대해 말씀하셨다.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받을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2백 데나리온은 2백명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8-9절]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아이’라는 원어(파이다리온)는 ‘어린아이’라는 뜻이다. 한 어린아이가 안드레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주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그 떡이 ‘보리로 만든’(크리디노스) 떡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물고기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냥 물고기(이크뒤스)가 아니고 ‘작은 물고기’(옵사리온)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좀더 생생한 증거이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터인데 그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런 큰 믿음의 행위에서 일어났다.

[10-1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마가복음 6:39는 그곳에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가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5천명쯤 되었다. 마태복음 14:21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무리의 전체 수는 약 6천 내지 7천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떼어주시는 떡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떡을 바친 어린아이가 만일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다면 그는 무릎을 치면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였을 것이다. “아! 내가 바친 그 떡과 물고기가 줄어들지 않고 예수님의 손에서 자꾸 나누어져 나온다!” 그는 집에 돌아간 후에도 그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먹는 음식이 남았다고 그냥 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앉았던 장소라도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다. 믿는 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는데,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그 저녁에 주께서 행하신 떡 기적은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한 풍성한 기적이었다.

[14-15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 선지자’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신 18:15).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그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셨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였던 것 같다. 사회적 평안과 물질적 유여함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죄 문제이다. 죄는 불행의 근본 원인이다.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참 평안과 행복이 없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를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가 거기에서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마 14:23; 막 6:46).

예수께서 행하신 떡과 물고기 기적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을 뿐 아니라, 풍성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하셨다.

떡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람으로서 이런 기적을 행한 자가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육신적, 물질적 차원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있었다. 그는 그를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무리들을 피하셨다. 그는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고 그보다 더 근원적 문제인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교회는 단지 세상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진리의 교훈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 존재한다.

 

16-29절,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16-18절]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갈릴리 바다 북동쪽의 벳새다 언덕에서 떡 기적을 행하신 후 날이 저물었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갔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는 중에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 그들은 큰 바람과 풍랑으로 인해 괴로이 노를 저으며 고난을 당하였다. 바로 몇 시간 전 놀라운 떡 기적을 보며 기뻐하였는데 그 밤에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고생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떡 기적으로 가슴 부풀었을 제자들이 큰 바람과 풍랑으로 두려워하며 당황하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다. 제자들은 이런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쉽고 안이한 삶을 살지 않고 기쁨과 슬픔, 평안과 고난을 번갈아 만나게 될 것이다.

[19-21절]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은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갔다. ‘십여리’라는 원어는 ‘25 내지 30스타디온’이라는 말인데, 약 5-6킬로미터의 거리이다. 그때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때가 ‘밤 4경쯤’이라고 말하는데, 밤 4경은 새벽 3-6시이다. 아마 제자들은 큰 바람과 파도와 씨름하느라고 여러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그 힘든 시간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이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바다 위로 걸어오는 물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그가 예수님인 줄 확인하고 그를 기쁘게 영접하였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은 기뻐서 그를 배로 영접하였고 배는 곧 그들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확실히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역사상 바다 위로 걸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몹시 힘들어하던 그 밤에 비상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기적이 확실함은, 첫째로 그 밤에 제자들만 배 타고 떠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둘째로 제자들이 10여리쯤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는 사실과, 셋째로 제자들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넷째로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 기쁘게 영접했다는 사실 등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그 밤에 그 배에 탔던 제자들은 다 이 사건의 증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마 14:33). 떡 기적과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2-25절]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그의 제자들이 탔고](전통본문)2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본문은 예수께서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실 수 없었고 오직 바다 위로 걸어서만 가실 수 있었음을 증거한다. 디베랴는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 중부의 도시이었다. 무리가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자기들의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그를 만났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찾고 그에게 나아오려는 열심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온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동기로,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바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26-2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人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단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늘도 그런 기적의 떡을 먹을 것을 기대하며 온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떡은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결국 다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부귀영화와 그 모든 즐거움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요일 2:17). 사람은 떡을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결국 늙고 병들고 쇠하고 죽고 만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허무한 데 두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도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물질의 복이나 육신의 건강과 행복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들은 썩는 양식이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국 다 없어지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영원하시며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벧전 1:23-25).

[28-29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누구든지 그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무엇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인가?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그러하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 전도서가 강조해 증거한 대로, 세상의 모든 것, 곧 해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벧전 1:24-25).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교훈대로(요일 2:15),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인 줄 알고 성경말씀을 사모하고 귀히 여기며 힘써 믿고 그 명령과 교훈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첫째로 여기며 믿는 일을 가장 크게 여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매우 귀히 여기고, 또 성경말씀 받는 일을 매우 귀히 여기며 사모하며 힘쓰자.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믿음의 일, 말씀 순종의 일, 성화를 이루는 일은 영생에 이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일을 첫째로 귀히 여기며 믿음과 순종의 일, 그리고 성화의 일을 위해 힘쓰자.

 

30-40절, 내가 곧 생명의 떡

[30-31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벳새다 들판에서 기적의 떡을 먹고 그 다음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모여온 무리에게 예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시자(요 6:27-29),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들의 질문에는 여전히 떡 기적 같은 물질적 기적을 구하는 기적주의적 생각이 있어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가 그를 믿을 만한 어떤 표적이 있는가?” 물론, 성경에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들을 사람들에게 주셨고 그것들을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를 확신할 수 있다.

[32-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사람은 날마다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않은 떡,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그 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물질적 떡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었다.

[35-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가? 그것은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에 온 것이다. 죄가 없는 천국에서는 죽음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의(義)를 이루셨고(롬 10:4) 이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입혀주심으로써(롬 3:24) 그를 믿는 자들이 죽지 않고 살며 죽어도 다시 살게 하셨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마르면 결국 죽지만, 예수께 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떡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를 눈 앞에 모시고도 그를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왜 생명의 주를 보고도 믿지 않는가? 사람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관련된 한 진리를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표현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됨을 증거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주시는 자들이 주께로 올 것이며 주를 믿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자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말씀은 구원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제한된 자들의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선택의 진리를 보인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는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멸망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택함을 받은 자들, 그 제한된 수의 사람들은 다 예수께로 올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가 없을 것이다. 또 그 구원은 불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또 완전하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증거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결코 거절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38-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었다.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택한 백성을 다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구원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반복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를 믿을 것이며 그들은 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것이며 또 마지막 날에 다 영광스런 몸, 곧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할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일시적인 것들, 곧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돈이나 세상 영광이나 육신적 쾌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썩어질 것들이며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썩어지고 없어지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것 곧 천국과 영생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보내주신 생명의 떡이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 곧 만세 전에 선택된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올 것이며 그를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려두셔서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고 이 생명의 떡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욱 굳게 서자.

 

41-51절,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41-42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앞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즉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나타내고, 또 그가 단순히 땅에 속한 자 즉 인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 즉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는 요한복음 초두에 증거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자’(요 1:14) 즉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한다고 수군거리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어릴 때부터 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그의 부모도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를 신적 존재로 인정할 수 없었고 수군거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롬 1:29).

[43-44절] [그러므로]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로 올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미니안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경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구주이시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시작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이끄실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로 나올 수 없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신적 구주이신 그가 친히 부활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장차 심판의 때가 있는데, 그때 믿는 이들에게 영광스런 부활이 있을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성도들에게는 복된 부활이 있고 그 후에 영생이 있다. 성도의 영생은 다시 죽지 않는 복되고 영광스런 삶이다. 이 부활과 영생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복된 소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13).

[45-46절]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그러므로](전통본문)27)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말을 구약성경 이사야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거나 육신의 귀로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심으로 심령으로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신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온 자’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믿는다.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즉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 구주이심을 믿는다.

[47-5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전통본문)28)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떡은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으나 그들도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 즉 신적 인격인 떡이시며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떡이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떡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소유하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었다(요 5:24).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가 줄]29)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본장에서 여러 번 자신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32, 41, 42, 50절).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암시한다. 그는 땅에 속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신적인 구주, 곧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시다. ‘산 떡’은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즉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택한 백성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온 자이시다. 그는 이 땅에,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하늘에 속하신, 본래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신 분, 즉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놀라운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끄실 때 구주 예수께로 나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은 그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그에 의해, 또 성령에 의해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 자신의 죄인 됨과 구주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만일 그가 이끌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저 유대인들처럼 수군거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거절했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영생의 구원은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 영생을 얻은 것을 가장 큰 행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다. 또 이 구원에 무엇을 더할 것이 없는 줄 알고 항상 만족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답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52-59절, 속죄 신앙

[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는 앞절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살을 줄 것이라고 암시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곳에는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의견 충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말하였다.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人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의 말씀의 진리성을 한번 더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자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영과 육체를 가진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을 가지셨으므로 물질적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실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19-20). 그것은 구약 제사 제도를 생각하게 한다. 구약의 짐승 제물은 피를 흘려 죽고 불태워졌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 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는 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원리이다(레 17:11).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매우 강하게 들리지만,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 곧 속죄 신앙을 가리켰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 음식이 우리의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듯이, 우리가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신다. 속죄 신앙은 성찬식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속죄 신앙은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 바르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의 길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믿음이다. 속죄의 주님이 없이는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참 믿음은 속죄 신앙이다. 속죄 신앙은 영생에 이르는 신앙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54-55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참으로](전통본문)30)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참으로] 음료로다.

속죄 신앙을 가진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신자도 불신자처럼 죽어 장사되지만 신자는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다(고전 15:51-52).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양식과 음료는 우리를 죽지 않게 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는 양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양식과 음료이시다. 세상의 모든 양식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는 양식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시는 양식이다. 이 세상에 영생의 양식과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56-57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께서는 또 영생의 이치를 연합의 원리로 보충하여 설명하셨다. 그는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안에 거하고 그도 저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연합의 관계를 묘사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이런 연합 속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그로 인하여 생명을 누리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 즉 그를 믿는 사람은 그로 인해 살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58-59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시다. 그는 신적인 떡이시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고 영생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신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이었다. 그 기적과 그 말씀의 내용은 제자들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행하신 기적이며 그가 친히 그 입으로 하신 진실한 말씀이며 확실한 진리이었다.

본문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영생의 양식이시다. 밥과 물은 우리로 죽지 않게 못하는 양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시다. 그가 우리의 참 양식과 음료가 되시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통해서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신 의(義)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생의 양식이시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복된 영생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영생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셨다. 인간의 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생과 부활에 있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다.

셋째로,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을 얻는다(요 3:1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신적 구주의 대속(代贖) 사역을 믿는 것, 곧 속죄 신앙을 가리킨다(롬 3:21-25). 속죄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복된 신앙이다.

 

60-71절,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60-62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중에 여럿이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말씀은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생기는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은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그의 말씀의 진리성을 좀더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천국에 있었다는 사실과 또 얼마 후에 자신이 이전의 있던 곳으로 올리울 사실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이시라면,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없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 곧 신적인 인격이시므로 그의 말씀은 진리이다.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살리시는 자는 성령이시니](NASB, NIV)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말들](원문)이 영이요 생명이라.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물질적인 떡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살리시는 일에 대해 말한 것임을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육은 본래 생명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산 자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영혼이 죽었다. 그 죽은 영혼은 육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으로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육은 무익하다.

예수께서는 신적 영과 인간의 영육이 결합된 자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피 흘리심은 대속(代贖)의 가치를 가진다. 그의 신성이 그 고난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 죽음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도 무한하다. 그의 영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그는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한 그의 말들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과 동일시된다. 그의 말씀들은 영 곧 생명 원리이며 사람들에게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실상 생명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은 그의 신성(神性)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실 뿐이라면, 그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며 사람을 살릴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말씀은 생명이 되는 것이다.

[64-65절]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그에게 ‘주여, 주여’ 하고 말한다고 다 믿는 자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나온다고 다 믿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다 아셨다. 그는 실상 태초부터 그들을 다 아신다. 이 지식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종말의 일을 태초부터 말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사 46:10). 제자들 중에도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그를 배신할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람이 예수께 나올 수 있고 그를 믿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다(롬 9:16). 그가 긍휼로 택하신 자들만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66-69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전통본문)31) 믿고 알았삽나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나뉠 것이다. 쭉정이와 알곡, 곡식과 가라지, 양과 염소, 즉 중생한 자와 중생치 못한 자는 나뉠 것이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수를 비교하면, 구원받은 자는 다수가 아니고 소수일 것이다. 중생한 자만 주를 끝까지 따를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의 주요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핵심적 이유는 그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생이 있고 그에게만 영생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요 곧 영생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요 14:6).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다른 길을 인류에게 주신 적이 없다(행 4:12).

[70-7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시몬의 아들 가룟인 유다](전통본문)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마귀’라는 헬라어(디아볼로스)는 ‘훼방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과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하고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유다는 주 예수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모든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성을 확인할 모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배반했다. 여기에 사람의 심각한 무지와 완고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있다. 또 물질에 대한 욕심은 그의 무지의 한 원인이었다.

본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믿는 자는 어떤 자인가? 믿는 자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 즉 그의 신성(神性)을 믿는 자이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승천으로 장차 확증될 것이다. 그의 신성의 영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 영생의 말씀이 있고 그에게 영생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은혜를 주지 않으신 자는 아무도 예수께 나와 그를 믿을 수 없으나, 그가 은혜로 택하신 자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또 그를 믿은 자들만 끝까지 그를 따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를 따르는 것 같은 자들 가운데 그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 말씀을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적 구주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갈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7장: 생수의 강을 주심

1-13절, 인간의 무지와 불신앙

[1-2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은 5장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의 명절 때 예루살렘에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때 이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 그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다니기를 꺼려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다. 요한복음에 ‘유대인의 유월절’(2:13; 11:55) 혹은 ‘유대인의 명절’(5:1; 6:4; 7:2)이라는 표현은 이 책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음을 보인다. 본장은 6장의 사건보다 6개월 후의 일들을 쓰고 있다. 앞장의 떡 기적 사건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의 일이었다(요 6:4). 유월절은 유대 달력으로 1월 14일이고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한 주간 동안이므로 6개월 간의 간격이 있다. 요한복음은 그 6개월 간의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생략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생애 가운데서 매우 제한된 내용들만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3-5절]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는 동생들이 있으셨다. 그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이었다(마 13:55; 막 6:3). 그들이 예수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말한 것은 그 형제들이라도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그와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이나 그의 메시아 사명을 알지 못하였고 그가 마치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그의 동생들이라도 그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단순히 성도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사람은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야 사람이 그에게로 나올 수 있다(요 6:44, 6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말하기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있다.

[6-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그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면, 그들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그릇되이 칭찬하지 않으셨다. 그는 공의로 말씀하셨다. 그는 선과 악을 구별하셨고 선을 선이라고, 악을 악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것들, 즉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선하게 보였으나, 속에는 온갖 탐욕과 미움이 가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 언행을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였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고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이는]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7-8).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아야 하고 거기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10-13절]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의 견해가 가능할까?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항상 이런 현상이 있었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라고 인정을 받았으나 불경건한 대중들에게는 배척과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도 무리들 가운데는 그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주의 귀한 종이라고 인정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를 교인들을 속여서 자기 사람이나 만들고 그들에게서 이득이나 얻으려 하는 자라고 비방하고 핍박하였다(고후 12:16-17).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에 대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라고 증거했다(고후 6:8).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이런 잘못된 견해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無知)와 완고함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를 증거한다. 예수님의 동생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를 무리를 미혹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선한 분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런 잘못된 견해가 가능한 것은 사람들의 무지와 완고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찾지도 못한다. 그래서 로마서 3:11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도행전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이 참된 회개와 믿음을 가지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의 어두움과 무지와 완고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또 우리가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부르시며 그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4-24절, 예수님의 교훈

[14-16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초막절은 7일간 지킨다(레 23:34). 연중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는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했다(출 23:17).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 초막절 중간에 성전에 들어가셨다. 여기에서 성전은 성전의 뜰을 가리킨다. 일반 사람들은 성전 뜰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고, 성소 안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유대인들은 그에 대해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마 13:55) 혹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막 6:3)로 불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나 회당에서 배운 것 외에 따로 배우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가르칠 능력은 누가 주시는가?(출 4:11-1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안다면 그의 지혜로운 가르치심에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하나님의 지혜와 힘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의 교훈은 곧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 특별계시이다(히 1:1-2). 그의 말씀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말씀들보다 더욱 권위를 가진다. 그는 자신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28,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복음 14: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24,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7-18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사람의 본성의 무지와 죄악 때문에,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면 죄악되고 허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 즉 경건과 의와 선을 구하면 자신의 죄악되고 허무함을 깨닫게 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인 줄 알고 그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고(잠 2:4-6) 자기 속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義)가 없음을 깨닫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마 5:3-6)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고 그를 알고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거짓 교사와 참된 교사를 분간할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말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만 구할 것이다. 거짓 교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교사이시다. 그는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며 그 속에 불의한 것이 없으시다. 여기에 참 제자의 모습도 있다. 참 제자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님을 따른다(눅 9:23).

[19-20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모세가 기록하였다(신 31:24; 수 1:7). 우리는 모세오경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의 진실성을 믿는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불경건과 부도덕은 사람을 영적 무지와 흑암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으로 악을 생각하고 악을 말하고 악을 행하게 만든다. 악은 불경건하고 쾌락적이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남을 해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경건하시고 진실하시고 남에게 유익을 주시는 선한 자이시다. 유대인들이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악하다고 책망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를 책망하시는 것은 선한 일이다. 죄의 책망이 사람을 회개시키고 하나님께로 오게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요 5:16, 18) 마침내 그를 죽였다.

[21-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한가지 일이란 여러 달 전 명절 때 안식일에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의 한 행각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그 일 때문에 그를 이상하게 여겼고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일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선한 행위는 오히려 그의 교훈의 진리성을 확증하였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표이었지만, 모세 때에 율법으로 규정되었다. 레위기 12:3에는,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제8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다(골 2:11-12). 그것은 죄씻음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을 상징한다. 할례 시 남자 아기 고추의 살가죽 끝을 자르는 것은 인간의 죄성을 잘라버리는 뜻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의 전신, 즉 영육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건전케 하셨다. 그의 병고치심과 구원은 할례보다도 더 나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큰 죄악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해야 했다. 그들이 병고침과 구원의 선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비방하고 죽이려는 것은 심히 악한 일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의 교훈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영생의 말씀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는 예수님의 교훈의 참됨을 깨닫는다. 기독교는 단순히 이론의 종교가 아니다. 사람은 실제로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철저히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고 믿고 구원을 얻고 그를 따르게 된다.

셋째로, 예수님의 병고치신 일들은 그의 교훈이 참되고 믿을 만한 선한 일임을 보인다.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신 일들을 통해 그를 믿고 그의 모든 교훈을 믿고 구원받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25-53절, 내게로 와서 마시라

[25-27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루살렘 사람들 중 일부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악한 자들의 악한 계획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드러난다. 또 사람들이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말한 것은 그의 육신적 출생과 자란 배경을 두고 한 말이다.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 동네 출신이며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28-30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출생과 배경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을 어느 정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심으로 왔으며 자신이 그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잡고자 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 그때가 아니면, 사람의 악한 계획이라도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31절]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그의 행하신 표적들과 기적들은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상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만큼 기적을 행한 자는 없었다. 석가모니도 마호멧도 공자도 아니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충분히 증거하였다.

[32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마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우려하여 그를 잡으러 하속들을 보내었다. 예수님은 전도사역 초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셨다. 나사렛 회당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그를 동네 밖 산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었고(눅 4:28-29), 또 1년쯤 지난 때부터는 그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더욱 드러났고(요 5:16-18), 또 그가 죽으시기 6개월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

[33-3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그의 승천을 가리켰다. 그가 승천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또 회개치 않는 자들은 그가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고 그의 승천과 천국에 들어가심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은 초막절 끝날 곧 거룩한 대회로 모이는(레 23:36) 큰 날에 예수께서 사람들을 향해 하신 복된 초청이었다. 그의 초청에는 제한성이 없었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었다. 이 목마름은 정신적, 종교적, 도덕적 갈증을 가리켰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며 세상에는 왜 불행한 일들이 많은가? 인간은 왜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실상,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예수께서는 단순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셨다.

[38-39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그를 믿으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경은 구원을 물에 비유하였다(사 12:3; 35:6-7; 41:18; 44:3; 55:1). 이사야 44: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神)[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구원은 갈한 영혼에 시원한 물과 같다.

사도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예수 믿는 자들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린다는 말씀은 그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 속에 계셔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신약교회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시는 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신자들 속에 메마름이 없는 풍성한 은혜이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필요한 영적 은혜를 날마다 공급하신다.

[40-44절]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그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또는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심령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믿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했다. 무리 중에서 예수님을 인해서 논쟁이 일어났다.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손을 대는 자는 없었다.

[45-46절]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왔고 자기를 믿는 자는 목마름을 해소할 것이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했다. 유대의 역사 속에 그렇게 말한 자는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도 없었다. 물론 거짓되고 부도덕한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양심적인 인격자들 중에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인생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욕심이며 그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가르쳤다. 이슬람교의 모하멧은 여섯 명의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될 뿐이다. 유교의 공자는 자기 자신과 가정을 다스리며 국가와 세계를 사랑과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조로아스터는 단지 자신을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라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한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47-49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미혹되었다’는 말은 ‘속임을 당하였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무리를 속이는 자이셨는가?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타당성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될 수 없다. 또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이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께서는 성경으로 자신을 증거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예언들과 예표들을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다(눅 24:27).

[50-53절]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유대 지도자들이 성경대로 판단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판단하기 전에 그의 말에 어떤 거짓이나 잘못이 있는지, 또 그의 행한 바들에 어떤 도덕적 악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경적 판결을 하는 자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들이나 행동들에는 정죄받을 악이 없었다. 단지 그들에게는 갈릴리 지방에 대해 멸시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정당하지 않았다. 요나는 갈릴리 출신이었고(왕하 14:25; 수 19:13) 나훔도 그러한 것 같다. 확실히,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무지했든지, 의도적으로 성경을 왜곡하였다.

25절로 53절까지의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유대 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셨지만, 실상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자이시며 그의 근본은 영원 전부터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신성을 가지신 자이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자이심을 아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심과 같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자마다 그에게 나아와 생명수를 마셔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목마름이란 인간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죄와, 고통과 불행과 허무, 그리고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들로 고민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생의 영적 목마름을 단번에 해소하시는 구주이시며, 또 그는 그를 믿는 자가 성령을 받음으로 영원한 위로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는 자이시다. 구원은 죄인들의 마음에 있는 갈증을 참으로 해소시키는 것이며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는 일이다.

셋째로, 인류 역사상 예수님처럼 말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죄와 불행과 죽음의 문제의 해결자라고 말한 자는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거짓되고 부도덕한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나, 양심적인 인격자들 중에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석가모니도 모하멧도 공자도 조로아스터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하신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자이시며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실 유일한 구주이시다.

 

 

8장: 죄에서 자유케 하심 

1-11절, 간음 중에 잡힌 여자32)

[1-5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밖 동쪽에 있는 산이다.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감람산에서 기도하며 지내셨던 것 같다. 그는 항상 기도에 힘쓰셨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자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며 예수께 말했다.

잡혀온 여자는 간음죄를 범했다. 죄는 부정당한 욕망에서 나온다. 밥을 먹고 싶은 욕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음식을 탐하여 도적질하면 죄가 된다.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간음하면 죄가 된다.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부부관계의 성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사랑의 수단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죄가 된다. 간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마태복음 5:28-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6-8절]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까닭 없이 예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큰 죄악이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만 죽을 죄인이 아니고 예수님을 정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죽을 죄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속히 대답하지 않으신 채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고 계셨다. 아마 그는 하나님의 율법도 지키고 그 여인도 구할 길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들은 묻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동시에 그 여인을 구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답이었다. 또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깨우치신 말씀이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간음죄를 지은 그 여인도, 예수님을 미워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죄인이었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9-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적 분별력과 판단력이다. 양심 때문에 사람은 악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그 형벌을 두려워한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느끼며 하나씩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일어나사 그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죽음에서 건져주셨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고 살리러 오셨다. 장차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의인과 악인,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심판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전통본문). 그러나 지금 그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단지 회개하라고 부르신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에서 돌이키고 죄를 청산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참된 회개이다. 회개한 자는 이제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였다(롬 6:17-18, 22).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 부르신 모든 사람은 모든 죄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거룩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그는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그는 지옥의 영원한 불에 던지우지 않고 의와 평화의 세계인 천국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1절로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은 죽을 죄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을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든지, 그를 붙잡아 와서 예수 앞에 두고 예수를 정죄할 거리를 찾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이든지, 방황하는 일반 대중이든지, 모든 사람은 다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죄인들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셨다. 그는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같은 죄인도 정죄치 않으시고 구원하셨다. 복음은 죄인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아와 그를 믿으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로 나온 자들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성도(聖徒, saints)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 의와 거룩 안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12-20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

[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전뜰에서 앉아서 무리를 가르치시던 주께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어와 그를 시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때문에 잠시 방해를 받으셨으나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나갔으나 그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슬픔을 상징한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이 될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였다(사 42:6; 49:6).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이다. 세상의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취고 있다. 그 빛은 영원한 생명의 빛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빛을 받아 영원한 생명의 복을 얻는다. 구원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3-14절] [그러므로](원문, KJV, NASB)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이는]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이 참된 것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사람 즉 신적 구주이시며 세상을 구원할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고 장차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증거는 사람들의 어떤 증거와도 같지 않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그 어떤 최선의 증거보다 더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거는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완전한 증거일 것이다.

[15절]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또 자신은 아무도 판단치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요 3:17). 예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16-18절] [그러나](원문)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아버지]33)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믿는다고 생각되었는데, 율법은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 하지 말고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가지고 하라고 했다(민 35:20; 신 19:15).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세상에 온 사실에 대해 율법의 요구대로 두 증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이시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또 그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셨다(마 3:16-17; 17:5).

[19절]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마 11:27).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의 지식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연보궤 앞은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아무것도 은밀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증거되신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신적 구주로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으시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으나 잡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으나, 아직 그를 해칠 힘은 없었다. 그것은 아직 그가 잡히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에 끝난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생의 기한이 있다. 그 기한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복잡한 세상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런 확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을 작정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또 구원과 영생에 대한 참 지식을 주셨고 죄인인 우리에게 의(義)를 주셨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아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다.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자는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았는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참 지식과 의와 기쁨을 얻으라. 또 우리는 이 빛을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자. 세상의 빛과 생명이신 구주께서 오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를 무시하고 그와 변론하며 그를 영접하지 않고 대적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멸시와 고난을 받으셨다. 그는 마침내 정죄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 이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었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서 칭찬과 영광을 기대하지 말고 또 자신의 자존심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멸시와 천대와 모욕과 고난을 받기를 각오해야 한다.

 

21-30절,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21절] [예수께서는]34)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즉 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하였다(7:33; 8:14). 그러나 유대인들의 다수는 그를 찾다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며 주께서 가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믿고 구원받는 것은 때가 있다. 때가 늦으면 구주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저버리면 다시는 회개치 못하고 믿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2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자살]하려는가?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살은 죄인데 주께서 자살을 의미했을 리가 없다. 우리의 목숨은 우리 것이 아니다. 특히 구원받은 성도의 목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전 6:19-20).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앞에서 그가 간다고 말한 것이 자살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으나 유대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셨다. 유대인들은 다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위에서 나셨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났다,’ ‘속한다’는 원어(에크 ejk)는 근원을 나타낸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그 근원이 다르다. 유대인들은 세상적 근원을 가지지만 예수님은 신적인 근원을 가지신다. 그의 신적인 근원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를 통해 특별하게 탄생하셨음을 포함한다(마 1:18; 눅 1:35).

[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의 신성(神性) 즉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신앙의 필수적 요소이다. 구원은 이 신앙을 통해 온다. 불신앙은 큰 죄악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죽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죄사함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이다(요 3:36).

[25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밤에 그를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그는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셨다(요 4:26). 그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요 5:17-18).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하셨다.

[26-27절]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마귀는 거짓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들도 다 진실하다. 그 내용이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외에도 말씀하실 것이 많으셨고 그가 더 많은 것들을 말씀하셨다면 그것들도 다 진리이겠으나, 적어도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은 다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人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유대인들이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는 그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를 알고 다 그를 믿지는 않을 것이나, 택한 자들은 그를 알고 믿게 되며 그의 말씀이 진리임도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 날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행 2:36-37, 41).

[29-30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께서](전통사본)35)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고 배척했으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와 함께 계시고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으셨고 배척을 받으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와 항상 함께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원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때가 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고 천국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나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신적 구주이시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과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구주이시며 어두운 세상에 빛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주의 간곡한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자. 예수께서는 유대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다른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인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이며 그들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며, 비록 세상에서 배척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며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1-36절, 죄로부터의 자유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먼저 참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이 그의 참 제자가 되려면 그의 말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에 거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제자는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 바대로 행하는 자이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인다(잠 10:8). 그것이 하나님의 참 백성의 모습이다. 그것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마 13:21-22),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눅 8:15). 참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붙들고 그대로 행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친히 하신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모든 말씀들을 다 포함한다. 그것이 곧 신약성경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바로 성경 교훈 위에 바로 선 기독교이다. 성경을 벗어난 말을 하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은 대략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성경보다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이며, 둘째는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은사주의이며, 셋째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은사주의를 포용하는 타협적 복음주의이며, 넷째는 성경적 교훈 안에 거해야 한다고 믿고 그대로 행하는 입장이다. 네 번째 부류가 참 기독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길은 좁은 길인 것 같다.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께서는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요 14:6) 그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이다. 구원의 복음이 진리의 말씀이다(엡 1:13). 복음의 요지는,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셨으므로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과 천국과 영생 소망을 주는 진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죄책(罪責) 즉 죄의 법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죄인이라는 신분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형벌 즉 영원한 지옥 형벌과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복음이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바울은 로마서 3:20-24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의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라도 신자를 정죄치 못하며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표현된다(롬 7:6; 갈 5:1).

물론, 성도가 죄의 세력 곧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땅 위에서의 성화는 불완전하다. 완전 성화는 부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義)는 무효화되지 않을 것이다. 의와 죄의 싸움은 있으나 최종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다시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성을 증거하고 있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영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몸의 질병이나 물질적 손실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깨달음도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교인들이 실제로 죄악된 일들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들은 저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구원 확신은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죄를 범하는 자는 죄성 즉 죄의 경향성과 습관성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형벌 아래 있다. 죄는 그의 육신의 욕망을 충동질한다. 모든 죄인은 다 죄의 종이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면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자는 누구나 죄로부터의 참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35-36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종과 아들의 신분의 차이는 크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 죄의 종인 사람은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실 수 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그의 참 제자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막연히 그를 믿는다는 생각으로 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 곧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모든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 길, 바른 길이며 성경적 기독교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감사함으로,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읽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리는 자가 되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는 죄성의 지배를 받고 죄의 형벌의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 즉 죄의 법적 책임과 형벌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 모든 신자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또 이 자유를 얻은 자마다 이제는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와 상관없이 살아야 한다. 중생한 자는 결코 계속 죄를 짓거나 계속 죄 가운데 낙을 누리지 않는다. 죄성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으므로 우리가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을 의지하며 의와 거룩의 길로 행해야 한다.

 

37-47절, 너희는 마귀의 자녀

[37-38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곁에서](원문)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아비와 함께, 아비 곁에서](전통본문)36)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약속된 메시아를 죽이려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요한복음 5장에서부터 요한복음 전체에 여러 번 증거되어 있다(5:16, 18; 8:37, 40; 11:5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며,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고 그의 신성(神性)도, 그의 그리스도 되심도 믿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나시기 전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하나님을 보셨다. 그는 천국에서 보고 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다 말씀하셨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비 곁에서 본 것을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아비란 그들의 육신적 아버지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근원적으로는 마귀를 암시한다. 주께서는 모든 죄인이 마귀의 자녀임을 암시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의 성질을 닮듯이, 모든 죄인은 그 죄성에 있어서 마귀의 성질을 닮았다.

[39-40절]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보여야 할 것이지만,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고 오히려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마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의 자손인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 대신 마귀의 형상을 닮은 자가 되었다. 사람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이 유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들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와 매우 달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께 들은 진리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하나님과 대적 상태에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시날 왕, 엘라살 왕, 엘람 왕, 고임 왕 등의 연합군을 파하고 조카 롯을 구하여 돌아올 때 자기를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10분의 1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한 한 예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였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는 매우 달랐다. 실상 그들의 아버지는 마귀이었다. 그들은 마귀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그들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신앙고백은 경건하고 좋아 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심령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심령 상태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었고 선함과 진실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 속에는 죄악된 욕심과 미움이 가득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42-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자녀가 아니며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고 하나님의 영도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깨달음이 없었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일에 대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증거하였다(고후 4:3-4).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거짓말쟁이]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께서는 보다 분명하게 그들이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그들이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마귀의 욕심은 교만과 명예심 등이며 거기에서 미움과 시기와 살인이 나온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 죽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다. 또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마귀 자녀임을 증거하였다.

[45-47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슨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마귀의 자녀들이라는 증거이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을 것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증거이었다. ‘속한다’는 원어는 ‘[에게서] 났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 난 자녀들, 곧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그들만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이었다.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43, 47절) 받지 않고(37절) 믿지 않고(45-46절) 예수님을 사랑치 않고(42절) 도리어 죽이려 하기 때문이었다(37, 40절). 오늘날에도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지 못하고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며 또 주께서 보내신 참된 목사들과 복음 사역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고 받고 믿고 따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모든 사람들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여러분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고 그 앞에 복종하기로 결심하며 실천하고 있는가?

 

48-59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48절]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유대인들이 그를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참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건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왔고(42절) 자신의 말이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46-47절)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고(행 24:5) 베스도 총독에게 미쳤다는 말도 들었다(행 26:24). 주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이라든가 귀신이 들렸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셨다면, 오늘날 주의 일꾼된 부족한 우리들이 그런 말이나 혹은 그보다 더한 말을 듣는다고 분노하거나 낙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49-5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께서는 바른 정신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하셨다면 그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바른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를 무시하고 모욕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구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가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셨다면 그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짓 선지자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으나 그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판단하시는 이가 계신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또 그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의 말과 행위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이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 말을 지킨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그의 교훈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인 죽음과 육신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성경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한다.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영생을 가리킨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의 말씀을 지키는 행위는 참 믿음의 증거가 된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며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순종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52-53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그가 말씀하신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단지 몸의 죽음으로만 이해하였고 또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54-5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과 구원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그 말은 별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구원 사역은 그의 아버지 곧 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가 증거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증거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알 뿐 실제로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신다. 실상 예수님만 하나님을 바르게 아신다.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특별히 친밀하며 신비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 되었다(롬 5:19).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는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언제,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가?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 당시에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으나,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37)

[57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때 예수님의 나이가 33세 정도이었을 텐데, 유대인들은 왜 그에게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말했는가? 물론 그의 얼굴이 실제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을지도 모르나 ‘네가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는 뜻일 것이다.

[58-5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나가시어 그들 가운데로 통과하여 지나가시니라](전통본문).38)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자신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셨고(선재성 先在性)과 영원하심,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있느니라’는 말씀은 구약에 ‘여호와’라는 명칭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직역하면 ‘나는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것은 ‘여호와’라는 말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설명이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그것은 출애굽기 3:14의 ‘내가 있느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는 자임을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신성을 소유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하였다. 그들의 영적인 눈은 아직 열려지지 않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바로 알자. 사람은 어머니의 배에 잉태된 날과 출생한 날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 즉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계 22:13).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51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요 3:16; 요 5:24; 엡 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은 그의 말씀을 행하는 바르고 거룩하고 선한 행위로 증거된다. 사람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선한 행위 없이 받는 것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열매요 증거와 표가 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자들은 이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이며 모든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9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1-3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길 가시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셨고 자신의 주된 사역이 병 고치는 일이 아니셨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일어난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 푸른 하늘과 산과 들, 각양의 동식물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자이었다. 세상에는 심신으로 병약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특히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많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으나, 죄와 질병은 흔히 관련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해 각종 질병을 당한다(신 28장).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약 5:16). 그러나 이 소경의 경우는, 자신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 받음으로 그를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하는 형제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당하는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내가](전통본문)39)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일반적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 인생에게 낮과 밤이 있다. 젊음도 한 때이며 평안한 환경도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만한 때에 시간을 아끼며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힘써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자신이 활동하는 때를 낮에 비유하셨다. 그는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잡혀 죽으실 때가 오며 그때는 밤 같아서 그가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6-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 소경을 고칠 수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그 소경으로 하여금 주께서 고치시는 것을 느끼게 하시고 또 그에게서 믿음과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 믿음과 순종이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했다. 그의 죽은 시신경이 되살아났다. 그 소경은 이제 보는 자가 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겠는지!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는 역사상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8-12절]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소경](전통사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소경은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증거하였다. 이 사실은 뒤에 15절에서도 또 증거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진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반복해 기록됨으로써 더 확실히 증거된다.

[13-17절]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신 것이 잘못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안식일은 죄로 인해 안식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참 안식의 예표이었다. 그 소경은 이제까지 참 안식을 모르고 있었고 마음에 늘 슬픔이 있었을 것이나, 병고침을 받음으로 큰 기쁨과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38절) 구원을 받았다고 보인다. 그 소경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그 소경에게 참 안식을 주신 것이었다.

[18-23절]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유대인들의 마음은 어둡고 강퍅하였다. 그들은 그 소경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은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속에 있었던 불신앙적 선입견은 그들로 하여금 명확한 사실 조차도 믿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불신앙적 편견을 버린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못된 선입견을 버릴 때에 어떤 사물이든지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믿을 수 있다.

[24-29절]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하였고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죄인인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이 죄가 되는가? 그것이 죄가 되려면,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또 예수께는 정죄받을 도덕적인 죄악이 없으셨다. 그는 참으로 정죄받을 일이 없으셨다. 불신앙은 명확한 사실에 대해 계속 의문을 일으킨다. 그들이 모세를 믿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참 선지자들은 그 교훈과 인품과 행위에 의해 그 진실성이 증거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참 선지자이신지에 대해 양심적 판단을 해야 하며 그를 무조건 거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어둡고 무지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를 정죄하였다.

[30-34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고침받은 그 소경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오히려 의아해 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확신하며 증거하였다. 평범한 그의 깨달음과 판단은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과 판단보다 더 타당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쫓아내어 보냈다. 인간은 전적으로 어둡고 부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무지함과 완고함이 제거되고 고쳐질 수 없다.

[35-38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하나님의 아들](전통본문)40)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프로스퀴네오)[경배하는지라](worship)(KJV, NASB, NIV).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한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 진리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셨으나 그것을 자신들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다(호 8:12). 그러나 그 소경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고 소경은 그를 믿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요 3:16, 36; 20:31).

또 그 소경은 예수께 경배하였다.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를 경배해야 한다. 그는 단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만이 아니시고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어떤 피조물도 경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외에 어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의 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5: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39-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께서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복음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이 된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두 부류로 나누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은 영적 소경인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암시한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소경이 고침받는 것과 같다. 우주와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삶의 목적도 방법도, 죽음의 이유와 그 후의 세계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던 자들이 구원을 받아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알지 못하고 본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적 소경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인생의 삶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돈을 버는 데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눈이 밝은 자들은 영적인 소경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주를 알지 못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마지막 심판 날을 대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고침받았던 그 소경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함을 이상히 여겼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혜롭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고, 소경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심령의 눈도 밝게 해주셨다. 그것이 주께서 하시는 구원의 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알고,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고, 천국과 영생을 아는 것이다. 주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신다(39절). 영적 소경들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의롭고 선한 길과 천국과 영생을 알아야 한다.

 

 

10장: 선한 목자 

1-21절, 나는 선한 목자라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세 가지 요점을 말씀하셨다. 첫째,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이다. 둘째,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고 앞서간다. 셋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도망간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백성 간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양의 문이며 또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증거하셨다. 그가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7-10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신 자들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켰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부류에 들 것이다. 그런 자들은 양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해 살지 않고 헛된 물질적 이익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들의 영혼을 살리고 건강케 하기보다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양의 문이시다.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들로 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성도의 신앙 인격과 삶이 강건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구원 얻은 양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양들의 우리이다. 구원 얻은 양들은 교회의 여러 모임들을 통해 영의 양식 즉 말씀의 교훈을 얻는다. 목사들은 성경적 교훈으로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교인들은 그 교훈으로 힘을 얻고 온전케 된다.

[11-12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이 말씀은 자신이 장차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9:12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4:9-10).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 그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며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 삯꾼은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결국 양들을 죽이는 자들이다. 목자와 삯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목자는 양을 위해 일하지만, 삯꾼은 오직 물질적 이익을 위해 일한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고 필요하다면 양을 위해 희생도 할 수 있지만, 삯꾼은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양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한 목자이시요 삯꾼이 아니시다. 또 그는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삯꾼이 아니고 선한 목자로 일하기를 원하신다.

[13-15절] [삯꾼이]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영혼들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들만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고 믿고 구원 얻고 그를 따를 것이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영혼 구원과 전도에 대한 그의 사명을 증거한다. ‘다른 양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으나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3:48은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민족이나 언어나 피부색의 구별 없이 그들은 다 한 교회가 되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아셨다. 그는 죽은 후에 다시 목숨을 얻을 것을 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주셨고 다시 얻을 권세도 주셨다. 그가 비록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지만, 죽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셨다. 그는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흘리시며 눈물의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셨다(눅 22:44; 히 5:7).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확신하셨고 그 뜻에 즐거이 순종하셨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그런 아들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으시겠는가?

[19-21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직분과 사명을 사실대로 증거하셨지만, 무리들 중 다수의 심령은 깨달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날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눈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양들은 그를 바로 알고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양들이 그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죄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왜 그가 선한 목자이신가? 그것은 그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이제 자기 양들을 아신다. 그는 자기의 양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셋째로, 우리는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양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한 우리에 들어가 한 무리가 된다. 참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 또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큰 목자이시고(히 13:20) 목자장이시다(벧전 5:4).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세우신 작은 목자들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충성된 목자들이 되어야 하고, 교인들은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몇 곳 살펴보자. 요한복음 21:15, 16, 17,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전통사본).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의 목자와 감독자로 세움을 받았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교인은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해야 한다. 히브리서 13:7, 1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교인은 목사와 장로들을 본받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22-42절, 양의 특징과 복

[22-26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41)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내 양에게 속하지 않으므로](원문) 믿지 아니하는도다.

수전절(修殿節)42)은 주전 165년 유대 지도자 마카비우스가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후에 성전을 정결케 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한 날로 유대인의 달력으로 9월 25일부터 8일간이며 우리 달력으로 12월 중순쯤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전도활동 초기부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 즉 그의 행하신 기적들이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앞에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선택의 진리는 두렵고 심오한 진리이지만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죄인들 중 어떤 자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엡 1:4-5; 딤후 1:9).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의 결과이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른다. 그를 따른다는 말은 그의 교훈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마음으로 이미 순종한 것이요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범사에 그를 순종할 것이다.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의 종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계명들에 순종한다.

[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복 중에 큰 복은 그가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 영생은 영원한 삶이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영생을 얻은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실상, 영생은 온 인류가 사모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요일 5:13).

예수께서는 또 그가 양에게 준 영생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며 또 그들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유보다 크시므로 그들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 받는 영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생, 안전하게 보장된 영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한 자들의 위협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산다.

[30-33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듦이로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임을 의미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므로 그것은 하나님과 아들의 일체를 증거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보다 명확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그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 했던 까닭은 그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인 자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개념을 가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참 하나님이시다!

[34-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시편 82:6을 인용하시면서 ‘율법에 기록한 바’라고 표현하셨는데, ‘율법’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시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폐지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의 말씀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성경관이며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의 성경관이었으며 정통적 기독교회의 성경관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예수께서는 인용하신 시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 즉 재판관들을 신이라고 부른 것을 언급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참람한 일이냐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심을 안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거를 대항하고 반론하지 못할 것이다.

[37-42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알고 믿으리라](전통본문)43)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이며 예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처음에 세례주던 곳에 모였던 많은 사람이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증거하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처음부터 밝히 말씀하셨고 그의 행하신 일들이 그를 증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둘째로,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은 것은 그의 양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선택을 뜻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게 주신 자들’이 양들이며 그들은 다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양의 복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양을 아시고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또 그가 주신 영생을 받은 자들은 영원히 멸망치 않으며 그들에게서 그 영생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 믿고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택자들은 다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세상에서 혹시 성도들에게 닥칠 환난, 곤고, 핍박, 기근, 헐벗음, 전쟁,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롬 8:35).

 

 

11장: 죽은 자를 살리심 

1-32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2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남동생]러라.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었던 것 같다. 베다니를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마을’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긴 일로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고 누가복음 10:39에 보면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대해 더 간절하였던 것 같다.

[3-5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께서는 후에 나사로를 ‘친구’(필로스 fivlo")[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셨다(11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14). 야고보는 신자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교훈하였다(약 5:13-16). 나사로는 그 병으로 죽었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모든 신자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사건이 아니고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요 장차 부활할 소망을 가진 죽음이다. 신자의 죽음은 불행의 극치가 아니고 이생을 충실하게 마치는 신앙 훈련의 절정일 뿐이다. 신자는 죽음을 생각하며 더욱 분발한다.

[6-8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조급하지 않으신다. 그는 시간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생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가 언제인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주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인간편에서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고 그때 우리는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도하심이 최선의 길임을 믿고 인내하며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의 예를 비유로 드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넘어지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낮 열두 시간은 그에게 일하실 시간이며 예수께서는 일하시는 동안 아직 죽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일하실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낮이었다. 제자들은 두려워 말고 그와 함께 활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죽음을 겁낼 때가 아니었다.

[11-14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하신 것은 죽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신 것이 아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죽은 영혼도 의식을 가진다(눅 16장). 죽은 자는 단지 몸의 상태가 잠자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 잠자는 자를 깨울 수 있듯이, 주께서는 마지막 날 죽은 자를 깨우실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슬픈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 없어지는 멸절의 사건도 아니다. 성도의 죽음은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로 잠드는 것이다.

[15-16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통하여 제자들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믿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으나 더 믿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가능한 가장 악한 상황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담대함이 없었고 오직 죽음의 두려움만 있어 보였다.

[17-19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5리’라는 원문은 약 3킬로미터이다.44)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 몸은 부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39절). 모든 사람은 병에 걸리며 마침내 죽는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죽는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다(히 9:27).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에 왔고 세상의 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이기도 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20-24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주님’이시며 그에게 병고침의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이제라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을 알았다. 마르다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또 그는 그의 동생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도 믿었다.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했다(단 12:2). 마르다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 하나님의 기도 응답,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매우 좋았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결코](원문)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몸의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그것은 성경에 전제되어 있고 밝히 증거된 바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창조된 본래의 모습대로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부활과 영생으로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실패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그것은 첫째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 그 자신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 때문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으나, 그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과 영생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복된 부활과 영생에 참여한다. 또 그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믿어야 그 생명에 참여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죽은 후에는 기회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서 그를 믿으면 몸의 복된 부활과 영생에 참여할 것이다. 또 그를 믿는 자는 순종할 것이다. 물론 사람이 그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27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페피스튜카)[믿었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적 믿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이며 여기에 영혼의 구원이 있다.

[28-32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남동생]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병 중에는 죽을병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도 있다. 나사로의 병은 그를 죽게 만들 치명적인 병이었다.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 질병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때때로 병에 걸린다. 그러나 그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이다. 성도는 병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겸손해지고 거룩해진다. 성도에게 허락하신 질병은, 비록 물질적, 시간적 손실이 있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다.

둘째로, 성도의 죽음은 육신적인 측면에서 잠자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죽은 자는 잠자는 자와 비슷하다.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부활을 예상하는 말이다. 잠자는 자가 깨움을 받듯이, 죽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문제이며, 부활과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이며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또 몸의 부활과 영생을 얻는 진리를 전한다. 여기에 인간의 가장 불행한 문제인 죽음의 해결책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해결책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의 해결자로 오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의 복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이제는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즐거이 말씀에 순종하자.

 

33-57절, 나사로야, 나오라

[33-34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통분히 여기다’는 원어(엠브리마오마이)는 ‘크게 요동하다’는 뜻이며, ‘민망하다’는 원어(타랏소의 수동태)는 ‘괴롭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심정을 가진 자이셨다. 그가 심령이 크게 요동하시고 괴로워하신 까닭은 그의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고 그의 죽음을 인해 여형제들이 슬피 울고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며, 또 본래 영생할 수 있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죽게 된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신 때문일 것이다.

[35-36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사랑과 동정을 가진 자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 모습이다.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악한 감정을 버리고 선함과 긍휼과 사랑의 덕을 가진 내면적 성품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면모이며 성화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딛 2:14).

[37-39절]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인간은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한번 죽는 죽음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주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특별한 예이었다. 나사로의 시체는 무덤 속에 놓여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므로 벌써 냄새가 났다. 나사로는 확실히 죽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물론 그의 회생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40-4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그러므로 그들은 그 죽은 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전통본문)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항상 기도로 교통하셨고 아버지께서는 그의 기도의 말을 들어주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매우 친밀하셨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는 그의 말씀은 그가 나사로를 살려주실 것을 기도하신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 속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다. 또 이 일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는 나사로의 몸을 떠나갔던 영혼을 부르셨고 잠든 몸을 깨우셨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거나 아버지께 호소하신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위로 그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도 친히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 즉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베’라는 원어(케이리아)는 ‘붕대’ 혹은 ‘수의’를 가리킨다. 죽은 나사로는 수의를 입은 채로, 얼굴이 수건에 싸인 채로 나왔다. 그는 예수께서 부르신 그때에 살아났다. 아직 수의나 수건을 벗을 겨를도 없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건이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일어났다.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과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증명하셨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눅 7:11-17) 야이로의 외동딸도 살리셨다(눅 8:40-42, 49-5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구주이시다.

[45-46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이끄시는 자들만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 요한복음 6:37, 4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47-48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객관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들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심령이 굳어서 그를 믿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아지면 로마인들이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여 다시 그 땅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왕이 아니셨다. 그의 왕권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다.

[49-57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본받자.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셨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셨다. 그것은 그의 인간다운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눈물을 본받자(요 13:34; 엡 5:2).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미신적이거나 불합리한 교훈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을 만한 증거들을 보고 믿으라고 말하는 복된 소식이다. 주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신적 구주이심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믿을 만한 증거들을 들었음에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들만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우리가 죄와 진노 아래 있는 것과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12장: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1-8절,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음

[1-3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죽었다가](전통본문)45)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46)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네 번째 유월절이었다.47) 베다니는 죽었다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였다. 마르다 형제의 집에서 잔치를 연 것 같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일이 기쁘고 감사해서 연 잔치이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는 일을 보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들기 위해 식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었다.

마리아는 값비싼 나드 향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겼다. 누가복음 7:38은 한 동네에 죄인인 여자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비슷한 사건을 기록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은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곧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증거했다(마 26:6-7; 막 14:3). 마가복음 14:5는 그 향유의 가격이 약 300데나리온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 두 책에 기록된 사건은 본문의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도, 발에도 부은 것 같다.

[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자, 시몬의 아들]48)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때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듯 말했다. 그 향유는 약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300일 동안 번 돈과 같다. 오늘날 하루 품삯을 대략 10만원으로 잡으면 3,000만원이 된다. 마리아는 오랫동안 돈을 저축하여 그 향유를 구입했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일이다(신 15:7-8, 10). 그것은 성도에게 합당한 선한 삶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선한 구제의 삶에 대해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을 부탁하였고 바울도 그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고 있다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적이었고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보다 돈에 관심이 있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가득하였다. 도적질은 죄악이다. 교회 직분자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8). 목사와 장로들은 재정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일들에 책임을 가진다. 교회 재정은 성경에 교훈된 대로 전도와 구제를 위하여 바르고 정직하게 또 절약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 재정을 잘못 관리하고 함부로 쓰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것이다.

[7-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葬事)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좋은 일을 했다. 그가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식을 위해 돈을 쓴 것과 같다. 평소에 돈을 잘 안 쓰던 사람도 사람이 죽으면 돈을 쓴다. 물론 평소에도 돈을 적절히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값비싼 관이나 수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평소에 부모님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너무 구두쇠처럼 살지 말고 평소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남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돈은 쓰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먹을 것도 적절히 먹고 입을 것도 적절히 입으며 살라고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은 특히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 교회 일들을 위해, 전도를 위해 써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우리는 도와줄 힘이 있을 때 가난한 교우와 이웃을 위한 선한 일에 돈을 써야 한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므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 기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후 죽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아마 마리아가 부은 것과 같은 그런 값비싼 향유를 발라보신 적이 없으셨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귀한 분이 있으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세상에 없다. 실상, 인간은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돈의 여유가 있으면 그런 것을 바를 수 있다. 그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과분한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분명 예수께서 그의 값비싼 향유보다 더 귀한 분이심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의 형제 나사로의 생명의 은인이셨다. 마리아는 또 예수께서 자기 자신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마리아는 예수님을 바로 알았고 그를 믿고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 구제하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며,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은 선한 일이요 우리가 힘써야 할 의무이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수고하지 않고 남의 것들을 훔치거나 불의하게 돈을 벌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 돈을 버는 자가 되어야 하며 또 번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절약적이게 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유를 바르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돈을 쓰자. 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사용하자. 마리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매우 귀한 향유를 주께 부어드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재능, 시간, 물질,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건립과 확장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을 위해 바치자.

 

9-19절, 나사로 까닭에

[9-11절] [그러므로](원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그와 함께 계신 줄 알고 모여왔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 때문에가 아니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다. 나사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 즉 죽었다가 살아난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제는 신구약 성경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구약성경에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신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고 또 지금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왜냐하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악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 되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극히 신중하게 또 정당한 절차를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악한 생각은 나사로까지 죽이려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공의롭고 선해야 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불의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것이 악한 인생의 모습이다.

[12-13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 이튿날에는 유월절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이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시편 118:22-25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것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많은 이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었던 것 같다.

[14-16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사도 요한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스가랴 9:9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한 나귀새끼를 빌려오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나귀 한 마리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참 소유주이시다. 그는 지금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제자들은 처음에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께 대한 것임을 알지 못했으나 그가 영광을 얻으신 후에 즉 그가 부활하신 후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다.

[17-18절] [그러므로](원문)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들은 계속 증거했고 이런 까닭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맞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이 표적 행하셨음, 즉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 행하셨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영접하였고 호산나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신 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추가적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고 그 사실을 본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환영하고 그를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인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19절] [그러므로](원문)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지만, 유대인 회중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려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하신 바를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도 남김 없이 결국 다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듯이, 성경은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나사로의 기적을 본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다. 성경을 깨닫고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하자.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지 말자.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였다. 그들은 양심이 무디어진 외식자들이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다고 하나님의 일은 좌절되지 않는다. 악한 자들의 악행은 자신들의 악만 더 쌓을 뿐이며 또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만 더욱 쌓일 뿐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착오 없이, 실패 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20-27절,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심

[20-23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人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예수를 뵈옵기를 청했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대로 이방인들이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때가 왔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헬라인들의 방문은 이방인들의 구원의 때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성령의 강림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낮아지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셔서 그를 높이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빌 2:9-11).

[24-2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심기우지 않고 창고 속에 있으면 한 알 그대로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어 썩으면 거기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의 사역도 이와 같다. 그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으셔야 했다. 그가 죽지 않으시면 그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나, 그가 한 알의 밀과 같이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의롭다]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했다(사 53:10-11).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시면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를 본받아 죽음을 각오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과 핍박이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심지어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어떤 공산국가들이나 이슬람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길 수 있고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육신의 생명을 아까워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를 믿고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그는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33).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순교를 당하며 끝까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간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을 초월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굳게 가지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영생에 이를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25에서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침에 있어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이 되셨다. 그는 이제 우리가 그를 믿고 섬기려 한다면 이 점에서도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신다. 즉 우리는 목숨을 내어놓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그를 참으로 알고 믿는 자들은 즐거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하려 할 것이다. 그가 우리같이 무지하고 무가치한 죄인들, 벌레와 같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고 그를 위해 죽음의 자리에도 나아갈 각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자기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두 가지 복된 약속을 하신다. 하나는 그를 섬기는 자들이 그가 계신 곳 즉 천국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자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고난도 즐거이 참았다(히 10:34-35; 벧후 1:10-11).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을 귀히 여기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고 우리를 불러 그를 믿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지만, 우리가 그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기뻐하시고 더 사랑하시고 더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4:21).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기뻐하시고 더 사랑하시고 더 귀히 여기신다면 이것보다 더 복된 일이 없다.

[27절]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시고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그를 따를 것을 교훈하셨으나, 인간적으로는 죽음 앞에서,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셨던 것 같다. 이것은 모든 사람 속에 있는 공통적 심리일 것이다. 죽음은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온 외부의 침입자이다. 죽음은 두렵고 슬픈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고 영생하기를 소원한다. 인간 예수께서도 같은 심리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도, 그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에 고민하고 슬퍼하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마 26:37-38). 그러나 본문의 말씀과 같이 그는 곧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증거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 길로 즐거이 가려는 결심을 보이셨다. 그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은 바로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처럼 죽으시기 위해,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셨다. 그는 한 알의 밀처럼 죽으셨고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둘째로,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그를 본받고 따라야 한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가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섬긴다면,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목숨을 미워하고 영생과 천국을 얻기를 소원해야 한다. 세상의 삶과 천국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가치의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천국만을 바라며 따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좋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는 자를 귀히 보신다. 첫째, 그는 천국에 확실히 들어간다. 순종은 구원의 확실한 증거이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행위가 수반된 믿음을 가진 자는 천국에 넉넉히 들어간다(벧후 1:10-11). 둘째, 그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28-36절,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28-31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불경건과 우상숭배와 악행으로 인해 더럽힘을 받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었다(마 6:9).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그때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우뢰소리나 천사의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무리들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 즉 예수께서 장차 죽으실 일의 목적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시고 죄인들을 심판하심으로써이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함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어 주심으로써 또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 사역을 통해 더욱 그렇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의 최종적 멸망은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그것이 온 것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탄은 죄와 사망으로써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택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실 때에 그는 사탄의 권세를 부서뜨리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마귀의 일은 실패할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전도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70인 전도자들에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고(눅 10:18), 또 요한계시록에도 “큰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했다(계 12:9).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천국에서 내어쫓길 것이고 마지막 날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마 25:41; 계 20:10).

[32-33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말씀은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다. 그는 요한복음 3:14에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人子)도 들려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8:28에서는 “너희는 인자(人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암시하심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카고)이 강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실패치 않으실 것이다.

[34-36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人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人子)는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시 110:4),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영원한 왕(사 9:6, 7)이라고도 말하였지만, 또 메시아께서 찔림과 상함을 당하시고 속건제물이 되실 것(사 53장), 곧 그가 사람으로서 속죄제물로 죽으실 것도 예언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와 죄악과 슬픔을 상징한다. 신자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혹 죄에 잠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우리는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내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다. 죽음은 언제든지 갑자기 찾아온다. 또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문이 닫히는 시간이 곧 올 것이다. 노아 시대에도 그러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고 죄악의 낙을 누리던 모든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다 기회를 상실했다. 어떤 청년들은 아직 인생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입시 준비 때문에, 취직 준비 때문에, 또는 취직한 지 얼마 안돼서, 집 장만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믿는 일을 뒤로 미룬다. 어떤 노인들은 이미 인생의 날들이 다 지났다고 생각하면서 믿음의 일을 포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에 아직 비치고 있다. 빛이 있을 동안에 죄인들은 빛을 믿어야 한다. 구원은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장차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파하실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2천년 동안 온 세계에서 충만히 이루어졌다.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셋째로, 죄인들은 빛이 있을 동안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아직 문이 열려 있고 구원받으라는 부르심이 들릴 때,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문이 닫히고 40일 간의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듯이,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더 이상 복음을 들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믿을 만한 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37-50절, 나를 믿는 자는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요한복음은 2장에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4장에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5장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6장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그 밤에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을, 9장에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것을, 11장에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 등을 증거했다. 이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30에서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기적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또 그들 앞에서 행하셨고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었고(행 2:22), 그들은 실상 그것들의 증인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많은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떤 기적을 보거나 경험함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기적을 전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영혼의 구원과 참된 교회의 건립은 기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대로(눅 16:31),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 전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적이 구원의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사람의 구원은 기적 경험 없이도 이루어진다. 기독교 2천년의 확장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가 아니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이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단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 생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 사람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이 없어도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그러하다(엡 2:8-9). 심지어 기적을 행해도 믿음이 없이 불법을 행하다가 심판 날에 멸망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마 7:22-23).

[38-41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사람들이 선지자의 전한 바를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고 그들로 회개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아주 무서운 심판의 하나는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시면 사람이 그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 유대인들처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42-43절]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회당에서 쫓겨남]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칭찬(KJV, NIV)이나 인정(NASB)]을 하나님의 영광[칭찬이나 인정]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출회[회당에서 쫓겨나는 것] 곧 출교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혜택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하나님의 칭찬이나 인정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비겁하고 비굴하며 불완전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을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32-33). 참 신앙은 인간적, 세상적 조건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이다(눅 14:26-27, 33).

[44-46절]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과 의(義)와 기쁨과 생명이다. 반면에 어둠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죽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또 하나님의 의와 기쁨과 생명을 얻는다.

[47-50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 곧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진리의 말씀들이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가감 없이 받아져야 하고 믿어져야 한다. 그의 말씀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이요 곧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믿었는지를 판단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참 믿음은 기적 체험을 통해 오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많은 기적을 직접 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인간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오늘날도 사람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칭찬과 인정보다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와 권세와 명예는 참으로 헛되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가장 귀한 보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관원들처럼 세상의 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고백하고 시인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교훈을 행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한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식과 의와 기쁨 가운데 거하며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3장: 새 계명을 주심

1-17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2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49)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네 번째 유월절이다. 본장에 나오는 식탁은 공관복음들에 나오는 유월절 식탁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곧 자신의 승천 시간이 가까웠음을 아셨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또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마귀는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범죄케 하여 멸망케 하는 자이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일으킨다. 택자들과 불택자들,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할 자들은 생각부터가 다르고 또 말과 행동도 다르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고, 아들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요 6:39)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는 그 일을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 ‘하늘로서 오시는 이’로서(요 3:31)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4-8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에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남을 섬기시는 행동이셨을 뿐 아니라, 10절이 암시하듯이, 특히 죄를 씻어준다는 뜻이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감히 천한 죄인의 발을 씻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한 섬김의 행동이 아니고 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상징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해주지 않으시면,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도, 천국 백성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씻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끝까지 은혜 안에 거하다가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9-11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말씀에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온 몸을 깨끗케 하는 목욕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룩케 된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이 바로 중생(重生, 거듭남)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새 생명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때때로 범죄한다. 그러므로 목욕한 자들이 발을 씻듯이, 중생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주께서 다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중생한 것이 아님을 보인다. 열두 제자들 중에는 불택자가 한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죄사함을 받지 못했고 중생하지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를 넘겨줄 자이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나 쭉정이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불택자들은, 비록 현재 교회 안에 있어 믿는 자와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중생치 못했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진리를 배반하고 떠나갈 것이다.

[12-17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기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특히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남을 용서하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1-35). 사도 바울도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며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자들이며 또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세상에는 환난과 핍박, 가난과 질병, 자연 재해와 사고와 전쟁 등이 있지만,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하셨다. 그것은 그의 겸손과 남을 섬김과 함께 죄 용서하심을 보여주신다. 자기의 온 몸을 씻은 사람이라도 조금 무슨 일을 하고 나면 다시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 목욕은 중생(重生)을, 발 씻음은 중생한 후 짓는 죄에 대한 씻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에도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죄를 짓는데, 그 죄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도 그것을 본받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족과 잘못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주의 피로 죄씻음을 받지만, 사람 앞에서의 잘못은 자신의 부족을 말하며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의 편협한 마음이나 부족한 사랑과 이해심을 극복하고 주의 교훈과 본을 따라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자.

 

18-38절, 서로 사랑하라

[18-20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나와 함께 떡](전통본문)50)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시 41:9)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본장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었다(11절).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을 팔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가 친히 택하신 자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 말씀은 그를 배신할 가룟 유다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임을 뜻한다.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를 배신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그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영접하는 것이듯이, 그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나타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를 나타낸다. 사람이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가 여부는 그가 구주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로 판단된다.

[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괴로우셔서]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시몬의 (아들) 가룟인 유다](전통본문)51)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여,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던 그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었다(요 21:20, 24). 예수께서는 빵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고 그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것 같고(마 26:14-15), 무엇보다 사탄의 역사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큰 악을 범하였다. 본장 2절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했다. 이제 사탄이 직접 그 속에 들어가 그로 하여금 이런 큰 악을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을 배신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는 그의 악한 계획을 속히 행하라는 뜻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의 영적 세계나 영원한 미래도 캄캄한 밤이었다.

[31-33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 밤에 잡히셔서 날이 새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죽음이요 그 일이 완성되면 그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내다보시면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그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으나, 후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그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대조된다. 옛 계명도 그 요점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마 22:37-39). 그러나 이제 주께서는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주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 곧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본장 앞부분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형제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용서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선을 베푸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 2:44-45).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십자가로 본을 보이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1-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가 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계할 것을 교훈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형제들에 대해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서신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증거이며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36-38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가 되면 그는 주님을 따라 그가 가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위해 그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그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한 결심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그는 그 날 밤에 닭이 울기 전에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보잘것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슴 아프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목욕한 자와 같이 죄사함을 받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를 팔 자, 곧 그를 배신할 자를 가리킨 말씀이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을 사랑했다(마 26:14-15). 그는 마침내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요 6:70; 13:2, 27).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구원하셨음을 확증하자. 데살로니가전서 1:2-4,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힘써 실천함으로 주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도 그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특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대상이 제한된 수의 택자들임을 암시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앞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것이 그의 제자된 표이며 참된 교회의 표이다.

 

 

14장: 성령을 약속하심 

1-14절, 제자들을 위로하심

[1-2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요 13:36)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근심을 이기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과 위로를 주셨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을 가리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새로워진 물질 세계일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천국에서 우리는 새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마 26:29).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준비하시러 가실 것이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이 다 준비되면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성령 강림의 일로 보고 주께서 있는 곳에 있게 된다는 말씀은 성도가 죽은 후에 주께서 계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지만,52) 그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53)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과도기적 상태이고 마지막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타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의 참 소망이며 위로이다. 에녹과 엘리야도 거기에 들어갔고 승천하신 예수님도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단지 영이 아니시고 신령한 몸 즉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시지만 자유롭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몸이셨다. 지금 주 예수께서 계신 곳은 단순히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영육으로 복된 세계이다.

[4-5절] 내가 가는 곳에[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전통본문)54)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제자들은 천국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는다면 그들은 그가 영생의 길이요 천국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천국에 대해서도, 천국 가는 길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천국 가는 길임을 증거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또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과 구원을 안다. 또 그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義)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영생을 얻는다. 천국 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곧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행 4:12),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7-9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기노스케테)[알고 있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복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3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증거하였다. 빌립이 그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증거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성(神性) 즉 신적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10-12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주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본질적 일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인격적 구별은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또 그는 만일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의 행하시는 일을 인해 그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의 기적들은 그의 참된 신성(神性)을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행한 일도 행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도 주셨고, 또 제자들이 그가 행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행할 것이라는 더욱 놀라운 말씀도 하셨다. 과연 제자들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심지어 베드로는 한 번 설교할 때 3천명의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들은 다 주께서 하늘에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주의 말씀의 성취일 뿐 아니라, 그의 신성을 더욱 확증하는 일들이었다.

[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러면 주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나님 자녀의 특권 등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자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천국 소망으로 위로를 받자. 본문은 주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실 것과 다 준비되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끝이 아니고 천국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오직 그를 통해서만, 즉 그를 영접하고 믿음으로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고(행 4:12),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친히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셨다. 그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신적 구주이시다. 신적 구주 예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넷째로, 신적 구주이신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것은 항상 잔고가 충분한 직불카드와 같다.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

 

15-31절, 성령을 약속하심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지키라].55)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21, 23, 24절).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큰 관심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16-17절]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위로자(KJV), 돕는 자(NASB)]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거하게](전통본문)56)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파르 par!)[혹은 ‘곁에’]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주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위로를 위해 또 그들의 사랑 실천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며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그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진리만 말씀하실 것이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알 것이다. 그가 “저는 너희 곁에 거하심이요”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은 성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성령께서는 이미 그들 곁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18-19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예수께서는 과연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오셨고(매튜 풀) 장차 재림하심으로 오실 것이다(어거스틴, J. C. 라일). 문맥적으로, 이 말씀은 성령의 오심에 가장 맞는 것 같다. 주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고 오직 제자들에게 보이셨다(행 10:41). 또 그가 승천하신 후에 세상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 주를 뵈올 것이다.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제자들은 그가 아버지 안에 계심, 즉 그의 신성(神性)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오시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 그들은 주의 신성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연합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성도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살 것이며 장차 천국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1-24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사랑하실 것이요 주께서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가 그를 거역하고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할 때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하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는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자 속에 오셔서 거하심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25-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얼마 후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또 다른 보혜사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며 ‘아들의 영’(갈 4:6)이시다. 또 성령(프뉴마 pneu'ma--중성명사)을 가리키는 ‘그가’(에케이노스)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시는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실 것이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 예수님은 ‘평안의 주’이시다(살후 3:16). 하나님의 나라는 평안의 나라이다(롬 14:17).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주님의 평안은 영속적이고 완전하다. 성도는 이 평안으로 죄와 마귀의 시험과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간다는 말을 인해](전통사본)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또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그의 제자된 우리들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씀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고, 인성(人性)을 취하신 중보자로서 자신보다 크시다는 뜻일 것이다(매튜 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다.

[29-31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가리킨다. 욥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온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사탄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셨다. 그래서 사탄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탄이 와서 악인들을 격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이제 그때가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의 뜻대로 택자(擇者)들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위축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하신 바를 묵묵히 다 행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이 점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다(15, 21, 23, 24절).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러므로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누구이신지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주님 대신 ‘다른 보혜사’로 오셨다. ‘보혜사’는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또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거짓말과 이단 사설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오심을 암시했다고 본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영이라고 불리었다. 또 그는 다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과 ‘아들의 영’(갈 4:6)으로 불리신다. 우리는 다시 삼위일체의 신비를 본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깊은 뜻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큰 유익을 날마다 체험해야 한다. 그는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신다. 그는 죄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하며 동행하며 그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이룬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주께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평안을 주신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 우리는 이런 큰 유익들을 날마다 체험하자.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1-8절, 포도나무의 비유

[1-2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표현하셨다(사 5: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신약교회인 우리들을 ‘그 가지들’로, 하나님을 ‘그 농부’로 비유하셨다. 그는 이 비유에서 열매에 대해 강조하셨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쓸모가 없고 제거될 것이다. 주께서는 열매를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들을 두 종류로 나누신다.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요,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곡식 비유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신 것과 같고, 또 가라지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신 것과도 같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농부가 잘라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을 제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잔가지를 치듯이 깨끗케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열매는 선한 인격과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선행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3-4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과 그의 의(義)와 그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거듭날 때 이루어진다. ‘거하라’는 원어(메이나테 단순과거 명령법) 는 반복적, 계속적 행위보다 어떤 단순한 행위를 가리킨다. 성도의 중생(重生)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단번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깨끗케 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중생은 죄씻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으로 죄씻음을 받아 새 생명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성도가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죽은 가지에 불과하고 결코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서 주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중생한 자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의 열매, 곧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5-6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은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중생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주께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메논 mevnwn)(현재분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주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신 것 같다. 성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과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만족하지 말고 현재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힘써야 한다. 과거에 포도나무의 가지이었어도, 현재 끊어진 가지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성도가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히 교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과 교통은 날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며 또 선행을 위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즉 그가 중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가지처럼 말라지고 버린 바 되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이 그 속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된 약속이 있다. 그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기도 응답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요 14:13-14). 그러나 성도도 죄 가운데 있으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선한 열매를 맺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때 기도 응답의 특권은 더욱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런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성도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한 행위들, 사랑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좋은 열매들이 많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NASB, NIV). 주께서는 앞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중생(重生)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 분리되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을 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중생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또 하나는 현재의 믿음과 순종이다. 성도는 믿음 없이 행하지 말고 또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항상 믿음과 순종으로 삶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 몇 가지 약속을 주셨다. 첫째, 그는 우리에게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실 것이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디도서 3:14,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열매를 많이 맺는 길은 중생하여 주님과 연합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둘째, 주께서는 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요 13:35). 선한 행실은 주 예수의 제자된 표이다.

 

9-27절,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9-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거절하지 말고 받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불순종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순종은 풍성한 기쁨을 가져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다(갈 5:22).

[12-15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다니!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안다. 예수께서는 친히 희생적 사랑을 보이실 친구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일진대, 우리는 그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주께서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다.

[18-21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세상은 그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미워하고 핍박하였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한 까닭은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아 구별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했던 그들은 예수께 속한 제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듯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25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은 까닭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는데, 바로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고 그것을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하고 풍성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은 큰 잘못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었다.

[26-27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미워하고 핍박하지만, 그를 증거할 자들이 있다. 첫째는 주 예수께서 보내실 성령이시다. 보혜사 즉 위로자와 변호자로 오신 진리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3). 둘째는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그와 함께 지냄으로써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다 들었고 그의 능력의 기적들을 친히 다 본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을 힘써 지키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그의 사랑을 받은 자들, 그의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백성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 그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누릴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것이며, 또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다면, 우리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자.

셋째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성령님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친히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또 사도들은 처음부터 주 예수를 따랐던 자들, 곧 증인들이다. 그들의 글들이 오늘 우리 손에 있는 신약성경이다. 성령님과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다.

 

 

16장: 성령의 사역

1-15절, 성령의 사역

[1-4절]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핍박과 성령 강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낙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포기하거나 변절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다. 사람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심지어 죽일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제자들을 핍박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길에는 고난이 있지만,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이다.

[5-7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러해야 보혜사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리우시면 그는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일이요 예수께서 영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다.

[8-11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깨우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께서는 오셔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우치실 것이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깨우치시는 것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성령께서 의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고 또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성령의 사역은 죄인들을 깨우치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다.

[12-13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自意)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의 정도만큼 진리를 가르쳐주셨고 아직도 많은 부분을 남겨두셨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는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5:39). 성경 진리의 요점은 예수님과 그의 속죄사역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실 것이다. 또 그는 장래의 일, 즉 종말 사건들에 대한 예언도 주실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이 신약성경의 내용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 구원을 받았다.

[14-15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나를 영화롭게 하리니](KJV, NASB)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아버지께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보인다. 하나님의 것은 피조물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시다. 또 예수께서는 7절에서 “내가 그를[성령을]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가 바로 사도시대에 교회에 오신 성령이시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세 구별된 인격은 한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세 구별된 인격이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래서 정통 교회가 역사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겠으나 그는 그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변절치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교훈하신 목적이며 성령을 보내주신 한 목적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우리는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며 살자.

둘째로, 우리는 성령님께 감사하고 그를 의지하며 고난을 이겨야 한다. 성령께서는 이미 세상에 오셨다. 그는 지금 교회 가운데, 성도들의 육체 속에 함께 계신다.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가 지상에서 누리는 놀라운 복과 특권이며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힘이 된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실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도 알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즉 그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고 적용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오늘날에도 구원받을 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주하시는 보혜사로 오셨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성경을 읽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성을 극복하고 성화를 이루며 성령의 위로와 힘으로 고난을 이기자.

 

16-33절, 주께서 떠나시지만

[16-19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전통본문)57)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 혹은 그의 승천과 재림, 또는 그 후반절을 그의 부활과 성령 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지만, 이 말씀은 문맥상 그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58) 그렇다면,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의 이유를 보이며, 주께서 죽으심으로 잠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의 옆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회개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3).

[20-2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그러나](전통본문)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이 애통하며 근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 것은 그의 부활로 인함일 것이다. 복음서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크게 기뻐했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요한복음 20:20,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누가복음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슬퍼할 것이나 그의 부활로 인해 다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기쁨은 성령의 강림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또 장차 주의 재림 때에 절정을 이룰 것이다.

[23-24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혹은 ‘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KJV, NIV)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구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와 동행하는 자의 특권이 될 것이다. 또 제자들은 기도 응답을 받음으로 기쁨 충만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복된 약속이다(요 15:11; 17:13). 그가 승천하신 후 예수께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으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의 응답을 받으므로 기쁨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5-27절] 이것을 비사(比辭)로[비유적인 말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비유적인 말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기도 응답의 약속과 특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고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그를 참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도 응답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28-33절]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比辭)[비유]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보잘것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믿음조차도 내세우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야 할 것이다. 특히,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미움과 핍박과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 안에서 또 기도 응답으로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그의 은혜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떠나시고 이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몇 가지 교훈을 다시 주셨다.

첫째로,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 응답의 약속을 다시 주셨다. 23-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그는 요한복음 14:13-14에서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기도 응답을 약속하셨다.

둘째로, 그는 또 기쁨 충만도 약속하셨다. 24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성도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누리는 것은 복된 약속이다.

셋째로, 그는 또 평안을 약속하셨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실 것이다(살후 3:16).

넷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담대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세상을 이기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고 두려워 말고 담대해야 한다(사 41:10; 43:1-2; 마 28:20). 우리는 특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래야 한다.

 

 

17장: 제자들을 위한 기도  

1-12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당신의](원문)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당신의](전통본문)59)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 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 성령의 약속 등의 말씀으로 교훈하신 후(요 14-16장)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전 3:1).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속(贖)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때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롭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또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시고 세상의 모든 택자들을 구원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것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릴 수 있는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목적은 그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데도카스 완료시제)60) 자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증거하며 선택된 자들의 수가 확정적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셨다(엡 1:4-5).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아담의 죄는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긍휼로 택한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구원하신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영생은 이것이니 이는 그들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사는 것이 영적 사망이며 그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

[4-5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이루셨고 다 이루실 것이며 이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그는 탄생하기 전에 선재(先在)하셨던 자, 아니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다. 그 영광은 신적 영광이다.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에 아들을 사랑하셨다(24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적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다.

[6-8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주셨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시며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가 행하시는 일들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임을 알았고 믿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표시이다.

[9-10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께서는 막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는 말씀은 선택의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인류 중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진리는 성경적 진리이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택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택자들은 빠짐이 없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신성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믿고 경배함으로 그가 영광을 받았다는 뜻이다.

[11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내게 주신 저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전통본문)(KJV)61)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을 앞두시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이름으로 구원하신 제자들을 보전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제자들의 연합의 본보기는 하나님과 아들의 연합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은 영적, 본질적 연합이다. 이와 같이 택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연합은 영적, 정신적 연합이어야 한다.

교회 분열의 문제는 단지 외형적 조직의 분열 문제만이 아니다. 실상 교리적, 정신적 분열이 더 큰 문제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다룬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마음의 분열이었다. 고린도전서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의 연합에 대해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고 본다. 첫째로, 교회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근본교리들은 교회 연합의 기초이다. 어떤 교회연합체이든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 근본교리들 위에 조직되어야 한다. 성경의 근본교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단이다. 기독교 근본교리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적 행하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사실들이 있고 그 핵심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이다. 또 이 모든 진리들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을 부정하는 자는 확실히 이단이다.

둘째로, 교회는 중요한 교리들에서도 가급적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서 탈선하는 것은 큰 오류들이며 그런 오류들을 양심적으로 포용하기는 힘들다. 여기에 교파들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잘못된 교리가 구원에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는 그런 자들 혹은 그런 교회를 정죄하지 말고 한 교회의 지체로 여기며 서로에 대해 긍휼과 인내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포용해야 하며 그런 문제로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이런 저런 지식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포용하며 그런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다같이 일치된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2절]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구원하셨고 지키셨고 그러므로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하나도 멸망치 않았다. ‘멸망의 자식’은 불택자인 가룟 유다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었고(요 6:64)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을 뻔한 자이었다(눅 26:24). 그는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로 준비하신 진노의 그릇이었다(롬 9:2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세상 끝날까지 보전될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결국 멸망을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더 마음에 새기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 있다. 그는 그들을 아들 예수께 주셨다. 그들의 수는 확정되어 있다. 그들은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참된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막연히 세상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고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여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해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그것이 선택받은 표이다. 택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할 것이며 다 구원받을 것이다. 요한복음 10:26-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대로 교회의 일체성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의 일체는 단순히 조직체적 일체가 아니고 교리적, 사상적 일체이다. 교회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과 그의 속죄 사역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또 교회는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 있어서도 일치해야 한다고 본다. 장로교회는 장로교 교리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교회는 그 외의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그런 문제들로 분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영혼들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포용하며 그런 문제들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일치된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교리를 믿는 다른 교파를 한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본다.

 

13-26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계속)

[13절]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는 목적은 그의 기쁨을 그들 속에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가 가지고 계신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며 인간의 육신적 조건이나 외적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난다는 말로 근심하며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그 기쁨을 충만히 주기를 원하셨다.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하셨으나 그들은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심같이 그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한다’는 원어(에이미 에크)는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중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다(요 1:13; 3:5). 제자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는 자가 되었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15-16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내용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속히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다가 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일터이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짓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 즉 거룩함과 온전함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우리는 우리가 받은 거룩과 의를 잘 유지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7-19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함의 방편이다. 시편 119:9, 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말씀을 거룩하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성도들의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이다.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점점 더 거룩해지고 온전하게 될 것이다.

[20-21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단지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오늘날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롬 8:34).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 곧 신약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하나 되심 같은 하나이다. 그것은 단지 외적 일치가 아니고 사상적 일치이다. 사상적인 일치가 없는 외적 일치의 추구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고 인류 초기의 바벨탑 쌓기(창 11:4)와 같은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된 증거를 해야 한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역사상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이탈한 이단들도 있었으나, 그들을 제외한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은 비록 교파가 달라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등을 고백하였다.

[22-23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내게 주신 영광’은 주께서 본래부터 가지고 계신 신적 영광을 가리킨 것 같다. 제자들은 신적 구주께서 이루신 의와 사랑을 은혜로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의와 사랑을 가지고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주께서 그의 제자들 속에 계심은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가 주신 의와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룸으로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한다.

[24-26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 주의 신적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또 그는 자신의 영광이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그에게 주신 영광임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볼 것이다. 천국은 성도에게 기쁨을 주는 소망의 나라이다. 본문에는 ‘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 속에 머물고 주께서도 친히 영으로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의 충만한 기쁨을 받게 되었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 짓지 않는 것을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곧 성경말씀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것은 좋지 않다. 교회는 바른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일치단합함으로 세상에 구주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넷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그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나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영원한 곳이며 성도들의 소망과 기쁨의 이유이다.

 

 

18장: 심문받으심

1-27절, 잡히시고 심문 당하심

[1-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횃불]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그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교훈과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셨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이 시내는 평소에는 물이 없고 겨울의 우기(雨期)에 물이 흐르는 ‘와디’라는 시내이다. 그는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감람산, 좀더 좁게는 겟세마네 동산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그 밤에 거기서 약 3시간 기도하셨다고 증거하는 것 같다(마 26:40, 44; 막 14:37, 41).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간절한 기도로 그의 연약한 마음을 굳세게 하셨던 것 같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람들이 강도라도 잡을 자들처럼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다고 증거한다. 그 상황은 누구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음의 안정과 담대함이 있으셨다. 그것은 기도로 준비된 담대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자신을 증거하셨다. 의인에게는 담대함이 있다(잠 28:1). 의로우신 예수께는 담대함이 있으셨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왔다. 예수께서 자신을 알리실 때 그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

[7-11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셨고 제자들이 잡히거나 다치거나 죽게 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끼셨다(요 13:1).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시몬 베드로는 검을 빼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좀더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약 7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후 그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셨었다(마 5:39-40). 더욱이, 그가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12-14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결박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꾸로 된 일이다.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가 죄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시는 일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고 대제사장은 공회 앞에서 그를 심문했다고 증거했으나, 요한은 그들이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보충적으로 증거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백성들보다 더 경건해야 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젊은이들은 혹 믿음과 인격이 부족해서 잘못을 범할지라도 노인들이 바른 조언을 해야 할 터인데, 안나스는 오히려 이 모든 일을 조종하였던 것 같다.

[15-18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와 함께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비록 멀찍이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증거했다(마 26:56, 58). 대제사장과 아는 한 제자가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해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밤에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밤은 추운 밤이었다. 시험은 종종 성도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닥친다. 사탄은 우리를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여종의 갑작스런 질문에 베드로는 실수를 했다. 그 밤에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주님의 염려대로 크게 실수하고 말았다(마 26:41).

[19-24절]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예수께서는 안나스의 질문에 직접 대답지 않으시고 자신이 회당과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가르쳤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신 까닭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기 위해서이실 것이다(마 7:6). 안나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하였고 단지 그 정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고 그 앞에 비굴하게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이 말씀을 하시자, 곁에 선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다.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정죄하려면 먼저 그의 죄를 확증해야 한다. 죄를 확증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잘못이며 큰 악이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공관복음은 가야바 앞에서 되어진 일만 증거하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생략하고 안나스 앞에서 되어진 일만 보충해 증거한다.

[25-27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 밤에 시몬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그는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하였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정했다. 인간은 참 약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자.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했던 제자들이 그 밤에 그를 보호하지 못하고 다 도망쳐 버릴 것이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배려하셨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자신보다 남을 배려한다.

둘째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자. 시몬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지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눅 22:51).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자에게도 선을 베푸셨다. 우리는 그의 교훈과 모범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끝까지 선을 베풀자.

셋째로, 우리는 친구가 우리를 버려도 낙심치 말자. 시몬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신뢰치 말고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거나 떠나갈 때라도 크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셨고 구타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세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 때 항상 담대할 수 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잠 28:1).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28-40절, 빌라도의 심문

[28-32절]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총독으로 예수를 정죄케 함으로 백성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한 것 같다.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악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밤에 공회를 소집하여 그를 심문했고 그 새벽에 그를 로마 총독에게로 데려간 것이다.

그 날이 무교절의 첫날, 즉 절기 안식일이므로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이방인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보다 자신들을 더럽히는 더 큰 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거나 자신들의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는 위선자들이었다.

빌라도는 밖으로 그들에게 나가서 말하였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끌고 온 예수의 정확한 죄목을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예수를 행악자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무슨 악한 일을 하셨는가? 그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악한 일인가?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빌라도는 그 재판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말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3-36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 세상 나라는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나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 나라인 대한민국에 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적자들과 싸우지 않으신다. 세계를 정복하시되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성도들의 사랑으로 하신다.

[37-40절]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예수께서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세상 나라는 거짓된 악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법이며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며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대해 증거하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이나,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진리를 듣지 않고 받지 않고 도리어 배척한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했다. 그가 진리를 알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無罪)를 선고하고 그를 곧 풀어주며 그 자신이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해 인식하였으나 마침내 그를 정죄하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다음 장(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두 번 더 말한다(19:4, 6).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도보다 못한 악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지한 열심은 오히려 위험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 뜻에 일치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한 열심을 버리고 바른 지식과 지식 있는 열심을 소원해야 한다.

둘째로, 타락한 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보다 더 나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알았다. 사형은 큰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져야 한다. 종교적인 죄 때문에 사형이 필요한 경우도, 먼저 그 죄를 확증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재판에서든지 죄의 명확한 증거가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옳지 않다. 도덕성 없는 경건의 모양은 위선에 불과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성경은 그 나라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도덕적인 나라이다. 그 나라의 행동지침은 의와 사랑이며 그 나라의 특징은 평안이다. 신약교회는 이 나라의 부분적 성취이다. 그 나라는 장차 주 예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19장: 십자가에 못박히심

1-16절, 빌라도의 판결

[1-3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올바르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으나 그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말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들은 그를 희롱하고 학대했다. 빌라도는 이 일들을 방치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당하셨다.

[4-6절]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officers)[직원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을 말했다.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다. 대제사장들과 직원들은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고 소리질렀다. 그들은 예수를 사형시키려고 이미 작정했었다.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는 무책임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죄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 아니었다.

[7-9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있었다. 모든 사람 속에는 그런 의식이 어느 정도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너는 어디로서냐?” 그는 예수께서 정말 하늘로서 온 자인지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처형할 죄목으로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당하려면 예수의 주장이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근거 없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었다.

[10-11절]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대답하셨다. 빌라도가 가진 재판 권세는 실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판관들의 재판관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 지도자들의 죄는 더 컸다.

[12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필로스)[친구]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다. 그는 심지어 예수께 대한 어떤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에게 불충성하는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한 압박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에 놀라운 지혜를 발휘했고 빌라도로 하여금 잘못된 판결을 하도록 몰아대었다. 그들의 악한 계획은 승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이성과 양심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총독직의 안정을 구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이끌리고 있었다.

[13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총독직의 안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예수를 놓을 수 없었고 또 그렇다고 이 재판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14-15절]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6시[제6시경](원문)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유월절의 예비일’이라는 말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 예비일 즉 금요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6시경’은 오전 6시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른 아침부터 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은 공정한 심리와 올바른 판단과는 거리가 먼 재판이었다. 거기에는 군중의 부르짖음만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는 지혜가 있었다(마 27:20).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라고 말했으나, 대제사장들은 대답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권, 메시아의 왕권을 포기하였다.

[16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선동에 굴복하여 로마법에 어긋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재판관의 지위를 사용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고 가시면류관을 씌우셨고 조롱과 매맞음과 학대를 당하셨다. 총독 빌라도는 그가 죄가 없음을 알았으나, 그런 고난을 당하도록 방치하였다. 예수께서는 잘못한 것이 없이 고난 당하는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5-6).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의 대속이 되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잘못된 판결을 받으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의 무죄함을 여러 번 거듭하여 증거하였다. 그는 심지어 그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군중을 성공적으로 선동하였다. 빌라도는 마침내 로마법에 어긋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었다. 이것이 죄악된 세상의 현실이다(행 8:33). 이것이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신 길이며 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17-30절, 십자가에 달리심

[17절]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나오셨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군병들은 구레네인 시몬을 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 그와 같이 가게 하였다(마 27:32; 막 15:21).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시몬은 그의 뒤에서 십자가를 같이 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체력으로 혼자서 무거운 십자가 나무 형틀을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18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께서는 좌우에 다른 두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극악한 죄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십자가형은 역사상 세계 여러 곳에서 존재했고 로마 시대에는 주로 큰 죄를 지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그런 형벌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사형수는 땅에 있는 십자가틀 위에 누인 채로 양손과 발에 날카로운 못이 박혔고 형틀은 밧줄로 들어올려 곧바로 세워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눅 24:39).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것은 심장에서 가장 먼 손과 발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마침내 죽게 되는 형벌이었다. 36시간 전에 죽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어떤 경우는 9일 동안 끈다고 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19-20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어(라틴어)로]62) 기록되었더라.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그 십자가 위에 그의 죄패가 붙는다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다.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인들은 이 패를 읽었는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나사렛에서 자라시며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인의 왕이시며,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세상의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은 단지 한 시대, 한 민족에게만 복된 이름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복된 이름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21-22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 하니라.

대제사장들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양심은 평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가 사형받을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과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허락했을 뿐이다. 그는 죄패의 글은 고칠 마음이 없었다.

[23-24절]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군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다. 그들은 네 명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속옷도 취하였는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군병들이 그것을 제비 뽑아 가진 것은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옷은 사람의 품위를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겉옷과 속옷을 벗기운 채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셨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원문에는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사이에 ‘와’라는 말이 없으므로 그 두 사람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KJV, NASB). 다른 복음서들은 많은 여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마 27:55; 막 15:41). 그들은 남자들보다 용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위하여 열심이 있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가리킨 것 같고(마 13:55),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즉 사도 요한의 모친은 본문의 ‘이모’나 마가복음 15:40의 살로메와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26-27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모친과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그는 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에 모셨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네 번이나 나온다(요 13:23; 20:2; 21:7, 20).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여자여’라는 호칭은 당시에 존경심을 가진 말로 쓰인 말이라고 한다.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지,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후자로 이해하며 문맥도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주의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님과 모친과의 인간적 관계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를 보는 모친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30여년 전, 그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다(눅 2:35). 지금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그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려는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육신의 모친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을 끝까지 가지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다른 여러 자녀들을 낳았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며(마 1:25 전통사본; 눅 2:7) 또 성경에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혹은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며(마 12:46; 13:55, 56; 요 2:12; 행 1:14)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갈 1:19). 요셉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주께서 모친을 왜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동생들은 다 결혼하였거나 믿음이 부족했고(요 7:5)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모친을 돌볼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영적 관계는 육신적 관계보다 더 낫다.

[28-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혹은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그 영]이 돌아가시니라.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그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보인다. 그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다. 많은 피를 흘리신 그는 목마르셨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 그는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 곧 택자들을 위한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히 9:12). 그런 후 그는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이 돌아가셨다. 그는 그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셨다(원문).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고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운 채로 수치스럽게 달리셨고 심한 갈증을 느끼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잊지 말고 그를 진실히 믿고 사랑하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배려하셨다. 그는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부모 공경의 실천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다 이루셨다. 그는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 뜻이다. 그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되어야 할 소식이다.

 

31-42절, 예수님의 장례식

[31-33절]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예비일이었다(막 15:42; 눅 23: 54). 그것은 무교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을 가리켰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날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들을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다.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군병들은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좌우의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군병들은 예수께 와서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

[34-35절]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다리를 꺾는 대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곧 피와 물이 나왔다. 이것을 본 사람이 증거하였으므로 이 증거는 참되었다. 그는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사람들로 믿게 하려고 증거했다. 성경은 목격자들의 진실한 증거들을 기록한 책이다. 주 예수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까지 흘리셨다. 가시 면류관을 쓴 머리에도 피가 흘렀고 못이 박힌 그의 손과 발에도 피가 계속 흘렀을 것이고 또 옆구리도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렸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다.

[36-37절]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그의 뼈가 꺾이우지 않은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린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출애굽기 12:46에 보면,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 “뼈를 꺾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고전 5:7). 또 스가랴 12:10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은밀히 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행하였다. 그는 빌라도더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였고 빌라도는 허락하였다. 그는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왔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는 부자요(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이었고(막 15:43; 눅 23:50) 선하고 의로운 자이며 예수님을 정죄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이었고(눅 23:50, 5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막 15:43; 눅 23:51). 마가복음 15:43에 보면, 그는 빌라도에게 용감히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그것을 받아 세마포를 사서(막 15:46) 그것으로 쌌다.

[39-42절]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의 장례를 받든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이었다. 그는 수년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자이었다(요 3장).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aloe,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100리트라)[약 34킬로그램]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들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은, 평소에 드러나 있지 않았던 두 사람, 즉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방식으로 그의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 두 사람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속에 판(마 27:60; 막 15:46; 눅 23:53) 새 무덤이 있었다. 그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이었다(마 27:60).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무덤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기 두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는 이렇게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장례식을 호화스럽게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성도의 장례식은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검소하게 행해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다. 머리에서도, 양손과 발에서도, 또 옆구리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여러 시간 많은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는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 믿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하실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고 그 일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우지 않으신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리신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것이 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이사야 53:9는 그가 부자와 함께 묻히겠다고 예언했고 그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눅 24:44). 또 그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었다(요 5:39).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떤 사건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성취되었다. 성경의 이러한 성격, 즉 예언의 성취라는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증거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놀라운 내용과 성격을 깨닫고 성경을 다 믿자.

셋째로, 우리는 인간의 의식(儀式)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자. 세상의 장례식들은 거창하다. 왕의 장례식이나 대통령의 장례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장례식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실상 다 헛되고 큰 가치가 없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사야 40:6, 8,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런 의식과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중요한 내용은 구원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런 거창한 장례식이 없어도 복된 자이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거창한 장례식을 한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죽은 후 상태는 지극히 불행스러울 뿐이다.

 

 

20장: 부활하심

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2절] 안식 후 첫날[주간의 첫날](원문)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해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순서적으로 자세히 기록했다고 보인다. 주간의 첫날 즉 주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다른 여러 여자들도 같이 갔던 것 같다(마 28:1; 막 16:1; 눅 24:1, 10).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절)는 말은 다른 여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해 왔다(막 16:1; 눅 23:56; 24:1).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컸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바위에 판 그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막 16:5; 눅 24:4).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들어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21:24에 의하면 본서를 쓴 자이며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3-7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갔다. 누가복음 24:11에 의하면,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허탄한 소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무덤으로 즉시 달려갔다. 누가복음 24:12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본문은 거기에 더하여 ‘그 다른 제자,’ 아마 요한도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말한다. 그 둘이 같이 달음질하였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단지 그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살아나셨다. 그것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 그 몸이 다시 사셨으므로 그 세마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수건은 개켜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영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증거한다.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바로 그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히 몸의 부활이었다.

[8-10절]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여자들도 확인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하였다. 빈 무덤은 그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가능성은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했고 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장사했기 때문이다. 또 설사 그렇게 회생(回生)하셨다 하더라도 죽다 살아난 자가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을 밀어 제치고 군사들의 경비(마 27:62-66)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 무덤문은 큰돌로 막혀 있었고 군사들의 경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신을 훔쳐 숨겨두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며 그 거짓말을 위해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의 원수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의 몸의 부활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11-16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그의 시신까지 분실되니 마음이 몹시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또한 불신앙의 눈물이었다. 그는 주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께서 그를 부르실 때도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연약한 믿음과 마음으로라도 그를 사모하며 따랐던 마리아를 찾아주셨다.

마리아는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들의 말에 그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나 그를 알지 못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고 말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또 그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신성(神性)의 영으로는 그가 십자가에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그 날 낙원에서 대할 수 있으셨으나, 인성(人性)으로는 아직 땅 위에 계셨다. 그는 땅 위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이셨다(요 3:13 전통본문).

그는 후에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세마포나 머리 수건을 개킬 수 있으셨고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자신의 인성(人性)을 여전히 증거하셨다. 또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아버지와 동등되신 자이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우리와 같은 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그가 주를 보았고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확신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는 단지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다. 본문은 그의 몸의 부활의 증거로 막달라 마리아가 주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그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놓여 있었고, 그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의 부활의 사실을 전해주었고,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의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의심치 말고 확신하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5:20-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9-31절,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문은 주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즉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셨다고 증거한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께서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셨음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체는 신비한 몸이었다. 물론 그의 몸은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었다(20절).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 몸의 회생(回生)이 아니었다. 그 몸은 변화된 몸이었다. 그의 몸은 닫힌 문을 열지 않은 채 통과하여 방 가운데로 들어오실 수 있는 몸이다. 그의 부활의 몸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가지고 누릴 것과 같은 변화된 몸이었다고 보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원하셨다.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 불안과 근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 평안을 주셨다.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되셨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몸으로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셨다. 그것은 며칠 전 유월절 식사 후에 하신 말씀의 성취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니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리라고 하셨다(요 16:17, 20, 22).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는 다시 평안을 기원하신 후에 그가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었다. 전도는 사도들의 사명이며 신약교회의 최대의 임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병 고침이나 기적 행함이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었듯이, 단지 교육 사업, 자선 사업, 구제 사업 등의 선한 일들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그것들이 비록 선한 일이지만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주님의 사명이 영혼 구원의 전도이었듯이,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 오직 거기에 있다. 실상, 영혼 구원의 전도는 이웃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행이다. 죄로 인해 지옥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영혼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선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행 1:8).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라고 보인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2:4).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 받은 제자들은 과연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 운동은 죄사함의 운동이다. 죄가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는 도리이다. 전도자들은 복음을 통해 죄사함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오순절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설교하였다(행 2:38). 복음 전파는 죄사함의 선포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을 것이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죄사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엡 5:26). 교회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24-25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도마는 이성적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그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자들 중에 도마와 같은 교인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부활하신 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를 위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말은 그 다음 주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제자들이 다시 함께 집안에 있었다. 도마도 함께 있었다. 그 날도 제자들은 집의 문들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안은 사람에게 매우 큰 복이다. 히브리말에 ‘평안’이라는 말(솰롬)은 우리말에 ‘안녕’처럼 매우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경제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또 그 다음 주일에 다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주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보인다. 주일에 성령께서도 강림하셨다(행 2:1). ‘주의 날’ 곧 주일에 사도 요한도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계 1:10). 주일은 확실히 구별되었다고 보인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에게 말을 건네셨고 믿음의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부활은 영이나 정신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의 사건이었다. 그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고린도전서 15:13-15,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도마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요 또 증인들의 증거의 진실성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말씀하셨다(마 22:29).

[28-29절] 도마가 [그에게](원문)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의심 많았던 도마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것이다. 그들은 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기독교 확장의 역사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도다”라고 증거하였다(벧전 1:8).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믿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본 증인들의 증거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을 증거한다.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또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서들을 주신 목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징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그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은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는 문들이 닫힌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올 수 있는 몸이셨다.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천국에서 영생할 몸이라고 보인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믿음을 주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기뻐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은 우리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려 함이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 함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며 주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자.

셋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죄사함의 사역을 지시하셨다. 복음 전파는 죄사함과 영생을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죄사함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자. 사람들을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8:10). 베드로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제자들은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보았고 그와 대화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일이었다.

[3-6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으나(요 20:21), 그들은 아직 전도의 일을 하지 못했고 하려 하지도 않았고 할 힘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먹을것을 얻기 위해 고기나 잡으러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왔다. 그때 바닷가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수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그는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오늘 디베랴 바닷가의 사건은 수년 전 그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 사건들이었다.

[7-9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200규빗]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200규빗, 즉 약 90미터 정도밖에 안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다. 그들이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있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10-1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오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합하여 좋은 방향으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은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치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만 힘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전도자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요나](전통본문)63)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아침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마 16:16).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마 26:33)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다(마 26:35). 그러나 그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그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실패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연약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고백은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그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주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전도자로 부르셨었다. 전도와 목양(牧羊)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집이다. 교회는 주께서 사랑하셔서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은 하나님의 양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며 보살피라고 세움을 받은 자들이다(행 20:28; 벧전 5:1-4). 베드로는 이제 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16-17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실 때마다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양(牧羊)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사명이다. 전도와 목양은 하나님의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해야 한다. 또 성도들은 전도자들과 또 전도와 목양을 위해 일하며 협력하는 모든 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자들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목양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은 목양의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일들 중에 영혼들을 다루는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세상에서 질병들을 치료하는 의사들보다 더 위험한 직업도 없겠지만,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결함들은 육신의 질병들보다 더 치료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구원은 영적 병들을 치료하는 일과 같고 교회는 그런 병원과 같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여러 종류의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다. 그것은 뿌리뽑히지 않는 질병과 같다. 그런 죄인들을 다루며 가르치며 책망하며 위로하며 돌보는 것이 목양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은 주의 십자가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만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죄로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18-19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셨다고 설명을 하였다. 주께서는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암시이었다. 고난을 각오하며 사는 것은 전도자에게만 해당된 말씀이 아니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하였다(빌 1:29).

[20-23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따를 때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다른 이의 일에 관여치 말고 주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종들은, 비록 교회의 성결을 위해 바른 말을 하고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는 일들이 있으나,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참견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면 된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도 다 그런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충성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일을 상관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하고 하나님의 명령만 준행해야 할 것이다.

[24-25절]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나는](원문) 아노라. [아멘](전통본문).64)

주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의지하였던 그 제자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이 사실은 본서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감춘 겸손한 미덕에서 짐작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실하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내용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선택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의 공동적 증거이며 사도 요한의 글에 대한 초대교회의 확증이라고 보인다. 초대교회가 증거한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증거들은 다 참된 증거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기적을 행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새벽에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히게 하셨다. 또 그는 숯불과 생선과 떡을 갖춘 신기한 아침 식탁도 제공하셨다. 본문에 언급된 7명의 제자들은 이 새벽에 이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받은 양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했다(딤후 4:2). 주의 종들은 주를 사랑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사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다 이 길을 가야 한다.

넷째로, 마지막 두 절은 본서가 진실한 증인의 진실한 증언들임을 증거한다. 이것이 성경이다. 진리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의 기록이다. 이 진리의 증언들에 구원과 영생이 달려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다 믿어야 한다.

 


미주

1) 이단 반박, 3. 1.

2) A. T. Robertson, A Harmony of the Gospels, pp. 284-87.

3) 헬라어 은 미완료과거 시제이다. 그것은 그가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물론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을 가리킬 뿐이다.

4) ‘태초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예로부터 철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혹은 첫 번째의 질문이었다. 이것을 ‘존재론’(Ontology)이라고 부른다.

5) 요한복음 1:18; 3:16, 18; 요한일서 4:9는 ‘독생하신 아들’(獨生子)이라고 되어 있으나, 본절은 ‘독생하신 자’(獨生者)라고 되어 있다.

6) Byz A W ita b e ff2 vg syrc arm 등에 있음.

7) Byz A lat syr(p) copmss 등이 그러함.

8) ‘그 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이나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는 것, 또 무엇보다 후에 요한복음 19:14에 빌라도가 예수를 제6시에 심문했다는 것과 마가복음 15:25에 예수께서 제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등은 요한복음이 유대인의 시간 계산방식을 사용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들이다.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II, 324-326; A. T. Robertson, A Harmony of the Gospels, pp. 284-287.

9) Byz A vgcl syrp s copbo-ms arm 등이 그러함.

10) Byz A ite syr 등에 있음.

11) 요한복음 4:35에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말씀은 5:1의 절기가 유월절이나 유월절 약 50일 후에 오는 오순절일 것을 보인다.

12) Byz (A) ita b ff2 vg syrp copbo-pt arm Origen 등에 있음.

13) Byz A itb e ff2 vgcl (ww st) syrp s copbo-ms arm geo Cyprianvid 등.

14) Byz A latt syr 등에 있음.

15) Byz p75 it vg 등이 그러함. 또 KJV, RV, RSV, NEB 등도 그러함.

16) Byz A D syrp 등에 있음.

17) 4:35의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말씀은 그때가 겨울임을 나타내며, 그것은 봄인 유월절 이후 8개월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낸다.

18) 대략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임.

19) 이레니우스, 루터, 헹스텐버그, 매튜 풀, 재미슨-포셋-브라운 등. 그러나 크리소스톰, 칼빈 등은 오순절로 보며, 랑게 등은 부림절로 봄.

20) 에피 테 프로바티케라는 말은 ‘양의 [무엇](생략된 말) 곁에’라는 뜻으로, 프로바티케는 여성 관사와 형용사 어미가 생략된 명사의 성을 나타낸다. 그 명사는 아고라(ajgorav) 즉 ‘시장’(market)(KJV), 혹은 퓔레(puvlh)나 뒤라(quvra) 즉 ‘문’(gate)(한글개역, NASB, NIV)이라고 추측된다. 이 단어들은 다 여성명사들이다.

21) 3-4절의 괄호 안의 구절은 Byz (A) ita b e ff2 vgcl syrp copbo-pt 터툴리안 등에 있다. 그것은 확실히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다.

22) Byz A ite syrp copbo-pt 등. 18절에,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라는 표현을 보면, 본절의 전통본문이 더 타당하고 자연스럽다.

23) ‘진실로’라는 원어(아멘 ajmhvn)는 요한복음에 51번 나오고, 신약성경 전체에 152번 나온다.

24) ‘들을’이라는 전통사본 원문(아쿠손타이)(미래 중간태)은 ‘자신들을 위해 듣는다’는 뜻이다.

25) Byz א* D(*) ita e syr (syrc) copsa 등에 있음.

26) Byz א A D W 등.

27) Byz A syrp c 등.

28) Byz A ita b d e ff2 vg syrp copsa pbo bo 등.

29) Byz syrp copbo 등.

30) Byz p66**) ita b d e ff2 vg syrp s c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31) Byz (ita e) itff2 (vg) syrp (syrs) copbo-mss Diatessaron Cyprian 등.

32) 많은 헬라어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지만, Byz D itd e ff2 vg copbo-mss fay 등에 있다. 문맥적으로 보아도, 이 부분이 없으면, 본문은 화난 공회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부터 예수께서 성전뜰 연보궤 앞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매우 부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3) Byz p39 66 75 B T W ita b e ff2 vg syrp copsa pbo bo ach2 arm geo Origen 터툴리안 등에 있음.

34) Byz lat syr copsa bo 등에 있음.

35) Byz syr(p) (copbo-pt) 등에 있음.

36) Byz D ita b d e ff2 vg syrp s 터툴리안 등이 그러함.

37) 대다수의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Matthew Poole, J. C. Ryle 등.

38) Byz A C vgms (syrp) copbo 등이 그러함.

39) Byz A C ita b e ff2 vg syrp s copach2 arm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40) Byz ita b e ff2 vg syrp copbo arm goth 터툴리안 Origenmss 등.

41) Byz p66* A D ita b d e ff2 syrp s coppbo 등에 있음.

42) ‘수전절’이라고 번역한 헬라어(엥카이니아 ejgkaivnia)는 히브리어 카누카에 해당하는 말로서 봉헌(奉獻, dedication)이라는 뜻이다.

43) Byz א A vg syrp 등이 그러함.

44) 원문에는 15스타디아라고 되어 있다. 1스타디온은 약 184.2미터이다.

45) Byz p66 A D itd ff2 vg syrs copbo ach arm geo 등에 있음.

46) ‘근’이라는 원어(리트라 livtra)는 약 340g이다(ISBE, IV, p. 1055).

47) 요한복음 2:13과 6:4에 두 번의 유월절이 언급되어 있고 요한복음 5:1의 절기도 유월절이든지 혹은 다른 유월절 후의 어떤 절기일 것이다.

48) Byz A D (Q) latt copbo 등에 있음.

49) Byz A itq (ff2) syrp s copsa 등이 그러함.

50) Byz p66 א A D W ita b d ff2 vg syrp s copbo-pt Origen Tertullian 등.

51) Byz p66 A W copbo 등이 그러함.

52) F. Godet, 박윤선 등.

53) 매튜 풀, 매튜 헨리, 재미슨-포셋-브라운 주석, J. C. 라일 등.

54) Byz p66* A D itb d e ff2 vg syrp s copsa-mss ach2 arm 등이 그러함.

55) Byz A D  W ita b d e ff2 vg Origenlat 등이 그러함.

56) Byz p66 A D W vg 등이 그러함.

57) Byz A vg syrp (s) cop(pbo) (arm) 등에 있음.

58) 크리소스톰, 매튜 풀, 헹스텐버그, 알버트 반즈, 레온 모리스 등.

59) Byz A D ita b vg syrp s copsa bo ach2 arm Diatessaronarm Origen 등.

60) 본장 6, 9, 24절에와 요한복음 6:39; 18:9에 나온다.

61)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Origenlat 등이 그러함.

62) Byz A lat syr 등.

63) Byz A syrp s arm (eth) geo 등이 그러함.

64) Byz lat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