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교회연합운동 비평

김효성 목사

2023년 11월 7일  수정

자료내려받기

책 안내

 

 

머리말

본서는 하나님의 뜻을 만방에 선포하는 뜻으로 출판된다. 부디,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이 본서를 읽고 현대 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교회의 정로를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본서는 저자가 이전에 쓴 현대교회문제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옛신앙, 2001),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옛신앙, 2004), 및 현대교회문제 (제3판; 옛신앙, 2007)에 있는 내용들--지금은 대부분 절판된--을 중심으로 쓴 것이다.

이렇게 한 목적은 오늘날 교회들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점을 좀더 잘 알리기 위함이다. 저자는 이로써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교인들이 바른 분별력과 지식과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생활을 바르게 하기를 소망한다.

본서는 교회연합운동의 모든 문제를 학문적으로 논하려 시도하지 않았고 단지 자료들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비평하려 하였다. 저자는 목회자로서 제한된 시간 안에, 재인용된 일차 자료들을 다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문제점들을 확증하는 자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가 이런 문제점들을 무시한다면, 그는 무지하든지 사실을 은폐하려는 자이며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점들이 확증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교리적 분별력 없는 교회연합운동, 우상숭배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천주교회와의 교제, 넓어진, 변질된 선교 개념,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 말씀 중심의 바른 길을 벗어난 은사운동, 보수 신앙을 가졌다는 목사들의 미지근하고 안이한 타협적 태도와 행위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용납, 세속적 교회음악과 예배 방식의 도입, 낙태와 동성애의 포용 등 여러 가지 심각한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현대 교회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직시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이 주의 종들에게 얼마나 있는지 매우 염려된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의 문제들을 지적하셨다(계 2-3장). 바른 교회의 건립은 주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엡 5:26-27) 하셨다.

오늘날 교회의 정로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치 않는 것이며, 또 은사 체험을 추구하지 않고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 길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에, 오직 거기에만 밝히,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불변적 말씀인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생각하고 바른 길을 구해야 하며, 비록 그 길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그 길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옛 길, 바르고 선한 길을 구해야 한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안을 얻으리라”(렘 6:16).

비록 부족한 자료들의 수집과 논평이지만, 저자는 필요성에 몰려 본서를 내놓는다. 저자는 본서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리 이탈하여 가고 있다고 판단한다.

본서는 하나님의 뜻을 만방에 선포하는 뜻으로 출판된다. 부디,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이 본서를 읽고 현대 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교회의 정로를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제목차례

 1. 정의, 역사적 고찰, 비평의 필요성 

 2. 교회 일체성의 기초 

   WCC의 공식적 진술들  

   신학적 포용주의 

   신학적 포용주의에 대한 비평 

 3. 성경관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임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함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 

 4. 신조, 복음, 믿음에 대한 견해 

   신조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 함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함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함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함

   복음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믿음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를 주장함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함 

 5.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  

   분석  

   천주교회 비평

 6. 한 세계교회 추구  

   분석    

   비평   

 7. 선교 개념 

   넓어진 선교 개념--사회정치적 활동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    

 8. 이방종교에 대한 태도  

   분석     

   비평   

 9. 문제의 핵심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천주교회의 포용  

   종교다원주의의 경향  

   복음주의 동일한 문제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천주교회의 이단성  

10. 성경적 견해  

   교회 일체성의 성경적 개념

   바른 연합의 원리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의 일치

     이단들의 배제 

     교파들의 정당성 

     초교파적 교제와 협력의 필요성

결론과 제안  

   결론    

   제안  

    기존의 세계적 단체들을 존중해야  

     잘못된 교제들을 반성하고 교정해야 

     너무 조직체적 연합을 강조하지 말아야

     영적 안목을 가지고 충성해야  

 

 

1. 정의, 역사적 고찰, 비평의 필요성

정의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교회연합운동은 온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이다. 마틴 마티는 교회연합운동을 “세계의 분열된 기독교회들이 자신들의 본질적 일체성(一體性)을 인식하고 새로운 일치와 재(再)연합을 향해 움직이는 시도”라고 정의했다(The Encyclopedia America, IX, 623). 로버트 브라운은 교회연합운동을 “분열된 기독교 가족을 재연합시키려는 관심”이라고 표현했다(The Encyclopedia of Religion (Macmillan), V, 20). 현대 교회연합운동의 주요 결실이며 또 주요 수단인 WCC(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연합운동의 목표를 “한 거룩한 공동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Gathered for Life: The Official Report of the Sixth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1983), p. 51).


역사적 고찰

현대 교회연합운동의 배경적 역사를 살펴보면, 19세기말,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첫째는 선교의 부흥이다. 이로 인해, 미국과 영국에서 선교회들이 조직되고 세계의 곳곳에서 선교대회들이 열렸다. 둘째는 1846년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이 영국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나 세계적 교회연합체로서 의의를 가진다. 셋째는 기독학생운동이 있었고 YMCA와 YWCA 같은 기독청년단체가 설립되었고 1895년에는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이 조직되었다(David P. Gaine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 Study of Its Background and History, pp. 5-17).

20세기에 들어와, 1910년에 영국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현대 교회연합운동의 시작이라고 여겨진다. 미국 감리교 평신도이었던 존 모트의 활약으로 159개의 선교회들로부터 1,196명의 총대들이 모였던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였던 세계적인 대회이었다(William H. T. Gairdner, Echoes from Edinburgh 1910, p. 50). 이 대회의 결과로,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세계적 연합기구이었다. 이 기구는 1961년에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병합되었다.

1925년, 스웨덴 웁살라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의 주도 아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생활과 봉사의 세계기독교대회’가 모였다. 이 대회의 관심은 사회정치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원리들의 적용이었다(The Stockholm Conference 1925, pp. 1-37).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라 불리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

또 1927년,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 촬스 브렌트의 주도 아래, 스위스 로잔에서 ‘신앙과 직제의 세계대회’라는 세계적 회의가 열렸다. 이 대회의 관심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의 회복 문제이었다(Faith and Order: Proceedings of the World Conference, Lausanne, August 3-21, 1927, p. 460).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

그 후, 생활과 봉사 운동과, 신앙과 직제 운동이 서로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조직되었다(The First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Held at Amsterdam, p. 14.). WCC(세계교회협의회)는 이와 같이 현대 교회연합운동의 주요 결실이요 주요 수단이며, 그 배경에는 선교, 사회문제, 교회일체성이라는 세 가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WCC 2차 총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3차 총회는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4차 총회는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5차 총회는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6차 총회는 1983년 캐나다 뱅쿠버에서, 7차 총회는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8차 총회는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9차 총회는 2006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그리고 10차 총회는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렸다.


비평적 연구의 필요성

현대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몇 가지 이유에서 필요하다. 첫째로, 교회연합운동의 세력과 영향력이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WCC는 2012년 1월 현재 110개국 이상의 349개 교단들에 소속된 5억 6천만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고 말한다(http://www.oikoumene.org/en/who-are-we.html에 의함).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성공회가 회원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점을 비평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교회들은, 그 운동에 가담하고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 운동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영향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연합운동은 성경적 근거와 신적 승인을 주장함으로써 많은 순진한 성도들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WCC 창립총회는,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땅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 그가 우리를 이 곳 암스텔담에 모으셨다”고 선언했다. 교회연합운동의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 17:11, 21)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한 사도 바울의 말씀(엡 4:3)을 즐겨 인용함으로써 교회연합운동이 성경적 근거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WCC의 신앙직제 사무관 한스-게오르그 링크는 에베소서 4:3을 언급하면서 “일체성에 대한 사도의 권면과 일체성을 위한 우리의 현재의 추구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한 주님께 대한 불순종이 된다”고 하였다(Apostolic Faith Today, (WCC, 1985), p. 1). 이런 유의 주장들은 교회연합운동 안팎의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에게 혼란스런 목소리로 들려질 것이다.

셋째로, 근래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WCC는 창립 때부터 그 지도층에 존  베넷, 브롬리 옥스남, 헨리 반 듀젠, 추첸 차오, 대주교 죄더불롬, 윌리엄 템플 등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자들을 포함했었다(Carl McIntire, Modern Tower of Babel, pp. 139-206). 그러나 1983년 WCC 6차 총회 때 복음주의자들 다수의 선언문에 의하면, 교회연합운동가들이 복음의 핵심을 믿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 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기쁘게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고 주장하였다(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p. 16-20).

이 공개편지의 서명자들은 풀러신학교 선교학 교수이며 미장로교회(PCA) 목사 아서 글랏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의 전 총무 월드론 스캇, 고든-콘웰 신학교 교수 리차드 러블리스, 개혁주의 에큐메니칼협의회(RES) 총무 폴 슈로텐보어 등 200여명이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이 운동의 문제점을 다른 이들에게 널리 알리고 인식시켜 그들로 하여금 WCC에 가입하지 말고 이런 단체와 운동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2. 교회 일체성의 기초

WCC의 공식적 진술들

교회연합운동은 오늘날 교회들의 신학적 변질 혹은 배교(背敎)와 더불어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그 운동의 문제점은, 비록 초창기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상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그것은 교회들이 신학사상의 변질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배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독교계는 한편에서는 신학의 변질을 수용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분별한 교회연합운동을 받아들였다. 교회연합운동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명분 아래 전 세계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점은 그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의 일체성(unity)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교회연합운동이 추구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基礎)는 공식적으로는 다음 몇 가지 진술들에서 나타나며 그 진술들은 얼른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WCC의 기초’

우선, WCC 헌법의 처음에는 ‘WCC의 기초’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WCC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 (Constitution, I, in Gathered for Life, p. 324).

첫눈에는 이 진술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WCC에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이 진술에 충실히 서명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이 진술은 적어도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 사상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점은, 이 진술이 기독교회들의 건전한 연합의 기초로서 충분한가? 비록 우리가 이 진술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진술로만 교회 연합의 기초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 외의 다른 본질적 교리들에서 이단적인 교회들, 예를 들면 로마 천주교회 같은 배교적 집단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신앙’

또 WCC는 한 신앙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WCC 제5차 총회는 선언하기를, WCC의 첫 번째 기능과 목적은 “한 신앙 안에서와 한 성찬 교제 안에서의 유형적 일체성의 목표로 교회들을 초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1982년 리마에서 모인 WCC의 신앙직제위원회는 유형적 일체성의 실현을 위한 첫 번째 요건으로서 “한 신앙 안에서의 일체성”을 강조하였다(Towards Visible Unity. Commission on Faith and Order, Lima 1982 (WCC, 1982), p. 5).

1993년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기장의 협의체이었던 한국장로교협의회도 다음과 같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모든 장로교단들은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 하나의 복음에 대한 공동 이해, 개혁신학과 신조에 바탕을 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동고백과 세례, 성만찬을 행하고 있다”(기독교보, 1993. 12. 11, 7쪽). 그러나 이 선언은 참되지 않다고 보인다. 예장통합과 기장의 신학 사상은 성경적 기독교 신앙과 다르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연합운동의 ‘한 신앙’에 대한 강조는 성경적인 맛을 가지지만(엡 4:5), 그 ‘한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명확한 진술이 없다. 특히, 그들의 진술 속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나 천주교회의 사상이 거기에 포함될 수 없다는 분명한 내용이 없다.

 

‘사도적 신앙’

또 WCC는 사도적 신앙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WCC의 신앙직제위원회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려고 할 때, 우리는 수백년을 걸쳐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성경대로의 사도적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Apostolic Faith Today, p. 93). WCC의 뱅쿠버 총회도 교회 일체성의 목표를 향한 한 단계로 사도적 신앙의 공동적 인식, 공동적 설명, 공동적 고백을 강조한다(Gathered for Life, p. 48). 이것은 좋은 표현이긴 하지만, 문제는 WCC가 사도적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또 모든 회원교회들이 그것에 서약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더욱이, WCC는 사도적 신앙의 예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제안한다. WCC의 신앙직제위원회는, “WCC는 교회들에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일체성을 재인식하고 . . . 그 내용을 더욱 포괄적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주장하도록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Towards Visible Unity, p. 35).

주후 381년에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와 성령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는 정통적 신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成肉身)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來世)의 삶을 바라본다. 아멘.

이것은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제시된 보다 구체적 신앙의 내용이다. 그러나 역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오늘날 자유주의적 교회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참으로 받아들이는가? 둘째, 교회들이 비록 이 신조를 받아들일지라도, 그 외의 추가적 요소들에서 이단적인 로마 천주교회를 용납할 수 있는가?


신학적 포용주의

WCC의 공식적 진술들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그럴 듯하다. 그러나, WCC와 교회연합운동의 자료들을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보면, 위의 네 가지 내용들조차도 단지 형식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교회연합운동의 활동가들이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주장하는 형식적 기초에 불과하다. 위에서 말한 내용들은 교회연합운동에서 교회 일체성의 실제적 기초가 아니다. 그들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theological inclusivism)이다. 그것은, 교회연합운동이 기독교계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면서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계에 현존하는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고 그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하며 여러 가지 교회연합적 행위들을 하고 있다.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함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WCC와 그 지도적 인물들이 오늘날 기독교회들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데서 드러난다. WCC의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교회들 안에서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다”라고 하였다(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5). WCC의 전 총무 유진 카슨 블레이크도 교회의 연합을 위해, “연합된 교회는 그 공동성 안에서 (또 그 공동성 때문에) 신앙의 신학적 작성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하였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p. 146). WCC는 선교에 대한 한 선언문에서 “공통적 신앙의 다양한 표현”을 추구한다고 진술하였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7 (1983), p. 68).

1997년 우리나라 예장대신측 교단의 전 총무인 조순태 목사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이라는 글에서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기독교보, 1997. 6. 21, 3쪽). 그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앨러배머 뱁티스트지는 “[1999년 미국의 솔트레이크 시의] ‘예수님을 위한 행진’은 예수님을 경배할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키는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교회연합적 사건”이며 올해의 버밍햄 행사는 크로스 대성당에서 시작되었고 라우얼즈의 숙녀 카톨릭 교회에서 끝났다고 보도하였다(Alabama Baptist, 13 May 1999; Calvary Contender, 1 July 1999). 데이빗 클라우드는 그 행진에 초청된 ‘거짓 그리스도들’을 열거하기를, 1)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경배되는 떡 예수, 2) 일부다처주의자인 몰몬 예수, 3) 처녀에게서 탄생치 않으신 현대주의 예수, 4) 하나님이 아닌 유니테리언 예수, 5) 아무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을 보편구원론자 예수, 6) 부요하신 번영의 예수, 7) 그의 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로 하여금 억제할 수 없이 웃고 술취한 자들같이 비뜰거리게 하는 웃는 예수, 8) 사람을 결코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 그의 자화상을 건립해주기 위해 오신 자기 존중의 예수, 9) 해방의 신학의 창설자인 혁명적 예수라고 했다(Cal- vary Contender, 1 July 1999).

2000년 2월, ‘교회일치운동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의 교회연합 포럼에서 WCC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보수적 교회]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진보적 교회]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고,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또 [교회연합운동과 복음주의의] 이분법적 구도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심화된 상태의 ‘적대적 냉전 구조’에서 파생되고 강화된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교회연합신문, 2000. 2. 13, 8쪽).

2000년 2월,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에서 김재규 목사(예장대신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기독교보, 2000. 2. 12, 10쪽).

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2000년 9월 “2000년 장로교대회 선언문”에서 “한국장로교회는 만국 교회 앞에 하나”라고 천명하였다(기독신문, 2000. 9. 20, 1쪽). 이와 같이 그들은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한다.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하나님의 여성화 사상을 용납한다. WCC에서 출판된 예배지침서,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책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평화의 숙녀, 지혜의 숙녀, 사랑의 숙녀, 출산의 숙녀, 어머니, 빵 굽는 여인 등의 이름들로 부르기를 권면하며 격려한다. 이 책의 교독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나는 세상을 불러 존재케 하신 어머니-아버지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 여자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에 들어와 우리의 인성(人性)을 나누어 가지고 거절을 당하시고 죽으셨으나 마침내 죽음을 정복하시고 세상을 그 여자 자신과 묶으신 하나님을 믿는다”(Chris- tian News, 24 June 2002, p. 3). 이것이 다양한 신학의 예이다.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함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 교회연합운동가들이 교회들 안에 있는 신학적 다양성을 비평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그들의 정당화는 두 방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어떤 이는 그 신학적 다양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임마누엘 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63년 몬트리얼 신앙직제대회는 신학적 대화가 11, 16세기의 대분열 이전 시대들 즉 교회 안에 어느 정도의 건전한 다양성과 다원주의뿐 아니라 신앙의 기본적 일치가 있었던 시대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하였다(Ecumenical Trends, 15 (1986), p. 4).

또 진 마리 틸라드도, “하나님의 교회는 심지어 가장 놀라운 일치의 시대들 동안에도 항상 다원적 형태이었다. 이것은 실천의 차원에서도 교훈의 차원에서도 그러하였다”라고 말했다(Different Theologies, Common Responsibility: Babel or Pentecost?, p. 63).

한편, 어떤 이는 그 신학적 다양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대표자인 메트로폴리탄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육신의 진리가 각 시대에 취한 역사적인 복장은 진리의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교회의 문제점은 그 회원들 중의 어떤 이들이 본질과 형식을 더 이상 구별할 줄 몰라서 형식적인 점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전통주의의 오류) 혹은 중심적 본질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잘못된 개혁론의 오류)(To- wards Visible Unity, p. 87).

하딩 마이어도, “우리 교회들의 분리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교리적 정죄는 결코 근본적 차이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개인적 차이점에 근거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였다(Ecumenical Trends, 15 (1986), p. 40).

교회연합운동에서 교회 일체성 즉 교회의 하나됨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며 그것은 WCC와 그 인사들이 교회들 안의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데서 그리고 그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하는 데서 이와 같이 드러난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증거한 바가 있다. 신정통주의를 포함하여 다양한 명칭들로 불리며 여러 학파들로 분류될 수 있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또 천주교회는 역사 깊은 이단이며 기독교의 왜곡이며 변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분명히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단을 용납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며 그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인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것이며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장로교인들이지만,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적 현실에서 초교파적 포용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보지만,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포용은 아니다.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선이다. 교회가 이 선을 포기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닐 것이다.

 

연합주의적 행위들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그 지도자들의 다음과 같은 연합주의적 행위들에서도 드러난다.

포용주의적 교리 진술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교회 일체성을 위해 기독교 교리를 포용적으로 표현하기를 제안하고 강조한다. 두어 가지 예를 들어보자.

WCC의 신앙직제위원회 전 의장 니코스 니씨오릴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일체성을 위해 진리를 정의하여야 한다. . . . 교회가 발언하는 모든 교리들은 교회의 교제를 회복하는 데 의무적이라는 불가피한 명제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필요하다”고 했다(Ecumenical Trends, 15 (1986), p. 181). 라이문도 파니카도, 교회연합운동의 토론 목표는 “다양한 기독교 신앙고백들을 초월하며 내재하는 원리에 보다 더 깊이 충실하는 항상 어떤 새로운 일치점이다”라고 말하였다(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19 (1982), p. 781).

 

상호 인정과 성찬 교제

또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교회 일체성을 위하여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한다. 예들을 열거해보자.

교회연합협의회(COCU)(1999년 CUIC(Churches Uniting in Christ)로 명칭을 바꿈)의 소위 ‘언약’(Covenanting)은 한 세례 안에서 회원들을 서로 인정함, 서로를 교회들로 인정함, 안수받은 목사들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함, 정규적인 성찬 교제를 나눔 등을 포함했다(Covenant- ing toward Unity: From Consensus to Communion (Consultation on Church Union, 1985), pp. 9-20). 르로이 개릿도, 일체성의 실제적 적용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동등한 자로 영접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이 교리적 심사 없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또 함께 일하는 목회사역이 가능한 것 등을 제안하였다(Theology Today, 40 (1984), p. 446).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4년 사업계획으로 각종 강단교류, 신학생 예배 강단교류, 연합예배 등을 결의했다(기독교보, 1993. 12. 11, 7쪽).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7년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위에 세워진 하나의 장로교회이므로 이 본질 위에서 정통과 전통을 이어나갈 것,” “교단의 정치 부조리를 물리치고 점진적 신학 교류, 강단 교류, 연합행사 등을 실시해 장로교회의 원형으로 회복할 것” 등의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7. 6. 8, 15쪽).

1998년 우리나라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렸다. 거기에 참여한 교회들은 개신교회,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회 등이었다. 예배 사회는 천주교 일치위원회 박기성 위원이, 주제 메시지 선포는 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박경조 신부가, 설교는 교회협의회 총무 김동완 목사가 맡았다(기독교신문, 1998. 1. 11, 1쪽).

1998년 3월,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미국 연합그리스도의교회(UCC), 및 미국 개혁교회(RCA)는 국내외 선교협력과 목회자 상호 인정 등을 포함한 전면적 교단 교류를 선언한 합의서를 수용하였다(기독신문, 1998. 3. 25, 16쪽).

2000년 2월,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의 주제강연에서 기장 소속 전병금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제들로 교단간의 강단교류 활성화, 총회에 상호 사절단 파견, 총회 개회예배 함께 드리기, 같은 지역 안에서의 연합예배와 성찬식, 세계개혁교회연맹 참여로 국제 교회와의 연합 강화 등을 제안하였다. 논찬에서 김재규 목사(예장대신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기독교보, 2000. 2. 12, 10쪽).


선교 활동에서의 협력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또 교회 일체성을 위해 선교 활동에서 서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강조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언급한 교회연합협의회(COCU)의 ‘언약’은 선교와 전도에 함께 참여할 것을 포함하였다(Covenanting toward Unity, pp. 14-16).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WCC 파송 상임대표인 메트로폴리탄 에밀리아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적 혹은 신적 어떤 법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교리적 혹은 예배의식적 차이점들 때문에 다른 자녀들을 돕는 것을 중지시킬 수는 없다. . . . 교회 역사는 요컨대 교리적 차이점들이 선교 활동에 협력치 못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인다(In- 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72 (1983), p. 258).

침례교 세계연맹(BWA) 총재 닐슨 패니니는, “신학은 때때로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선교와 전도는 우리를 연합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Baptist World, July-September 1998).

 

협의체들의 구성

교회연합운동은 국가별로 또 좀더 넓은 지역별로 교회협의체들을 만들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러한 협의체들 조직의 예들을 연도별로 대략적으로 열거해보자.

교회연합운동은 1948년에 세계적으로 WCC라는 세계적 협의체를 조직하였고 각 나라에서는 교회협의회(NCC)들이 조직되었고 지역적으로도 여러 협의체들이 있다. 유럽 교회협의회(Conference of Eu- ropean Churches=CEC), 아프리카 교회협의회(All Africa Conference of Churches=AACC), 라틴 아메리카 교회협의회(Latin American Council of Churches=CLAI), 아시아 교회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 등이 있다(http://www.oikoumene.org/en/member-churches.html).

1962년, 미국에서 4개 교단들로 시작된 교회연합협의회(COCU= Consultation on Church Union)는 그 후 9개 교단이 참여했고 2002년 1월 그 명칭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들’(CUIC=Churches Uniting in Christ)로 고쳤다. 거기에 속한 9개 교단들은 다음과 같다.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 Christi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Episcopal Church, International Council of Community Churches, Presbyterian Church (USA), United Church of Christ, United Methodist Church(http://www.cuicinfo.org/history/cocuhistory.html).

1998년 10월 29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통합 총회장 서정래 목사)의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등 31개 회원교단 가운데 참석한 신임총회장 등 임원 120여명은 공동기도문에서 “지난날 장로교회가 분열된 아픔을 깊이 회개한다”면서 “장로교회가 하나로 연합해 이 땅에 바로 서서 주님의 정의를 아름답게 꽃 피우자”고 강조했다. 그 모임에서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했다(크리스챤신문, 1998. 11. 9, 14쪽).

1999년 1월 7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24개 회원교단 총회장들과 총무들 등 120여명이 참석한 신년하례회에서 대표회장 예장통합 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신년사를 통해 ‘장로교 연맹’의 결성을 제안했다. 그는 그것을 120여개의 장로교단들이 하나 되는 꿈을 꾸면서 현재의 총회들의 질서와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보다 협력과 결속이 강화된 조직으로 묘사했다. 그의 제안은 장로교 연맹을 만들어 3년 내지 5년 후에 하나의 장로교회 혹은 ‘연합장로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며, 그 장로교 연맹은 하나의 장로교회를 위한 전 단계가 되는 것이다(기독교신문, 1999. 1. 17, 2쪽).

1999년 미국교회협의회는 새 에큐메니칼 모험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고, 새 조직체를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5 June 2000).

1999년 8월,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련: 대표회장 유의웅 예장통합 총회장)는 2000년 회원교단들의 총회 개시일을 9월 25일로 통일시켜 이를 ‘한국장로교의 날’로 선포하기로 하였다. 이 날 30개 회원교단 임원과 대의원들은 한 자리에 모여 개회예배를 올리고 성만찬, 축하 공연 등을 함께 갖게 된다. 한장련은 또 총회 직전 주간과 일요일을 각각 ‘한국장로교주간’, ‘한국장로교주일’로 지정, 장로교 여러 교단이 형제자매임을 고백하고 일치의식을 확인하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하였다(조선일보, 1999. 8. 21, 18쪽).

2000년 7월 6일, 한국의 개신교 17개 교단의 총회장 및 총무 23명은 연세대학교에서 간담회를 갖고 한국 개신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할 ‘한국교회연합준비위(가칭)’를 구성하였다. 참여한 교단들은 예장통합, 예장대신, 감리교, 기장, 기하성, 기성, 기침, 구세군, 정교회 등이다. 교단 대표들은 90년대 이후 침체 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국 개신교가 사는 길은 연합과 일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최성규 기하성 총회장은 “지금의 위기감을 넘어서는 길은 진보와 보수, 개혁과 복음 등 이분법을 넘어서 형제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주요 교단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개혁 등 보수교단들의 참여, 현존하는 양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해체 등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 모임의 초청자였던 기장측의 전병금 목사는 “한국 교회가 이번에 하나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며 앞으로 상당 기간 연합하기 어렵다는 각오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조선일보, 2000. 7. 10, 21쪽).

2000년, 미국교회협의회(NCC)와 미국복음주의협회(NAE)는 빈곤, 낙태, 동성애 등의 주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두 단체를 하나로 묶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로버트 에드가 미국교회협의회 총무는 새 연합체가 탄생할 경우 앞으로 3년 안에 미국교회협의회를 자체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1950년에 창설된 미국교회협의회(NCC)는 개신교회의 주류 교단들과 동방정교회 등 35개 교단들을 가지고 있고, 1942년에 창설된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는 51개 교단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크리스챤신문, 2000. 9. 25, 2쪽).

2000년 9월 20일, 한국장로교단들에 속한 총회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원, 한국신학대학원, 고려신학대학원, 합동신학대학원, 기독신학대학원, 국제신학대학원, 대한신학대학원, 중앙신학대학원, 합동중앙신학대학원, 개혁신학대학원 등 11개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기독신학대학원에 모여 ‘한국장로교 신대원생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신학적 색채를 반영하기 위해 1인 대표체제를 지양하고 총회신학대학원 이재윤, 장로회신학대학원 고창준, 기독신학대학원 김상민 등 3명을 공동대표로 하는 복수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이 단체는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공동사업에 힘쓸 것이라고 하였다(기독신문, 2000. 9. 20, 2쪽).

2001년 1월, 미국의 천주교회, 개신교회, 헬라 정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기독교 연합 단체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그것은 천주교인들, 복음주의자들, 주류파 개신교인들, 오순절파 교인들, 및 헬라 정교회 신자들을 포함하므로 특별하다(Religion Today, 10 January 2001). 16명의 위원들 중 천주교 대주교 윌리암 키일러, 헬라 정교회 대주교 디미트리오스, 풀러신학교 교장 리차드 무우,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 교수 체릴 존스,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 토마스 길레스피가 있고, 한 캐나다 수녀가 회계이었다(Calvary Contender, 1 February 2001).

2001년 3월 15일, 제5차 한국교회 화합과 일치를 위한 정례기도회가 신촌성결교회(이정익 목사)에서 250여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번 기도회의 주최는 한국교회 화합과 일치를 위한 기도회 준비위원회이었다. 이날 기도회는 서경석 목사(예장통합, 서울 조선족 교회)의 사회로 이근수 목사(예장합동, 홍성교회)가 대표기도했다. 정진경 목사(기성,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는 설교에서 기독교회는 본질상 하나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현재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첫째, 신학의 창조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둘째,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어야 하며, 셋째,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바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함을 역설했다.

설교 후 세 사람의 목회자들이 열린 발언을 통해 한국교회의 일치 방향성에 대한 제안을 했다. 기장측 전병금 목사(NCC 한국교회 연합운동 추진위원장)는, 교단의 지방행사로 피치 못하게 참석치 못한 최성규 목사(한기총 한국교회 일치위원장)와 생각이 거의 동일하다고 전제하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끼치고, 통일상황을 앞두고 한국기독교의 일치는 필수불가결적이며, 선교와 구제 및 사회봉사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하나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성구 목사(고신 신대원 교수)는 “한국교회 나누어짐의 원인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교단 소속 목사로서, 교단 내부 문제가 수습되는 대로 교회연합운동에 적극성을 띨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명혁 목사(합신 총회장)는 “전병금 목사와 최성규 목사가 추진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렇게 기도하는 불씨가 점점 커져 좀 더 적극적으로 한기총과 KNCC가 기구적으로 협력하다가 마침내 통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크리스챤 신문, 2001. 3. 26, 15쪽).

2001년, WCC는 전 세계의 모든 교단들을 연합할 전 세계적 새 기독교 포럼을 제안했다. 이 포럼은 단지 현재의 WCC 소속 교단들뿐 아니라, 현재 WCC에 속하지 않은 단체들, 예를 들어 천주교인들과 오순절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도 포함할 것이라고 한다(Fundamental Digest; Calvary Contender, 1 May 2001).

2002년 1월, 미합중국 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미국 성공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등 미국의 9개 교단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들’(CUIC)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 기구는 아직 교단들의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2007년까지 소속 교단들의 목회자들의 강단 교류를 포함하여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목표를 세우고 계속 대화하기로 결의하였다(크리스챤신문, 2002. 1. 14, 1, 2쪽).

2002년 4월, 미국의 천주교회, 자유주의 개신교회, 복음주의, 헬라정교회, 오순절파 지도자들은 “미합중국 기독교회들 연합”(Christian Churches Together in the USA)이라는 문서에 서명했다(Calvary Con- tender, July 2002).

2002년 6월 20일,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등 21개 교단 신학자들로 구성된 장로교 신학회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초대회장에 선출된 이종윤 목사는 취임소감에서 “장로교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된 것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적인 자화상이다”라고 하면서 “이번 장로교 신학회의 창립을 통해 장로교가 분열을 극복하고 선교초기처럼 하나가 되어 새 시대에 복음전파에 주역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크리스챤신문, 2002. 7. 1, 14쪽). 30여명의 신학자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진 중에 황창기 고신대교 총장, 오영석 한신대 총장, 오덕교 합동신대원 교수, 김인환 총신대 교수 등이 있다.

2002년,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가 각 교단에게 제안했던 ‘한국교회의 통일된 연합체 구성 추진’ 헌의안이 23개 회원교단 중 15개 교단의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통과시킨 총회는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예장고신, 예장개혁(광주), 예장개혁(국제), 예장대신, 예장합신, 예장합동정통, 기성, 예성, 기침, 기하성,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교역자회, 하나님의 교회 등이다. 나머지 8개 교단 중, 구세군, 예수교 복음교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협의회, 나사렛 성결교회는 임원회 등에서 결의되어 총회 인준만 남겨두고 있고, 기감,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기독교 한국루터회, 예장순장은 불명확하나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라고 한다(기독신문, 2002. 10. 2, 1쪽).

미국의 주류 개신교회, 헬라정교회, 천주교회, 오순절파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2003년 1월 세 번째 모임을 준비하면서 새 삶의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임시적으로 우리 자신을 ‘미합중국 기독교회 연합’이라 부르게 인도했다. 우리는 더 큰 일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Calvary Contender, November 2002).

2004년 3월 31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의 대표자들 모임인 소위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18인 모임’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이행과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회의에는 교회협에서 회장 김순권 목사(통합), 총무 백도웅 목사, 일치위원장 김상근 목사(기장)가, 한기총에서 공동회장 최성규 목사(기하성), 일치위원장 손인웅 목사(통합), 일치위원 박종수 목사(고신)가, 교단장협에서 상임회장 김순권 목사(통합), 상임회장 김진호 목사(기감), 서기 이용규 목사(기성), 사무총장 김원배 목사(기장)가 참석하였다. 또 그 모임은 교회협과 한기총 양기구의 대표 각 5인 등 13인을 준비위원회로 구성하였고 그 위원회로 하여금 2007년 교회연합기관인 가칭 ‘한국교회연합’을 출범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결정하였다(기독신문, 2004. 4. 7, 12, 23쪽; 기독교보, 2004. 4. 10, 15쪽).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WCC의 손짓

수십 년간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던 WCC는 근래에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WCC 제8차 총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의 조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내세웠다(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2000년 초, 미국교회협의회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날 것이라고 한다. AP통신에 의하면, 이런 제안의 통지문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와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에 보내졌다. 미국교회협의회는 1999년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새 교회연합의 모험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었다(Calvary Contender, 15 June 2000).

다시 정리해보자. WCC와 교회연합운동의 교회 일체성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회들 속에 현존하는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고 그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함에서 드러나며, 또한 그들의 연합주의적 행위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의 연합주의적 행위들의 예들로는, 포용주의적 교리 진술의 제안, 상호 인정과 성찬 교제의 제안, 또 선교 활동에서의 협력 제안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각종 협의체들의 구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행위들, 특히 포괄적 협의체 구성의 행위들을 볼 수 있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등 보수적 교단들의 적지 않은 인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포용주의는 교회 일체성의 바른 기초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신학적 포용주의에 대한 비평

교회연합운동에서의 교회 연합의 실제적 기초인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교회연합운동에서의 신학적 포용주의의 잘못은 다음의 네 가지 관점에서 분명하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임

첫째로,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교리가 무엇이고 신학이 무엇인가? 교리(敎理, doctrine)란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고 신학(神學, theology)이란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것, 즉 교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다. 성경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확실하고 불변적인 진리들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 계시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들으신 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5-18). 그는 이 말씀에서 교회의 기초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진리에 대한 고백임을 분명히 하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외에 다른 터가 없다고 증거하였고(3:11), 디모데전서에서는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eJdraivwma)[지주(支柱)]라고 표현했다(3:16).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증거하였다(행 2:22-24).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증거한 것이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기초적 사실들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했다(1:22-24).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 등 확실하고 불변적인 사실들 위에 기초하고 있고 특히 그의 죽음의 속죄적 의미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을 통해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7-28,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과 같은 사건들과 특히 그의 죽음의 속죄적 의미는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즉 신학이 바른 신학이라면, 그 중심적 내용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교리들과 신학들을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소위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자살 행위인 것이다.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짐

둘째로,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즉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지닌다. 모든 시대에 모든 지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성도들의 모임인 모든 교회들은 한 몸이지만, 그 일체성(一體性), 한 몸됨,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즉 바른 교리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 하나됨은 기본적으로 교리적이다.

교회연합운동가들이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 구절로 자주 인용하는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은 하나가 되어야 할 대상과 그 하나됨의 성격을 통해 그 하나됨의 교리적 성격을 잘 보인다.

요한복음 17:9, 11,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0-2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즉 택자들의 하나됨을 기도한 것이며, 그 성격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같은 하나됨이며 하나님 안에서와 그의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에베소서 4: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3-14에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임을 증거했었다. 그들은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이다. 또 사도 바울은 그들의 하나됨의 성격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께서 하나이신 것같이, 또 믿음과 세례와 소망이 하나인 것같이, 몸인 교회도 하나임을 증거하였다. 즉 그가 말한 교회의 하나됨은 포용주의적 하나가 아니고 분명한 교리적 성격을 가진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워필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바르게 말하였다(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또 설교자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하나됨은 없다”고 바르게 말하였다(D. Marti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바른 교리들을 보수(保守)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

셋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받았고 소유하고 있으며 또 그 진리들을 보수(保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는,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 전해 받은 내용)을 지키라”고 말한다. 또, 디모데후서 1:13-14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바른 말들의 표준을 지키라]”라고 말한다. 사도적 바른 교리들은 확실히 개신교회의 주류적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교리들을 포함한다.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근본교리들은 교회의 하나됨의 기초로 간주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기초로 간주하였다(기독교 강요, 4. 1. 12). 존 오웬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The Works of John Owen, XV, p. 106).

그러므로, 바른 교리들을 보수할 교회의 의무를 생각할 때, 바른 교리들, 적어도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근본교리들을 보존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이다.

 

교회는 이단을 배격할 의무가 있음

넷째로, 교회는 이단을 배격할 의무가 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사도 요한도 이단의 영을 조심하라고 교훈하였다.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단을 배격하라고 분명히 교훈하였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유다서를 쓴 유다도 그의 서신을 쓴 동기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임을 분명히 말했다(유 3). 사도 요한은 이단자를 멀리하고 그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정통적 신앙을 부정하는, 갖가지 형태의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무슨 전문적 명칭으로 분류되든지 간에 대체로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신적 권위, 하나님의 형벌적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복음의 핵심인 그의 대속 사역, 그의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옛신앙, 2008)). 그것들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의 사상보다도, 심지어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천주교회보다도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 메이천는 기독교와 자유주의(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라는 그의 책에서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비(非)속죄적 종교이며, 단순히 이단이 아니고 전혀 기독교가 아님을 잘 증거하였다. 또 천주교회는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인 단체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단 이상이다. 그것은 참된 기독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에서 떠난 이단들을 배격해야 할 교회의 의무를 생각한다면, 오늘날 교회들 안에 들어와 있는 신정통주의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들과 또 역사상 매우 뿌리깊은 이단인 천주교회를 분별하고 배격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큰 잘못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의 실제적 기초인 신학적 포용주의, 즉 교회들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수용하는 입장은 명백히 잘못이다. 첫째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이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둘째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교회의 일체성 즉 하나됨이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만국 교회는 바른 교리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셋째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교회가 바른 교리들을 보수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바른 교리들의 보수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넷째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교회가 이단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직면한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와 교회연합운동은 명백히 잘못이다.

 

3. 성경관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구체적인 몇 가지 점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잘못된 성경관의 포용에 대해 살펴보자.

교회연합운동의 성경관은 매우 포용적이다. WCC의 신앙직제위원회는 성경에 대한 다섯 개의 보고서들을 채택한 바가 있다. 그것들은, ① 1949년의 왜담 보고서(“성경 해석을 위한 지침들”), ② 1963년의 몬트리얼 보고서(“성경, 전통 및 전통들”), ③ 1967년의 브리스톨 보고서(“교회연합운동을 위한 해석학적 문제의 중요성”), ④ 1971년의 루베인 보고서(“성경의 권위”), ⑤ 1977년의 로컴 보고서(“신약성경과의 관계에서의 구약성경의 중요성”)이다. WCC는 1980년 이 다섯 개의 보고서들을 묶어 성경: 교회연합운동에서의 그것의 권위와 해석(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WCC, 1980))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을 살펴보면,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포용적 입장을 취함을 알 수 있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성경관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교회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일한 진리의 규범이다, ② 성경은 교회 안에서 계속적 생명을 가졌던 동일한 전통의 산물이다, ③ 성경은, 입구가 여럿인 기독교 진리의 종합관에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또 그 보고서는 “우리는 이 입장들 중의 어느 것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위의 책, 38-39쪽).

또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포용주의적이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성경 해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다른 원리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② 성경의 중심 주제가 해석의 열쇠이다, ③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 개인의 양심에게 말한다, ④ 교회의 생각이 해석의 열쇠이다, ⑤ 신앙의 저장소가 해석의 열쇠이며, 교회의 가르치는 자들이 그것의 관리인이다, ⑥ 신조들이 해석의 열쇠이다. 또 그 보고서는, 우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자명하거나 결정적인 것으로 혹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말했다(위의 책, 22, 38쪽).

WCC는 특히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진다.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임

첫째로, WCC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일군(一群)의 문학적 문서들을 포함한다. 또 그것은 다른 문학적 문서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문학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위의 책, 31쪽).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 . . 전통들과 기록물들은 이스라엘과 초대교회에서 전달되어 내려왔으며, 흔히 오랜 기간 동안 결합되고 후대의 역사 상황에 비추어 재작성되고 재해석되었다. . . .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위의 책).

그 책의 편집자 플레스만-반 리어는 이 보고서에 대해, “그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사용하는 학자적 주석의 과정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라고 논평했다(위의 책, 45쪽).

루베인 보고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기원한 인간 문서들의 집합으로, 또 과거의 모든 다른 문학적 문서를 위해 채택된 절차들을 따라서, 연구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 . . 역사적 비평적 연구에 근거하여 성경학자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많은 애매한 점들을 분명하게 해결하였다. . . . 그 연구 방법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위의 책).

그러나 WCC가 용납하는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은 성경을 파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이다. 에드가 크렌츠는 성경의 문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적 비평(Literary Criticism)은 저자의 저작 목적, 그가 사용한 문학 형식, 작품의 완전성과 신빙성, 또 그것의 자료들을 결정한다. 역사적 비평(Historical Criticism)은 작품이 쓰인 역사적 상황과 그 작품의 선(先)역사에 관계한다(Edgar Krentz, Biblical Studies Today: A Guide to Current Issues and Trend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6), p. 17).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들의 말이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개혁교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그들은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의 말임을 똑같이 명백하게 믿는다”고 했다(Revelation and Inspi- ration (1927; Baker, 1981), pp. 397-98).

그러나 문제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 방식을 취하는 성경 연구자들이 두 가지 잘못된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첫째로, 그들은 초자연적 사건들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현대인들이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리차드 소울런은 “역사적 비평 방식이라는 용어는 실재(reality)(하나님, 계시, 기적)에 대한 인간의 현재적 경험이 과거에 무엇이 발생할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를 결정할 객관적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추론의 기본 원리를 가리킨다”고 말했다(Richard N. Soulen, Hand- book of Biblical Criticism (John Knox Press, 1976), p. 99).

둘째로, 그들은 성경이 참된 책들이 아니라고 전제한다. 즉 성경의 신빙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적 증거들로부터 성경책들의 신빙성을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성경이 그 언급된 저자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들 또 이런 유의 비평 방식은 주관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옛날에 일어난 초자연적 사건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참되고 정당한 변론이 아니다. 비록 현재 경험치 못하는 것일지라도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이라면 그것들은 인정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또 성경책들이 그 주장된 저자들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들의 것이라는 생각도 완전히 주관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의 불신앙적, 파괴적 비평 방식은 결코 건전하고 정당한 성경 연구의 방식으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함

둘째로, WCC는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경은 매우 다양한 문학적 전통의 집합을 포함하는데, 그 내용들은 흔히 서로 긴장 속에 있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때때로 진짜 모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그것들이 참으로 모순적인 곳에서 이것은 성경 시대 자체 안에서의 실제 신학적 불일치들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혹은 역사적 상황들에 기인하였을 것이다(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pp. 31-32).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단지 인간 저작품들을 모은 책으로 본다면 상호 충돌과 모순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성경의 참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성경의 통일성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영감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 진리이다. 촬스 핫지는 “만일 성경책들이 그것들이 주장하는 그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책들은 한 생각의 작품이며, 그 생각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 이 사실로부터, 성경은 성경과 모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바르게 말했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1871-73; Eerdmans, 1981), I, 187).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

셋째로, WCC는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해석된 역사로 본다. 루베인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성경학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이 모든 경우들에서 이미 해석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 . 보도된 사건들은 그러므로 결코 ‘순수한(bare) 사실들’이 아니고 오직 성경 저자들에 의한 해석의 옷을 입고서만 항상 우리에게 접근한다. . . . 우리는 성경에서 해석되지 않은 사건들이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 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48).

또 WCC는 1984년 우리의 공통적 신앙의 뿌리들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조지 판텔리스(Jorge Pantelis)의 자유주의적 글이 비평 없이 실려 있다(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WCC, 1984), pp. 41-53). 판텔리스는 성경학자들이 예수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받아들인다(위의 책, 41쪽). 그는 사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을 논하면서 “저 이야기들은 분명히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생애의 그 측면을 어떻게 다른 방식들로 확장하기를 좋아했는지를 보인다”고 한다(위의 책, 43쪽). 또 그는 변화산 사건 이야기에 대해 “대부분의 주석가는 이 이야기가 부활 사건 후의 제자들의 경험임을 동의한다”고 말한다(위의 책 , 50쪽).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성격을 가졌고 성경 저자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실한 증거자들이었다. 성경의 권위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권위, 즉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이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므로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의 역사적 성격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진실한 증인됨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파괴하는 무서운 이단인 것이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

넷째로, WCC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직접적으로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지 못함을 주장한다. 루베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서 따라야 할 표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 . 우리는 [성경을] 모든 문제와 모든 상황을 위한 규범으로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 . . . 성경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부과되는 규범이 아니다(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56).

그 대신, 그 보고서는 성경의 ‘관계적 권위’ 즉 성경 권위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그 보고서는,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이 그것을 권위 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에만 현재적 실재이다”라고 말한다(위의 책, 48쪽). 덧붙여, 이 보고서는 성경의 영감이나 성경 저자들의 목격자적 성격도 성경의 신적 권위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말한다(위의 책, 49, 54쪽).

이런 성경관의 당연한 결과들로, 첫째로, 성경구절들은 증거 구절(proof texts)로 인용되는 것이 어려워진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흔히 해왔듯이 고립된 성경 본문을 ‘증거 구절’로 인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위의 책, 32쪽). 둘째로, 성경의 명확한 메시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몬트리얼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책의 편집자 플레스만-반 리어는 “특정한 문제에 관하여 성경의 메시지나 성경의 교리에 대해 더 이상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 . . 어떤 [성경] 본문도 어떤 현재의 교리적 혹은 윤리적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위의 책, 4, 11쪽).

그러나 교회연합운동가들이 말하는 성경의 ‘관계적 권위’는 바로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이다. 물론, 성경의 관계적 권위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령께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사람에게 확신시켜주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는,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서 말씀에 의해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연합운동가들의 성경관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관계적 권위만 주장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기본 신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모든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졌다”고 말한다. 루터파의 일치신조도 “모든 교의들과 모든 박사들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유일한 규칙과 규범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도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믿도록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개신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객관적 규범이라는 확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또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성경 자체의 증거들과 충돌한다. 주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명백히 증거하셨다. 주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라고 선언하셨다(요 10:35). 사도 바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했다(딤후 3:16). 또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사도들의 교훈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여기에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도 있다. 사도들의 글들이거나 사도적 승인을 받은 글들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성경은 자신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기초적 신념이며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모든 개신교회의 공통적 신념이다. 오직 근래에 자유주의 신학만이 기독교의 이 기초적 신념을 부정한다. 그것은 이단이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의 이 기초적 신념을 부정하는 이단적 자유주의 성경관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이 기초적 신념, 즉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곳에는 참 기독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 성경관이나 그것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은 명백히 잘못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며 그런 이단을 포용하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우리는 이런 유의 포용주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배격해야 한다.

 

4. 신조, 복음, 믿음에 대한 견해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성경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조와 복음과 믿음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도 볼 수 있다.


신조

교회연합운동은 신조에 대해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 내용을 축소시키려 함

첫째로,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 내용을 축소시키려 한다. WCC에서는 교회 연합을 위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제안된다. 1982년 WCC의 신앙직제위원회의 리마 보고서는, “[니케아 신조]에 근거하여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적 입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다른 교회들의 교훈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되고 이해되었던 정죄들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Towards Visible Unity (WCC, 1982), p. 43).

그러나, 교회 일치를 위하여 신조 내용을 축소하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제임스 배너만(James Bannerman)은 신조의 역할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① 연합의 기초로서 성경의 진리를 붙듦, ②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침, ③ 세상의 오류들이나 불신앙을 대항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함(The Church of Christ (T. & T. Clark, 1868), I, 296-302). 이 세 가지 역할 중 세 번째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머레이도 신조는 오류의 침입에 대항하여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I, 281). 그는 오늘날 신학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생각할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 . 가장 기초적 불신앙의 모순들이 확고한 성경 교리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Ibid.)라고 말했다. 바람직한 신조는 모든 진리를 선언하고 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오류를 반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신조의 이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니케아 신조는 오늘날 교회들의 교제의 기초로서는 여러 점에서 부족하다. 예를 들면, 그것은 펠라기우스적 오류를 배제할 사람의 전적 부패성에 대한 진술이 없고, 교황 무오, 마리아 숭배, 미사, 연옥 등 천주교 오류를 배제할 진술도 없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그리스도의 속상적(贖償的), 유화적(宥和的) 속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성경 무오 등의 중요한 진리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오늘날 교회는 현대적 오류들이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진리들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보다 더 자세한 신조를 필요로 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들은 니케아 신조보다 좀더 자세한 자신들의 신조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일체성의 기초가 될 신조는 적어도 이런 신조들의 공통적 내용들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들이 니케아 신조로 돌아가려는 것은 후퇴일 뿐 아니라 큰 오류이다. 그런 생각은 존 머레이가 표현하듯이 “교회를 깨우쳐 오셨던 성령”을 모욕하는 것이다(Ibid., p. 284). 교회 일치를 위해 니케아 신조를 제안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또 이런 잘못된 생각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함

둘째로,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WCC의 리마 보고서는 1세기의 신조들의 언어가 “그 시대의 문화와 필요와 상황에 의존했다”고 주장하면서, “[니케아] 신조도 그 언어와 그 개념들과 그 사상 형식들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였다(Towards Visible Unity, p. 34). 그 보고서는,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고대 헬라-로마의 사상과 언어의 형식들에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Ibid., p. 40).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시대제약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구체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주셨고 정통 신조들도 그런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가 특정한 문화로 옷 입었다고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주어진 문화적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들을 전달하시는 수단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 내용을 구성하였다. 또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이런 성격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언어적 진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신조가 시대제약성을 가진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것이 신조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기에 결함이 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적 상황들을 그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면, 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작성된 신조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더욱이, 만일 신조가 시대제약성을 가지기 때문에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는 즉시 회의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의 모든 진술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당신의 주장도 시대제약성을 가지는가?”고 반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조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들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신조들의 역사적, 문화적 옷들뿐 아니라, 또한 신조들이 선언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들 자체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사실, 신조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할 때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왜냐하면 진리와 교리는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며, 신조란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들과 교리들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이 기독교 진리들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지므로, 모든 신조들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조가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게 나타내는 한, 즉 그것이 성경적인 한, 그것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영원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의 신조들은, 아치볼드 알렉산더가 표현했듯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공식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권위 있는 내용으로 간주해야 한다(Archibald Alexander, “Creed,”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I, 741). 따라서 니케아 신조가 시대제약성을 가진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이런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함

셋째로,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솔직히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보았다. 1981년 WCC 신앙직제위원회의 오뎃사 보고서는 “어떤 이들은 [니케아] 신조가 단지 낡은 언어뿐 아니라 심지어 잘못된 기초적 존재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진술하였다(Apostolic Faith Today (WCC, 1985), p. 250). 그 보고서는 또한 “그[니케야] 신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경적 신앙에 대한 부적절한(inadequate) 신조로 생각된다”라고 말하였다(Ibid., p. 251). 그 보고서는 덧붙여, 그들에게 그 신조는 일방적인데 왜냐면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과 성육신(成肉身)의 교리가 오직 요한복음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Ibid.).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만일 ‘부적절하다’(inadequate)는 말이 양적인 부적절함 즉 불충분성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니케아 신조는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한 기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니케아 신조의 부적절함이 내용적 부적절함 즉 부당함(impropriety)과 부정확함을 의미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교회연합운동가들이 그 신조가 그 기본 철학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므로, 그들이 의미하는 부적절함이란 내용적 부적절함 즉 부당함과 부정확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신조의 권위와 내용의 정확함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용납될 수 없는 잘못이다.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회들을 포함하는 모든 기독교 세계가 공식적으로 성경적 신조로 받아들이는 신조이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는 “니케아 신조는 철저히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II, 492).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도 니케아 신조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의 일치적 찬동이요 정통적 참 교회의 고백이다”라고 말했다(Ibid., 94-95). A. A. 하지는 니케아 신조를 모든 기독교회의 신조라고 표현하였다(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 5).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의 권위와 정확함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바른 전통에 반대되며이런 잘못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함

넷째로,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했다. 오뎃사 보고서는 “신비의 요소가 [니케아] 신조에서뿐 아니라 또한 기독교 신앙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한 다음,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믿는 유대적 신앙으로부터의 이탈, 즉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비판 없이 인정한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한 예로,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신조가 생명으로 취급될 때, 그것의 내용은 모든 정의를 초월한다. . . .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누가 표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위험을 무릅씀이 없이 그 정의할 수 없는 분을 정의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86).

그러나,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주장은 큰 잘못이다. 이것은 신정통주의적 사상이다. 신정통주의는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적, 명제적(命題的)이지 않고, 인격적, 경험적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상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 즉 객관적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하나의 신비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만들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들은 언어적, 명제적이며, 여기에서 사람의 언어의 인지적 기능(cognitive function)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나 명제적 진술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기본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개념들을 단호히 거절해야 하며, 건전한 옛 신조들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사상은 잘못된 사상이며 그런 사상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신조 내용을 줄이자는 주장,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지며 부정확하다는 주장, 또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주장 등을 포용한다. 그것들은 명백히 잘못이며, 그런 잘못들을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복음

교회연합운동은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교회가 복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1963년 신앙직제위원회 몬트리얼 보고서는 교회가 복음 자체보다 복음에 관한 증언들만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The Bible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21). 플레스만-반 리어도, “우리는 전통(Tradition)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적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고 말했다(Ibid., p. 3).

그러나, 교회가 복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교회는 복음을 받았고 지금 가지고 있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확정적, 불변적 복음을 전하였고, 초대교회는 그 복음을 받았다.

또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실 때, 그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전파할 복음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만일 그들이 전파할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그들이 무엇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내용을 전파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확실히 잘못이다.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라고 말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언어적, 명제적 진술의 부당성을 말하면서, 복음은 ‘살아있는 실재(實在)’(a living reality)인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한다: “전통의 내용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달하는 실재는 명제적 형식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Ibid., p. 27),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복음 자체 . . . 즉 교회의 생명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Ibid., p. 19). 플레스만-반 리어는 그 보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따라서 전통(Tradition)은 단번에 확정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 교리들의 총체로서 이해되지 않았고,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에서의 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Ibid., p. 2).

그러나,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실재(존재)이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 교리와 인격(살아있는 실재) 간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제시된 그 분이시다. 예수께 관한 교리적 진술들은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고전 15:3-4). 그러므로 교리와 인격을 분리시켜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칼빈은 바르게 말하기를, “복음의 주요한 요점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복음은 파괴된다”고 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고든 클락(Gordon Clark)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의 어떤 대립도, 지적 신앙에 대한 어떤 무시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실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명제들의 진실성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신비적 경험의 상징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2nd ed., pp. 107-108).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선포는 항상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Ibid., p. 20). 또한 1981년의 오뎃사 보고서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복음의 ‘헬라주의화’의 문제뿐 아니라 그것의 ‘유대주의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결코 ‘화학적으로 순수한’(chemically pure)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핵심으로 돌아간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1983년 WCC 뱅쿠버 총회도 이와 비슷하게 진술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이미 많은 다른 문화들과 오랜 세기 동안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 시점에서 문화적으로 제한된 기독교를 다른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Gathered for Life, p. 33).

그러나,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8-9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문화적 제약이 없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대하여 해석하면서, 칼빈은 “복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조를 말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루터도 로마서의 주석에서 “이 서신은 바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p. xiii).

만일 우리가 복음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옷 입었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문화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거룩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문화 속에서 그의 영원한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주실 수 없는가? 사실, 만일 어떤 특정한 문화 속에서 주어진 사람들의 모든 진술들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래서 어떤 순수하고 영원한 진술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 생각은 명백히 오류이다.


복음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복음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말한다. 몬드리얼 보고서를 요약하면서, 플레스만-반 리어는 복음이 “어떤 단번에 확정된 신조들의 합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 ment (WCC, 1980), p. 2). 오뎃사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신약성경의 글들 자체는 전통의 계속적 과정과 그것의 재해석을 증거한다. ‘복음은 동일한 복음으로 남기 위하여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 . . 만일 신약 시대의 기간에 신앙의 작성과 재작성의 계속적 과정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이 과정이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고 동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postolic Faith To- day, p. 252).

그러나, 복음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큰 잘못이다. 성경은 분명히 복음의 내용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9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이 그로부터 받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밝히 말하였다. 복음의 내용은 사도의 선포와 더불어 영구히 확정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바른 복음관이다. 복음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마다 변한다는 생각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1:8-9에 관해 바르게 말하기를, “한 번 복음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취소되지 못할 것이다. . . .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무것도 더해서는 안 되고 아무것도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Lectures on Galatians, pp. 55-56).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복음에 대해 ① 교회가 복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②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이다, ③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④ 복음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잘못된 견해들을 포용하고 있고,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믿음

교회연합운동은 믿음에 대해서도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를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 즉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재시 마라쉰(Jaci Maraschin)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믿음은 체계가 아니고 “하나의 산 경험, 하나의 존재의 양식,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분위기”이며, “이성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한다”고 한다(Towards Visible Unity, pp. 25-26).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이러한 반(反)지식적 견해는 잘못이다. 성경은 믿음이 지식을 필요로 하고 지식을 내포함을 명백히 보인다.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들을 기록한 이유에서 증거된다. 누가복음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믿음이 어떤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참된 믿음이 지식을 내포한다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전했는지를 살펴볼 때에도 분명해진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특히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다.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믿음의 지식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표현했다(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ii. 7). 또 그는 천주교회의 ‘맹목적 믿음’(implicit faith)의 개념을 반박하면서 “지식 없는 곳에 믿음도 없다”고 말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촬스 핫지도, “지식 즉 믿어야 할 명제의 의미의 인식은 믿음에 본질적이다”라고 말했다(Systematic Theology, III, 84). 메이천(J. Gresham Machen)도, “모든 참 믿음은 지식적 요소를 내포하며 . . .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 . 어떤 명제들에 대한 동의는 믿음에 절대필수적 요소이다”라고 말했다(What Is Faith? (Eerdmans, 1925), pp. 40, 48). 믿음과 지식을 그릇되이 대립시키고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오류요 명백히 이단적이다.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함

어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컨대, 죠지 판텔리스는 현대 성경학자들이 “예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WCC, 1984), p. 42). 또한, 1983년 신앙직제위원회의 로마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사도적 믿음은, 사도적 공동체의 본래의 증거와 여러 세기를 걸쳐 이루어진 그 증거의 충실한 설명과 연속성을 가지고, 변하는 시대들과 장소들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고백되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Ibid., p. 20).

그 보고서는, 비록 사도적 공동체의 본래의 증거와의 ‘연속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 사도적 믿음이 변하는 시대들과 장소들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고백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고 분명히 표현하였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명백히 잘못이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① 예수 그리스도, ② 복음 진리들, 그리고 ③ 성경 전체인데,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탄생, 그의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 등 어느 하나도 변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또 특히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의 내용도 불변적이다(갈 1:8-9). 그 내용의 핵심은 속죄의 진리이며, 그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뀔 수 없는 내용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은 하나님의 불변적 말씀이다. 성경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은 폐할 수 없다(요 10:3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말보다 더 악하고 파괴적인 말은 없다. 그런 사상은 확실히 이단적이다. 또 이런 이단적 사상을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믿음에 대해 ① 믿음의 반지식적 견해를 포용하고, ② 믿음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잘못된 견해를 포용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과 믿음에 대해 잘못된 견해들을 포용하는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5.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한 우호적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기독교계의 재연합이라는 교회연합운동의 비전은 천주교회와의 연합이 없이는 수적 결함을 가질 것이다.


분석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결국 천주교회와의 연합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주교회에 대한 우호적 태도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나타낸다. WCC의 초대 총무이며 명예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WCC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 관계에 대해,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WCC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교회연합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WCC의 전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WCC와 천주교회 간의 현재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공언하였다(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6).

1992년 WCC의 총무인 독일의 루터파 자유주의 신학자 콘라드 라이저(Konrad Raiser)는 “내가 교회연합운동 안으로 더 많이 이끌리면 이끌릴수록, 나는 헬라정교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들을 더 많이 존경하게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더 많이 풍성해졌다”고 말했다(Cal- vary Contender, 1 October 1992). 그는 후에, 세계는 ‘후(後)-교파적’ 시대에 있고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전통적 교단들을 넘어서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며, 이것은 WCC가 비(非)회원교회들에 대해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Christian News, 7 June 1993).

1995년 교황은 비카톨릭교인들에게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 일치에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가 되도록 함께 재고하자고 제안했다(Cal- vary Contender, 1 June 1998).

팻 로벗슨은 다양한 현장들을 통해 교회연합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라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천주교 연맹을 창설했다. 1995년 그는 천주교 교황이 미국 뉴욕시를 방문하는 기간 미사에 참여할 다섯 명의 이슬람 지도자들과 27명의 개신교회와 헬라정교회의 대표자들을 포함하는 에큐메니칼 행진을 인도했다. 그는 교황을 칭송하고 “우리 모두는 천주교회와 다리 놓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고 알려진다. 로벗슨이 명예총장이고 총장이 천주교인인 리전트(Regent) 대학교에서는 매 주일 교정에서 미사가 있다고 한다(Calvary Contender, 1 July 2000).

1997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교회연합 관계자 프랭크 센(Frank Senn) 목사는 “나는 우리와 천주교회와의 관계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제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진영에 있다,” “우리는 16세기에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며, 우리는 다시 함께 돌아가야 할 자들이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7).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1997년 8월 모임에서 수세기 동안의 천주교도들과의 분열의 싸움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과거의 정죄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진술을 958대 25의 표결로 승인하였다(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7).

1998년 1월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CCA)와 아시아 가톨릭 주교회의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제2차 ‘기독교 일치를 위한 아시아 운동’ 세미나를 갖고 아시아 지역 신구교 일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세미나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신구교 사이의 공식적 논의 기구이다. 이 기구는 1990년 당시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 총무 박상중 목사가 제안했고 1991년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 마닐라 총회에서 허락된 후 1995년 양측 모두 7인씩의 위원을 임명 ‘아시아 에큐메니칼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아시아 교회연합 위원회는 1997년 제1차 ‘기독교 일치를 위한 아시아 운동’ 세미나를 열었고 1998년에 제2차 세미나를 열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8. 1. 11, 2; 기독교신문, 1998. 1. 25, 1).

WCC의 총무는 주류 기독교회들이 2000년에 모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연합하는 세계적 기독교 협의회에 도달할 절차를 시작하기를 재차 요청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석 교리 고문 라칭거 추기경은 “교회의 일치와 신앙과 도덕에 대한 [천주교회의] 책임”에 대해 말하며, 또 그는 “이제까지 분리된 공동체들이 교황과 더불어 일치 안으로 들어올 때”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계를 변화시킬 방식들을 구상하였다(Christianity Today, 18 May 1998).

미국 천주교 주교 대회와 미국 교회협의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커져가는 협력’과 계속적인 ‘공동적 활동’을 보고한다. 1999년 6월 21일자 크리스챤 뉴스는 “그러한 협력의 다른 한 상징으로, 교회협의회의 회장이며, 미국의 전(前) 유엔 대사인 [친 마르크스주의적]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Calvary Contender, 15 July 1999).

매트 코스텔라는 미국 침례교회(ABC)의 2년마다 모이는 1999년 6월 모임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침례교회 목회자협의회는 2년마다 모이는 모임의 첫째 날에 모였고 사우스 다코타 주 워터타운에 있는 하나님의 어머니 수도원에서 온 베네딕 수녀 아드리엔 카우프만이 ‘실제적 대화: 회중들이 분열 가능한 문제들을 분열됨 없이 다루는 수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 (2년마다 모이는 지난번의 모임에서는, 천주교회 추기경이 전체 모임에서 설교하였다)”(Foundation, July-August 1999).

1999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의 새 학장에 천주교회 신부인 브라이언 헤이르(Bryan Hehir)가 임명되었다. 헤이르는 이 역사 깊은 대학의 이 직위에 임명된 최초의 천주교인이다(Christian News, 13 September 1999).

2000년 1월 18일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대희년(大禧年) 교회일치 기도회가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 국교회 수장(首長) 조지 커레이 캔터베리 대주교, 동방 정교회 대표 헬리오폴리스 수석대주교는 함께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교황은 “[우리는] 이제 굳은 결의를 가지고 완전한 일치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 “지난 1000년간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데 대해 그리스도께 용서를 구하고 새 밀레니엄에는 간절한 기도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자”고 말했다(조선일보, 2000. 1. 22, 23쪽).

2000년 1월 18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가톨릭과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소속 개신교 교단들, 루터교, 한국정교회, 성공회 등이 참가한 합동기도회에서 교회협의회장 이성덕 구세군 사령관은 “신-구교 신자들은 관행과 제도가 다른 가운데 지내왔지만 이 순간 그리스도의 마지막 소원을 재확인하면서 ‘주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간절한 일치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라고 말했다(위의 글).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회의에서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그것은 그 협의회 창립 5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현재 19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고 천주교회는 1997년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다. 발리 주교는 취임 인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위해 서로를 더 잘 아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치가 내일 당장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일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라고 강조하였다(크리스챤신문, 2000. 5. 22, 2쪽).

유럽의 로마 천주교회, 헬라 정교회, 개신교회와 성공회는 교회연합관계를 촉진하고 유럽 대륙의 유익을 위한 가시적인 일체를 위해 협력하기 위하여 그들의 차이점들을 제쳐놓자고 뜻을 모았다. 서로 대화하고 유럽 교회들 간의 화해를 증진시키려는 헌장에 서명하기 위해, 여러 교회들과 교단들로부터 온 약 200명의 공식적 참석자들이 2001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모였다. 그 모임은 유럽 천주교 주교협의회와, 전 유럽 120개 헬라정교회, 성공회, 개신교회들을 대표하는 유럽 교회 대회에 의해 공동으로 조직되었다. 그 모임의 마지막 날, 지도자들은 카르타 오에쿠메니카(에큐메니칼 헌장)에 서명하였다(Ecumenical News International, 20 April 2001; Foundation, May-June 2001, 36-37).

프라하의 로마 천주교 대주교, 카디날 밀로슬라브 비크는 이 헌장이 “유럽의 교회들의 가시적 연합운동”을 향해 길을 닦기 위해 의도되었다고 말하였다. 비크는, “우리는 기독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잘 느끼고 있다. 우리는 복음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주기도를 공유하고 있고 우리는 사도신경을 공유하고 있고 . . . . 우리는 성령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바와 우리가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하였다”라고 부언하였다(위의 글).

2001년 4월 23일 카톨릭 뉴스서비스에 의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모임 참석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격려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유럽 대륙에서 한 목소리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주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셨던 일체성은 기독교적 증거의 신임성의 조건이다”라고 말했고, 또 “복음의 분명한 제시가 특별히 유럽에서 긴박하다”고 덧붙였다(위의 글).

미국 교회협의회는 퀘이커 교도요 미국 천주교 주교대회의 이전 직원인 앤 리그즈(Ann K. Riggs)를 교회연합 토론을 위한 신학 작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Christian News, 11 March 2002). 그 임명은 교회협의회가 천주교인들, 복음주의자들 및 오순절파 교인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개혁하려는 비상한 때에 이루어졌다. 한 핵심적 지도자 모임은 천주교인들, 구세군 및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하여 비NCC 회원교회들과의 미래에 관해 토의하려고 계획했다(Calvary Contender, April 2002).

2002년 12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대화와 협력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가 양측 지도자들에 의해 추인되었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의 총무인 백도웅 목사와 천주교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장인 최기산 주교가 주축이 되어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회원 교단들이 총회장, 총무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계자들, 루터교회, 정교회 대표들이 모여 그 회의를 추인했다(조선일보, 2002. 12. 20, A19쪽).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긍정적, 우호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의 태도의 변화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 변화에 대해서도 정리해보자.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교회연합운동 밖에 있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는 1960년에 기독교 일치촉진 사무국을 설립했고, 1962년에 제2차 바티칸회의를 시작했고, 그 후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회의를 마쳤고, 1967년 기독교 일치촉진 사무국을 교황청의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이 두 교황의 노력으로 천주교회는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회의는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그 회의 이후, 천주교회는 다른 교회들과의 대화들에 활발히 참여해 왔다.

비록 천주교회가 현재 WCC의 회원이 아니고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교회는 교회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WCC의 신앙직제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 왔다. 그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1) 매년 기독교일치 기도주간을 위한 예비 대회들에 참여하였고, (2) WCC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으로 정규적으로 참여하였고, (3) WCC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 들어 있고, (4) 1985년 현재, 적어도 25개의 지역적 혹은 국가적 교회협의회에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Apostolic Faith Today, p. 9).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WCC 제5차 신앙직제위원회 세계 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으로서 전적으로 참여하였다(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9).

1998년 WCC 제8차 총회 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WCC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에게 보낸 공식적 편지에서 “WCC와 천주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연합실무회의 골격 안에서 미래의 협력의 길들이 기독교 일치를 위한 추구를 강화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의 유형적 차원에서도, 찾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9).

1998년 WCC 제8차 총회에서 천주교회 신부 토마스 스트란스키는 천주교회와 WCC와의 관계에 대한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1972년에는 바티칸이 가까운 미래에 WCC의 회원이 되기를 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했었지만, 이제 “나는 로마 천주교회가 미래에 WCC의 회원이 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Calvary Con- tender, 1 February 1999).

2001년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바티칸에서 150명 이상의 추기경들은 에큐메니칼 대화의 중요성, 기독교 일치, 및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포함하여 새 천년에 로마 천주교회가 우선 순위를 둘 일을 토의하기 위해 추기경 회의로 모였다. 교황청의 기독교 일치 회의의 의장인 월터 카스퍼 추기경은 교회연합운동의 주제로 강연하면서 비록 교회연합운동이 때때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저항을 받지만 제2 바티칸 회의 이후 크게 진전되었고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하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가속화되었다’고 했다. 또 그는 “일치는 세 번째 천년의 도전”이며 교회연합운동은 시대의 ‘주제’라고 말하였다(Foundation, July-August 2001, p. 42).

애버리 둘레스 추기경은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에 대해 강연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타종교들과 말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은 실제로 교회연합을 증진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추기경들은 그 모임의 마지막 날에 로마 천주교회가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일들을 간추려 말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작성하기 위해 투표했다. 그 메시지는 말하기를, “찢어짐들과 충돌들로 무겁게 특징지어진 세상 안에서 그리고 분열의 상처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교제의 영성뿐 아니라, 사랑과 진실과 신뢰를 따라 교회들의 연합 및 종교간의 대화의 길을 개발해야 할 보다 더 강한 의무감을 느낀다”고 하였다(위의 글).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천주교회와의 연합적 활동들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와 연합적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1998년 1월 아시아 기독교협의회(CCA)와 천주교 아시아 주교회의(Fede- ration of Asian Bishops Conference=FABC)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제2차 ‘기독교 일치를 위한 아시아 운동’ 세미나를 갖고 아시아 지역 신구교 일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8. 1. 11, 2쪽).

1998년 1월 한국의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려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였다. 거기에 참여한 교회들은 일반 개신교회, 한국 성공회, 한국 정교회, 천주교회 등이었다(기독교신문, 1998. 1. 11, 1쪽).

세계 루터교회 연맹(LWF)은 제네바에서 열린 1998년 연례회의에서 제의된 “칭의(稱義)의 교리에 대한 [천주교회와의] 공동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Dallas Morning News, 4 July 1998). 그렇지만, 하루 뒤, 바티칸의 고위 관리들은 그 문서를 칭찬하면서 몇 쪽의 ‘설명서’를 내어놓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이 은혜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행과 공적에 대해 주시는 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즉 천주교회는 선행과 공적의 교리를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1999년 10월 31일, 세계 루터교회 연맹(LWF)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천주교회 교황청 일치위원회 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칭의(稱義)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이 사건은 신구교의 500년만의 화해 사건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1999. 11. 2, 8쪽). 크라우제 주교는 그 공동 선언을 치하하면서 그것을 ‘희망의 서명’이라고 묘사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 선언을 칭찬하면서 그것이 완전한 기독교 일치의 회복을 향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말했고(Christian News, 10 January 2000, p. 3), 또 “그리스도인들이 환희와 일치와 연합으로 나아가는 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며 환영하였다(기독신문, 1999. 11. 3, 16쪽).

미국의 앨러배머 주의 헌츠빌 타임즈(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15일자의 한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어디서 천주교 신부가 [남]침례교회에서 연설하고 안식교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대 희년 예배를 위한 기독교 일치 축제’에서이다. . . . 기독교 공동체는 1월 23일 [헌츠빌] 제1침례교회에서 예배와 찬양의 시간으로 모일 것이다.” 주최측은 이것이 이 곳에서의 새 교회연합운동의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 천주교 연사는 로마 천주교회와 헬라 정교회와 개신교와 복음주의자들/은사주의자들이 대화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그들이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 Fe- bruary 2000).

2000년 1월 8일 로마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천주교회, 헬라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대희년 교회일치 기도회가 열렸고, 한국에서도 그 날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회와 한국 교회협의회(NCC) 소속 개신 교단들, 루터교회, 정교회, 성공회 등이 참가하는 합동기도회가 열렸다(조선일보, 2000. 1. 22, 23쪽).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회의에서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회장으로 선출했다.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선출한 것은 캐나다 교회협의회 창립 5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 협의회는 현재 19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고, 천주교회는 1997년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다(크리스챤신문, 2000. 5. 22, 2쪽).

2000년 5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모인 천주교회와 성공회의 역사적 모임은 13개국에서 온 26명의 성공회와 천주교회 주교들이 두 교회가 466년간의 분열을 넘어서 연합할 방법을 연구할 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다(Huntsville Times, 27 May 2000). 캔터베리 대주교 조지 캐리와 추기경 에드워드 카시디는 새 위원회가 여성 안수와 윤리적 지위 및 두 교회의 성직 조직의 통합 등의 문제들을 연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미국 오하이오주 북서 지역 감독교회와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표시로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기로 서약하였다. 그 언약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로써 일치 운동의 장애물들의 제거를 위해 노력하고 재연합의 길에 어떠한 장애물도 놓지 않기로 동의한다”(Foundation, May-June 2001, p. 38).

한 로마 천주교 주교는 논평하기를, “이것은 다른 하나의 차원의 교회연합운동이며 상호간의 존중이다. 우리 모두는 공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탁하고 그것을 거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감독교회의 한 지도자는, “나는 이것이 에큐메니칼 관계를 위한 하나의 획기적 변화이며 놀라운 실제적 관계성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위의 글). 이와 같이,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와 재연합을 위한 활동들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성례관의 변화

교회연합운동의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인 맛, 즉 성례 의식 자체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처럼 들린다. WCC는 1982년 세례, 성찬, 및 교직제도(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라는 문서를 출판했다.

이 문서는 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 . . 그것은 세례받은 자를 그리스도와 또 그의 백성과 연합시킨다. . . .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롬 6:3-5; 골 2:12), 죄씻음(고전 6:11), 새 출생(요 3:5)이다. . . . 세례받은 자들은 더 이상 죄에 노예들이 아니고 자유롭다. . . .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았고 깨끗케 되었고 거룩하여졌다. . . . 하나님께서는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과 약속을 허락하신다. . . .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서로간의, 그리고 모든 시대와 장소의 교회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온다(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pp. 2-3).

또 이 문서는 성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만드시는 은사의 성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통해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 . . 그리스도의 약속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세례받은 각 지체는 성찬에서 죄 용서의 확신(마 26:28)과 영생의 보증(요 6:51-58)을 얻는다(Ibid., p. 10).

이 문서에 진술된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이며 천주교회의 성례관에 가깝다. 타임지 종교편집인 리처드 오슬링은 잘 논평하였다.

[이] 문서는 개신교인들과 [헬라] 정통교인들 간의, 또 비(非)성례주의적 개신교인들과, 천주교회에 가까운 성례관을 가진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을 극복하려고 추구한다. . . . 그 문서는 부인할 수 없이 ‘고(高)교회적(천주교회적)’ 음조를 가지고 있다(University of Portland Magazine, Summer 1986, p. 13).


교황제도의 수용 움직임

심지어, 교회연합운동에는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움직임까지 존재한다. WCC의 초대 총무이었던 비셜트 후프트는 일찍이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p. 33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석 교리사무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2005-2013년 교황으로 재위한 베네딕토 16세임)은 “교회의 일치와 신앙과 도덕에 대한 [천주교회의] 책임”에 대해 말했고, “이제까지 분리된 공동체들이 교황과 더불어 일치 안으로 들어올 때”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계를] 변화시킬 방식들을 구상했다(Christianity Today, 18 May 1998).

1999년 5월 12일 성공회와 천주교회 신학자들로 구성된 ‘성공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발표한 “권위의 은사”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로마 주교는, 교회의 보편적 수위권(首位權)의 표현으로서,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는 특별한 사목(司牧) 활동을 한다”고 명시하였다. 조지 캐리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문서에 대해 “환영한다. 폭력과 분열로 갈라진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기독신문, 1999. 5. 19, 16;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1999년 5월,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로마 천주교 국제연합 위원회는 “권위의 은사”(The Gift of Authority)라는 제목의 문서를 통해 모든 성공회 교인들에게, 만일 새로운 지구 교회가 창조된다면 교황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라고 요청하였다(CRN Newsletter, June 1999). 그 문서는 교황을 ‘모든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할 은사’라고 표현하였다. 람베스 관저에서 발표된 그 성명서는, 비록 현재 구속력은 없지만, 새로 연합된 교회에서 세계적 수위권(首位權)을 행사할 인물이 로마 주교[교황]일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다(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이와 같이, 현재 교회연합운동에는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움직임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은사운동의 접착제 역할

오늘날 은사운동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그네이셔스 카타넬로는 1983년에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매주 은사주의적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였었다(Ignatius Catanello, "The Effect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n Local Ecumenism" (Ph.D. dissertation, New York University, 1983), p. 1).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 북미대회에서 한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예언하였다(Foundation, July-September 1987, pp. 16, 27).

이전에 천주교 신부이었던 바트 브루어는 이렇게 말한다.

은사운동은 교회연합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 . . 의문할 여지가 없는 목적들을 위해 온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두 운동들은 동일한 밭고랑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 . . 많은 은사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 지도자들은 성령을 통해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이 사라지고 무의미하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한 세계교회를 향한 현재의 교회연합운동은 은사운동으로부터 기세를 얻고 있다(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9).

천주교회는 1965년 제2 바티칸회의 때부터 은사운동을 후원하였다. 1967년 이후 약 일억명의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갱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주교회 내에서의 이 ‘갱신’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1999년 7월호는 ‘갱신’의 단계를 넘어서 ‘은사주의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특징은 방언 말하기, 거룩한 웃음, 예배 악단, 춤추는 수녀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방문객들 등이다(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이와 같이, 오늘날 은사운동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분노할 만한 배교적 연합운동이다. 천주교회를 바로 알면 이런 연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지 알 것이다.

천주교회 비평

위에서 살펴본 대로,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도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처음부터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집단으로 간주해 왔으며 천주교회는 그 기본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근본적 오류들을 비평함으로써 천주교회를 포용하려는 개신교회들의 경향이 잘못된 것임을 살펴보자(김효성, 천주교회 비평 (옛신앙, 2019)).


마리아에 대한 교리

첫째로, 천주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되었고 평생 무죄했고 계속 처녀이었고 마침내 승천했다고 가르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제2 바티칸회의도,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다”고 말했다(Documents of Vati- can II, ed. Austin P. Flannery, VIII. 59).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한다(카톨릭 교리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1967), 114쪽). 천주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된 알폰수스 데 리구오리(Alphonsus de Liguori) 주교는, “많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구하여 받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구하는 바를 예수께 기원함으로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 더 신속히 얻는다”고 말했다(Alphonsus de Ligouri, The Glories of Mary, pp. 127, 254).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칭호들을 돌린다. 제2 바티칸회의는,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선언했다(Ibid., VIII. 59). 카톨릭 교리서도, “마리아는 . . . 하늘에 오르시어 천상과 지상의 모후가 되셨다”고 말한다(114쪽). 또 제2 바티칸회의는, “하늘로 올림을 받은 후 그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선언하였다(Ibid., VIII. 62).

알폰수스 리구오리 주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만 용서받는다”(83쪽), “마리아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실패하고 잃어버려진다”(94쪽),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160쪽), “구원의 길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열려져 있지 않다”(169쪽),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마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순종하신다. . .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온 교회를 마리아의 통치 아래 두셨다”(180-181쪽), “그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모사,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도움이시다”(257쪽).

천주교회는 마리아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지도적 인물들이나 심지어 교황들은 말과 행위로 마리아에 대한 열렬한 숭배를 표현했다. 1965년 교황 바울 6세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였고(로레인 뵈트너,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 이송훈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24쪽),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자신과 자신의 교황직을 ‘우리 부인’인 마리아에게 바치었다(The Fatima Crusader, Novem- ber-December 1986, p. 9; 데이브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정태윤 역 (도서출판 누가, 1994), 352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마리아 숭배는 원래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벨론 종교의 영향이었다. 또 성경은 마리아가 평생 처녀가 아니고 맏아들 예수(마 1:25 전통본문; 눅 2:7)를 낳은 후 여러 명의 동생들을 낳았다고 증거한다(마 13:55-56). 또 성경에는 마리아에게 드려진 기도는 단 하나도 없고 또 마리아에게 기도하라는 어떤 암시도 없다. 마리아가 누구를 도와줄 수 있다거나 도와주겠다는 어떤 약속도 없고, 다른 사람을 기적적으로 도와주었다는 단 하나의 기록도 없다. 사실, 마리아가 매 시간 전 세계의 천주교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는 것은 그를 신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며 기도해야 하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된다(출 20:3; 마 4:10). 또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반대의 예들을 본다. 마리아는 자신을 ‘계집종’이라고 불렀다(눅 1:38, 46-48). 동방박사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다(마 2:11).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 대해,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48-50).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한 죄인에 불과하다.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들은 확실히 우상숭배적 오류들이다.


칭의(稱義)에 대한 교리

둘째로, 천주교회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의 복음을 부정한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고(The Canons of Trent, Session VI, Canon 10),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Ibid., Session VI, Canon XI).

또 칭의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카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고백의 성사로 지옥의 벌은 언제나 사함을 받으나, 세상과 연옥의 벌까지 사함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유한한 벌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신부는 보속을 정해준다. 고백 성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 죄에서 오는 벌을 보상해야 한다(148쪽).

제2 바티칸회의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죄는 속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이생의 슬픔과 불행과 시련의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속죄는 내세에서 불과 고통들 혹은 정결케 하는 형벌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Indulgentiarum Doctrina, I. 2).

16세기 천주교회의 트렌트회의는 성경에 대한 권위, 은혜와 믿음만으로 얻는 구원, 신자의 만인 제사장 등 종교개혁의 주장 전부를 부인하였고 개신교의 주장에 대해 100회 이상 저주를 선포하였고(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269) 성례가 구원에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천주교회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눈다. 대죄는 일곱 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들,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범한 모든 성적인 범죄, 개신교회에 출석한 것, 개신교 성경을 읽은 것, 충분한 이유 없이 주일 아침 미사에 빠진 것과 십계명을 범한 죄들이다. 대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사죄받을 수 있다고 한다. 고해성사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의식이 된다.

천주교회에 의하면,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대죄만 용서받고 그것은 지옥에서 영혼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소죄들은 금생에서 속죄받든지 사후에 연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소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고 그들이 선행들을 통해 그 죄들을 속죄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면죄부에 대한 교리도 그 하나이다. 그것은 결국 행위구원론이 된다.

천주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완전에 도달한 신자들만 죽을 때 즉시 천국에 간다. 세례 받지 않았거나 세례 받은 후에라도 대죄를 범한 모든 사람은 즉시 지옥에 간다. 부분적으로 정결함을 받았으나 어느 정도 죄를 짓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연옥으로 가서 그 죄가 깨끗케 될 때까지 고통을 받은 후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은 일한 것이 없이도 은혜로 받는 의이다.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한 사람(예수님)의 의(義)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롬 5: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義)이시다(고전 1:30).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또 사죄와 칭의는 완전하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복음에서 멀리 떠난 의식주의적인 종교가 되었다. 실상, 성경은 어디에서도 비밀 고해에 대하여 가르친 적이 없다. 또 성경은 어디에서도 연옥에 대해 가르친 적도 없다. 성도들의 경건과 기도, 그리고 선행과 봉사는 결코 사죄와 칭의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사죄와 칭의의 결과요 열매일 뿐이다. 천주교회의 칭의론은 분명히 복음의 왜곡이며 변질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갈 1:8-9).

 

미사에 대한 교리

셋째로, 천주교회는 미사 교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부정한다. 천주교회의 미사는 개신교회의 성찬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트렌트 신앙고백은, “나는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말했다(6조). 또 트렌트 회의는,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다(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제2 바티칸회의도,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선언하였다(Eucharisticum Mysterium, Introduction C, Section 1, 2). 우리나라의 카톨릭 교리서도 설명하기를,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라고 하였다(135-136쪽).

그러나 미사에서 빵과 포도즙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도, 이성적, 상식적, 경험적으로도 합당하지 않다. 성경적으로, 미사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대한 왜곡이며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고 했다(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p. 235-37).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한다(히 7:27; 9:12, 26, 28). 히브리서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성적으로도, 미사 교리는 합당치 않다.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즙을 축복하신 후에도 거기에 계셨고 빵과 포도즙의 형태로 나타나기 위해 사라지지 않으셨다. 또 그는 그 포도즙을 여전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부르셨다(마 26:29). 또 만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사람의 피를 마셨다면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었을 것이다(레 17:14). 또 미사 때에 빵과 포도즙에는 어떤 외형적, 실체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없다. 빵은 여전히 빵이며 포도즙은 여전히 포도즙이다. 속성의 변화가 없는 실체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미사 교리는 미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교리에 대한 왜곡이며 모독이다.

천주교회는 세례나 미사에 있어서 성례주의적이다. 그러나 성례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첫째, 성례주의는 복음의 영적 성격과 모순된다. 구원은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영적 변화이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유효하지 못하다. 기독교는 단지 의식의 종교가 아니고, 마음과 영의 종교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 의문[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것은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둘째, 성례주의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례에 참여한 자일지라도, 만일 그가 영적으로 중생하지 못하였다면,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손에서 빵과 포도즙을 받은 후에도 멸망하였다. 마태복음 26:24, “인자(人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칼빈은 성례주의가 명백히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4. 14).

 

교황에 대한 교리

넷째로, 천주교회는 교황의 교리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천주교회는 로마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정당치 않다. (1) 신약성경 어디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교황으로 임명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8:18의 말씀대로, 천국 열쇠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교회의 복음 전파와 권징의 권세를 나타낸다고 본다. (2) 신약성경은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베드로는 바울 앞에서 책망도 받았다(갈 2:11). 또 바울은 13-14개 서신들(2033절)을 썼으나, 베드로는 단지 두 서신(166절)만 썼다. (3)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주교라는 역사적 증거도 없다. 주후 2세기 말, 이레니우스는 처음 로마 주교들 12명의 명단을 제공하였는데, 거기에 베드로의 이름은 없다. 로마의 제1대 주교는 리누스이었다. 초대교회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도 베드로를 로마의 주교로 기록한 적이 없다(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82-83쪽). (4) 로마는 당시의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 베드로보다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에게 더 적합하였다. (5) 베드로는 교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이지 않았다(벧전 1:18). (6) 베드로는 교황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화려한 왕관도 쓰지 않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게 하지도 않았다(행 10:25-26). 또 베드로는 결혼한 자이었다(마 8:14; 고전 9:5).

천주교회는 또 교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신적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 교회는 조직의 맨 위에 교황이 있는 전제주의 조직이며, 그들만 참 교회이며 개신교회들을 포함한 다른 교회들은 존재할 권리가 없는 이단들로 본다. 중세 천주교회의 최대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고 말하였다(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예루살렘, 2009), 88쪽). 제2 바티칸회의 교회헌장도,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표현하였다. 교황이 쓰고 있는 삼중의 왕관은 하늘과 땅과 지하 세계의 왕권을 상징한다(뵈트너, 181쪽).

천주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한다. 1870년 제1 바티칸회의에서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이 그 직분에 따라 믿음과 윤리에 관하여 교리를 정의할 때 무오(無誤)하다고 선언했다. 1964년 제2 바티칸회의도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교회의 유형적 머리”라 부르면서 교황의 머리됨과 무오(無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변함 없이 강조했다(Documents of Vatican II, ed. Austin P. Flannery, pp. 370, 380)

그러나 천주교회의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에 대한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신약성경의 어느 책의 어느 구절도 또 초대교회의 어느 인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주교를 교회의 무오한 교사와 치리자로 세우셨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가톨릭 역사가인 될링거는 “고대의 어떤 신앙고백도, 어떤 요리문답도, 백성들의 교육용으로 집필된 교부들의 어떤 문서들도, 교황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다. 더구나, 신앙과 교리문제의 확정이 교황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은 전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였다(Dollinger, p. 53; 헌트, 118쪽에서 재인용). 오히려, 1415년의 콘스탄스 회의와 1432년의 바젤 회의는 “교황일지라도 회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했다(뵈트너, 332-333쪽). 1870년 제1 바티칸회의에서 선포된 교황무오 교리는 콘스탄스 회의의 선언을 부인한 것이다(Hasler, How the Pope Became Infallible, pp. 74, 29, and inside back jacket; 헌트, 105쪽에서 재인용).

또, 교황 무오의 교리는 교황들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된다. 역사상 어떤 교황들은 다른 교황을 정죄하였고 또 전의 교황의 선언을 부정하였다. 또,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려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런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고 다른 교황들은 그 칭호를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9세기 후반 하드리안 2세는 세속 결혼도 유효하다고 선언했으나, 19세기 초 피우스 7세는 그것을 무효라고 정죄하였다.

또 16세기 말에 씩스투스 5세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와 여러 다른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하였다(뵈트너, 343쪽). 18세기 후반에 클레멘트 14세는 예수회 회원을 억제하는 명령을 내렸고 19세기 초 피우스 7세는 그들을 회복하는 명령을 내렸다. 15세기 초, 유게니어스 4세는 잔다크를 마녀와 이단으로 정죄하여 불태워 죽였으나, 20세기 초, 피우스 10세는 그녀를 시복하였고 베네딕트 15세는 그녀를 성자로 선언하였다(헌트, 95쪽).

또, 많은 교황들이 이단적인 교리들을 가르쳤다. 3세기 초의 로마 주교 칼리스투스는 성부와 성자를 나눌 수 없는 한 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이단사상이다. 4세기 중엽 리베리우스는 아리우스 이단 교리에 찬동하는 서명을 하였다. 5세기 초 조지무스는 펠라기우스를 정통 교사로 선포하였다가 후에 그 입장을 바꾸었다(뵈트너, 342쪽).

사실상, 교황 비질리우스(Vigilius, 6세기 후반), 교황 인노센트 3세(13세기 초), 교황 클레멘트 4세(13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 11세(14세기 후반), 교황 하드리안 6세(16세기 초), 교황 바울 4세(16세기 중반) 등의 교황들은 교황무오의 교리를 반대하였다(뵈트너, 347쪽).

덧붙여서, 참으로 교훈의 무오성을 가진 교황이라면, 가장 정확한 성경주석을 출판함으로써 온 세계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일까? 그러나 이제까지 어느 교황도 성경의 어느 한 권, 아니 어느 한 장에 대한 무오한 해설의 책을 출판한 일이 없다. 또 무오한 교황이 있는데, 어떤 문제에 관해 교황이 신학자들과 주교들의 연구보고서를 제출케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황의 무오성을 실제적으로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실상,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근본적 차이는 권위의 원천의 문제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신학적 논의의 핵심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와 행위는 무엇에 의해 규정지어지는가? 사람의 이성인가, 교회의 전통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신앙의 기준을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에 둔 것에 대항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권위적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임을 천명하였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견해이며 예수님 자신의 견해이었고 또 초대교회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견해이었다. 특히 천주교회의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참으로 허구이며 근본적 오류이다.


윤리적 오류들

천주교회는 또한 역사상 심각한 윤리적 오류들을 가지고 있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기본권인 자유를 극도로 탄압하였고, 역사상 많은 사람들을 매우 비인간적 방식으로 고문하였고, 또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로마 천주교회는 로마 제국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18세기 말, 스페인의 마드리드 종교재판소 서기로 일했던 케논 로렌테는 그의 책 종교재판소의 역사에서 스페인에서만 300만명 이상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약 30만명이 화형당했다고 기록했다(R. W. Thompson, The Papacy and the Civil Power, p. 82; 헌트, 68쪽에서 재인용).

W. E. H. 레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를 바로 아는 개신교인이라면 로마 교회가 인류 사회에 존재했던 어떤 단체보다도 무고한 자를 많이 죽였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 . 로마 교회에 의해 희생된 자의 수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W. E. H. Lecky,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vol. 2, p. 32;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106쪽에서 재인용).

J. M. 캐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또다시 잔악한 박해의 손길이 닥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코자 한다. 만약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1,200년 동안에 5,000만명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었다고 하면--역사는 확실히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100년마다 평균 400만명 이상의 비율로 죽은 셈인데, 이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J. M. 캐롤, 피흘린 발자취 (혜남사, 1988), 52쪽; 유석근, 113쪽에서 재인용).

종교재판소(the Inquisition)는 그 후 ‘성직회’(the Congregation of the Holy Office)라고 불리었고 1966년 교황 바울 6세는 그 이름을 다시 ‘신앙교리회’(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라고 개명하였고, 또한 ‘교리회’(the Doctrinal Congregation)라고도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그 회의 중심인물은 근래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된 요셉 라칭거(Joseph Ratzinger) 추기경이었다.

또한, 천주교회의 역사는 음행으로 더럽혀진 역사이었다. 역사상, 교황들 중에는 음란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천주교회의 음행들의 역사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정도이었고 아니 일반 종교로서도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었다(김효성, 천주교회 비평, 2판, 70-73쪽). 그것은 가증한 일이며 이 한가지만 보아도 천주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천주교회의 또 하나의 윤리적 문제는 물질의 탐욕에 있었다. 교황들은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수백만 달러가 넘는 매우 값비싼 왕관들을 썼다. 그것은 그들이 누렸던 물질적 풍요의 표이었다. 교황은 제2 바티칸회의 때까지 공식적으로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라는 삼중관을 썼다. 11개의 사파이어, 19개의 에메랄드, 32개의 루비, 252개의 진주와 529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티아라가 있다고 한다(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263쪽). 또 로마의 바티칸은 수십조 달러의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과 수억 달러의 보화들을 소유하고 있고, 이탈리아 주식의 27%를 독점하고 있으며, 세계 교회로부터 걷는 세금과 광대한 토지와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유석근, 265쪽).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의 부귀, 권세, 영광을 누리지 않으셨다. 그는 교황들의 모습과 다르셨다. 그는 부귀, 권세, 영광을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않으셨다. 부도덕한 교황이나 교회는 하나님의 종이나 교회가 아니다. 더욱이, 종교를 빙자하여 돈을 버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또 교황들이 참으로 영혼들을 연옥에서 풀어줄 권세를 가진 자들이라면, 그들이 돈을 받지 않고 그 권세를 행사하려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시며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신칭의)에 대한 교리, 미사에 대한 교리, 교황에 대한 교리 등 중요한 교리들에서 성경적 기독교로부터 분명하게 이탈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역사상 살인, 음행, 탐욕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윤리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을 가진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보기 어렵다. 또 하나님의 참 교회라면, 자신의 문제들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철저히 청산해야 할 것이지만, 천주교회는 역사상 그렇게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16세기 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라고 말했다. 루터는 교황제도를 마귀적이라고 말했다(Church and Ministry, III, 363). 칼빈도 천주교회를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이며 이스라엘 나라의 여로보암 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를 가지고 더 큰 우상숭배를 하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했던(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고 보았고(기독교 강요, 4. 2. 4, 9, 12) 교황의 복음을 사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천주교회의 핵심적 교훈들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대한 16세기 개혁자들의 판단과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다. 천주교회는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단체이다. 스펄젼은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그 이름으로 불리울 자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자”이라고 말했다(헌트, 317쪽에서 재인용). 로이드-존스도 천주교회는 모조품이며 가장 악마적 형태이며 적그리스도의 모범이라고 말했다(헌트, 299쪽).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가들의 천주교회와의 교제와 천주교회에 대한 우호 관계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저버림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교훈된 교제와 절교 즉 분리의 교훈에 명백히 어긋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배신이며 불충성이며 불순종이다.

 

6. 한 세계교회 추구

교회연합운동은, 비록 그 지도자들이 자주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옴에도 불구하고, 한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한 세계교회의 추구는 옳지 않다.


분석

먼저, 교회연합운동의 한 세계교회 추구를 분석해보자.


교파의 부당성을 강조

우선, 교회연합운동은 교파의 부당성을 말한다. 교파들의 분리의 현실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된다. 리처드 니이버(H. Richard Niebuhr)는 교파주의를, “[자기 잘못을] 인정치 않는 위선”이라고 비난했었다(The Social Source of Denominationalism (Henry Holt, 1929), p. 6). 이런 반교파주의적 정신이 교회연합운동에 흐르고 있다. 1982년 리마에서 모인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우리의 분리들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고 선언하였다(Toward Visible Unity, p. 41).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한다. WCC의 1948년 암스텔담 창립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함께 머무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고, 1954년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하나의 완전히 공약된 교제(one fully committed fellowship)에서 나타난다”라고 선언했다. 또 1968년 웁살라 총회는 “보편적 에큐메니칼 협의체적 형태의 일체성”을 언급하였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우리는 하나의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선언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는 완전한 유기체적 일체성과 동일하며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교회의 일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교회연합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교회연합운동가들은 한 세계교회를 꿈꾸지 않는다고 말하곤 하였지만, 앞에서 인용한 이러한 진술들이 결국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는 교회연합운동가들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회장: 한영제--예장통합측 총회장)는 회원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등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다섯 개 교단이 궁극적으로 한 장로교단이 되어야 할 것을 천명했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3. 5. 30, 3쪽; 크리스챤신문, 1993. 5. 29, 3쪽).

1996년 9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발제자 한명수 목사(한기총 전총무,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교회협[한국기독교회협의회]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 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논찬자로 나선 정진경 목사(한기총 전대표총무)도 개신교계 대표성을 띤 연합기관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한기총과 교회협의 하나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도 “한기총 대표회장 최훈 목사도 하나되는 소망을 갖고 일한다”고 말하며 “양 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독신보, 1996. 9. 14, 19쪽).

1997년 3월, 예장통합, 합동, 고신, 대신, 개혁, 기장 등 장로교 9개 교단이 속한 한국장로교협의회의 “장로교 연합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한명수 목사(합동)는 “개신교계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생긴 결과”라고 말했고, 김순권 목사(통합)는 “권위주의와 신학교 난립, 감정 대립 등이 장로교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997. 4. 5, 15쪽).

1997년 5월, 한국의 대표적 두 장로교 협의체인 한국장로교협의회와 대한예수교장로교협의회는 ‘조건 없는 합동’을 결정했고 두 단체의 회장들은 “두 단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데 동의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7. 5. 11, 1, 3쪽). 그 해 7월, 두 단체가 연합하여 ‘한국장로교총연합회’를 출범시켰다.


연합된 교회에 관한 두 견해

연합된 교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한 신학과 한 정치구조를 가진 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각 회원 교회의 신학과 정치구조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구조의 면에서] 우리는 완전한 ‘유기적 연합’의 옹호자들과 ‘조화된 다양성’의 옹호자들의 양극단으로 나뉜다. 후자의 슬로건은 흔히 아무것도 동의하지 않는 공손한 방식인 것같이 보이며, 전자는 이해할 만한 ‘획일적 구조’의 두려움을 일으킨다(Ecumenical Trends, 16 (1987), p. 6).

 

비평

그러나 이러한 한 세계교회의 추구는 올바른 일이 아니다.


교회 일체성은 교리적이어야

이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은 영적, 교리적, 유형적 성격을 가진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영적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날에 보다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점이다. 교회의 교리적 일치는 영적 일치의 한 중요한 표현이요, 이 기초 위에서 교회는 유형적 일치를 나타내어야 한다.

요한복음 17장(특히 9-11절과 20-21절)과 에베소서 4:3-6은, 교회의 일체성의 대상과 성격에 관해, 교회의 일체성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엡 1장)의 일체성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와 진리 안에서의 일체성임을(요 17장) 분명히 보인다. 다시 말해,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바른 교리 안에서의 그리고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또 에베소서 2:20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했는데,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그들의 교훈을 가리킨다. 사도적 교훈이 없이는 교회도, 교회의 일체성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벤자민 워필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잘 말했다(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이단을 포용하는 교회 연합은 잘못

그러므로 바른 교리를 무시하고 교회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와 배교적 천주교회의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 연합의 추구는 잘못이다. 물론 조직체적 연합의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건전한 교리와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교회 연합을 반대할 자가 누구이랴!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의 개념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연합운동의 한 세계교회 개념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구성원들인 자유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다. 교회 연합이라는 구호가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들의 배교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기독교 강요, 4. 2. 1).


초교파적 교회도 바람직하지 않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교파적 확신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초교파적 연합교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연합의 과정에서 모든 이단적 요소를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적 초교파적 교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많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중요한 교리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직의 성격,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 휴거 등에 대해 심각한 견해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차이들은 진리들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여하튼 이런 교파들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한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충실한 고백과 선포를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어떤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할 때 그것은 어떤 교인들의 양심을 억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목사들을 양성하는 신학교는 어떤 교리적 신념을 가르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점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포괄하는 초교파적 한 교회란 진리의 신념의 차원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한 교회 안에서 교리적 갈등을 가져온다. 사실,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란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마틴 로이드-죤스(D. Martyn Lloyd-Jones)는, “단순히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잘 말하였다(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61). 초교파적 교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함

덧붙여서, 우리는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사람들이 만든 하나의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교인들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치 않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교만해져서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교회의 일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피흘려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며,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라는 귀한 유산을 잃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것이다.

 

7. 선교 개념

넓어진 선교관 비평

오늘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넓어진 선교관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 즉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구원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바른 개념이 넓어졌고 변질되었다.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는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고백서는 교회의 선교(mission 사명)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였다:

사람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해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고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1.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해 봉사한다(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 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1.1).

1980년 멜본에서 열린 WCC의 세계선교 및 전도대회는,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하였다(Your Kingdom Come, p. 186).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는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했다(Ibid., p. 17). WCC의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라고 했다(Mission and Evangelism, p. 28). 이것이 1973년 방콕에서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에서 강조되었던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혹은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넓어진 선교관’을 받아들인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전도와 사회정치활동 간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그 대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죤 스토트는, “나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뿐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말했다(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Falcon Books, 1975), p. 23).

개혁주의에큐메니칼협의회(RES) 총무 폴 슈로텐보어도, “전도는 일차적이지만 또한 예비적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개혁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6 (1982), 152). 밀라드 에릭슨은 교회의 네 번째 직무로 사회적 관심을 들며 교회가 세상에서의 궁핍이나 상처나 잘못을 보는 모든 곳에서 관심을 보이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Christian Theology (Baker, 1983), pp. 1057-59). 웨인 그루뎀도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사역은 전도와 구제이며 전도가 우선적 사역이지만 그와 병행되어야 할 사명이 구제사역이라고 말했다(Wayne Grudem, 조직신학 (하) (은성, 1997), 42쪽).

이런 선교관은 우리나라에서도 보인다. 1990년 9월에 예장 합동측이 주최한 서울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 선교사 100명 중 설문에 응답한 64명 중에, 선교가 전도를 뜻한다고 대답한 자들은 50퍼센트뿐이었고, 전도와 문화적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 것이지만 전도가 우선이라고 대답한 자들이 32.8퍼센트, 우선 순위를 두지 말고 둘 다 감당해야 한다고 대답한 자들이 14퍼센트이었다(기독신보, 1991. 8. 17, 3쪽).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예장통합 장로회신학대학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데 초점을 둔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교회연합운동에서 교회의 사회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됐다고 전제하며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독교보, 1996. 10. 12, 5쪽). 이것이 오늘날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관’은 올바른 개념인가? 선교는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는가?

선교(宣敎)란 ‘교(敎)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의 영어 단어 미션(mission)은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선교 즉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배와 양육과 전도를 삼대 임무로 이해해왔다. 예배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기본적인 임무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와 찬송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 엡 1:14). 또 교회는 어린양과 같은 교인들을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 주께서는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주셨고, 교훈, 교제, 구제, 권징의 일을 하게 하신다(엡 4:11-12; 행 2:42).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

전도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며 이것이 교회에 주신 특수 임무, 즉 사명(使命, mission)이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선교 즉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이었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전통본문).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은 사회봉사활동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또 주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믿음을 가지고(마 8:2, 5, 10, 16; 9:2, 22, 29) 예수께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병든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에게 의료적 행위나 약을 제공하는 것에 해당하지, 독립적 의료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정치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선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J. 그레셤 메이천은, 선교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과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What Is Christianity' and Other Addresses, pp. 148-155). 로버트 글로버도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라고 바르게 말하였다(Robert Hall Glover, The Bible Basis of Missions (1946), pp. 34, 40).

해롤드 린젤도 “선교와 전도는 중심에서 동의어이다”라고 말했다(Harold Lindsell, "The Biblical Basis of Missions and Evangelism," Baker's Dictionary of Practical Theology (1967), p. 148). 또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고(Christianity Today, 19 June 1970, pp. 5-6) 그 선언의 초안자인 피터 바이엘하우스(하이델베르크대 선교학 교수)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Peter Beyerhaus, Mission: Which Way?--Humanization or Redemption (1971), p. 17).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주께서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치 않으셨다. 그는 형의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이의 요청을 거절하셨고(눅 12:13-14) 자기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을 피하셨다(요 6:15). 또 그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증거하셨다(요 18:36).

둘째,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영혼들을 구원하라고 명하셨다.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들과 사도행전의 첫 부분은 이것을 밝히 증거한다(마 28:19; 막 16:15; 눅 24:47-48; 요 20:21; 행 1:8).

셋째, 주 예수님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증거하는 바다.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소극적이고 온건하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사회 질서를 존중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내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롬 13:1-7; 엡 6:5-9; 골 3:22-4:1; 딤전 2:1-2; 벧전 2:13-20).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 사회적 말씀들은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에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 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 성경적 개념이 변질되었다. 선교를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하는 넓은 선교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이와 같이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이탈하였다.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중대한 잘못이다.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선교를 위한 후원자가 되지만, 우리가 선교에 대한 순수한 성경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역사적 기독교가 믿고 행해온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해내어야 한다. 사회정치활동은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주께서 주신 이 숭고한 전도의 임무에 첨가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린이집,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교양강좌, 노인대학 등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이다.

사회정치적 행동주의 비평

우리는 교회연합운동에서 선교 개념의 변질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WCC의 헌법은 WCC의 한 기능을, “사람의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들의 제거, 및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있어서의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Gathered for Life, p. 324). 데이빗 스토우는 1980년 WCC의 멜본 세계선교와 전도대회에 관해, “멜본 대회는 사회 활동에 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집중하였다”고 말했다(Missiology, 9 (1981), 26).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 문제이며, 따라서 이상적인 사회는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암시한다. 데이빗 스토우는 이렇게 말했다.

멜본 대회가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천국에 반대되는 주요 표현으로 인식했으므로, 그 대회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같은 어떤 이상, 즉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를 불가피하게 안출하였다. 약간 부드럽게 명명되는 ‘중앙설계경제’는 여러 방식으로 새 세계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 역사에 새 장으로서 암시되었다(Ibid., pp. 33-34).

또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월권을 주며 그들의 투쟁에 연대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단지 이론적 변론만이 아니라, 투쟁의 행위를 강조한다. 1968년 WCC 웁살라 총회는, “인류의 갱신은 지역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 또 사람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Apostolic Faith Today, p. 120).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그 나라에 참여하는, 그 투쟁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말하였다(Your Kingdom Come, p. 34). 감리교 목사요 짐바브웨 대통령인 케이넌 버내너는 그의 대회의 연설문에서,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분명한 정죄와 그것을 전복시키는 힘찬 행동이다”라고 썼다(Ibid., p. 116).

WCC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WCC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의 대표적 예이다. 그 단체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은 1970년 이후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나미비아의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에게 1992년 9월말까지 1,007만불 이상을 지원하였다(Christian News, 23 November 1992, p. 2).

교회연합운동과 공산주의와의 연관을 증거하는 자료들도 드러났다. WCC는 1961년부터 공산세계의 교회와 러시아 비밀경찰인 성직자 회원들을 가지고 있었다(Calvary Contender, 1 July 1988). 소련의 타스 통신은 러시아 비밀경찰(KGB) 요원들과 동독 비밀경찰이 유럽 교회들의 대회와 WCC에 침투하였으며 1984년에 에밀리오 카스트로의 WCC 총무 선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하였다(Moody Monthly, April 1992). 3천명이나 되는 많은 교직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보제공자들로 행동했으리라고 하며, 일부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지도자들은 위험이 없이 그들의 일들을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시하는데 그들의 성직자의 복장을 사용하였다고 한다(Christian News, 16 March 1992).

1986-1987년 미국 연방수사국(FBI)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사람들은 미국교회협의회(NCC)나 WCC를 그들의 선전 목적들에 사용하였고 공산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이것을 조종하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아래의 정부의 도구이며 “어떤 정교회 신부들은 단순히 비밀경찰의 협력자들로서가 아니고 실제적 요원들로서 활동하였다고 보인다”라고 보도하였다(US News &World Report, 2 March 1992;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0). 특히, 독일 학자들 게하르트 베지에르, 아르민 보이엔스, 게하르트 린데만(Gerhard Besier, Armin Boyens, Gerhard Lindemann)은 1992년에 공개된 러시아 비밀경찰(KGB) 자료들에 근거해 쓴 1074쪽짜리 책(National Protestantism and the Ecumenical Movement: Church Activities During the Cold War)에서 WCC가 동유럽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침투를 당했고 전 회장들 중의 한 사람인 메트로폴리탄 니코딤(Nikodim)이 러시아 비밀경찰요원이었음을 확증했다(Chris- tian News, 20 March 2000;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0).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말했던(Your Kingdom Come, p. 17)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는 선교사 3천명을 투옥하고 처벌한 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모택동)을 중국인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아’로 일컫고 중국의 공산혁명을 새로운 중국을 이룩한 해방과 구원이라고 말했었다(박영호, 현대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 선교 (개혁주의신학사, 2010), 240쪽).

칼 매킨타이어 박사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강력한 비평자이었고 자유주의자들과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지나치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2002년 3월 그가 죽은 후 풀러신학교 교장 리차드 모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칼 매킨타이어] 그는 미국 교회협의회와 WCC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소련 진영의 정교회들로부터 온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했을 때 원수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분, 이들은 공산주의 정부의 공작원들입니다!’라고 주장하려 했다. . . .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같이, 나도 그의 비난들을 광신적 폭언들이라고 물리쳤다. . . .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저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의 다수가 참으로 그들의 마르크스주의 정부의 지식 있는 지도자들임을 알고 있다. . . . 내가 아는 한, 에큐메니칼 개신교계에서 아무도 그의 비난들을 물리쳤던 태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믿었다. . . . 매킨타이어 박사여, 당신이 옳았다!(Christianity Today, 21 May 2002;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3).

확실히 교회연합운동과 공산주의는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이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용납할 수 없는 무신론적 유물주의 사상이며 역사상 1억명을 죽게 한 악마적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핀 대로, 교회연합운동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

첫째로,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말하지만, 그 둘은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사회적 관심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정치적 관심과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선한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10계명을 어기다가 지옥 갈 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 문제라고 보며, 따라서 이상적 사회는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진리와 다르다.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근본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물질적인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뜻과 계명을 어기는 죄 가운데 있다. 다시 말하여, 경건과 부도덕이 사회의 근본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셋째로, 가난은 항상 사회 구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가난은 결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빈부의 격차를 크게 하는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라는 최고의 장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는 자는 일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 그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은 게으르고 낭비하는 자가 가난해진다고 말한다. 잠언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또한 많은 경우들에, 가난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넷째로, 교회연합운동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월권을 주며 그들의 투쟁에 연대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월권을 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두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 . .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다섯째로, 이 땅에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사람의 죄성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세상에서 악인들이 다 제거되기 전까지 이상적 사회의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여섯째로,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유, 특히 종교적 자유의 박탈과 탄압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보다 더 큰 사회적인 문제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폭력적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사회의 개선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복음 전도를 통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진정한 사회 개선은 단지 사회 구조의 개선이 아니고 인간 개조이어야 한다. 인간 개조가 사회 구조의 변화보다 앞서야 사회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과 인격의 변화는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대답이다.

둘째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집과 교회를 모범적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모범적이게 만들지 못한 채 사회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다. 교회가 이상적이게 되지 못한다면, 세속사회가 이상적이게 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의무의 수행을 통해 사회 정의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법률, 과학, 교육, 신문 방송, 예술 등 그의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그가 책임 있는 윗사람일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혹은 그가 아랫사람일 경우에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할 것이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동료들을 겸손히 설득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정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시민으로서 우리의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 방법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와 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물리적으로 강압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참되고 온전한 도덕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교회연합운동의 사회정치적 활동을 포함한 넓어진 선교관과 사회정치적 행동주의는 성경적으로 옳지 못하며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8. 이방종교에 대한 태도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방종교들까지 포함하려는 종교다원주의, 즉 혼합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분석

WCC가 이방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함

1983년 WCC 총회는 WCC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했다(Christian News, 5 September 1983, 7;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Fundamental Evangelistic Association, 1986), pp. 6-7).


대화의 방식을 강조함

WCC는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방식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진리의 통찰력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캐나다 뱅쿠버에서 모인 WCC 제6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신앙들의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 . . 대화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어떻게 활동적이신지를 더 분별하고, 다른 신앙들의 사람들이 궁극적 실재[신, 神]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찰들과 경험들을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감사하기를 기대한다(Gathered for Life: Offical Report VI Assembly World Council of Churches, Vancouver, Canada (WCC, 1983), p. 40).

WCC의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모든 곳에서 사역하지 않으셨는가? 또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 구원적이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있고, 그 대답들은, 대화에서 우리가 단지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빛들을 가지기 위해서 배우고 들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p. 215).

WCC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지도자인 존 테일러(John Taylor)는, 모든 종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협의회 회원들 가운데 일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된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의 모든 선교적 노력들을 중지해야 한다. . . . 많은 유대교인들이 우리를 제발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Province [of Vancouver], 27 July 1983; Christian News, 5 September 1983, p. 7).

WCC 사무총장 콘라드 라이저는 스리랑카에서 천주교 신학교수들과 개신교회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개종(改宗)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개종시키는 신앙이었고 ‘이방인들’을 회심시키려 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다른 종교들에 대해 좀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선포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참된 대화를 원하는 내적인 모호함을 가지고 있다(E-mail from WCC, 19 March 2001).

2003년 제네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의 의장인 카돌리코스 아람 1세는 종교간 대화가 WCC의 에큐메니칼 증거에서 충분히 높은 우선순위를 가지지 못하였고 종교들의 공존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근본주의가 “종교의 가장 큰 적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위험한 세력”(PCUSA News, 26 August 2003)이며,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모든 종교들을 위해 첫 번째의 긴급한 우선순위의 일이다”라고 말하였다(Calvary Contender, October 2003).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함

더욱이, WCC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WCC 종교간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했다(M. H. Reynolds Jr.,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 8).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는 WCC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는,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고,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이 성 요한, 성 바울,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WCC, 1985), 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명확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기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Ibid., pp. 21-22, 67), 또 성경 언어가 객관적, 절대적 진리를 나타내는 언어가 아니고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pp. 6, 9, 24, 26).

또 그는 이교도들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회개해야 할 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신, 힌두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힌두교적 이해, 이슬람교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 . .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Ibid., pp. 9-11, 56).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전도에 가장 큰 방해거리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는 이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Ibid., p. 53).

 

종교다원주의의 용납

1990년 1월, WCC의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과의 대화 분과의 스위스 바아르에서의 모임은 15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헬라 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했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했다(Marlin Van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5 Feb- ruary 1990, p. 1).

이 문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구원적 임재(臨在)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다른 종교적 전통들의 “추구와 발견 속에 하나님께서 계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의 진실과 지혜와, 그들의 삶에서의 사랑과 거룩은 . . . 성령의 은사이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그 문서는 종교적 다원성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성취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과의 그리고 이웃들과의 우리의 만남을 깊게 할 기회로 본다. 또 그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신뢰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VanElderen, p. 15).

그 문서에 의하면, 그 세계적 차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Ibid.). 또 그 문서는 주장하기를,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의 삶과 전통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우리가 다른 종교들의 진리와 선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세계 안에서이다”라고 하였다(Ibid.).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7차 총회에서 한국 이화여대 조직신학교수 정현경은 주제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 당한 어린아이들의 영, 잔다르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또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샤마니즘적 행위를 했다(기독교 연합신문, 1991. 3. 17, 7쪽; 1991. 3. 24, 7쪽; 1991. 3. 31, 7쪽).

그는 또 독일 영화인들 앞에서 “하나님은 나의 문화에서 부처를 통해, 무당들을 통해 . . .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해방-생존-혼합주의의 영’이라고 고백했고 “나는 여러분처럼 혼합주의자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Christian News, 17 February 1992;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2).

WCC의 사무총장 콘라드 라이저는 200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WCC의 ‘폭력 극복 10년’이라는 행사에서 행한 연설에서 선교적 활동과 세계적 전도가 많은 국가들에서 충돌과 폭력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1년 4월 25일자 연합감리교 뉴스서비스에 의하면, 라이저는 네다섯 나라들에서 이슬람교인과 기독교인과 불교인 간의 긴장 상황들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선교 활동의 초점을 나라들 안에서나 관계에서 “화평과 화해의 사역”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화해의 중개자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대신 그들의 선교 활동이 충돌의 원천이 되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하면 선교에 실패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합감리교회의 멜빈 탤버트 주교는 라이저와 동감하며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와 사랑의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탤버트는 교회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초점을 두지 말고 다른 이들과 함께 평화로이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데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탤버트는 요한복음 17장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예수께서 지구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즉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호소하고 계신” 기도로 언급했다(Foundation, May-June 2001, pp. 38-39).

이와 같이, WCC와 교회연합운동가들에게서 이방종교를 포용하는 경향과 예들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이다.

 

교회들의 혼합주의적 풍조

노만 빈센트 피일

1993년 95세로 사망한 노만 빈센트 피일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의 한 예이다. 그는 1984년 필 도나웨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듭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는 여러분의 길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길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신도교 사당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했다. . . . 그리스도는 그 [여러] 길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신다(Christian News, 8 June 1998).

노만 빈센트 피일은 1980년 한 몰몬교 총회장 생일축하회의 주 연사이었고 몰몬교 지도자들을 칭찬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의 신성(神性), 및 그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리 그레이엄과 기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찬사를 받았다(Calvary Contender, 15 July 1998).

로버트 슐러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적 인물의 다른 한 예는 로버트 슐러이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뉴 에이지) 기독교 일치학교 연례대회를 위해,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 또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의 조찬기도회에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No- vember 1998).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또 천주교인들은 그의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하였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이단적이다(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기를 원하지 않았다(The Discerner, June 1999).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June 1999; Christian News, 19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미국 감독교회

미국 감독교회는 수년 동안 이방종교를 용납해왔다. 캘리포니아 감독교회 감독 윌리암 스윙은 1996년 국제연합(UN)처럼 모든 종교를 모아 대화케 하려는 종교연합 발기인회를 설립하였다(Calvary Con- tender, October 2003). 뉴욕 시의 성 요한 대성당이나 샌프란시스코의 은혜 대성당에서는 근래에 불건전한 신비주의 의식들이 거행되었다(Christian News, 8 September 2003).

미합중국 장로교회 소속 페이스 장로교회

1998년 6월, 미국의 알라바마 주 헌츠빌의 ‘종교간 선교봉사회’는 그 월례회에서 미합중국 장로교단 소속 페이스(Faith) 장로교회에서 ‘거룩한 소리들’에 대한 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Huntsville Times, 11 July 1998). 바하이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및 세 개의 ‘기독교’ 교단들을 포함하는 종교 대표자들은, 소리가 그들의 예배 형식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발표하였다(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변선환

우리나라 감신대학 전학장 변선환 교수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심을 부정했다. 그는 기독교 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기독교사상 (1983. 5), 155쪽), 또 그는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와 동일시할 때 거침돌이 된다”고 하였다(위의 책, 156쪽).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위의 책, 156쪽). 또 그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서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고, 또 “예수님을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크리스챤신문, 1990. 12. 8). 또 그는 한 정기간행물에서 “[이방 세계는] 교회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선행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으며 기독교의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를 비기독교 세계에 가지고 오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 나라는 거기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했다(현대사조, 2권; 기독교연합신문, 1992. 1. 5, 20쪽과 국민일보, 1992. 6. 27, 2-3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런 사상은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는, 비평할 가치조차 없는 명백한 이단이다.

김경재

한국신학대학 조직신학교수요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인 김경재는 정현경 교수의 캔버라 주제 강연에 대해 동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서 유대 땅에 화육하셨지만, 영원한 그리스도로서 연민의 사랑과 지혜의 영으로서 모든 문화 속에, 우리 조상들 속에 현존하셨다는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전래 이전 불교와 유교를 믿고 살고 간 우리 조상들은 지옥 갈 우상숭배를 하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혹은 그림자처럼 우리 가운데서 창조와 구원과 속량의 일을 행하여 오셨다고 믿고 신앙고백하는 것이 정 교수의 신앙고백이다. 필자는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한다(기독교 연합신문, 1991. 3. 31, 7쪽).

2000년 1월, 김경재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기장 교단이 불교와 심층적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뚜렷하게 하고 동아시아의 위대한 영성과 창조적 지평 융합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기독신문, 2000. 4. 19, 19쪽).

2000년 10월, 김 교수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유일신 신앙이 어떻게 다른 종교들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일신’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신(神)이란 모든 것을 통섭(統攝)하고 근원 지우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호와, 야훼 등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신의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로고스(Logos), 법(法), 도(道), 이(理)는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문화권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 로고스만이 옳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는 것이지요(조선일보, 2000. 10. 20, 21쪽).

또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기독교가 절대적 종교로서의 위치를 잃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면 정체성과 본질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가 예수와 바울을 거치며 그 울타리를 벗어났듯이 역사적 종교인 기독교도 다른 문화와 전통을 만나면서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인식이 늦은 편이지만 인터넷 보급 등으로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보편화될 것으로 생각합니다(위의 글).

또 그러면 여러 종교 중 왜 하필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위의 글).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은 다른 종교가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종교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이 개인의 ‘궁극적 선택’이 갖는 진지성, 결단성,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에 철저한 사람만이 다른 종교와의 진정한 대화와 협동도 가능합니다.

또 그는 이름 없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각 역사적 종교는 서로 다양한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고백된 ‘구원의 길들’을 열고 있다”고 전제한 뒤,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경심을 갖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깊이 헌신한 것, 이것이 신앙의 자세다”라고 말하였다(크리스챤신문, 2003. 2. 24, 1쪽). 또 그는 “하느님은 이름 없는 존재로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와 풍토와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실한 언어로 붙인 이름들이 있을 뿐이다”며 “그것은 하나님이기도, 알라이기도, 비로자나불이기도, 브라만이기도, 한울님이기도하며 신, 로고스, 태극이거나 혹은 이름 없이 가슴속에 담아두며 흠모하는 우주적인 어떤 존재이기도 하다”고 주장하였다(위의 글).

또 김경재는 “45억년 동안의 생명 진화 과정에서 불과 300만년 전에 출현한 인간 종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지구촌 각 지역에서 ‘영적 진리 체험’, ‘하나님과 구원 체험’, ‘인간의 제한성과 자기 초월성 체험’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경이로움을 넘어서 신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증험하는 커다란 증좌가 아닐 수 없다”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은 물론이고 우리의 동학이나 원불교, 무교 등과 같은 종교들도 지구촌이라는 정신적 삶의 동산에서 피어난 영적 꽃들이다”라고 주장하였다(위의 글).

천주교회의 혼합주의

천주교회의 의식은 오랜 세월 동안 매우 혼합주의적이게 발전해 왔지만, 20세기 말에 와서 더욱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이슬람교인들과 유대교인들과 기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과 동일한 참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적 믿음이 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수년 동안 거듭 반복해 말해왔다.

1985년 모로코 방문에서, 그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메카를 향하는 회교도 순례자들에게 “우리는 같은 하나님,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5 July 1988).

그 교황은 이슬람 경전인 코오란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본다. 1999년 5월 바티칸에서 3명의 이슬람교인들과의 면담 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코오란에 절하고 그것에 입맞추었다(Christian News, 18 October 1999).

2000년 12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의로운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은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천주교회를 믿지 않을지라도 구원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복음은 우리에게 팔복에 일치하게 사는 자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마음이 청결한 자들과, 생활의 고난을 사랑으로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선한 한 천국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말한 것이다(Christian News, 18 December 2000).

2001년 9월, 그 교황은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이 연합하기를 요청하며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이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를 요청한다. 우리 모두는 그의 자녀들이다”라고 했다. 그는 천주교회가 ‘진정한 이슬람교인’에 대하여 오직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교황은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Christian News, 1 October 2001).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2002년 1월 24일 이태리 아싯시에서의 역사상 가장 큰 ‘기독교’ 모임에서 천주교인들, 침례교인들, 루터교인들, 궤이커교인들, 메노나이트교인들, 및 헬라 정교인들, 그리고 유대교인들, 이슬람교인들, 힌두교인들, 시크교인들, 불교인들, 신도교인들, 유교인들 및 부족 원시종교인들을 포함하는 11개의 기타 종교 단체들을 함께 모았다. 약 200명이 순례의 행진을 했고 대화를 위한 요청과, 경제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주의적] 세계를 창조할 필요성에 대해 들었다(Huntsville Times, 24 January 2002). 교황은 “사람은 어떤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라도 사람에 대해 폭력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2).

 

비평

성경적 전도 방법은 선포이다. 대화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진리의 통찰력을 얻기 위한 이방종교인과의 쌍방적 대화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바이다. 신명기 12:30,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예레미야 10: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더욱이,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확실히 이단이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사상은 자유주의 신학의 결론이며 명백히 이단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교회가 속화되고 부패될 때마다 우상숭배적 혼합주의가 유행했다. 그러나 사두개파적 불신앙을 버리고 성경을 보면, 성경의 언어는 단순히 신앙의 언어가 아니고 진리의 언어이며 성경의 신론과 기독론은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함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하늘과 땅에]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은 이방종교들이 모두 헛됨을 밝히 가르친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가르치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이 사실을 내포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예레미야 10:11,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은 이방종교들이 헛될 뿐 아니라,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에베소서 2:2-3,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 . .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출애굽기 12:12, “[내가]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예레미야 51: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이방종교들을 긍정적으로 탐구하는 것도 금했다. 신명기 12:30,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또한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요한복음 8:24, “너희가[유대교인들이라도]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002년 10월 미국 기독교회협의회(ACCC)는 미국 미주리 주 모네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개신교 대교단들,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천주교회, 이슬람교, 불교 등에서 구원의 길에 관한 혼란이 많기 때문에, 또 종교다원주의(‘모든 길은 결국 천국에 이른다’는 신념)가 널리 용납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미국 기독교회협의회는 성경에서 발견되는(행 4: 12; 딤전 2:5; 요 3:36; 14:6) 기독교의 유일한 메시지를 선언할 것을 결의한다.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 성경에 의하면, 오직 구원의 한 길이 있다. 구원은 은혜로만, 믿음을 통해서만 되고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엡 2:8-10).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 기독교회협의회 회원 교회들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왜곡을 경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유일한 길을 선포하기를 요청할 것을 결의하는 바이다(Calvary Contender, December 2002).

 

9. 문제의 핵심

모든 종류의 연합이 선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인류 초기의 바벨탑 사건은 잘못된 연합주의의 표본이었다(창 11: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단합을 미워하셨고 그들을 뿔뿔이 흩으셨다(창 11:9).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17에서 잘못된 교제와 일치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런 교제와 일치를 삼가라고 교훈하였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오늘날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연합운동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참 교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들의 연합적 교제들과 활동들도 그런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현 시대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마 24:11; 살후 2:3; 계 13장), 말세의 징조들을 드러내고 있다. 다수의 개신교회들이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버렸거나 심각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용납하고 있다. 교회들의 혼란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많은 보수적인 목사들이 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면 현대 교회연합운동(the ecumenical movement)의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현대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의 핵심은 그 운동이 주장하고 추구하는 교회 연합과 일치의 넓은 기초에 있다. 그 운동의 이론적 기초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그것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 운동은 기독교 이름을 가진 모든 기독교회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반부터 명확해진 ‘넓어진 교회들’의 협의체로서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개 교회들이나 개 교단들은 다양성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넓어진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교회들의 해이함이며 교리적 무관심주의의 결과이다. 교회들이 잠들면 가라지들이 덧뿌려진다(마 13:25). 그것은 사탄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마태복음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그러므로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다수의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신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해이해진, 넓어진 상황에서 물론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것의 명확한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역사적 대교단들이 안고 있는 신학적 다양성의 문제점 바로 그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다양성이란 단순히 복음적 개신교파들의 다양성을 뜻하지 않고 19세기에 작게 시작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역사적 대교단들을 부패시키고 혼란시킨 자유주의 신학까지를 포함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역사상 볼 수 없었던 파괴적 이단인데, 오늘날 세계의 역사적 대교단들은 이 이단 사상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고 이런 교회들의 연합체로서의 WCC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조직체가 된 것이다.


천주교회의 포용

교회연합운동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것이다. WCC는 초기부터 천주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오늘날 천주교회와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도 변하였다.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주교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협의회들(NCC)의 정회원이다(Calvary Con- tender, 1 February 1999).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WCC 제5차 신앙직제위원회 세계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종교다원주의의 경향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최근에 종교다원주의의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WCC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도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의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WCC, 1985))이라는 책은 대표적인 한 예이다. 또 1990년 1월, 스위스 바아르에서 모인 WCC의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과의 대화위원회 모임에서 발표된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도 명백히 종교다원주의적이다(Marlin Van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5 February 1990, p. 1).


복음주의의 동일한 문제

20세기 중엽에 복음주의는 자유화된 대교단과의 분리를 거절하고 자유주의와의 교제와 공존을 처음부터 용납하였다. 복음주의는 더 이상 자유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자유주의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또 오늘날 복음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것 같다. 그것은 복음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에서 잘 드러났었다. 199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의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빌리 그레이엄의 타협적 전도 방법을 잘 증거한다. 허스턴은, “지난 10-15년 동안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약간의 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 신자들은 안내위원, 성가대원, 또 상담위원으로도 환영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그러나 현대 교회연합운동이 포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과 그것의 개입을 부정하는 사두개파적 불신앙이며 성경의 신빙성과 진리성, 신적 권위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신성(神性),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등의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것은 성경적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교회에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참으로 괴이한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에 시작되었고 20세기에 미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현대교회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보다 일찍 자유주의의 영향 속에 있었다. 카나다 교회들은 일찍 자유화되어서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카나다 선교사 서고도(William Scott) 같은 이들로부터 들어왔다. 서고도 선교사는 성경에 다수의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말했다(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십년사 (1945-195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56), 186쪽). 또 193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에서 제기되었던 아빙돈 단권성경주석 번역출판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그 주석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이적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신성(神性)을 의문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등 “모든 자유주의 신학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였다”고 말했었다(박형룡,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자유주의,” 신학지남, 1964년 9월호, 9쪽 이하). 이런 자유주의적 성경주석을 한국의 감리교회는 희년 기념사업으로 번역출간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감리교회는 일찍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또 1947년 51명의 진정서 사건으로 제기된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신)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었다. 당시에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공언하며 자신을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 같은 신정통주의자들과 같은 부류로 말하였다. 이 문제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김재준을 면직함으로 종결되었고 그를 옹호한 자들이 만든 교단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는 일찍부터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심지어 예장통합측까지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포용해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1984년 이동렬 씨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제출되어 통과된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말하였다(장로회신학대학원, 1984), 63쪽). 또 장로회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그의 책에서 성경의 축자[단어]영감과 성경무오를 옛시대의 신앙사상이라고 말하며 오늘날의 개혁신학이 바르트와 브룬너와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차원 높은 신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200-201, 208-209쪽). 그러나 신정통주의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없다든지 자유주의 신학이 단지 극소수의 몇몇 학자들의 생각일 뿐이라는 무지하고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말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무지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불신앙이나 타협을 위장하는 것일 것이다. 한두 명의 목사가 그래도 심각한 문제인데 상당수의 목사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되고 더구나 목사후보생들을 양성하는 신학대학원과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사상이 그러한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이단이기 때문에, 교회들의 교제와 연합이 그런 신학을 포용하며 이루어지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그것은 WCC적 교제와 연합이든지 복음주의적 교제와 연합이든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배교이며 타협이다!


천주교회의 이단성

또한 천주교회는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단체이다.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그 근본적 내용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1)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부당하게 높이며 섬기는 우상숭배적 집단이며, (2) 미사(Mass)를 그리스도의 현재적 속죄제사로 간주함으로써 그의 단번 속죄사역을 왜곡하고 모독하며,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진리를 명백히 부정하고 정죄하며, (4) 성경의 권위와 나란히, 교황의 교훈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한다. 이것들은 다 매우 치명적인, 이단적 오류들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며 우상숭배적 단체이다. 천주교회는 신약교회 2천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또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다. 그러므로 16세기에 루터나 칼빈 등의 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고, 적그리스도적, 우상숭배적 단체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대한 교회연합운동의 지도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의 우호적 관계과 일치의 추구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저버린 배신 행위이며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보면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의 교제의 교훈을 어기는 매우 큰 잘못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이다.

 

10. 교회의 일체성의 성경적 개념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교제와 연합은 아름다운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시편 133:1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린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그를 믿는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원하셨다. 요한복음 17:11,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1-3에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훈하였다. 성도들 간의 교제와 연합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의 성경적 개념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은 영적 의미, 교리적 의미, 유형적 의미 등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 교회연합운동의 실제적 기초인 신학적 포용주의를 비평하면서 교회의 일체성의 성경적 개념인 이 세 가지 의미를 강조했지만, 이제 다시 그 세 가지 의미를 좀더 정리해보자.


영적 의미

첫째로,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 천주교회는 교황을 머리로 하는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본다.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는 생각은 초대교회의 키푸리안에게서 시작된 사상이다. 교회의 조직을 중시하고 그 조직을 이탈하는 자를 구원 얻지 못하는 자로 간주하는 키푸리안의 생각이 천주교회의 교회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천주교회의 생각을 단호히 부정했다. 여기에서 소위 무형교회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사상이 아니고 성경의 교회관을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어떤 조직이 아니라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이 모인 곳에 교회가 있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가 교회의 조직체 밖에 있다 할지라도, 또 심지어 그들의 이탈이 정당하지 못하고 사람의 부족 때문에 비롯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이 진실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그들은 교회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체성은 무엇보다 영적이다. 이 일체성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 주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기도하셨던 그 기도는 실패치 않으셨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모두 이 한 교회에 속한다.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어떤 신자가 어떤 교파,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 만일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를 믿고 성경의 교훈에 순종하며 사는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믿는 자요 그런 자들은 다 한 교회의 교인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우리가 노력해서 비로소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이미 확보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때 이미 우리는 그 한 교회의 교인이 되고 그 한 교회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일체성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일체성이다.


교리적 의미

둘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다. 교회의 일체성의 영적 의미는 교회의 사상적 하나됨, 즉 교리적 하나됨을 포함한다. 하나님과 사탄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오지만 실상은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이다(마 7:15). 예수님 자신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데까지 나아가셨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 곧 율법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사도행전에 보면, 에베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그의 전하는 말을 비방했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9:9).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만찬과 긴 교훈 후 하나님께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을 때 그는 그의 기도 전체에서 제자들 곧 택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셨다. 그는 그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셨다(6, 9, 24절). 그는 심지어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9절).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제자들의 하나됨을 아버지와 자신의 하나됨에 비교하셨다(11, 21절).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하나됨은 복음 진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복음 진리 밖에서는 하나님도, 구원도 생각할 수 없고, 성도들의 연합도 하나됨도 생각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들의 하나됨에 대해 말했을 때도 구원 얻은 성도들의 연합과 하나됨을 말한 것이라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그는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구원 얻은 자들임을 이미 자세히 언급하였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救贖)과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구원 얻은 자들이다. 또 4장에서 그가 성도들 혹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할 때도 그는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께서 각각 하나이시며 믿음과 소망과 세례도 각각 하나임을 말하였다(4-6절). 그런 주제들과 함께,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의 하나됨이 교리적 내용과 상관없이 그냥 하나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교리적 내용과 함께, 또 이런 교리적 내용에 근거하여, 하나인 것을 잘 나타낸다.

교회의 일체성의 교리적 성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바른 교훈을 지키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교훈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워필드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바르게 말했다(“True Church Unity: What It Is," in 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마틴 로이드-죤스도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의 기초라는 그의 책에서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고 말했다(D. Marty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그러므로 바른 교리와 상관없이 교회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보다 더 비성경적인 일은 없다.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혼란시키고 해를 끼칠 뿐이다. 사상적 하나됨이 없는 기구적 연합은 무의미하고 그런 하나됨은 실상 위선(僞善)에 가깝다.

유형적 의미

셋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이다. 사도 바울은 분열과 파당이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 1:10). 그는 에베소교회에게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엡 4:1-3).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이 외형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다. 교회는 공동적 신앙고백과 사랑의 교제와, 전도와 봉사에서의 협력과, 또 가능하다면 하나의 조직체로 그 하나됨을 드러내고 그 하나됨을 지키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 분열과 원수맺음, 반목과 대립과 분리는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에 증거된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악들이다(갈 5:19-21). 그러나 누구든지 뒤늦게라고 자신의 부족과 실수와 범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을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일체성이 반드시 한 개의 조직체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이며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조직은 교회에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신자는 한 조직체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이 반드시 한 조직체에 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한 일이다. 또 우리는 한 세계적 조직체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천주교회의 횡포의 역사를 기억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한 세계적 조직체보다 성도 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성도들의 친밀한 교제가 더 귀한 것임을 깨달았다. 땅 위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물론 구원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들을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교회를 분별하며 선택하고 일단 선택한 교회에 충실해야 한다. 또 그는 신중하게, 기회 있는 대로 교회적 교제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성결성을 동반해야

성경적 교제와 연합 개념의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 교회의 일체성은 교회의 성결성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대해 가르칠 뿐만 아니라, 교제의 단절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비록 지상에 완전히 순결한 교회는 없을지라도, 참된 교회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충실히 지키고 순종하려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와 성례의 바른 시행과 권징의 바른 실행을 말했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고 교회의 하나됨이 중요하지만, 악을 포용하면서까지 연합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연합의 덕은 교회의 순결성을 양보하고 교리적, 윤리적 악과 타협하면서 지켜야 할 덕이 아니다. 참 교제는 악과의 분리를 내포해야 한다. 참된 사랑은 불의와 악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고전 13:5-6).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원리는 요한일서 성경이 매우 강조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요한일서의 중요한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이지만, 그 서신은 또한,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 수 없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까지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생명을 얻지 못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가르친다. 사랑과 의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 둘은 모든 성도들이 다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만큼이나 분명한 또 하나의 성경적 교훈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 가운데 있는 자들이나 또 그 오류를 회개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교훈이다. 이런 성경 교훈을 순종하는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다. ‘분리주의’라는 말은 ‘분리를 일삼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적 교만과 욕심 때문에 성도들 간에 다투고 시기하고 원수를 맺고 분쟁하고 당을 짓고 분리하는 일은 분리주의라고 정죄받을 만하다(갈 5:20). 그러나 성경 교훈을 순종하는 분리는 분리주의라고 비난되어서는 안 된다. 교제의 단절과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명백하고 확실하다.

성경적 분리에 대한 대표적 구절들을 들어보자.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9-11,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단합해야 하지만, 성결성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하고 모든 오류들로부터는 단호히 분리해야 한다.

 

11. 교회적 교제와 연합의 바른 원리

그러면 오늘날 교회적 교제와 연합의 바른 원리는 무엇인가?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의 일치

첫째로, 현재 세계의 모든 교회들은 적어도 성경의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교회들이 교파적 신념들의 차이 때문에 모든 교리들의 일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모든 교회들은 적어도 성경의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다.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의 일치는 온 세계의 기독교회들이 다 하나라는 표가 될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똑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비본질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했다(기독교강요, 4. 1. 12).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도, 교회의 일체성은 영적이며 또 신앙의 일치, 즉 동일한 진리의 믿음과 고백의 일치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가 필요한데 첫째는 기독교의 근본 조항들의 정확하고 명백한 고백이며, 둘째는 그 외의 다른 것들과 의무들에 있어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Church Purity & Unity, vol. 15 of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1850-53; reprint e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7), pp. 106-110).

물론, 성경의 근본 교리들이 무엇인가, 어느 교리까지 근본 교리에 속하는가라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교파적 확신만 주장하며 다른 모든 교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신교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교회-장로교회, 루터교회, 영국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등을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로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그 교회들의 공통적 신앙고백을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19세 말에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근본적 교리들을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으로 천명한 운동이었다.

예를 들어, 1948년에 조직된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의 헌법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하였다:

(1) 성경의 완전 영감, 무오(無誤), 최종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神性)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人性),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贖償的, expiatory) 죽음, (6) 그의 몸의 부활, (7) 동일하신 그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 얻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

또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① 무오(無誤)하며 단어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진 자, ②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나 다 그렇다고 믿는 자, ③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받는 자, ④ 삼위일체의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등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⑤ 이런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⑥ 이런 신앙에 대한 모든 교회적 부인과, 오류들과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에게서 분리하는 자, ⑦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Faith for the Family, September-October 1976, p. 9).

그러나,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들에서 이러한 근본 교리들의 일치는 다수결적 일치이어서는 안 되고 만장일치이어야 한다.


이단들의 배제

둘째로, 참된 교회들은 이단을 배제해야 한다.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교회의 인정된 교리와 다른 신념’이라고 정의되지만(웹스터 영어사전), 보통 좀더 좁게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에서 이탈한 신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New Dictionary of the Theology (IVP, 1988), pp. 291-292). 이단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가감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교회들은 이단을 막기 위하여 신조를 작성하였다. 제임스 베너만은 신조의 기능들을, (1) 성경의 진리를 연합의 기초로 붙드는 것, (2) 신적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치는 것, (3) 세상의 오류나 불신앙에 대항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요약하였다(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pp. 296-302). 존 머리가 강조했듯이, 신조들은 오류의 침입에 대항해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다(The Claims of Truth, vol. 1 of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Banner of Truth Trust, 1976), p. 281). 교회 역사는 신조 작성의 역사이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니케야 신조나 칼케돈 신조, 종교개혁 이후 제2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등이 그러하였다.

신조의 이런 기능을 생각할 때, 어떤 이들이 교회연합의 근거로서 사도신경을 제안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배제하는 기능에 있어서 매우 부족하다. 예를 들어, 천주교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지만 참 교회로 인정될 수 없다. 천주교회의 문제는 사도신경 외의 첨가된 교리들에 있다. 삼위일체 외에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적 교리, 성경 외에 교황의 무오한 권위를 주장하는 것, 연옥을 가르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제물 되심 외에 미사에서 그의 계속적 제물 되심을 가르치는 것 등에 천주교회의 문제가 있다. 교인에게 세례를 줄 때 기본적 신앙고백을 요구하지만, 신자가 이단을 주장하면 권징의 대상이 되듯이, 교회는 기본적 신앙고백뿐 아니라 이단을 배제하는 진전된 신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의 연합의 기초로 사도신경을 제안하는 것은 매우 적절치 않다. 사도신경은 교회 연합의 기초로서는 매우 부족하다.

참된 교회의 표는, (1) 말씀의 바른 전파, (2) 성례의 바른 시행, (3) 권징의 바른 시행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년) 18항은 참 교회의 표를 (1)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전파, (2)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의 바른 시행, (3) 교회적 권징의 바른 시행이라고 보았고, 벨직 신앙고백(1561년) 29항도 참 교회의 표를 (1) 복음의 순수한 교리, (2) 성례의 순수한 집행, (3) 권징의 시행이라고 보았다. 헤르만 훽스마는 참 교회의 표를 (1)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 (2) 성례의 바른 시행, (3) 권징의 충실한 실행이라고 말했다(Herma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 620).

참 교회의 표는 교회연합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리적 무관심주의는 이단을 포용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연합체에는 이단 방지 장치, 즉 권징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참 교회나 참 교회연합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어떤 교단이 과거에 이단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를 먼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사 정리가 없는 연합적 활동은 교회를 혼란시킬 뿐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원리 원칙을 가진 교회적 교제의 확장이 바른 일이다.

특히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상황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와 은사주의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단의 경계선을 무시하고 연합을 추구하는 잘못된 연합주의와 타협적 복음주의가 널리 퍼져 있고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신학들, 즉 신정통주의를 포함해 성경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신학들은 이단이다. 또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더 악화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기독교의 변질된 형태이다. 또 성경의 종결성과 충족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현재적 직접적 계시를 주장하는 은사주의도 이단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회 연합과 교제는 적어도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와 은사주의를 배제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교파들의 정당성 인정

셋째로, 비록 우리가 기독교회의 일체성을 공통적 근본 교리들에서 찾는다 할지라도, 교파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개혁교회만 참 교회로 볼 것인가? 칼빈주의 5대 교리들 중 네 가지만 믿는 소위 아미랄더스파 교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 칼빈주의 5대 교리 전부를 믿는 스펄전과 같은 신념을 가진 침례교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알미니안파나 웨슬리안 알미니안파 즉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교파의 특색이 되는 교리나 정치 체제는 본질적 문제는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또 그것에 대한 확신과 생각의 일치가 없이는 한 조직체 안에서의 성도들의 교제에 평안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지교회에서 교훈과 행정에 대한 교인들의 생각에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생각의 불일치는 갈등을 일으킨다. 여기에 교파들의 불가피성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땅 위에 여러 교파들이 있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교리적 이해의 제한성과 부족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본다. 또 우리가 교회의 영적 본질을 이해한다면, 교파들의 존재가 교회의 일체성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교파들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복음적 교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다.


초교파적 교제와 협력의 필요성

넷째로, 우리는 한 지교회나 교파의 담을 넘어서서 범교회적 혹은 초교파적 교제와 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것은 본질적 교리들의 일치와 이단들의 배제라는 최소한의 공통적 근거 위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로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범교회적 혹은 초교파적 교제나 협력은 상당한 제한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전도집회나 부활절 연합집회 등의 공동적 개최, 기독교 방송국이나 성서공회 같은 연합기관들에의 참여, 비상한 경우의 대사회적 발언이나 자연재해 등 특별한 경우에 공동 대처하는 자선활동 등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초교파 신학교의 건립 등은 바람직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교회는 일치된 사상과 입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그럴 때만 충실한 말씀 증거와 변호의 사역이 가능하고 또 참으로 성도들 간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교회적 혹은 초교파적 교제나 협력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교파적 확신을 버리거나 성경의 모든 교리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모든 교리들의 공동적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들은 기회 있는 대로 또는 기회를 만들어, 교파적 차이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토론하고 연구해야 하며 공동적 이해와 고백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론과 제안

결론

결론적으로, 현대 교회연합운동은 비성경적 운동이다. 교회 일체성이라는 목표는 좋아보이지만, 이 운동이 실제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 개념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현대 교회연합운동이 실제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것은 기독교계에 현존하는 다양한 신학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가 기독교계를 변질시킨 배교와 혼란의 시대에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단들을 포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비성경적 오류이며 악이다.

또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포용적이다. 현재 교회연합운동과 천주교회는 매우 가깝게 교제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유산을 뒤엎는 배신 행위이다. 천주교회는 확실히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이단이다. 천주교회는 그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변한 것이 없다(김효성, 천주교회 비평 (옛신앙); http://www.oldfaith.com/00download/05others/04RCC.pdf).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판단과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연합운동의 조직체적 관심 즉 한 세계교회의 추구도, 자유주의와 은사주의와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한, 용납할 수 없고, 또 비록 기독교계의 이런 이단적 요소들을 배제한 연합이라 할지라도 초교파적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충실한 신앙고백과 교훈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타종교들에 대해 포용적 경향 즉 종교적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의 경향을 명확히 보이고 있다. 이것은 1983년 뱅쿠버 총회 이후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교회의 배교의 모습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교제이며 교회의 연합이겠는가?

교회연합운동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비성경적, 인본주의적, 배교적 바벨탑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신실한 교회들과 성도들은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하고 성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안에 있는 진실한 성도들은 자신의 교단이 이 운동에서 떠나도록 힘써야 하고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 성경을 믿는 모든 신자들은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이나 타협적 교단으로부터 나와 바른 교회를 설립하든지 아니면 건전한 바른 교회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배교와 타협하지 말고, 옛 길, 좁은 길을 지켜야 한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예레미야 6:16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슬프게도 유다 백성은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고 대답하였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고린도후서 6:14-18에서, 사도 바울은 교제의 원리를 분명히 교훈하였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be separate,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11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위태하게 되는 그런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였고(William E.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31), 20세기 초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앙의 투사이었던 메이천(J. Gresham Machen)은 현대교회의 타협의 죄를 바로 지적하기를,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후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함께 공동전선을 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Ibid.).


제안

나는 교회연합운동과 관련해 몇 가지 점들을 제안하려 한다.


기존의 세계적 단체들을 존중해야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입각한 초교파적 교제를 위해 이미 설립된 단체들을 존중해야 한다. 1948년에 설립된 국제기독교회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ICCC),1) 1976년에 설립된 세계근본주의자대회(World Congress of Fundamentalists= WCF), 그리고 1987년 설립된 성경적교회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of Biblical Churches=WCBC) 등이 그러한 단체라고 본다.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는 헌법 서문에서 오늘 시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진단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말한 후, 열두 가지의 성경적인 교리 선언을 채택하였다(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김효성, 복음주의 비평 (옛신앙, 2014), 132-133쪽).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도 근본 교리들에 대한 진술과 함께 이런 신앙에 대한 모든 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함을 선언하였다(Rumminger, "Special Report: World Congress of Fundamentalists," Faith for the Family, September- October 1976, p. 9). 오늘날의 배교와 타협의 상황에서 이러한 단체들의 진술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며 오늘날 참된 교회들의 연합과 교제는 이러한 원칙보다 못하지 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근본주의 단체들을 분리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비난은 근본주의에 대한 오해나 타협적, 신복음주의적 입장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분리는 성경적이다. 그것은 결코 분리를 일삼는 태도가 아니고 명분 없이 분리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교제의 원리 혹은 교제 단절 즉 절교의 원리를 지키는 입장이다.

성경은 교제의 원리, 혹은 교제 단절 즉 절교의 원리에 대해 분명히 가르친다(롬 16:17; 고후 6:14-17; 살후 3:6, 14; 요이 7, 9-11 등). 우리가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주의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또 우리가 자유주의나 은사주의나 천주교회의 배교와 타협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근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 교회들과 성도들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와 은사주의와 천주교회의 이단 사상을 배제하는 건전한 기초 위에서 서로 교제하고 연합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교제들을 반성하고 교정해야

둘째로, 교회는 잘못된 교제를 반성하고 교정해야 한다. 성경적 교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이런 유의 교제를 반대하고 거기서 나와야 한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와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또 심지어 이방종교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런 교제는 분명히 성경이 금하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교훈하였다(롬 16:17). 또 그는 교훈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다(고후 6:14-17).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미혹하는[속이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하였다(요이 7, 9-11).

또 참 교회들은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WEA, 이전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같은 복음주의적 교제를 책망하고 그들과도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은사주의의 이단성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을 배제하지 않고 폭넓게 교제하고 협력하는 타협주의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적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런 자들에 대해서도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했다(살후 3:6, 14-15).

우리나라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자유주의적 교단(예장 통합측)을 주요 회원으로 두고 있고 1991년 2회 정기총회에서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힘”으로써(기독교 연합신문, 1991. 1. 13, 15)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배제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었다. 또 더욱이, 한기총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들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협의회(NCC)와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기독신보, 1996. 9. 14, 19쪽; 기독교연합신문, 2000. 2. 13, 3쪽) 분명히 잘못이다.


너무 조직체적 연합을 강조하지 말아야

셋째로, 우리는 조직체적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이 유형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 역사는 항상 조직체의 불완전함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성도의 인격적 불완전함 즉 성화의 불완전함은 무덤에까지 이른다. 사람의 교만은 자기를 드러내기 쉽고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인격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서지 않는 인물이 다 무능한 자는 아니다. 빈수레는 소리가 요란하다. 교회의 조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성도들의 경건과 겸손과 사랑이 더 중요하고 신앙 사상과 바른 분별력과 입장, 교리적 일치가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의 세계적 단일 교회(A Super-Church)가 이상적인 교회일까? 모든 신자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양심을 압박했던 과거의 천주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세계적 교회가 가능할까? 흔히, 회중교회는 장로교회로 변해가고 장로교회는 감독교회로 변해간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교회 조직의 횡포, 즉 교권의 횡포는 교회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고, 오늘날에도 교회 조직체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은 과거 이런 횡포의 희생물이었다고 본다. 그들은 총회측에 의해 쫓겨났다고 보인다. 또 1937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갈라진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도 그런 횡포의 파생물이었다고 본다. 당시 북장로교회는 독립선교부에 관계된 인사들을 권징하였고 거기에 항의하던 자들이 쫓겨나서 생긴 교단이었고 여기에서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생겼다. 이것은 북장로교회의 교권의 횡포의 결과물들이었다. 세상 법정에서도 보통 허용되는 합당한 항의와 토론과 판단의 절차가 생략된 정죄는 확실히 현대교회사에서 본 교권의 횡포이었다.

2006년 한기총이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를 퇴출시킨 방식도 그와 비슷해 보인다. 모 신문에 의하면, 한기총 대표회장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때려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내보내겠다”고 주장하고 그 일을 강행하였고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는 한기총의 자체 조사도 없이, 최소한의 소명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퇴출됐다고 한다(기독신문, 2006. 2. 8, 7쪽). 물론 이것은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인간적 조직의 결함과 부족의 한 예이다.

교회가 과연 이런 유의 잘못된 행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으로 단일 기구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그것이 참 교회의 모습인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교제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너무 조직체적, 기구적 일치를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바른 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체는 언제든지 횡포하는 권력 조직이 되기 쉽다. 또 하나의 조직체인 교회라 할지라도, 권력 조직으로 변질된 하나의 세계적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보다 결코 더 낫지 않다. 하나님의 교회들은 실상 이미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영적 안목을 가지고 충성해야

넷째로, 교회들은 외적 규모만 중시하지 말고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의 운동이었다(눅 12:32). 진리 운동은 구약시대로부터 적은 무리들의 운동이었다.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 시대를 기억하며 또 선지자 예레미야의 41년 간의 사역을 기억한다. 비록 그들이 부패된 유형교회를 부정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나 부패된 지도자들과 더불어 거창한 활동들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때때로 외로이 행하였다. 그들은 외로운 길을 걸었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역을 하였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성도들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않는 것이 좋다(시 131:1).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일이며 걷지 않는 길이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적 교회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안목을 가질 때, 우리는 각 나라, 각 방언, 각 민족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성도들의 무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요한계시록 14:4-5에 14만 4천명으로 상징되었고 순결한 자들이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그 무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충성해야 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어려운] 때가 이르리라,”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는 사도 바울의 예언(딤후 3:1; 4:3-4)은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는 그의 유언적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지교회를 목회하여 교인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세워야 하고, 또 우리의 속한 교단을 바르게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바른 신학교,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전수하고 현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가지게 하는 목사 양성원들을 세워야 한다. 신학교가 가는 대로 교회들이 갈 것이다. 또 교회들이 가는 대로 신학교도 갈 것이다. 물론, 기회 있는 대로 전체 교회의 교제를 건전한 원리에 따라 행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 지교회, 지교단이, 비록 그것들이 작은 규모일지라도, 바르게 세워지고 바르게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모든 목사들과 교회들의 일차적 의무일 것이다. 그것을 먼저 잘하면서, 우리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전체 교회의 개혁과 정화와 갱신, 그리고 개인들과 교회들의 건전한 교제의 확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미주

1) 근자에 성경무오 견지와 은사주의 반대에 대해 ICCC에 변질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고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