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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6월 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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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으로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성경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뜻을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도는, 유일한 선생님이신 성령의 지도를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강해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심히 부족한 종에게 지혜와 분별력과 간절함과 건강을 주시고 또 약한 남편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아내를 주시고 또 많은 기도와 물질로 후원한 성도들과 합정동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데오빌로라는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또 사도행전에서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 바울의 전도여정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통속적) 헬라어에 익숙했고 어휘가 풍부했다. 누가복음에는 약 312개의 특유한 말이 나온다(디이슨, 신약개론, 232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의학적 용어들과 병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런 사실들은 저자가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여정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고 썼다(이단 반박, 3. 1.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해 말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이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것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에 즉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하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예수님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진다(디이슨, 신약개론, 237-239쪽).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해 강조하는 요한복음과 대조된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한 언급과 기도에 대한 교훈이 많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열다섯 번 나오는데, 그 중에 열한 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증거한다. 이 책에는 마리아의 찬송(1:46-55), 사가랴의 찬송(1:68-75), 천사들의 찬송(2: 13-14), 시므온의 찬송(2:28-32), 제자들의 찬송(24:53) 등이 나온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와 탕자의 비유(15장)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와 대조하여,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교훈이, 또 마가복음에는 그의 기적이 강조되어 있다(메이천, 신약개론 (하), 317쪽).

다섯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셨고(2:32),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다(3:38). 또 이 책은 주께서 유대인들을 제치고 한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행위의 모범으로 제시하신 한 비유를 기록하였다(10:25-37).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일들](NASB, BDAG)(페플레로포레메논 엔 헤민 프라그마톤)[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KJV), 완전히 확정된 일들](롬 4:21; 14:5; 골 4:12 참조)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을 쓴 이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도 썼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 혹은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었고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지어낸 말들이 아니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다(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증인들과 문서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에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고 그를 따를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고 그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임신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無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임신을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前例)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천사의 말은 사가랴가 평소에 자녀를 위하여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이 임신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했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그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에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異像)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손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카타 티)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었다고 보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하였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임신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여인이 자녀를 임신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임신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엘리사벳이 아들을 임신하게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례 요한의 부모이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비록 자녀가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들이었다. 의인들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부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도 이런 저런 부족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족을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사가랴는 자신의 영적인 생활과 자기 나라 백성을 위해서뿐 아니라, 자기 가정의 자녀를 위한 기도도 간절히 아마 오랫동안 올렸을 것이고 그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께 들으신 바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힘써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육의 문제를 위해,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을 위해, 우리의 교회를 위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가 일시적으로나마 벙어리가 되었었다. 오늘 시대는 성경에 대한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가득한 시대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잘 이해하고 의심치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그 저장소인 성경의 말씀들을 다 믿어야 한다.

 

26-56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엘리사벳을 방문함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다윗의 집 출신)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우리는 천사를 본 적이 없을지라도 천사가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천사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집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인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한 순결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0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1)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산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사람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또 그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곧 다윗의 왕위를 이어서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자이시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포스)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임신하지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임신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일 것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출산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KJV, NASB, NIV).

천사는 “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헤 둘레 퀴리우)[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복종했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45절]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님이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님이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복되었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位)[지위, 직위]에서 내리치셨으며[내리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空手)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그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사람은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의 긍휼을 얻을 것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악인을 공의로 보응하시는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졌던 바른 지식과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잉태하고 출산한 예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 또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예수께서는 메시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대로, 주 예수께서는 멸망할 세상에 사는 멸망할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약속된 메시아께서는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신약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며, 장차 그의 재림으로 나타날 영광의 천국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행 16:31). 우리는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그의 교훈을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38절,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나타난 그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에게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57-80절, 세례 요한의 출생, 사가랴의 찬송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8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그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구원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내용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구원의 뿔[능력]’이란 ‘능력의 구주’를 가리킨다.

사가랴가 말한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앗수르, 바벨론, 로마 등의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 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를 언약과 맹세로 나타내셨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 얻어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스플랑크나 엘레우스)[긍휼의 심정]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아나톨레)[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했다(엡 1:7).

사가랴는 또 “이로써 해의 돋음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안이다. 구원은 평안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되고 심령이 강해진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사람과 세상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사람과 세상의 문제들의 근본적 해답이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대속 사역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의 긍휼뿐이다.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 속에는 구원 얻을 아무런 의(義)도, 어떤 조건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구원 얻을 영혼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자신의 죄들 때문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구원 얻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셋째로,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취는 햇빛으로 오셨다(79절).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평안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빛이다. 이제 구원 얻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일 것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 얻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현재의 삶이다.

 

 

2장: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어린 시절

1-20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천사의 증거와 찬송

[1-5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약혼한] [아내](전통사본--Byz A it vg 등)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때와 장소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었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마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헤롯 대왕(주전 40-4년)의 죽음 이전이며, 그가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신 것(눅 3:23), 디베료 가이사(주후 14-37)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에(눅 3: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 등을 볼 때, 그의 탄생은 주전 4~6년경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했다. 마리아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마 1:18; 눅 1:35) 아기가 다 자라 해산할 날이 되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올라갔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았고 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成肉身)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그는 자신을 심히 낮추셨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 즉 소나 말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매우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대속(代贖) 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오셨다.

본문은 예수님을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남동생들과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8-12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주의 천사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한 소식을 증거했다. 역사상 주의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사두개인처럼(행 23:8) 천사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이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을 때,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는 구주이시며 그리스도 주이시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증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증표까지 주셔서 그들로 구주 탄생의 소식을 믿게 하셨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天軍)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BDAG)로다](전통본문)2) 하니라.

목자들은 홀연히 하늘에서 수많은 천군들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천사들의 찬송은 가사가 분명하였고 은혜롭고 아름다웠다. 그 찬송의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라는 것이었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다(고후 12:2). 그 곳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 평안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요 14:27; 빌 4:4).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 천사의 증거와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이 그 천사가 말한 것을 확인하였고 그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하나님께 찬송하며 돌아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셨고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마 20:28). 그는 자신을 비어 종의 모양을 가지셨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5-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10절,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 사는 자들에게 은혜와 평안이다.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은혜의 결과는 평안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21-39절, 할례를 받으심, 시므온의 찬송, 안나의 감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할례 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며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시다.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潔禮)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결례의 날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 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레 12:8).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으나,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예수님을] 데리고 오는지라.

당시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참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그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즉 ‘하나님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바이기도 했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며’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얻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사람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15세쯤 결혼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는 당시에 아마 106세쯤(15+7+84)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마침 이때 나아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3)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해,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을 생략하고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구주이시며 “이방 나라들을 비추는 빛”(눅 2:32)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믿었고 의지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 구원을 얻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엡 1:4)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그의 탄생은 만민에게 기쁜 소식이며 우리는 이 소식을 만민에게 전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인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 즉 죄사함이며 또한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이제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셋째로, 구주 예수께서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소년 목수로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겸비하심을 본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4)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본문의 내용은 네 가지이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해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고 보인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님은 그의 신성(神性)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을 것이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罪性)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때때로 보이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5)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랍비]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요셉과 그 모친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님은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님이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이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쉬네시스)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소피아)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그들이]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있어야 될[일들에 관계해야 할](KJV, NKJV)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실제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에는 ‘집’이라는 말(오이코스)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토이스)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에르고이스)이 더 가능해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KJV)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님이 열두 살 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열두 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셨는지 그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그의 모친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메트 아우톤)[그들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엔 휘포타쏘메노스 미완료과거시제와 현재분사)[계속 순종하셨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어린 시절을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계속 순종하시며 섬기셨다.

소년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계속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예수께서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지혜가 자라셨다. 사람의 지정의(知情意)는 그의 영혼의 활동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함께 그의 지혜도 자라셨다고 보인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다고 보인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 키가 자라셨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神性)에 관해,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 자신을 찾았던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해야 한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단지 사람에 불과하셨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그의 신성(神性)은 그가 평생 죄 없으신 사람이 되게 도우셨고, 또 그의 신성(神性)은 한 분이신 그가 많은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구주가 되실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 한 사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인성(人性)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본받아야 한다. 또 우리 자녀들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래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점점 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하고 흠 없는 인격으로 자라감으로써 하나님에게와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경건 훈련을 힘쓰고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본받아 흠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고, 또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의 정상적 신앙생활이며 구원의 현재적 단계인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20절, 세례 요한의 사역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位)[왕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갈릴리 호수 동쪽)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다메섹 북서쪽)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본문은 세례 요한의 활동 시대에 대해 증거한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누가복음 2:1에 언급된 가이사 아구스도 다음에 황제가 된 자이다. 그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이다.6)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국토를 나누어 통치하는 왕)이었다. 그 동생 헤롯 빌립은 갈릴리 호수 동쪽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었고, 루사니아는 다메섹 북서쪽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는 대제사장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요한이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선지자의 사역을 시작하였다(렘 1:2).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생활 환경이 좋지 않은 곳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부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광야는 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많이 교제할 수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복이며 특히 하나님의 일꾼된 자들의 의무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성경에 정통해야 하며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시시때때로 광야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3-6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요한은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필요하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주신다.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음받지만, 회개한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처럼 회개가 중요하고 죄사함이 중요하며 또 세례도 중요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 시 길을 닦는 것과 같았다. 그 준비는 사람의 마음을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골짜기는 불신앙과 의심과 낙망의 마음을 가리키며 모든 산은 교만과 높은 마음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7-9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하나님께서]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아담과 하와가 사탄에게 미혹되어 범죄한 후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마귀의 성질인 죄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와 같다(마 23:33; 요 8:44; 요일 3:8).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대형사고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지옥 형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회개하는 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라는 원어(메타노이아)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선민 의식은 헛된 것이며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오직 그의 긍휼의 처분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고 우리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이다.

심판의 불은 지옥 불못을 가리켰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4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勒徵)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誣訴)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세례 요한은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주었다.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회개는 생각의 변화이며 그것은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 이웃을 돌아보며 없는 자들과 나누는 것이 회개의 증거이다. 세금 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도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고 또 받는 급여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에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과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회개하였고 구원을 얻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즉 도덕적 삶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이다.

[15-17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신발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와 구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을 분명히 말하며 그에 대해 세 가지 내용을 증거했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끈을 푸는 종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증거했다. 요한과 그리스도는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실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라고 증거되었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상징하지만,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중생(重生)의 은혜를 가리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한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불같이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증거되었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세상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심판주이시고, 또 그가 세상의 심판주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쭉정이들, 즉 회개치 않는 자들과 위선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막 9:48).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불행과 죽음에서 벗어날 유일한 처방이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죄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회개하고 믿은 자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회개한 자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해야 한다. 우리는 강포하지 말고 거짓되이 남을 비방하지 말고 탐심을 품지 말고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선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불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탐심을 버리고 자족하며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성경의 모든 교훈을 행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주는 자이시며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그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악성과 악습으로 망가진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고쳐주신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셨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계셔서 우리로 계명을 지키게 하신다. 그러나 그는 또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그는 마지막 날에 곡식과 쭉정이를 나누시고 쭉정이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알곡 같은 신자들로 성화를 이루며 잘 준비되어야 한다.

 

21-38절,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예수님의 족보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죗짐을 짊어지심을 보이신 것뿐이다. 그것은 대속제물로서의 메시아의 한 준비과정이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일어난 광경은 신비한 일이었다. 우선, 하늘이 열렸다. 하늘은 항상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때때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세계가 계시된 때가 있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섰는 광경을 보았다(사 6:1-2).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행 7:55-56). 사도 요한도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고 그 문으로 들어가 하늘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그 외에 많은 것들을 보았다(계 4:1). 이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도 하늘이 열리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소리가 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인다.

성령께서는 형체로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후에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시며 뱀같이 지헤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16).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며 그의 영께서는 거룩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하나님과 성령께서는 본질상 동일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세상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영이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충만하심 속에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났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예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한번 더 그에 대해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구별되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성경을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그 세 구별된 인격은 한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건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은 그의 참된 신성 즉 그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분이심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라고 부른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신적 영광을 함께 받으셨다(계 5:12, 13).

[23-38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아르코메노스) [‘예수님 자신은 약 30세가 되기 시작하셨는데’(KJV),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BDAG, NASB, NIV)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7)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 자신은 약 30세가 되기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로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을 보인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족보에서 같은 사람이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둘째로, 양자(養子) 제도나 수혼(嫂婚) 제도(신 25:5-6) 때문에 족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루터, 매튜 풀, 벵겔, 라이트푸트, 매튜 헨리, 알렉산더 등). 그러면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고 그의 장인이 될 것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J. C. Ryle, 복음서 강해, II, 106).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인성(人性) 즉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그는 본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 그 이후, 그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셨다. 그는 독특한 인격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다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놀라운 구주이시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같이 누가복음의 족보도 예수님을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암시하였고(창 12:2-3; 22:18) 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그러나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시아 예언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선언에서부터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사람의 죄의 형벌은 사람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인 사람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신비이다. 세 인격의 구별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후 기도하실 때 잘 나타났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 세 인격은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감사히 받고 감사히 믿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 대해 친 음성으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에 힘입어 신적 구주이신 예수님을 더욱 감사히 받고 믿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위한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지 않으셨고 인류 중 일부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려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항상 감사해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사역 시작

1-13절, 마귀의 시험을 받으심

[1-2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을 입으신 후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사역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로 불리며, 이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들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들과 풍조들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이며(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세 가지의 시험을 하였다. 첫 번째는 떡 시험이었다. 이것은 먹는 문제에 관한 시험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이다. 사람들은 먹기 위해 일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 첫째로 먹는 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였던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이라고 보인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옳은 개념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 몹시 배고프셨으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셔도 정당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육신적 유익을 위해서 또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케그랍타이)[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8)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라고 말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라고 말했다(엡 6:17).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음식을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밥은 단지 몸을 위해 필요하다. 밥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평안이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불행이요 죽음이다.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9)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세상 권세와 영광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 시험에서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와 부귀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성경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다(롬 11:36).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시험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했다(약 4:4).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 마귀에게 굴복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얻고 누리지만, 그 누림은 일시적이고 곧 그것을 빼앗기고 만다.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10)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의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명예와 기적주의의 시험이었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시 91:11-12)을 인용하면서 시험하였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바른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지만 그것도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행위의 주장과 함께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절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생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큰 잘못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성경을 인용하며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반대된다. 우리는 기적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기적주의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또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2-24). 기적주의는 바른 신앙사상이 아니다.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종종 우리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경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검으로 사용해야 한다(엡 6:17).

둘째로, 우리는 떡 시험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의식주 문제로 염려치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1-34).

셋째로,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위해 마귀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요한일서 2:15, 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의 뜻만 행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기적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으나 기적만 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 체험이 아니고 바른 교리 사상과 선한 삶이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강조하였다(고전 13장). 또 그는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피차 복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또 우리의 삶이 영적인 전투이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실, 의, 화평,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14-30절, 회당들에서 가르치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그는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의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배우며 기도하기 위해 그 곳에 모였고 공적인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습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나사렛은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생활하신 곳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습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습관대로’라는 말은 그가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온전한 성수주일, 규칙적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 새벽 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은 ‘바실리카’라고 부르는 예배실의 앞부분에 ‘베마’라고 부르는 강단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성령께서] 내게 임하셨으니[내 위에 계시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치료하며](전통본문)1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덱토스)[받으실 만한](KJV) 해(year)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펴면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위에 계셨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고 본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해 있고 마귀와 죄에 포로 되어 있고 눈멀고 억눌린 자가 되었고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그 불행한 처지에서 건져내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시대를 선포하셨다. 이 은혜의 시대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2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헤 그라페)[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씀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 곧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 예수께서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목수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를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 그를 무시하였고 의심하였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단지 기적에 대해 관심을 가졌음을 아셨다. 그러나 기적은 단순히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구하거나 행하실 일이 아니었다. 또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는 그들과 똑같이 평범한 어린 시절을 가진 자이지만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된 자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신 은혜와 직분과 권위를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꼭 믿어야 할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 나라를 버려두시고 이방나라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나라의 한 군대장관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죽어야 할 때가 되지 않으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어릴 때부터 율법의 규례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셨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다. 경건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7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훈련하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공적 예배에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찬송하고 기도하기 등 경건 훈련을 힘써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들의 성취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옛날부터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께서 오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가 오신 후 세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렸고 죄사함을 얻었고 자유함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의 구원의 일을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그의 말씀에 대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까지 했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神性)의 영광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고 배척하지 말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로 알고 영접해야 하고 겸손히 그를 믿고 사랑하고 따르며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

 

31-44절, 여러 병자들을 고치심, 전도하심

[31-37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으셨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하였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과 행위를 조장하는 영이다. 그 더러운 귀신은 예수께서 자신을 멸할 수 있는 자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특별한 사명을 주셔서 보내신 자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널리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확실히 신적인 권세이었다.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시몬은 시몬 베드로를 가리킨다. 마태복음 8:14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말했다. 시몬 베드로는 결혼한 자이었는데(고전 9:5), 그의 장모가 심각한 열병에 걸려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앞에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고 그 병이 떠나갔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예수께서는 그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그때 그 병이 떠났고 여자는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열병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려고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사건은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 즉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을 일으키는 병균까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했다. 하나님께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시며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다 통치하시는 자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그리스도]12)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며 또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히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으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를 구주로 의지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귀신들에게는 구원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그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8:4와 9:30에 보면 치료받은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더 근원적 문제 곧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소식이다. 기독교는 단지 외형적인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인 기적, 곧 회개와 믿음과 영혼 구원을 전한다. 또 영혼 구원은 참으로 복된 일인 몸의 부활과 영생과 천국으로 이어진다.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일을 위해]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13) 전도하시더라.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셨는데 아마 기도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막 1:35). 또 그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마귀의 나라는 무지와 죄와 슬픔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과 의와 기쁨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말씀들을 지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전도의 사명을 밝히 증거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또 그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또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데리고 온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또 열병에게도 명령하셨고 또 일일이 병자들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했고 각종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神性) 곧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했다. 비록 그들이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다. 우리는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43절,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오늘도 기독교는 사람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 좀더 넓게 말한다면 육신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기독교는 사람의 죄 문제의 해결 즉 영혼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죄 문제가 사람 개인과 인류 전체, 즉 온 세상의 근본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셨고 그것과 함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복된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도 전도의 사명을 위해 힘써야 한다.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베드로를 부르심

본문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며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라고 본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예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어 유익한 지식을 주는 말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이나 거짓되고 부도덕한 말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준다. 그것은 우주가 어디서 기원했고 사람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장차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한 명칭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호숫가에 서셔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은 밤새 고기를 잡고 아침에 돌아왔던 것 같다. 마태복음의 내용이 같은 사건을 증거한다면,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가 그 새벽에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께서는 한 배에 오르셨다.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이 시몬은 8절에 시몬 베드로라고 언급된다. 예수께서는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은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별히 시몬과 동료들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관심과 배려이셨을 것이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요한복음 1:41-42에 보면, 시몬은 형제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받았었다. 시몬은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고 그의 말씀을 순종해 보려는 마음도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심히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동료]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심히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디에레그뉘토, 미완료과거시제)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적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또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예수님을] 좇으니라.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에피스타타)라고 불렀던 시몬 베드로는 지금 그의 무릎 아래 엎드려 두려워 떨며 그를 ‘주여’(퀴리에)라고 불렀다. 이것은 확실히 변화된 호칭이라고 보인다. ‘주’라는 호칭은 단순한 존칭어인 ‘선생’이라는 호칭의 뜻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졌다고 보인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지 않을 자는 없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았고 놀랐다. 그들은 다 이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잡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단지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이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기 위함이셨다. 과연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의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주시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끌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6:24), 또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소유와 자기 자신까지 다 버리지 않고는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4:26-27, 33). 우리는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시드는 허무한 세상임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부귀와 영광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보다 훨씬 큼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전하며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셨다. 직업이 고기잡이이었던 시몬이 밤새도록 잡지 못했던 고기를 예수께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에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로 잡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신 것,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자신의 비천하고 누추하고 죄악된 모습을 깨달았다.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며 그를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성경적 설교들을 들을 때 또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 눈이 열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심히 부족함과 누추함과 죄악됨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전도자로 부르기를 원하셨다. 10절,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시몬 베드로와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며 충성할 일꾼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며(요 6:29) 복음을 널리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요 6:39). 우리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이 일에 동참해야 한다.

 

12-26절, 나병 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나병은 미생물로 인한 만성적 전염병으로 궤양, 결핵성 혹, 손가락과 발가락의 끊어짐, 신경의 마비 등의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거하는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한 나병환자가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예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이나 예수께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사건을 보거나 들음으로 생겼을 것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구원 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했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사람은 보통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질병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했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나병이 즉시 그를 떠났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신적 능력을 증거한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했다. 하나님께서만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 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 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 아니셨다. 그의 임무는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하였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사람들이 사는 동네 안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 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예수께서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을 대속 제물로 오셨다. 그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떠나 물러가셨고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그의 기도 생활은 모든 신자들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힘을 얻어야 한다.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율법 선생들]이 앉았는데 [그들의](전통본문)14)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예수님과] 함께하더라.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교법사’라는 원어(노모디다스칼로스)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노미코스)나 ‘서기관’(그람마튜스)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 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 병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의 능력은 ‘주(主)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니.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은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낙심치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은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해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님 앞으로 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친구에 대한 사랑과 수고와 협력하는 마음이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과 그 병자를 포함할 것이다.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병고침을 간청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용기 있게 행동했고 수고하며 협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죄와 병이 관계가 있음을 보인다.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하였다. 우리의 모든 병이 우리의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나, 우리의 많은 병들은 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도 많고 병자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도 없고 병자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의논한다’는 원어(디아로기조마이)는 무엇을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아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23-26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인자(人子)는 예수께서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심을 증거하는 명칭이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도 물론 쉬운 말은 아니겠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인성(人性)을 가진 자, 즉 참 사람이시지만, 또한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시고 신적 사역을 하시는 분, 즉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다. 또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또 드러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이런 불치의 병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런 불치의 병들을 고칠 수 없으셨을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거나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자이시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는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는 피이었다. 죄인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을 얻고 영생에 이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험한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선한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27-39절, 죄인을 부르러 오심, 금식에 관한 교훈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세금 받는 관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본문에 세금 받는 관리 레위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이었다(마 9:9).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셨다. 모세와 다윗은 양을 치거나 지키다가 부름을 받았다(출 3:1-10; 삼상 16:11-13). 주께서는 ‘나를 좇으라’는 말로 마태를 전도자로 부르셨다.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나, 요한과 야고보도 그와 같은 말로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전도자들을 부르신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그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했다(마 4:20, 22; 눅 5:11).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그 무엇보다 더 귀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며 따랐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에게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계승하며 그 일을 수행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푼 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했다. 그는 그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주이심을 깨닫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전도적 관심과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고 그의 계명을 어기고 죄 가운데 있었을 때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서는 누구든지 만나며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자들과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만 참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큰 전도집회를 열었던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의 전도 방법은 옳지 않다.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서 탈선한 자들이며 그런 자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전도 동역자가 될 수 없다.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왜](전통본문)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마시나이까?](전통본문).15)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본받아(마 11:18), 또 그들의 선생이 지금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기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했었다(요 3:29). 결혼은 사람의 일들 중에 매우 기쁜 일이다.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날에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시는 날과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 성도들의 한 생활 원리를 보인다. 그것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살지만, 또한 환난과 핍박 중에서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기를 부정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나 교회 장로들을 세울 때에 금식했다(행 13:2-3; 14:23). 교회의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직분자들을 세울 때 축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그래야 둘 다 보존되리라](전통본문).16)

예수께서는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를 자기 자신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를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것은 그를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또 이 비유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도 보인다. 구약시대의 은혜는 율법적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신약시대의 은혜는 복음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씻음을 받기 위하여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신약 교회에서는 공적인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17)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18) 좋다 함이니라.

옛날의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신다.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구원 의지이시다.

둘째로, 죄인은 회개해야 한다. 32절,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는 죄인들의 구원에 필수 과정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죄를 버리고 죄에서 떠나는 것이다. 죄인들은 불경건하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다 멸망할 것이다(마 3:8-10; 눅 13:3, 5). 죄를 버리고 죄를 떠나는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이며 생명 얻는 길인 동시에 구원의 목표이다(행 11:1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시대의 은혜는 구약시대와 같이 율법의 형식이 아니고 복음의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구약시대와 동일한 경건함이 있지만, 구약시대보다 자유롭고 자원적이며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신약시대의 금식은 틀에 매인 것 같은 율법적 규례의 금식이 아니고 자유롭고 자원적이며 평안과 감사함을 가진 금식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 .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6장: 가르치심

1-19절, 안식일 문제, 병자들을 고치심,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19)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뜻이 분명치 않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人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치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을 요청하였고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의 일행에게 주었었다(삼상 21:1-6). ‘인자(人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의식적(儀式的) 요소와 도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 즉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에 쉬는 엄격한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골 2:16-17).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 즉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은 신약교회에도 필요하고(히 10:25)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시대로부터 주일이 그 날로 지켜지기 시작하였다(행 20:7; 고전 16:2). 그러므로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모든 날이 다 ‘나의 날’ ‘우리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의 날로 지키는 것은 선하고 복되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예수님을] 송사할 빙거[구실]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예수님을]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신 후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선한 일, 예컨대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했다. 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을 범한 자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12절]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에도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물론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6:6).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눅 18:1-7; 빌 4:6-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사람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라는 원어(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그의 교훈과 그의 죽음의 속죄적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3:13), 그들이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3:14-15).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고 알기를 힘써야 한다.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를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자가 열두 제자 중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평평한 곳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 기록된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보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J. C. 라일, 매튜 풀).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처럼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처럼 보인다. 물론 ‘평지에’라는 말은 산언덕의 평평한 곳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5절,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보고 또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육신의 휴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모든 성도는 늘 기도함으로 승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세우신 직분자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자세히 배우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 속에 풍성하게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정신적 질병을 포함하여 많은 각종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그는 죽은 자도 살려주셨다. 그는 그 외의 기적들도 행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이나 기적들을 행하신 사실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 육신적 의미뿐 아니라, 또한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고 본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때에 육신적 가난과 슬픔은 그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된다.

초대 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슬퍼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무의미함, 무가치함, 목적 없음과, 또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義)와 영생이 없음을 깨닫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와 영생을 갈망하고 또 자신의 죄들과 죄성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오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구주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언제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고 우는 자가 웃게 될 것인가?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그의 긍휼을 구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될 때 천국 백성이 되고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내세(來世)의 복은 더욱 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육의 만족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人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들이 받는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께서 가신 길이며 하나님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주의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마음의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다고 말했고(고후 6:8), 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님의 교훈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 영혼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교훈은 세상의 선생들의 교훈들과 달랐다. 예수님은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둘 다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인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물질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다른 곳에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고(요 6:27), 사도 바울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했다(고후 4:18).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17).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말씀에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미움과 배척이나 칭찬의 말에 대해 너무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사랑하라, 대접하라, 자비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교훈은 그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세상에는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성경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께서는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도리어 그에게 끝까지 선을 베풀라는 교훈이다. 이 말씀은 물론 폭력이나 살인, 도적질이나 강도질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런 직업이 부당하다거나, 또 악을 행하는 자들과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한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수의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또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정당하다고 본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선과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롬 12:17-21).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주 예수님의 명령이다. 그에게 빚진 우리는 그것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그는 친히 본도 보이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대인 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대접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좋은 것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먼저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공의와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고전 13:5) 남을 배려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빌려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빌려주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하나님과 닮은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셨다. 성도가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가급적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다. 천국에서의 상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27절). 주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의 요점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6-40). 그는 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우리는 믿는 교우들뿐 아니라,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들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31절).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사람을 향해서도 진리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섬겨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귀하게 여겨야 그에게서도 그런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의 보응의 진리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 시대에 동족들 간에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2:25; 레 25:35-37). 신명기 23:19, “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지니 곧 돈의 이식, 식물의 이식, 무릇 이식을 낼 만한 것의 이식을 취하지 말 것이라.” 우리는 믿는 교우들 간에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말고 돈 거래를 안 하는 것이 좋다.

넷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다 햇빛과 비를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 선하시고 온전하신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마태복음 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37-49절, 선을 행하라

[37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비판치 말고 정죄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라도 판단치 말고 정죄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판단하고 책망하였고(갈 2:11),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하여 교훈했다. 특히 이단에 관계하여 우리는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선과 악에 대해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고 이단과 불의를 정죄해야 한다(롬 16:17; 딛 3:10; 요일 4:1; 요이 10; 유 3).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금한 말씀이라고 본다. 우리가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선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위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약 4:11-12).

더욱이, 우리는 부족한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았다. 이 세상에 흠과 부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흠과 부족은 우리 속에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남의 흠과 점을 볼 것이 아니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야 우리도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고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를 받을 것이다.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준다’는 말은 남을 구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받는 생활보다 주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다(엡 5:2). 그러므로 우리도 남에게 주라고 명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또 주께서는 주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풍성한 보상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다. 잠언 11:25도,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했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이 비유는 무지한 인도자가 무지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둘은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바른 지식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남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에게서 좋은 것을 배우고 좋은 영향을 받는 자들은 복되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을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큰 결함을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 남의 작은 결함에 대해 지적하고 고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 남의 부족을 지적하고 권면해야 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그것은 자신에게 큰 결함이 없는 경우에 남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가리킨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행위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사람의 인품은 그의 언행을 보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함과 선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2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교훈을 행하려 해야 한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흙 위에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믿음을 잃고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리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에 대해 판단해야 하지만,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더욱이 우리는 부족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정죄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다 이런 저런 부족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흠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고 도리어 남을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선한 행실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남의 부족과 결함을 지적하는 비평적인 자가 되지 말고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행위를 나타내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행위를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교훈을 행함으로써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자는 흙 위에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자와 같다. 그런 자는 환난의 날에 집이 부서지고 큰 낭패를 당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의 교훈을 행함으로써 그 진실함이 증거되고 또 튼튼한 바위 위에 견고하게 건립된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7절, 죽을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엔티모스)[소중히 여기는](BDAG, NASB)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며 로마 사람이었다. 그가 소중히 여긴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했고 죽을병에 걸린 그를 포기하지 않고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그는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그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으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사람은 사랑하는 일을 위해 돈을 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돈을 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전통본문).21)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또 자신의 심히 부족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이었고,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고 그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으로 인정하는 뜻이 있었다. 그는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자기가 군인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가 순종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칠 수 없다. 병을 지배하고 병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

[9-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토사우텐 피스틴)[이렇게 큰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아팠던]22)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예수께서 세상의 영광을 보고 경탄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백부장의 이 큰 믿음을 보고는 놀라셨다. 더욱이, 이방인인 그가 이렇게 큰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원하시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 아팠던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다.

본문이 증거하는 중심 인물은 백부장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바로 그 주님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병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과연 고치셨던 신적 구주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의 집에 가지도 않으셨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단지 말씀만 하셨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소중히 여기는 종은 그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여졌다.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그의 많은]23)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나인 성은 갈릴리 지방 남부 이스르엘 평원의 작은 마을이다. 가버나움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은 그 둘을 구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예나 오늘날이나 예수님 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그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진리를 구하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따르는 무리이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다. 그 죽은 자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나왔다. 이 장례는 매우 슬프고 불행스런 일이었다. 그 외로운 과부에게 위로와 소망과 의지이었을 외아들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긍휼과 능력을 지닌 예수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일들 중에서 장례식은 큰 일이며 엄숙한 일이다. 이 불행스런 장례식에 사람들은 동정하는 마음으로라도 많이 참여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실 놀라운 기적을 볼 것이며 그 기적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은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 저자인 누가가 예수님을 ‘주’(호 퀴리오스)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행하실 기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권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주님이시다. 주께서는 슬프게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다. 죽음은 사람이 저지른 죄의 형벌로 왔으나,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는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로만 그를 위로할 수는 없다. 그는 그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다. 오직 신적 구주께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그는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 당시의 관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일종의 침대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한다. 주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 관 혹은 침대에 손을 대시자 그것을 멘 자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가 가지신 신적 권위를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그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그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했고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주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 살아난 청년이 ‘말도 하였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살아났음을 증거한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16-17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그 과부의 기쁨과 받은 위로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은 많은 증인들에 의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백부장의 죽을병이 든 종을 고쳐주셨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이런 병  고침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그는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다. 이 사건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특히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줄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고 예수께서 누추한 자신의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겸손히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가 한 마디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을 믿은 큰 믿음을 가진 자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었다. 우리도 이런 경건과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이런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백부장도 자기의 종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고 그 종이 병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예수께 보내었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겨야 한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 베드로전서 3:8,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동정심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심으로써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 되셨다. 그는 죽은 그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장차 주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보장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마지막 날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되셨다. 우리는 사도신경에 진술한 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이나 그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와 슬픔,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고,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셨다. 그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셔서 영광스런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18-35절,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심

[18-20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예수께](전통본문)24)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힘을 들으시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었다(마 4:12).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등을 옥에 갇혀 있는 요한에게 고하였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듣고(마 11:2) 그의 제자들 중 둘을 예수께 보내어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고 하였다. ‘오실 그이’는 메시아를 가리켰음이 확실하다.

세례 요한이 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의심어린 질문을 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주석가들25)은 요한이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려고 한 것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과, 22절에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는 말씀과,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보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요한은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일시적으로 의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21-23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들 외에도 많았다. 예수께서는 또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요한복음 21:25, “예수의[예수님]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으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었다(사 29:18; 35:5-6). 예수께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등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그의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확신을 줄 만한 증거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24-25절]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들판의 갈대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마음에 믿음이 적어 의심하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그 곳으로 나아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었다. 그때에 요한은 확신이 없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에 넘쳤던 인물이었다. 또 그는 외모를 치장하거나 남의 칭찬을 구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검소하게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옥중에서 잠시 연약하여져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난의 현실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26-2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26) 요한보다 큰 이[큰 선지자](전통본문)27)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요 큰 선지자라고 증거하셨다. 요한은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 앞에 보내실 그 사자이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큰 선지자이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했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권을 가진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었다. 마태복음 11:12-13,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비추어 볼 때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신약교회의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신약 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의 성도들보다 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충분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9-35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人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그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부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는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며 부당한 비난이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 그런 부당한 판단과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불평과 비난만 일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지혜는 잠언 8:22-31의 비유처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그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과 평가를 가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오실 그이’이시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했다. 세례 요한도 그 예언의 말씀을 믿고 메시아를 사모했다. 그는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었다(요 1:29, 33).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고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묻게 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증거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하심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소경과 앉은뱅이와 나병환자와 귀머거리 등을 고치신 것을 언급하시며 자신이 오실 그이라는 것을 대답하셨다. 그것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이 그 증거라는 뜻이다. 또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그의 메시아이심의 최고의 확증이었다. 그것들은 예수께서 ‘오실 그이’ 곧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신약성도는 의심하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을 감사하며 성심으로 주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36-50절, 많은 죄를 사함 받은 한 여인

[36-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음식 드시기를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 같다. 남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앉으셨다’는 말은 ‘기대어 누우셨다’는 뜻으로 옛날에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을 가리킨다. 식사 초청을 받을 때에 거절하지 않고 응하는 것도 사랑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죄인인 한 여자’라는 말은 그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가 무슨 죄들을 지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많이 지었고 사람들의 지탄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신 일들과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일 등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신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는 표이었다. 또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행동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의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신적 구주로 믿고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이 광경을 보고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그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하였다.

[40-4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해서도 또 그 바리새인 시몬의 속마음도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지 못하고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다고 하셨다. 사람들의 죄의 크기는 각기 다르다. 모든 죄가 사람으로 지옥 들어가게 할 만하지만, 죄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창 13:13; 요 19:11). 죄들 중에는 무지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레 4:2, 22) 고의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도 있고(민 15:30) 용서받지 못하는 죄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마 12:32; 요일 5:16).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다. 물론 죄의 크기에 따라 용서의 크기도 달랐다. 또 죄 용서의 크기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도 달라질 것이다.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영원한 지옥 불못으로부터의 구원의 값을 그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44-47절]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를 식사 자리에 초청한 시몬과 그 여자를 비교하셨다.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고도 당시의 예절대로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 시몬은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표로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주께서 들어와 앉으셨을 때부터 그의 발에 계속 입맞추었다. 시몬은 흔한 감람유도 예수님께 붓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주의 발에 부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시몬과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자의 행위는 너무 차이가 컸다.

예수께서는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자는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표시이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죄사함의 원인은 아니나 증거는 된다.

[48-50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사함의 선포는 주님의 가장 은혜로운 사역이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또한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선포는 죄인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죄사함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 즉 성화(聖化)의 기초와 원동력이다.

함께 앉은 자들은 속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는 전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5:24). 주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여자가 받은 죄사함의 구원에 대해 증거하셨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여자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그 여자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자신을 낮추도록 했고 하나님과 구주를 극진히 높이며 사랑하게 하였다. 또 죄는 사람에게 슬픔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참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참 평안은 주님께로부터만 온다(마 11:28; 요 14:2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주가 필요치 않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구주께로 나올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구주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은 죄사함이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구주이시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죽으셨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셋째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는 죄사함의 크기에 비례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크고 심각함을 알아야 한다.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며, 탐심도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며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다. 또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영원한 지옥에 던지움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크기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이럴 때 저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자가 될 수 있다.

 

8장: 기적들을 행하심

1-3절, 예수님의 전도 사역과 여자들의 섬김

[1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하였고.

예수께서는 각 성과 촌에 두루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그의 전도 사역은 전도자들의 사역의 본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설교의 중요 주제이었다(마 4:17; 행 1:3).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고 그의 뜻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고 음란하고 부도덕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즉 통치권의 회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3, 5). 그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만 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 그 곳에는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전도 사역을 하셨을 때 열두 제자들이 그와 함께하였다. 제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막 3:14).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고 배워야 했다. 제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행위를 본받는 자이다. 그들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증거할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오늘날 주의 제자들은 성경적 교회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하며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있는 길이다.

[2-3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을 따르며 그와 그 제자들을 섬긴 자들 중에는 귀신 들림과 병들의 고침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이었다. 또 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공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전도 후원자들이었다.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돈을 쓴다. 헌금은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이다(고후 9:13; 8:8). 자신을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사랑하는 자는 즐거이 헌금할 것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빌 4:17-18).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입는 일 등에만 돈을 쓰는 자는 땅의 것만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돈을 쓰는 자는 하나님과 천국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각 성과 촌에 널리 전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세상의 모든 나라의 각 도시와 마을에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의 통치하심이 온 세상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둘째로, 열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였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막 3:14-15).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가 부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었다(사 6:8). 주께서는 오늘날 목사들을 불러 사용하신다.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전도자의 직무는 충성된 자들을 통해 계대된다.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오늘날도 예수님의 전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한다. 또 그들은 전도하기 전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셋째로, 병고침을 받은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질로 섬겼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십일조 제도를 통하여 레위인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또 하나님께서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저축하여 레위인들과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어 배부르게 하기를 원하셨다(신 14:28-29). 예수께서는 주의 작은 종 하나에게 주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자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 10:40-42).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준 선교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했다(빌 4:15-19).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처럼, 우리는 교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신실한 전도자들을 도와야 한다. 이 일은 확실히 천국에 보화를 쌓는 일이다.

 

4-15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8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머거리 외에는 들을 귀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단지 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말의 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지 않다.

[9-10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이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만 허락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선택의 진리를 보인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임을 보인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또 선택의 진리는 우리의 구원이 값싼 것이 아니고 값비싼 것임을 증거한다. 구원의 값은 계산할 수 없이 크다. 영생과 천국의 구원은 돈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주신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만 얻을 수 있다.

[11절]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셨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씨는 신기한 물체이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씨가 땅에 심길 때 그 속에서 싹이 나서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며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말씀이다. 물론, 성경에 증거된 대로,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복음 진리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이 복음, 이 바른 성경 교훈만 생명의 씨이다.

[12절]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마귀가 와서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아서 그들로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그것을 빼앗기는 것이다. 구원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고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이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기분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런 믿음은 뿌리가 없다. 즉 복음 진리에 대한 바르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일시적 믿음은 환난이나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는 잘못된 생각이나 이해의 부족으로 마음이 동요하고 믿음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을 이기지 못한다(마 13:21).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 자만 시험이나 환난을 이길 수 있다.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財利)와 일락(逸樂)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지내는 중 세상의 염려와 돈과 육신적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세상의 염려와 돈 욕심과 육신적 쾌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가시와 같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신앙의 방해물이다. 돈 욕심도 신앙의 큰 방해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육신의 쾌락도 신앙의 방해물이다. 육신의 죄악된 욕망에 이끌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이며 참된 생명에 반대된다. 물론 육신의 즐거움들 중에는 음식이나 운동이나 결혼 등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것도 있으나(전 5:18; 9:9), 우리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 절제 있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 씨가 좋은 땅에 심어진 경우는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으므로(렘 17:9),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을 얻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23; 딛 2:14). 또 인내로 결실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에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믿은 자는 그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과거의 죄악된 행습을 다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으로 날마다 변화를 받으며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맺는 거룩하고 선한 행실은 성도가 구원을 얻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산 믿음은 선한 행위로 증거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씨가 뿌려지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구원 얻지 못한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행하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행하여 영생과 천국의 복을 누리는 자들보다 많다(마 7:13-14).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열매 없는 나무 같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의 문제가 아니고 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의 문제이다. 성경에 계시된 복음 진리, 생명의 진리는 불변적이다. 교회는 오직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은 여러 종류가 있다. 그의 마음이 심히 어둡고 길같이 딱딱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 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확신이 없는 자들도 있다. 그런 자들은 시험이나 환난이 오면 넘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확신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의 염려와 돈 욕심과 쾌락 사랑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다 구원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 자들이다.

셋째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오래 참고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인생의 성공자이다. 물론 좋은 땅은 사람이 만들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요 6:44).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내하며 그 말씀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16-21절, 등불의 비유,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옴

[1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침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등잔걸이]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다(시 119:105). 빛은 어두운 세계를 밝히는 유익을 준다. 밤에 빛이 꼭 필요하듯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무지와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이 어두운 세상에 구원을 준다. 성도는 그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17절] [이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몇몇 사람들을 위하여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보이는 말씀이다. 보배로운 진리를 짓밟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만(마 7:6),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해졌고 가르쳐졌던 것들이다. 요한복음 18:20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회에서 대제사장에게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주신 교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진리를 땅끝까지 널리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가장 큰 임무이다.

[18절]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의 내용과 그 참됨을 이해하고 확신해야 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그 말씀을 행함에 관계된다고 본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 곧 지식과 믿음과 행함이 없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연한 지식만 가져서는 안 되고 바로 알고 믿고 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되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절] 예수[예수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그 동생들’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주교 학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들을 낳지 않았고 여기에 ‘그 동생들’은 그의  사촌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주장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맏아들이라고 증거하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마 13:55; 막 6:3). 복음서들의 제한된 지면들에 그의 사촌 동생들의 이름까지 열거했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런 생각이다.

[20-21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영적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육신의 가족을 잘 보살피고 돌보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딤전 5:8). 그러나 우리는 ‘내 가족’, ‘내 식구’라는 육신적 가족의 한계를 넘어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거대한 가족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구원 얻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큰 가족, 영원한 가족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몇 가지 성격을 교훈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갈 길을 보인다. 그것은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다.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죽음에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에로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고, 만인들을 위해 공개된 내용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모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책이며 교회가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 가르쳐야 할 말씀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자’ 곧 그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의 말씀은 막연한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마 7:21).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적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21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 된다. 그들이 바로 신약교회이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들이다. 그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자들이다. 교회적 교제는 영원한 교제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고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한다.

 

22-25절, 광풍을 잔잔케 하심

[22-23절]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실 때 잠이 드셨다. 그는 잠이 부족하시도록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셨던 것 같다. 또 그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참으로 사람이셨다(요 1:14; 딤전 2:5).

그때에 마침 광풍이 호수에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였다. 광풍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 바람은 때때로 이리 불기도 하고 저리 불기도 하며 때때로 약하게 불기도 하고 강하게 불기도 한다. 또 마귀의 장난으로 광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믿는다면 마귀의 장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의 자연 현상들이나 마귀의 장난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본문에 나타난 한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는데도 광풍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으며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듯이,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 속에도 어려운 일들이 많다. 때로는 큰 광풍 같은 일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생기는 모든 어려운 일들은 언제나 유익을 준다. 고난은 성도들에게 믿음과 겸손함과 거룩함의 유익을 주는 것이다.

[24-25절]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으나 그 이상이셨다. 잠을 주무시는 자는 분명히 사람이시지만,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자는 분명히 사람 이상이시다.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만 바람과 파도를 통제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와 목적이다.

광풍과 파도를 대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주여’라고 번역된 원어(에피스타타)는 ‘선생님이여’라는 말이다(KJV, NASB, NIV).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여하튼 그들은 심히 불안해 선생님을 야단스럽게 불렀다. 예수께서는 깨어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고 믿음 없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환난 중에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다. 우리는 환난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출 14:13-14; 시 62:1).

그러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이긴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셨다. 그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극악한 위기의 상황은 그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평온한 환경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며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시 46:1; 50:1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며 죽음의 위험이 있는 위기 상황도 만난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된 것이며, 우리에게 결국 유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땅에 떨어진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바람과 물결을 명하여 순종케 하신 분은 결코 단지 사람이실 수 없다. 그는 사람으로 세상에 탄생하셨지만, 그 이상이시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이 세상 사는 동안 만나는 시험과 환난의 광풍을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광풍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지 생각하며 그의 구원하는 손길을 기다리며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빌 4:6-7).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눅 11:8; 18:7).

 

26-39절,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26-27절]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가다라인](전통본문)28)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오래](전통본문)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가다라’라는 마을에 한 귀신 들린 자가 있었다. 그 귀신 들린 자의 특징들은, 첫째, 옷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치 않았다. 둘째, 그는 집에 거하지 않았다. 즉 안정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집은 휴식의 장소인데, 그는 그런 안정된 가정의 삶을 저버렸다. 셋째, 그는 무덤 사이에 거했다. 그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자와 같았다.

귀신 들린 것은 정신적 연약과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의 이성이 그의 감정과 의지를 어느 정도 통제한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상당히 절제된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은 그러한 조절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이다. 귀신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영이다. 그것은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거짓말하며 시기 질투하고 남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돈을 사랑하는 영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매우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28-29절] 예수를[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그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 또 그는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에게 간구하였다. 28절뿐 아니라, 31절과 32절에도 그가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들도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구원을 얻지 못할 뿐이다.

그는 힘이 셌고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들었다. 마태복음 8:28은 그가 심히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5:5는 그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고 감정에 따라 행하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그가 그렇게 명령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도 귀신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도 통제하신다. 귀신들은 그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

[30-31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군대’라는 원어(레게온)(전통본문)는 로마 군대의 한 단위를 가리켰다. 그것은 수백 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귀신 들린 사람과 달랐고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 귀신은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 ‘무저갱’(無底坑)이라는 원어(아뷔쏘스 )는 ‘밑바닥이 없는 곳’(Thayer) 곧 지옥을 가리킨다(계 9:1, 11; 11:7; 17:8; 20:1, 3).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이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한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2-36절] 마침 거기 많은 돼지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예수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마침 거기 많은 돼지떼가 산에서 먹고 있었다. 마가복음 5:13은 거기에 ‘거의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귀신들은 그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가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돼지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공의로운 재앙을 통해 악한 자를 징책하시고 사람들에게 세상 재물이 헛됨을 깨우쳐주신다. 사람에게 물질적 큰 손실이 있어도, 물질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이 허무함을 깨닫는 큰 유익도 있다. 실상, 귀신 들린 한 사람의 가치는 그 돼지 2천 마리의 가치보다 더 크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

사람들은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 들렸던 자가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 일에 대해 말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들은 은밀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것들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진실한 증거적 성격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다 믿어야 한다.

[37-39절] 거라사인[가다라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가다라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 속에는 메시아에 대한 갈망,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다. 그러나 귀신 나간 사람의 태도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와 달랐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귀신 들린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했고 힘이 세고 사나웠고 제정신이 아니고 비정상적이었다. 그는 불쌍한 세상과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고 악화되었다. 이것은 다 죄의 결과이다. 죄인들은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둘째로, 귀신들은 자기들이 장차 무저갱의 지옥에 던지울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사탄과 악령들은 지옥에 던지울 존재이다. 장차 악인들이 들어갈 지옥은 일차적으로 사탄과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귀신들은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고, 또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셔서 그들이 그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우리를 위한 신적 구주이시다.

넷째로, 많은 돼지떼가 몰사하였다. 마가복음은 그 수가 약 2천 마리나 된다고 했다. 비록 돼지 약 2천 마리의 손실은 컸지만, 그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불쌍한 사람은 고침을 받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

 

40-56절, 두 가지 기적

[40-42절]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회당장’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던 곳인 회당에서 가장 중한 책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마가복음은 그가 많이 간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자기의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겸손히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많이 간구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간구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리에 둘러싸여 그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43-44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뤼시스 하이마토스)[피의 유출]으로 앓는 중에 [의사들에게 그 가산(家産)을 다 허비하였으되]29)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이다. 그는 열두 해나 병과 싸웠고 병고침을 위해 재산을 다 허비했으나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왔다고 자세히 썼다(막 5:26). 그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심한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오랜 고난을 통해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 대신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며 의지하는 겸비한 심령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를 믿었고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그의 열등감과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 앞에 나올 용기조차 없었다. 그는 그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었다. 마태복음은 그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출혈이 즉시 그친 것이었다. 마가복음은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고 말한다. 12년 동안 누구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그 몸의 출혈이 즉시 멈춘 것이다. 불치의 병이 놀랍게 치료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심을 증거했다.

[45-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전통본문)30)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누가 나를 밀었다 하시나이까?]3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힘을 내라](전통본문),3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다른 기적들과 같이 이 기적 사건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 앞에서 확인되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기적들은 항상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성격 전반이 그러하였다. 그것은 공개적이다. 복음은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이 여자처럼 예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한 자만 그에게 나올 수 있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구원의 이치는 비슷하다. 죄인인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의지하고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얻는다.

[49-53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는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를 깨우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은 잔다고 표현된다.

[54-56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헤 파이스)[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은 주께서 아람어로 “달리다 쿠미”(전통본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의 영(靈)이 돌아와 그 소녀가 곧 일어났다. 사람의 죽음은 그의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 영이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그 죽은 그 열두 살 소녀가 “달리다 쿠미”라는 그의 음성을 듣듯이, 그가 그 말씀을 하시자 마자 그 아이가 살아났다. 그는 즉각적으로 살아났다. 사람들의 생각에 불가능해 보였던 생명의 회복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즉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들이나 살려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 즉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눅 5:32) 또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기 위해(마 20:28) 오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세상의 불행한 일들과 그 원인인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는 한 여인을 고쳐주셨고 회당장의 열두 살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이 일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세상에서, 인류 역사 속에서 신적 구주 예수님 외에는 이런 일을 한 자가 없었다.

둘째로, 이 두 가지 기적 사건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구원의 이치를 증거한다. 모든 불행한 일들의 근본적 원인은 죄요 그 결과는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그러나 열두 해 혈루증 환자와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과 딸의 구원을 얻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롬 3:20-24). 사람은 종교적 고행이나 도덕적 선행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엡 2:8-9).

셋째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많이 간구했고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들은 다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와 간구하였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믿었고 겸손히 그에게 간구하였고, 문제의 해결을 얻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이 문제의 해결을 얻는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에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자는 문제의 해결을 얻는다.

 

9장: 제자의 길

1-6절, 열두 제자들을 보내심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그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은 단지 사람의 말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표로 확증됨이 필요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고전 4:20). 사도들에게 주신 병고침의 능력은 그들의 복음 사역에 권위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신임장이었다.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열두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그것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주를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중생한 믿음 없이도 가능한 것 같다. 마태복음 7:22-23에 보면, 주께서는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말할 것이나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원문)고 밝히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보내시며.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보내셨다. 그는 사도들에게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과 직무를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민주국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서 국민에 의해 다스려지며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이다. 이런 개념에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존적 존재인 것 같은 생각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존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케 되었고 부모가 낳음으로 출생되었고 또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매우 의존적인 존재이다. 여기에 민주국가의 관념 속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사람은 실상 스스로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는 하나님께서 왕(바실류스)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神政) 국가이다. 그 나라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의 백성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섭리하신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복종함으로써 그 나라에 속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고 음란한 자들이 되었다. 이 세상은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이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의 뜻을 행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3절]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가방]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가방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열거하셨다. 첫째는 지팡이이다. ‘지팡이’라는 원어(랍도스 )는 길 갈 때 의지하는 지팡이와 자기의 몸을 방어하는 데 쓰는 호신용 막대기를 포함하는 것 같다. 둘째는 가방이다. 그것은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가죽 가방이나 지갑을 가리킨다. 셋째는 양식이며, 넷째는 돈이며, 다섯째는 두 벌 옷이다. 그러나 그가 후에 전대나 주머니 등을 허용하신 것을 보면(눅 22:35-36), 전도자가 평생 그런 것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전도자가 세상 염려나 세상의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4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예수께서는 또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만족하며 활동해야지 더 나은 집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 환경적 조건을 찾아다니는 자는 전도자답지 못하다. 세상에서도 직장인이 가능하면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대우가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다니면 그의 인격에 흠이 될 수 있다. 세상일도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일반적으로 좋다. 전도자는 더더욱 그렇다. 세상의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나선 자가 세상의 조건에 마음을 쓴다면 중심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5-6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나가서 각 마을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 전도자는 그런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여러 곳에 두루 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전도자는 그를 영접지 않는 곳을 떠날 때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야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복이 그들과 상관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그에게 순종하는 나라이다. 그 나라에 사람의 구원과 영생과 행복이 있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땅끝 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고 제자들이 행한 일이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병고침의 표를 주셨다. 사도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도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을 통해 확증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온 마음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 모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전도 이외의 일들, 예컨대 가난한 자들과 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복음화라는 큰 사명을 위해 세상의 일들을 작게 여겨야 했다. 교회는 세상 일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먹을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실 것이며 성도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했고(딤전 6:7-8), 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딤후 2:4).

 

7-17절, 헤롯의 당황함, 5병2어(五餠二魚)의 기적

[7-9절] 분봉왕 헤롯이 [그에 의해 이루어진](전통본문)33)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는 편안할 수 없다.

[10-11절]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벳새다라고 불리는 성에 속한 한 한적한 곳으로](전통본문)34) 떠나가셨으나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신 것은 그들에게 쉴 시간을 주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따라왔다. 그들의 열심은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부흥을 주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냉냉하고 거칠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무디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고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을 고치시셨다. 그에게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 세상 나라는 죄악되며 장차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하며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병들도 고쳐주셨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도 필요하다. 천국에는 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영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된 나라, 그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복된 소망이다.

[12-17절] 날이 저물어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자가 한 [약] 5천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50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이것은 갈릴리 호수 부근 벳새다 들판에서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요한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요 6:9). 남자가 한 5천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적은 양의 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떼를 지어 한 50명씩 앉히라.” 제자들이 무리를 50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혔다. 그러므로 무리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파악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저녁에 거기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나 거두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이 남자만 약 5천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1만명 이상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그의 신적 인격과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였다. 예수님,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시고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사람이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또 그가 사도들에게 그리고 후에는 신약교회에 주신 사명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 얻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택함 받은 자들을 다 구원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20:30-31의 말씀대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셋째로, 떡 기적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심도 증거한다. 요한복음 6장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5, 51, 53-55).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사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2-33).

 

18-4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8-20절] 예수께서 따로[홀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 그때 그는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고 대답을 들으신 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즉 신성(神性)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가리킨다.

[21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또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건져내어 주실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아의 일차적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메시아 왕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가질 것이지만, 그는 우선 정치와 경제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 문제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다. 그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구주이셔야 했다. 사람들이 이런 메시아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22절]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인자’(人子)라는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의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사람이신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그는 과연 자신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주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래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허무하고 죄악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한다.

[24-25절]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구원할 것임이니라](원문). [이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유익하겠는가 함이라](원문).

‘나 때문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목숨만을 위해 산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육신의 목숨만을 위해 살려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이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들의 삶의 과정이다.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는 영생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자기의 영혼이 지옥에 던지운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26-27절]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人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부끄러워할 것임이니라](원문).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던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인정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서 제외하실 것이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는 말은 다음에 언급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신 사건이라고 본다.

[28-31절]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예수님과]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은 그의 인격의 성결함과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32-36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선생님이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35)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예수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여러 해 후에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했다(벧후 1:16-18).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이었다.

[37-39절]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불행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마태복음은 그 아이의 병을 간질이라고 말했다. 이 병은 악령의 활동이었다. 악령은 그 아이 속에서 활동하며 소리를 치며 부르짖고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그 몸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다. 마태복음은 그가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졌다고 말한다(마 17:15).

[40-41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제자들은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그들은 병고침의 권세를 받았지만 이 아이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적기 때문에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7:20).

[42-45절]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人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다시 한번 나타내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었고 이 세상에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한 대답이며 바른 신앙고백이었고 또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친히 증거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귀신 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친히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가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그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풍성한 증거이었다(요 20:30-31).

둘째로, 예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다(22절). 그것은 주께서 여러 번 예언하신 바이었다. 그는 친히 예언하신 대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특히 그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본받아 따라가야 한다. 또 이것은 주께서 친히 교훈하신 바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그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바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46-62절, 제자의 길

[46-48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큰 자임이니라].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 그런 경쟁심은 사람의 뿌리깊은 죄악성인 교만과 명예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며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다툰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려고 종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너무 다르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많은 말씀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제자들 속에는 연약성이 그대로 있고 아직 주님을 본받는 자 되기에 부족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그들의 마음의 욕심과 복잡함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아신다(요 2:24). 그는 제자들의 문제점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것을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임이니라(원문)”고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에피)’라는 원어는 ‘내 이름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든지, 혹은 그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작은 일 하나를 즐거이 행하는 그 사람이 큰 자이다. 모든 종류의 명예심과 욕심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자는 큰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49-50절]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에피스타타)[선생님이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이는] 너희를[우리를](전통사본)36)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우리를](전통사본)37) 위하는 자니라[자임이니라] 하시니라.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었던(막 3:17) 요한은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 사도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이가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으므로 그런 일 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이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관용의 정신이 있다. 물론 관용에는 한계선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라는 한계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향해 ‘우리 교회에만 속해야 한다’는 좁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2:30에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과 반대되지 않고 보충적이라고 본다. 그 말씀은 어떤 사람이 생각과 입장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같이하지 않으면 그는 그들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본다.

[51-53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예수님을]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잘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죽음의 길을 향해 즐거이 나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하셨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굳게 결심하며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을 위해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절반쯤의 이방인으로 여기며 낮추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육신적 혈통이나 종교 생활은 순수하지 못하고 혼합되어 있었다.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엘리야도 했듯이] (전통본문)38)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기를 잡으러 보낸 50명의 사람들을 저주하므로 두 번이나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의 일을 기억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멸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주님께 물은 것이다.

[55-56절]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도다. 이는 인자(人子)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는 말이 있다.39)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44).

[57-58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주여](전통본문)40)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는 말은 귀한 결심과 고백이다. 그것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이다. 이것은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격려하는 대신 매우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여우나 새도 집이 있지만, 자신은 안정된 집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주께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으셨다. 그는 전도 활동의 마지막 때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유월절 식사도 어떤 이의 다락방에서 하셨고 그 밤의 휴식도 감람산에서 하셨다. 그의 전도 사역에는 물질적 안정이 없었다. 주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의 길을 따를 각오를 해야 한다.

[59-60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주여](전통본문)41)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두 번째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고 주를 따르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으나, 그는 먼저 가서 그의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주께 구했다. 그의 요청은, 그의 부친이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보살피겠다는 의미이든지 혹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면 7일 애곡이나 1년간의 애도 등의 장례식 절차들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두 번째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 곧 장례를 행해야 할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부모를 공경하며 그들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잘 행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단지, 주의 말씀은 더 높은 명령,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에게 명한 말씀과 비슷하다(레 21:10-11). 대제사장은 부모로 인해서도 더러워지게 말고 성소에서 나오지도 말아야 했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전도의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일이 세상 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의 기본적 일 때문에라도 방해받지 않고 지장되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61-62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또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그러나 ‘먼저’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주께 요청하였다. 사람이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우선순위의 혼란이 문제이었다.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밭 가는 자는 앞을 바라보며 밭을 갈아야 할 것이다. 만일 밭 가는 자가 밭을 갈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비뚤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었다(창 19:26). 복음의 일꾼들이 세상의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천국의 직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제자는 겸손해야 한다. 그는 경쟁심이나 명예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우리는 주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배우고 품고 주를 따라야 한다.

둘째로, 제자는 관용해야 한다. 제자는 편협한 마음과 보복심을 버려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전통본문).

셋째로, 제자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는 고난과 핍박, 또한 물질적 불안정과 가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이미 말씀하셨다(눅 9: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고난의 길을 가셨다. 주의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넷째로, 제자는 가족 관계를 초월해야 한다. 결혼한 사람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세상의 그 어떠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모든 의무들 중에서 가장 큰 의무이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2:3-4는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교훈하였다.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24절, 전도자와 전도

[1-2절] 이 후에 주께서 달리 70인42)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주께서 전도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그들이 전하는 바를 확증하고 서로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도를 추수에 비유하셨다. 씨는 이미 뿌려졌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졌다. 씨가 심겨지고 자라서 추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 즉 구원 얻을 영혼들이 많으나 일꾼이 적으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 즉 전도자들을 많이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그는 천국 백성의 씨를 뿌리게 하셨고 그것을 자라게 하셨고 또 그것을 추수하게 하신다. 세상 종말이 가까운 때에는 전도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3-12절]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주머니[가방]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전도자들은 이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어린양같이 위험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분명하였다.

첫째로, 전도자들은 가야 했다. 주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세계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전도자들은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마 28:19; 막 16:15).

둘째로, 전도자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했다. 이 세상에는 이리 같은 악한 자들과 핍박자들이 많으므로, 그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셋째로, 전도자들은 물질적 염려를 버려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부르시고 보내시는 전도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실 것이다.

넷째로, 전도자들은 자기의 임무만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다른 일에 관여하지 말고 자기에게 부여된 전도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다섯째로, 전도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기원해야 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기원할지라도, 하나님의 평안은 평안을 받을 만한 자들에게만 임한다.

여섯째로, 전도자들은 한 집에 유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아야 했다. 전도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환경과 조건에 대해 초월하는 태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일곱째로, 전도자들은 어떤 동네에 가든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전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죄인들의 구원 문제이며 구원 얻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영생의 문제이다. 신약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그러나 전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접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거절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그것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때,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다.

[13-15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기적 체험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이다. 심판의 날에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가버나움 사람들도 천국에 갈 것같이 생각했으나,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회개치 않는 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자는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요,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주님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17-18절] 70인43)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많은 사람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했던 것 같고 심지어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하늘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쫓겨났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그 사자들이 하늘에서 내어쫓겼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탄과 악령들을 파하고 지옥갈 죄인들을 구원하는 사역이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죄인들은 전도를 통해 회개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와 구원 얻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간다.

[19-20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주노니]44)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은 그가 주시는 권세가 현재에 효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뱀들과 전갈들을 밟으며 원수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사탄과 악령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에서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었다. 과연 주 예수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며 이제 사탄과 악령들을 제어할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주셨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는 말씀은 그의 제자들의 구원과 영생의 보장을 의미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일은 귀신들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쁘고 복된 일이다.

[21절]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 얻고 나아가 전도하며 영혼들을 구원한 사실을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구원은 우리 모두의 기쁨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자이시며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물론, 사람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당시에 유대의 나이든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어린아이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구원의 지식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주께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거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신 말씀이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구주로 보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에 달렸다. 그가 소원하여 그 심령에 깨달음을 주시는 자는 다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만 제시하고 구원의 결정권을 사람에게 맡겨두신 것이라면, 그를 구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23-24절]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은밀히, 따로]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들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고 그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복되다.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왕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하던 그가 오신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이며 영광의 천국에 들어감이다. 그것은 참으로 복 중의 복, 곧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며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가 필요하고 설교자가 필요하다. 신실한 목사들과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많은 전도자들을 주시기를 위해 또 하나님께서 주신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악한 세상은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을 것이며 완고한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이 그러했으나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신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을 귀히 여기며 그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셋째로, 구원은 참으로 복되다. 그것은 심지어 귀신들을 제어하는 것이나 기적들을 행하고 체험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복되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즉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얻는 것과 의롭다 하심 얻는 것이며, 그 결과인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복된 구원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5-42절, 이웃 사랑과 경건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예수님을]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한 율법사의 질문은 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사람 속에는 영원한 삶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신 마음이다(전 3:11).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감할수록 더욱 영원한 삶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26-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율법사는 율법의 내용을 두 가지로 바르게 잘 요약했다. 율법의 핵심적 두 가지 내용은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에 나와 있고, 과연 그 두 가지 내용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십계명은 결국 그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요약이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한 하나님이시며 그에게는 사상적, 교훈적 일치가 있으시다.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행하면 그것이 그에게 의(義)와 생명이 된다는 것은 성경의 한 기본 진리이다(신 5:32-33).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은 본성이 심히 부패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죄악됨을 깨닫는다(롬 3:20).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다. 사람은 율법을 행하려고 할 때 자신의 죄악됨과 무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들과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다(롬 4:15).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 안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 제도는 죄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죄씻음 받을 것을 암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와 영생을 얻는다.

[29-32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마을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나 되지만 여리고는 해면보다 390미터나 낮은 지역이라고 한다.45)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험한 길이었다. 강도들은 한 사람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갔다. 그때 우연히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 자기도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자기 일이 바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그를 피해 지나갔다. 한 레위인도 우연히 그 곳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그도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지만 그 죽게 된 자를 돌보고 살려주려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였다.

[33-35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추가적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반쯤 이방인으로 여겨서 상종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사랑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그의 상처에 부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소독하고 부드럽게 하는 응급조치의 방법이었다. 그는 그의 상처를 싸매고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또 그는 이튿날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나 되는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돌보아 주기를 요청했고 비용이 더 들면 그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 어려움 당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했고 그를 위하여 자기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아끼지 않았다.

[36-37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주님의 질문은 이상하게 보인다. 주께서 “네 이웃은 강도 만난 자니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라고 물으셨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 사마리아인이라고 율법사는 대답하였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을 교훈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선행을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언급되는 그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우리 자신 곧 온 인류이며, 그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과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 혹은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배척하였다(요 8:48). 그러나 그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인류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참 이웃 사랑을 실천하셨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우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가진 이웃들을 돌보아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15:7-11). 구제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요(잠 19:17) 의인의 삶이며(잠 21:26) 복된 삶이다(잠 11:24-25; 28:27). 또 구제는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일이다(눅 12:33).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생관을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38-39절]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가 살았던 마을은 베다니이었다(요 11:1). 그 집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아마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고 음식으로 대접하려 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 한 것은 마르다의 믿음을 나타낸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서 그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요 11:24),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자이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동생 마리아는 언니보다 더 믿음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주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였고, 요한복음에 보면, 아마 얼마 후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가량 되는 지극히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40-42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한가지가 필요하니라](전통본문).46)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식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지만, 여자들이 부엌에서 음식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바쁘고 힘든 일이며 마음 쓰이는 일이다. 마르다의 불평스런 말은 이해할 만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은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이런 외적인 봉사의 일들을 선한 것으로 장려한다(롬 12:13).

그러나 주께서 더 크게 여기신 한가지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첫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요 3:16; 6:39, 40),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다(딤후 3:15). 둘째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우리의 지식과 인격을 선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영의 양식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계명 순종의 의는 영생의 길이다. 영생의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주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대답하셨다. 사람이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0-22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님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둘째로, 그러나 계명 순종의 행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주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가서 너도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멸망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셨다. 그는 죄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다. 우리는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그를 본받아 우리 주위에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도 만난 자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해야 한다. 전도는 가장 큰 선행이다. 또 우리는 필요할 때 구제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한가지 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가리켰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와 성경적 설교 듣기를 중시해야 한다. 

 

11장: 기도를 가르쳐주심

1-13절, 기도를 가르쳐주심

[1-2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기를 힘쓰셨고 또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그가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 내용의 모범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그 다음 우리 자신의 것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며 또 우리가 기도해야 할 요긴한 것들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 계신 우리](전통본문)47) 아버지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 세계를 초월하여 하늘에 계신다. 또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낳고 보호하고 의식주의 문제를 책임지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창조자와 보호자와 공급자이시다. 우리의 천부(天父)께서는 영적인 것들뿐 아니라, 의식주에 관한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마 6:32).

[아버지의](원문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이름을 더럽히고 욕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치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이[나라가] 임하옵시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이다. 소요리문답은 이것을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나라는 전도를 통해 영혼들의 거듭남으로 시작된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단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복음 전파의 일, 그것을 통해 영혼이 구원 얻고 참된 교회들이 설립되는 일을 가리킨다. 영광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나라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몸의 부활과 만유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것은 의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나라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48)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듯이, 땅 위에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하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다(엡 2:8). 그것은 개인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 믿는 자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롬 6:22).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셋째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런 몸이 되고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롬 8:29-30; 계 21-22장).

이렇게 구원 얻은 자들이 모인 것이 교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참 교회들이 처처에 세워져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참된 교회는 말세의 징조들인 배교(背敎)와 타협하지 않고 그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 교회들은 모든 인본적, 세속적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전심으로 믿고 따를 때 순결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성경의 모든 교훈을 순종함으로써 점점 더 거룩해지고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3-4절]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네 번째 내용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다. 사람이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활기를 얻지만, 주께서는 특히 육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람은 영육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육의 양식도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또 이 내용은 일용할 양식 외에 우리의 모든 육신적, 가정적, 사회적 일들도 포함된다고 본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고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해물이다. 범죄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우리가 범하는 실수와 죄는 여전히 죄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근심케 하며 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사함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여전히 회개에 대해 말한다(고후 7:10; 계 2:5; 3:19). 그러나 주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받기를 원하는 대로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49) 하라.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여섯 번째 내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우리의 큰 문제는 육신적, 경제적 문제가 아니고 죄의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죄사함도 중요하지만,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5-8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빌려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아나이데이아)[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그의 필요한 만큼] 주리라.

주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밤중에 무엇을 빌려달라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만, 그 사람이 친구의 청을 들어준 것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끈질김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몇 번 아뢰다가 중단하지 말고 끈질기게 조르듯이 강청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또 그에게는 밤중같이 불편하여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기 힘든 때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실 것이며, 특히 끈질긴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끈질긴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끈질긴 기도를 통해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되고 겸손해진다. 또 우리는 끈질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굳세게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익을 주시려고 우리의 기도를 금방 들어주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끈질긴 기도를 올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시때때로 간절한 끈질긴 기도를 올려야 한다.

[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것임이니라].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기도하면 응답을 얻는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반복적이고 점점 강해지는 뜻을 가진 이 말씀은 끈질긴 기도를 묘사한다. 또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이라는 말씀은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가, 두드리는 이에게’라는 표현은 기도하는 자가 응답을 받는 것이며 그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기도는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증거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굳게 믿는 자는 힘있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11-13절]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전통본문)50)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주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사람의 예를 사용하신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자가 없고 계란을 달라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없다. 악한 사람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구하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들을 주시겠는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 중에 귀한 복이 성령이심을 증거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끄시는 거룩한 영이시며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 또 생명의 활기와 힘, 또 위로와 기쁨을 주신다. 예수님 믿는 신약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고(롬 8:9),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늘 구하며 느끼며 그의 위로와 힘을 받으며 살아가면 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기도의 중요한 내용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의 나라를 위해, 또 그의 뜻을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영혼들이 구원 얻고 참된 교회들이 세워지고 구원 얻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또 그는 우리가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죄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주로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주께서는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교훈하셨다. 우리는 기도할 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또 그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강조하여 교훈하셨다. 끈질긴 기도는 믿음의 바른 기도이다. 우리는 조금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고 더욱 힘써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용대로, 즉 필요한 대로 주실 것이며, 좋은 것을 주실 것이며, 특히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님을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얻는 가장 큰 복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다 해결된 것과 같다.

 

14-36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절]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귀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 곧 악한 영이다.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벙어리 되게 하였다. 모든 질병이 다 그렇지는 않다고 보지만, 어떤 질병들은 정신적 요인으로 발생한다. 그런 경우 그 병은 자신의 영의 결함 때문이든지, 귀신의 영의 활동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사건처럼, 귀신은 어떤 사람의 뇌신경에 나쁜 영향을 줌으로 그로 하여금 언어 기능이 마비된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벙어리 귀신을 내쫓아 주심으로 그 벙어리는 말하게 되었다. 그것은 심리 치료 방법이나 반복적 언어 훈련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된 것이었다. 이런 유의 병의 치료는 병든 영의 치료나 악한 귀신을 내쫓음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께서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것은 그가 천사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영계(靈界)와 물질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5-16절]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은 예수님의 기적이 놀라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를 비난했다. ‘바알세불’은 ‘더러운 것[우상들]의 주’라는 뜻이라고 한다.51)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악한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고 그를 ‘귀신들의 왕’이라고 비난하다니 사람은 참으로 무지하고 악하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다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기적이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계기가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인할 만한 기적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미 믿을 만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 이제도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는 표적을 보이셨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신기한 일들을 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믿음의 근거를 구한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호기심을 위한 요청이라고 보여진다. 참으로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기적들을 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로 충분하다.

[17-19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단지 그들의 말에 대해 대답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주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고 말씀하시며 사탄과 악령들이 서로 다투면 어떻게 그 나라가 서겠는가라고 반문하셨다. 또 주께서는, 만일 내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렇게 하는가라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행했었다(눅 9:49). 유대인들은 그런 자들에 대해 예수께 했던 비난과 같은 비난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그 아들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0-22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의 행위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한 것임을 증거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어떤 이들의 잘못된 말들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나타낸다고 증거하셨다. 이스라엘 사회는 영적으로 어두워진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세력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힘 있는 천사들이다.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자기 집과 같은 사회를 지킬 때는 자기들의 소유물들이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강한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이기실 때 그들의 무장을 빼앗으시고 그들의 소유물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23-26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흩어지게 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저 악한 자들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그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실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정말 위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그와 함께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혼들을 모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구원하여 모으려는 사람들을 흐트러뜨리는 자들에 불과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방해자요 교회를 흩어지게 하는 사람들이다.

둘째로, 그들이 만일 그를 참으로 영접지 않는다면 그들의 마지막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사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과 악령들이 일시적으로 내쫓김을 받았지만, 만일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하고 순종치 않으면 사탄과 악령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들어와 활동하게 되어 그 마지막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다. 복음을 듣고 그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를 진심으로 영접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의 마지막 형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27-28절]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과의 혈육적 관계를 자랑하며 뽐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혈육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의 혈육관계보다 더 복되다.

[29-30절]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人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 당시의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다. 그들이 예수께 표적을 구하지만 진심으로 믿으려는 동기에서가 아니고 단지 호기심 때문이라고 보인다. 주 예수께서 많은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들을 구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신 후에 제3일에 부활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큰 표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최종적으로 확증할 것이다.

[31-32절]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주께서는 자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신 자이며 또 요나보다 더 크신 자임을 증거하셨다. 그것은 인간적 교만이나 자랑의 말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며 사실 그대로이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요나보다 더 크신 자이시다. 그러나 솔로몬 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지만, 이 세대는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으니 얼마나 악한 것인가!

[33-3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그러므로](전통사본) 네 눈이 성하면[좋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마음의 눈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내면적 지식과 사상과 깨달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마음의 등불과 같다.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과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아는 지식이다. 이것이 성경의 바른 지식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은 세상의 현실을 보인다. 귀신은 더럽고 악한 영이며 세상을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불행한 세상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이 세상은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온 자처럼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하다.

둘째로, 벙어리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요나의 표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최종적인 확증이다. 그는 솔로몬보다 크시며 요나보다 크시다. 만일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자요 속이는 자이었겠지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지식의 빛을 얻었다(눅 10:22; 고후 4:6).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믿으며 그와 함께하는 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또 성경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대로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죄를 버리고 예수님 믿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7-54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심

[37-38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우선]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음식을 들기 전에 손을 씻는 것52)은 당시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 주께서 그런 관습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람의 관습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것들만 권위가 있고 성경에 교훈하시지 않은 관습들을 우리가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39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하르파게)[‘약탈’(Thayer, KJV, NASB), ‘탐욕’ (BDAG, NIV)]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께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것을 교훈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삶을 말하면서 내면적 성결을 중시하지 않고 외형적 성결만 강조했다.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남의 것을 빼앗는 욕심과 악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문제이었다. 외적인 불결은 몸에만 해롭지만, 마음의 불결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며 자기 자신을 멸망시킨다. 참된 경건은 내면적인 성결로 나타난다.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고 착한 것이 중요하다.

[40-41절]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타 에논타)[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 (KJV)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주께서는 사람이 내면적 거룩함이 없이 외적 거룩함만 중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영육의 존재이다. 남에게 보이는 사람의 외형적 부분은 육체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적 부분은 영이다. 사람의 겉이 아무리 아름답고 단정해 보여도 그의 영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무가치한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의 내면적 불결을 지적하신 것이다.

주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오직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에 물질에 대한 탐욕이 가득해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줄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탐욕의 죄를 회개하고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해야 한다.

구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다. 물론 규모 없이 살거나 절제 없이 살아서 가난해진 자들 또는 근면하지 않고 게을러서 가난해진 자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규모 있고 절제 있게 살고 근면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교훈하신 바이다(신 15:7-11). 그러므로 구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시가 된다. 옛날 멸망을 당하였던 소돔 성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했으나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줄 몰랐고 그것이 그들이 멸망한 중요한 죄악의 내용들 중 하나이었다(겔 16:49). 사람은 탐심을 버려야 남을 구제할 수 있다.

[42-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전통사본은 생략함)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실천하였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서 성경에 가르치신 헌금의 주요 원리이다(레 27:30-33). 그것은 물질의 복이 약속된 규례이다(말 3:8-12). 십일조는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물질의 소득이 다 하나님의 복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표시이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실천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십일조 같은 종교적 규례보다 내면적 도덕성, 즉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교훈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시며 명하시는 사랑’을 다 가리킬 수 있다. 마태복음 23:23에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 자비)과 신(信, 신실함)”이라고 말했다. 종교적 규례와 내면적 도덕성은 둘 다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도덕성이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규례는 중시하며 지켰으나 내면적 도덕성을 버린 것은 큰 죄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명예심과 교만을 나타낸다. 이것도 역시 큰 죄이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덕이다.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11-12). 우리는 교만과 명예심을 버려야 한다.

[44절] 화 있을진저 너희여[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53)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한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지만, 그 속에는 부패되고 더러운 죄성이 가득한 위선적 인격을 표현한 말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보기에 경건하고 단정하였으나 속에 탐욕과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위선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내면적 성결과 단장이다. 디모데전서 2:9-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단정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 -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45-46절]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말로서 율법학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지기 어려운 짐들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혀 행위의 모범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삶을 원하신다.

[47-48절]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 한 것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그들의 선조들의 삶과 동일하다. 그것은 큰 위선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단지 이전 시대의 선지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것보다 그들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본받는 것이다.

[49-51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었다.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뜰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대하 24:20-21)의 피까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의인과 선지자들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 세대가 참된 의인이시요 선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악은 인류 역사와 구약 역사의 모든 죄악들 중에 가장 큰 죄악이다.

[52절]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이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사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지식의 열쇠를 오용하였다. 그들의 지식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지식이었다. 행함 없는 지식은 위선자들을 만들어 내며 종교를 부패시킬 뿐이다. 또 그런 위선자들은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길을 오히려 방해한다.

[53-54절] 거기서 나오실 때에[그들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실 때](전통본문)5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를 비난하기 위해](전통본문)55)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에네드류오 )[숨어 기다리더라, 올무에 걸리게 하더라].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서 흠을 잡기 위하여 그에게 맹렬히 달라붙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었으나 예수께서는 그런 관습보다 성경에 교훈된 바를 진실히 실천해야 함을 교훈하셨다. 주께서는 우리가 겉만 깨끗하게 하지 말고 우리의 속사람을 깨끗케 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외모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려 하지 말고, 우리 속에 악하고 더러운 탐욕, 악독, 명예심, 음란, 교만 등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자, 즉 내면적 단장을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특히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탐욕에는 만족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이 지나가는 헛된 세상이고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라는 것을 알고 천국을 소망하고 거기에 가치를 둘 때, 우리는 물질적 탐욕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며 절제하며 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우리 주위의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며 살 수 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교훈하셨다(마 6:19-20).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된 규레로 주신 십일조 생활도 실천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덕인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소득의 주인이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물질의 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말라기 3:10,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러나 우리는 이것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덕인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신자에게는 종교적 규례도 필요하지만, 덕이 더 중요하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 환난 중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고(1:27) 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2:17, 26). 참된 복음 지식과 믿음은 실천을 수반한다.

 

12장: 절대적 신앙

1-12절,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를 부정하고 무시한다든지,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미움과 음란으로 가득한 것이 외식이다. 외식은 일종의 거짓과 속임이다. 외식은 ‘누룩’처럼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교회를 형식적이게, 생명력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식과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짓과 외식의 악을 미워하신다(시 5:4-6; 마 23:33).

[2-3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주께서는 제자들이 그에게 배운 진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파하라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 있으셨으나(마 10:26-27),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감추인 악들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감추인 악들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은밀한 탐심과 미움과 음란 등은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세상에 은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추인 악들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몸의 죽음으로 사람의 생명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 단지 그것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는 심판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무엇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후 그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지옥은 불못이다. 지옥 교리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마 10:28; 막 9:43-49). 요한계시록 21:8도 지옥 불못을 분명히 증거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시는 공의로운 형벌이다. 죄인들은 이 진리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6-7절]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앗사리온은 데나리온 은전의 16분의 1의 값인 동전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기도 하고 또 잡혀 죽기도 한다. 사람은 참새보다 귀하다. 사람은 머리털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는 우리를 아시고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핍박이나 불안한 미래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

[8-9절]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人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인정하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하는 공개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개적 신앙고백을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9-10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다.

[10절]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인성(人性)에 가리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을 한 사람으로 알고 거역한다면 그는 사하심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이 때때로 드러나고 그의 하신 일이 명백히 성령으로 된 것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그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보고도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매우 완악한 자이며 구원의 가망이 없는 자일 것이다.

[11-12절]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政事)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께서]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초대 교회 시대는 예수님 믿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 시대와 같았고 공산 치하의 때와 같았다. 믿는 이들은 유대교 회당들에서도 심문과 핍박을 받고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예견하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또 무엇을 변명하며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그때에 마땅히 할 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심문들을 통해 유대의 무지하고 외식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나 세상의 무지하고 부도덕한 위정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외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너무 의식하거나 두려워할 때 외식하기 쉽다. 속에는 믿음이 없고 불의와 악함, 거짓이 있으면서, 겉으로는 믿음 있는 척하며 의롭고 정당하고 선한 척하며 진실한 척하는 것이 외식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이며 속임이다. 외식은 누룩과 같아서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교회 안에 외식자들이 있으면 교회는 급속히 부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와 악함과 거짓과 외식을 미워하신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베드로전서 2:1-2,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외식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은 우리 몸만 죽일 수 있지 우리 영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죽이신 후에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치 않으면 주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치 않으실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배당에 나올 때 성경책을 들고 오며, 음식점에서 식사 때에 기도하며, 전철을 타고 다닐 때나 직장에서 쉴 때 성경책을 읽으며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와 온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13-21절, 탐심을 물리치라

[13-14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주님께 요청하기를 그의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자기와 나누게 해달라고 했다. 그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다 가지려 하였던 것 같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은 비록 장자가 동생보다 두 배를 얻지만(신 21:17) 동생도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다. 즉 동생은 부모의 유산의 3분의 1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은 그 유산을 다 가지려 한 것 같으니, 그것은 잘못이며 형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동생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물건 나누는 자’라는 원어(메리스테스)는 ‘중재자, 조정자’라는 뜻이다(BDAG). 예수께서는 그런 일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그 형이 유산을 정당하게 분배했는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을 위해 지금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왔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또 그는 제자들에게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교회의 사명은 주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그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 구원의 전도의 일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그의 제자들은 주 예수께서 명하신 전도에 힘썼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교훈했다(딤후 4:2). 그러므로 교회는 세속적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영혼 구원의 전도의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교회 밖의 고아들이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 일이나 사회 정의를 위한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들은 교회가 직접 관여하거나 운영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일반 학교나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양노원 등을 만들어 경영하든지 정당을 세우든지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국가나 사회 단체들이나 그런 일에 사명을 느끼는 그리스도인 개인들이 할 일이다. 교회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과 전도자들이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주의하고 경계하라](전통본문).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형은 부모의 유산을 혼자 다 독차지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생도 탐심을 주의해야 했다. 그도 물질을 더 가지려는 탐심을 품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탐심을 주의해야 한다. 부자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탐심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탐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제10계명에서 “탐내지 말라”고 명하셨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돈을 크게 여기는 마음이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싹이 나오나 세상 염려와 돈에 대한 생각과 육신의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8:14).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했다(골 3:5-6). 또 그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물질적 부요는 큰 시험거리이다. 사람은 부요할 때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쾌락에 빠지기 쉽고 외도(外道)하기 쉽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牛羊)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경계하며 교훈하였다(신 8:12-14).

그러므로 성도는 부요함을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잠언 30:7-9는 지혜자의 교훈을 기록하기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6-8).

[16-19절]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예수께서는 물질적 부요가 헛됨을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 부자는 그가 한 곡식 추수와 얻은 풍성한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비를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풍년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의 관심과 생각은 풍성한 소득과 그것을 즐기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20-21절] 하나님은[께서]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다. 그 부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다 어리석은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면서 그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도 알지 못한다. 그 부자는 자신의 물질적 부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 자신의 건강과 생명과 행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물질적 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의 영혼을 그 날 밤에 불러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언제든지 불러가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가 그 날 밤 그 영혼을 불러가시면, 그의 예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가 죽고나면 그의 쌓아놓을 많은 곡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며 다른 누군가가 누리게 될 것이다. 그의 생명은 그의 소유의 넉넉함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물질적 여유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유익할 뿐이다. 돈은 그의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사람은 누구나 가야 한다.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모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자들은 바로 이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란 하나님을 확신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요셉 등이 그러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 오직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혼 구원의 복음과 하나님의 바른 말씀만 전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적인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둘째로, 우리는 탐심을 주의해야 한다. 탐심은 제10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그것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죄악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장애물이다. 우리는 부하려는 마음과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지 않은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되며 적은 소득이라도 정당하게 얻은 것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자족하며 살아야 하고 구제와 선행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확신하고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살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성경책을 읽고 많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는 것이고 또 우리의 인격과 삶이 점점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며 또 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고 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고, 요셉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통함을 누리다가 천국 가기를 원한다.

 

22-34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22-23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사람이 사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하루 24시간 중에, 먹는 일을 위해 쓰는 시간은 대략적으로 장보기 1시간, 음식 만들기 1시간 30분, 식사하기 1시간 30분, 설거지하기 1시간, 도합 약 5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몸을 가진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살고 또 무엇을 입어야 산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을 입는 것이 필요하다.

또 사람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그런 문제로 염려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런 것들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생활에 중요한 부분인 만큼, 그것들에 대한 염려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그런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음식과 옷이 중요해 보이지만, 실상 목숨을 위하여 음식을 먹는 것이고 몸을 위하여 옷을 입는 것이다. 즉 음식과 옷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음식과 옷보다 목숨과 몸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이 음식과 옷에 대한 염려 때문에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4-26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얼마나 더 보살피시며 섭리하시겠는가?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셨을진대, 그는 우리가 목숨을 위해 직장 생활이나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을 얼마나 더 보살피시고 도우시겠는가? 그것은 그가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에 비하면 작은 일이다. 보잘것없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것도 택한 백성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우리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27-28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자연만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사람이 자기 지혜로 만든 그 무엇보다 뛰어나시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땔감으로 불에 태워지는 풀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면, 하물며 자기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잘 입히지 않으시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알아야 하고 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염려와 근심은 몸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목숨을 위태하게 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된다. 우리는 그런 문제에 매이지 말고 다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29-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음식과 옷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섭리자이심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염려하며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새들과 땅의 모든 짐승들,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더욱이, 그는 자기 독생자의 피로 구속(救贖)하신 신약 성도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사랑하시고, 우리의 영혼의 필요뿐 아니라, 우리의 몸의 필요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차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먹고 입고 거처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31절] 오직 너희는 그의[하나님의](전통본문)56)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직’이라는 원어(플렌)는 강한 대조를 나타낸다. 음식과 옷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땅의 일들만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으로 충만한 나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본래의 관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본성이 부패되어 스스로 이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의 대속(代贖) 사역으로 택자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랑하고 성경을 읽고 거기에 기록된 그의 뜻을 즐거이 따르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양무리]’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수효의 무리이다.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은 많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택한 백성들은 불택자들에 비해 그 수가 적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위축될 수 있다. 또, 물질 만능의 시대에, 가난한 자와 부자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오늘 시대에 물질을 초월하며 사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위축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가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의 행복과 가치를 바로 안다면 우리는 찬란해 보이는 세상의 영광으로 인하여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또 그가 주시는 천국을 확신하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그를 따라가야 한다.

[33-34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는]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있음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는 구제하며 산다. 구제는 성도의 삶의 특징이며, 천국에 저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셨다(마 6:19-20).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땅에 쌓아놓지 말고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해야 한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는 우리의 마음도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음식과 옷 문제, 즉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공중의 까마귀를 생각해야 하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그것도 자기 독생자의 피로 구원하신 자들을 더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염려와 근심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말씀대로, 음식은 썩는 양식이지만, 믿음은 썩지 않는 것이다(요 6:27-29).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계명의 순종은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미가 6:8은 하나님의 뜻이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도서 2:14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구제하는 삶을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구제는 천국에 저축하는 것이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구제 헌금을 풍성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고후 8:7).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자신도 본래 구제에 힘쓰고 있다고 간증했다(갈 2:10). 성경은 부자들이 구제에 힘쓰라고 가르친다(딤전 6:18).

 

35-48절, 예비하고 있으라

[35-36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의 결혼식은 밤에 행해졌고 따라서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밤 늦게야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자지 말고 깨어 기다려야 하였다. 이와 같이, 주의 제자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충성된 종들처럼 주의 재림과 영광의 천국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것은 충실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주의 재림은 신약교회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도록 그를 믿고 순종하고 충성해야 한다.

[37-38절]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2경에나 혹 3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께서 돌아오실 때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우리를 자리에 앉히시고 친히 띠를 띠고 우리를 대접하실 것이다. 이것은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어떻게 영광스런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대접을 하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충성된 종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된 약속이며 위로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저녁에 해 질 때부터 아침에 해 뜰 때까지의 밤을 1경, 2경, 3경, 4경의 넷으로 나눴다. ‘2경’은 대략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를 가리키고, ‘3경’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를 가리킨다. 밤은 환난의 때를 상징하는 것 같다.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4:3-31). 결혼식에 간 주인은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결혼식에 갔다가 한밤중에 오는 주인을 종들이 자지 않고 깨어 있다가 맞으면 복되듯이, 주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그를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성도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20). 그러므로 비록 그가 늦게 오신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그의 재림을 확신하고 그를 섬기며 따르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39-40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임함을 도적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그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가리킨다. 도적이 사람이 알 수 없는 시간에 집에 침입하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갑자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재림을 항상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는 자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고 또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교훈의 요지는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반드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의 약속은 참되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시는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참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알고 그를 맞을 준비를 하면 된다.

[41-44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님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들은 집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 있고 충성된 청지기와 같이 교인들에게 신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들을 다 믿고 소망하며 행하면서 또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인격, 또 신앙 상태나 정도와 함께 간다. 목사와 교인들은 함께 간다. 목사가 어떠하냐에 따라 교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해이해지고 부패된 목사에게는 그런 유의 교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해이해지고 부패되어서 교인들이 부담 없는 신앙생활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성경은 우리가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고 바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다(히 10:23-25).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그는 항상 깨어 그를 기다리며 맡겨진 일에 충성한 목사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그의 모든 소유를 그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주께서는 그의 충성된 종들의 충성된 사역들에 대해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의 약속을 믿고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한다.

[45-48절]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디코토메오)[둘로 쪼개고, 엄히 벌하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함께 벌을 받으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을 학대하거나 먹고 마시고 취했던 악한 종들은 매우 엄한 벌을 받고 불신자들처럼 취급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징벌하실 것이다. 그의 심판은 공정할 것이다.

악하고 불충성된 일꾼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정도에 따라 또한 그들이 받은 책임의 정도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자들은 잘 몰라서 행하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며, 큰 책임을 가지고도 충성하지 못한 자는 작은 책임을 가진 자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과 열심을 가지고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경고대로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주의 재림을 부정할 것이지만(벧후 3:3-4),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확신한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상적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것은 경건한 삶과 순종의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또 가족들과 이웃들을 위해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죄를 멀리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해야 한다.

셋째로, 재림하시는 주께서는 우리의 선악간의 행위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의 종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과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과 벌을 받을 것이다.

 

49-59절, 불을 던지러 오심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께서 의미하신 불은 성령의 불을 가리키신 것 같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기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하였다(마 3:11).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가 이루신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오순절에 성령께서 세상에 내려오셨다(행 2:3). 불같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내려오셨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요(요엘, 이사야, 에스겔) 예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이었다(요 14-16장; 행 1장).

성령의 불은 우선 죄를 소멸하는 불이다. 성령께서 오신 첫 번째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속(救贖)하신 영혼들을 중생시키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를 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죄를 소멸시키는 불의 역사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성령의 불은 또한 능력의 불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고(눅 24:49), 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행 1:8). 성령의 능력은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 운동의 불길로 나타났다.

[50절]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켰다. 그는 성경 다른 곳에서 ‘세례’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셨다(막 10:38). 그의 답답하심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그의 인간적 마음의 고통과 더불어 그 고난을 통해 아버지의 명하신 구원의 일을 이루시려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람의 삶을 사셨다.

[51-53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디아메리스모스 )[분열케, 나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나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나뉘리라] 하시니라.

평화의 왕인(사 9:6) 메시아께서는 또한 나뉘게 하시는 자이시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믿음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의 나뉨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 의와 불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면 항상 그 진리를 따르는 자와 그것을 거부하는 자로 나뉜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은 많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마 7: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에 이를 것이다(막 16:16). 구원의 복음은 분열을 가져온다.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나뉘게 한다. 그것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로 나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심지어 집안 식구들을 둘로 나누며 서로 갈등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신 6:5).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그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요구하셨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절대적 믿음과 사랑은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때때로 가정에서부터 그러하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가정복음화의 시작과 과정인 경우가 많다. 먼저 믿은 식구들이 바라는 것은 모든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영원히 나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다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의 복음화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막 16:15).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얻은 자들은 이웃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귀는 자기의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들의 생애가 그러하였듯이, 전도 사역에는 이방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과 핍박이 예상된다. 전도와 구원 운동은 영적 전쟁이다. 거기에는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하다. 진리와 비진리 간에는 타협과 일치가 불가능하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나뉘며 영원히 나뉠 것이다.

[54-56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도키마조)[분별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분별치] 못하느냐?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날씨와 기후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한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메시아로 오셨고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함을 가리키신 것이라고 본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주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7:22).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많은 일들과 기적들은 그가 그리스도이신 충분한 증거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거리를 찾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57절]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옳은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진리는 옳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죄를 떠나야 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옳은 것을 알지 못하고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였다.

[58-59절]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아펠라크다이)[놓여나기를](KJV, Thayer)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官屬)[치안관]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조금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모세 곧 모세의 율법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즉 아직 우리의 목숨이 끝나기 전, 아직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 전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갚기 전에는 영원한 감옥인 지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실상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자신의 죗값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아직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다. 지금은 아직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아직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전해지고 있고,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직 들려지고 있다. 아직은 사람들이 길 가는 중에 있고 아직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신의 죄에서 놓여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령께서는 불과 같으시다. 그것은 중생의 불이다. 성령께서는 죄인들의 죄를 소멸시키시고 새 생명을 주신다. 그것이 성령세례이다. 성령의 불은 성령 충만함도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의와 선을 행하는 성화의 능력이며(갈 5:16) 또 봉사와 전도의 능력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능력의 영이시다. 우리는 성령님을 이미 받았고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화를 이루고 봉사와 전도도 힘있게 행해야 한다.

둘째로, 주께서는 분열도 주신다. 그 분열은 하나님과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가정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증거해야 한다. 가족들 간의 갈등이 있고 심지어 핍박도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심도 보게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메시아께서 오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그 사실을 충분히 증거한다. 사람들은 아직 길에 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고 죄에서 놓여나야 한다. 아직 구원의 문이 열려 있고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죄사함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9절, 회개치 않으면 망함

[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아마 이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나 다른 곳에서 제사하던 중 로마 군인들에게 죽임 당하므로 그들의 피가 그들의 제물에 섞였던 것 같다. 그들은 어떤 죄를 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보통 죄 때문에 재앙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느끼는 바이며 그래서 ‘천벌’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의 재앙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경우들도 있으나, 참으시고 내버려두시는 경우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당한 재난을 보고 저가 큰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며 비난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사람만 큰 죄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은 더 큰 죄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당한 재난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교훈을 삼고 자신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의 중심 내용이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은 회개를 동반한다. 회개는 믿음의 표시이다. 회개는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회개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 얻지 못한다. 구원은 결코 회개 없이 얻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3은,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바르게 진술하였다.

[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다. 거기에 있던 망대가 무너지므로 열여덟 사람이 죽었던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 샘물에 몸을 씻으려고 왔다가 그런 변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자동차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건물의 화재나 붕괴, 지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그것도 다 그러하다. 우리는 이런 일들로 죽은 자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교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사람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징벌과 재앙을 당할 것이다. 다윗은 시편 7편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말하였다(시 7:11-12). 혹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를 다 징벌하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신다 할지라도, 그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는 복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 불못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것이 지옥이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이 비유는 앞에서 하신 회개에 대한 교훈과 연결된다. 무화과 열매는 회개의 열매를 가리킨다.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회개를 전했던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 .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었다(눅 3:7-9; 마 3:7-10).

회개의 열매는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악하고 음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경건한 말이나 모습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과 인격과 생활의 변화이다. 좋은 열매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7절]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과원지기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3년은 하나님께서 각인을 위해 정해두신 기간이다. 3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그는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그가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을 때 그를 그냥 버려두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듯이, 회개치 않는 사람은 주 하나님께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 안에 거할 자격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벌하시고 참된 교회로부터 쫓아내실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실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열매가 없는 교인들이 참된 교회에서 제외될 것을 보인다. 열매 맺는 가지들만 포도나무에 남겨질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너희가 육신대로[즉 육신의 죄성에 이끌려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했다(롬 8:13). 사람이 죄에서 구원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반드시 죄를 멀리해야 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8-9절]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전통본문)57)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과원지기는 1년의 기간을 허락해주시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특별히 관리해보겠다고 요청했다. 그 특별 관리란 그를 위한 더욱 강력한 말씀의 교훈과 책망과 훈련을 가리킬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육체적, 환경적 시련도 포함될 것이다. 연장된 1년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남을 것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나,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영히 버림을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람이 죄 때문에 재앙을 당한다는 일반적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율법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진리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진리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속에 살지 예외적 섭리 속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사람이 재앙을 면하려면, 죄를 깨닫고 미워하고 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사람은 죄 때문에 재앙이 온다는 일반적 진리를 잊지 말고 늘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고 만다. 하나님의 재앙은 이 세상에서도 있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대 앞에서도 있다. 회개치 않은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영원한 지옥 불못의 벌을 피할 수 없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일이지 선택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회개 없이 얻는 것이 아니다.

셋째로, 회개는 의롭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회개의 열매는 변화된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던 무신론적이며 불경건했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힘쓰는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며 욕하고 음란하며 도적질하며 거짓말하며 탐심을 품고 살았던 삶이 변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결하며 절제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고 먹을것과 입을 것으로 자족하며 거짓말하지 않고 탐심을 버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단지 자신의 죄를 말로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변화된 행동으로 해야 한다. 회개의 열매는 경건과 도덕성의 인격과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10-21절, 사탄에게 매인 자를 푸심

[10-11절]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프뉴마 에쿠사 아스데네이아스)[질병의 영을 가지고 있었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아직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셨다. 장차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신약의 주일로 바뀔 것이다. 또 그는 회당 집회에 참석하셨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생긴 유대인들의 예배당이었다. 예수께서나 사도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때는 아직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구별되기 전이며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나뉘기 전이었다.

그때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을 질병의 영을 가지고 있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인이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것은 병을 일으키는 귀신의 활동이었다. 악령들은 세상에서 불경건하고 악하고 불행한 일들의 배후에 활동하고 있다. 에베소서 2:2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활동하는 영이라”고 말했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귀신으로 인한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을 때가 왔다.

[12절]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가 소원하기 전에 그를 보시고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이 여자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병고침을 소원했겠지만, 아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병고침을 요청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던 경우처럼 요청받지 않으신 때에 긍휼을 베푸셨다. 많은 경우에는 그가 병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으나 이 경우는 그가 말로 표현된 소원을 들음이 없이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다. ‘여자여’라는 원어(귀나이)는 성인 여자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 같다(요 19:26).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는 말씀은 병을 치료하시는 그의 권위 있는 말씀의 선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권위 있는 말씀이었다. 그 권위 있는 말씀은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다.

[13절]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그의 몸은 즉시 펴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났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그가 중한 열병을 앓았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 여인이 곧 일어났었고(눅 4:39), 친구들이 데려왔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에도 그 병자가 곧 일어났었다(눅 5:25). 이제도 그 여자는 곧 몸을 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그 여자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던 이 여인은 이제 그 매임과 그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드러났다.

[14절]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안식일을 존중하며 지키는 것 같았으나, 그에게는 무지와 완악함이 있었다. 그는 방금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증거를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당 예배를 인도하는 그의 수고는 무의미하였다. 사람의 종교적 직분과 활동이 그의 내면적 경건과 항상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5-16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마구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그 회당장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마구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이 불쌍한 여인을 그 오랫동안의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 흑암의 권세에서 살았다고 말하고(골 1:13),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하며(요일 5:19), 또 교회에서 제명 출교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표현했다(고전 5:5). 그 여인은 소나 나귀보다 귀한 사람이며 더욱이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택한 자이었으나 오랫동안 사탄이 준 질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침을 받았고 사탄에게서, 사탄의 쇠사슬에서 놓임을 받았다.

[17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그의]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이란 방금 전에 그가 병을 고치신 일과 그의 바르고 지혜롭고 은혜로운 말씀들을 가리킬 것이다.

[18-19절] 그러므로[또 그는](전통본문--Byz A 등)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정원]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그것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가 없는 세계이다. 그것은 병고침을 받았던 한 여인과 같이 죄인들이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 들어가는 세계이다.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마귀의 시험과 장난이 없지 않지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으며 신자는 마귀의 시험과 장난을 이길 것이다(롬 8:35-39).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며 인류 역사의 종착지이다.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은 성도들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원에 심긴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다. 그는 심긴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세력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라서 마침내 크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 곧 그의 피로 죄씻음 받고 구원 얻은 자들로 구성된 신약교회는 매우 작은 무리로 시작하여 점점 자라 지금은 세계적인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신약교회는 세계적 교회가 되었다.

[20-21절]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또 누룩에 비유되었다. 누룩은 보통 악과 그 영향력을 비유하지만 여기에서는 퍼져나가는 것, 즉 확장성을 가리켰다. 반죽된 가루 서 말 속에 둔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미미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적 교회가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 여인을 그 매임에서 자유케 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을 자유케 하신다. 이 세상은 지금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사함을 통해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시다.

둘째로, 마귀 권세에서 자유케 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었고 이런 자들의 모임인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고 구원 얻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직전까지 계속 더해질 것이다.

 

22-35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2-24절]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구원의 문은 좁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의 속죄의 의(義)만 믿고 모든 죄악된 행습들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세상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하신 구주이시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가 없다(출 20:3; 신 6:4; 요 14:6; 행 4:12; 딤전 2:5).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그의 계명대로 모든 죄를 버리고 바르고 선한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고 결심이 필요하고 또 힘쓰고 애쓰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힘쓰라”(아고니조마이)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열심히 싸운다’는 뜻이다(BDAG).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잘못된 사상들이 있고 죄의 유혹들이 있고 신자를 낙망시키는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시고 은혜 주시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끝까지 따를 수 있다.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많을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 그 길로 가는 자는 많을 것이다(마 7:13). 구원 얻을 자들보다 구원 얻지 못할 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보편구원설은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노아 시대에 노아의 가족 8명 외에 다 홍수로 멸망하였듯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멸망하였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믿고 모든 죄악된 행습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대로 사는 자들은 적은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25-27절]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전통본문),58)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구원의 문은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 곧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자이시다(계 3:7). 천국 문은 지금 열려 있으나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이 닫힐 때가 있다. 문이 한 번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원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집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두 번이나 말하였다. ‘어디로서’라는 말은 근원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우리가 천국 가려면 거듭나야만 한다(요 3:3, 5). 또 주인은 그들을 ‘행악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행악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 사람이 구원 얻지 못하는 이유, 영원한 멸망을 받는 이유는 죄 때문이다(고전 6:9-10; 계 21:8). 회개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의 증거를 가질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구원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지만,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수 없고 그에게서 떠나야 한다.

[28-30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국한문,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은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온 세계에서 구원 얻은 많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천국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은 밖으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고 더 이상 그의 작은 긍휼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도 멸망할 수 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을 것이다.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키며 ‘먼저된 자’는 유대인을 가리키겠지만, 이 말씀은 또한 먼저 믿은 자와 나중에 믿은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구원에는 순서가 없다. 복음을 먼저 들었으나 구원 얻지 못하는 자도 있고, 복음을 나중에 들었으나 구원 얻는 자도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은 것 같으나 구원에 실패자가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중에 믿은 것 같으나 구원에 이르는 자가 있을 것이다.

[31절] 곧 그때에[그 날에](전통본문)59)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여기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인데 당시 갈릴리 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눅 23:7). 예수께서는 아직 갈릴리 지방에 계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피신시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환영치 않으므로 배척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헤롯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배척하였다.

[32절]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텔레이우마이)[내가 목표에 이르리라](NASB, NIV) 하라.

예수께서는 세상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는 선지자적 권위를 가지고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셨다. 여우라는 말은 그 간교함과 잔인함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오늘과 내일’은 ‘명확하지 않은 얼마간의 기간’을 가리킨 것 같다. 즉 헤롯의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서도 내가 얼마 동안 좀더 나의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3일’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목표에 이르리라’는 말씀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대속(代贖) 사역을 이루신다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고 본다(요 19:30).

[33-34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께서는 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그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가셔야 할 사명의 길을 가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었다. 이제도 헤롯만이 아니고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는 여러 번 그들을 품으려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원치 않았고 거절했다. 구약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약교회도 타락하고 배교적이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중세시대의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한 많은 종들과 성도들을 고문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단체가 되었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들은 다시 타락하여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포용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들은 역사상 가장 이단적이다. 오늘날 다수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보수 신앙의 교훈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35절]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장차 예루살렘 성은 멸망할 것이다. 이 일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그들은 이제 주의 재림의 날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영원 자존자, 창조자, 섭리자, 살아계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성경을 주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요 14:6; 행 4:12; 딤전 2:5)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그는 그를 믿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롬 3:21-24; 10:4) 그의 의를 받아 그 의 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둘째로, 우리는 중생의 증거를 가져야 한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우리는 모든 죄악된 행습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義)가 되심을 믿는 속죄 신앙을 가져야 하고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14절, 식탁 교훈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파라테레오)[자세히 주시하고] 있더라.

예수께서는 높은 지위를 가진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거절치 않으셨다. 그는 죄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들에게 필요하듯이, 의인들에게는 구주가 필요치 않고 죄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눅 5:31).

그런데 그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세히 주시하였다.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지만, 사람이 그를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거부하고 자세히 주시하고 경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에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보인다.

[2-4절] 주의 앞에 고창병(dropsy; 수종(水腫), 부종(浮腫), 몸이 붓는 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60)?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거기에 주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인지 질문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치시고 보내셨다.

얼마 전 예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는데(눅 13:15-16) 이번에는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의 크신 긍휼 때문이며 또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인애(仁愛)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호 6:6).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만 중시하는 무지한 외식자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보다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

[5-6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61)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예수께서는 이 질문으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표현하셨다. 그는 지난 번 사건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었다(눅 13:15-16).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이렇게 상식적으로도 그 정당성이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생활의 더 중요한 내용, 즉 경건과 도덕성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단지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7-11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上座)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末席)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상석에 앉으려 하는 마음은 일종의 교만과 명예심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석에 앉으려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교훈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교훈이시다. 예수께서는 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명하신 성도의 매우 중요한 덕이다.

또 그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존귀케 되는 길이다. 잠언 18:12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하였다(벧전 5:6). 교만은 다툼의 원인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람을 낮아지게 만들지만,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과도 화평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임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주께서는 사람이 선을 베푼 후 베푼 그에게서 다시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칭찬과 상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13-14절] 잔치를 배설하거든[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발을]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러면 장차 의인들의 부활의 날이 있는데, 그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생활이다(눅 12:33-3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다(잠 19:17). 사람이 이 세상을 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을 바라볼 때 선한 일을 힘쓸 수 있다.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그에게서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갈 6:9-10).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고창병은 몸이 붓는 병이다. 주 예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한 번 더 증거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성도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증거하셨다. 성도들은 주일에 병환자 심방 같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잔치에 초청되었을 때 말석에 앉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교만은 가장 큰 악이며 성도의 덕은 겸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고(빌 2:6-8) 또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마 20:26-27; 23:11-12). 우리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전 15:9; 엡 3:8; 롬 12:10; 빌 2:3).

셋째로, 우리는 잔치할 때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청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받을 것을 바라면서 남에게 선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빌려주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눅 6:35). 참된 구제와 선행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며 하는 구제와 선행은 순수하지 못하다.

 

15-35절, 주의 제자가 되는 길

[15-17절]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열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큰 잔치’는 신약교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한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그 잔치에 청하셨다.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으로 본문에 4번 언급된(17, 21, 22, 23절) ‘종’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비유할 것이다.

[18-20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초청받은 자들의 핑계거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필수적인 일들이다. 성경은 이런 일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근면한 삶을 장려한다. 그러나 잔치에 초청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그 주인을 무시하였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초청을 사양하고 오직 자기 일터로 갔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이것은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건강한 자들과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진 자들은 그 주인의 잔치 초청을 거절했으나, 병약한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그 초청을 들을 것이다.

[22-24절]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산울 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가리킨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현재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함으로 된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킨다.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다.

[25-27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간다고 다 그의 제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와 제자 아닌 자를 분명히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그에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차원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우리 목숨이 위협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신앙은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이시다. 아무리 사랑스런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하며 육신의 생명도 연장시켜주지 못한다. 불치병에 걸린 자를 도울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목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며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심지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의 현실은 자기 부정의 시험대요 훈련장이다. 성도는 고난의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의 말씀과 본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킨다.

[28-32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1만으로서 저 2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또 자신의 군사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군사력을 비교해보지 않고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자는 없을 것이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시편 49:8은,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을 버리면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 없어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면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고, 썩어질 육신의 몸을 버리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는다.

[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하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도답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답지 못한 성도는 아무 가치가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일들이 바쁘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일을 우리의 세상일들보다 먼저 앞세워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초청을 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강권하여 교회를 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초청해야 하며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매이지 말고 또다른 이들을 초청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초청해야 하고 사람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 가족들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온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15장: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심

[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당시에 죄인들로 알려진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도 같이 드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가 그들의 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며 불평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과 접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헤오스 휴레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예수께서는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를 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잃은 양의 비유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양들의 주인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둘째로, 주인은 잃어버린 그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주인은 그 양을 조금 찾다 만 것이 아니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아 마침내 찾았다. 셋째로, 주인은 잃어버린 그 양을 찾은 후 매우 기뻐했다. 그는 즐거워 그것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만큼 그의 기쁨이 컸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 얻은 모든 자들보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적 진리이다.

[8-10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께서 하신 잃은 은전의 비유도 잃은 양의 비유와 같은 진리를 나타낸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값의 돈이며 그것들은 다 은전(銀錢)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이 비유에서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써 마침내 찾았고 그때 그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11-16절]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국한문,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예수께서 하신 잃은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에서, 그 둘째 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류의 모습을 나타낸다. 인류는 자기의 자유 의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갔다. 그는 하나님의 간섭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였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하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 지혜와 재능,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허비하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방탕한 삶을 미워하신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그는 방탕한 자들에게 징벌하신다. 그것은 질병, 가난, 가정 파탄, 사고, 지진, 전쟁 등의 불행한 일들을 가리킨다. 범죄한 인류는 결국 궁핍해지고 낮고 비천하게 될 것이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에이스 헤아우톤 엘돈)[이에 정신이 들어]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하늘을 향하여와 아버지 앞에서]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재산을 낭비하며 방탕하게 살았던 그 둘째 아들은 궁핍 속에서 바른 정신이 들었다.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궁핍이 그에게 불행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궁핍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이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탕자는 또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이 부요하였음을 기억하였다. 또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고 일꾼의 한 사람으로 여겨달라고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相距)[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는 깨달은 대로 행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동이 나온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일어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낸다.

[21-24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얻었음이니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고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뉘우침을 기쁘게 받았고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게 한 것은 그를 종으로가 아니고 귀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 믿은 자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고 그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특권을 회복시켜 주셨고 천국의 기업과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이 비유의 중요한 한 내용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로 인해 기뻐하였다는 데 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살진 송아지를 잡게 했고 다 함께 먹고 즐거워했다. 그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그러므로](전통사본)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충실히 여러 해를 보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고 근검절약하며 충실하게만 살았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이 정당하다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자가 양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여인이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아홉 개의 은전을 싫어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큰아들의 것이었다(“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것 같은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뿐이다. 그 기쁨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는 뜻이다(눅 15:7).

어떤 이들은 맏아들을 집안의 탕자라고 해석하지만, 그런 해석은 본문의 전체적 내용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맏아들은 그 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고 그의 고백에서도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 또한 아버지의 말에서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충성된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아버지의 뜻이나 둘째 아들을 향한 그의 기쁨의 심정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를 집안의 탕자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지나쳐 보인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신다.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가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었듯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구원 얻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가 회개하는 것을 심히 기뻐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처럼 한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기뻐해야 한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 드시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나 또 맏아들처럼 불평하지 말고 회개하는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영접하고 접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이나 방문자들이나 구원의 길을 찾는 자들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영접하고 인도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 장로들, 권사들, 주일학교 교사들, 구역 권찰들은 이런 심정으로 모든 영혼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양의 주인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려 두루 다녔다. 또 은전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날마다 기다렸다고 보인다. 그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한 명의 영혼 구원을 위해 죄인들을 접촉하고 함께 먹으신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배교자들과 함께 집회를 여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배교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집회를 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지는 않으셨다.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18절, 불의한 청지기

본문은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 중의 하나이다.

[1-8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청지기 비유를 하셨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리기 때문에 그에게 해고하겠다고 통지했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임의로 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가 해고된 후에 그들이 그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으니 옳지 않은 일을 하였다. 이것은 기왕의 그의 불충성에 더해 주인의 재산에 더욱 더 손해를 끼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르게 잘 관리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그 청지기의 지혜는 선한 지혜가 아니고 세상적인 지혜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재물’이라는 원어(맘모나스)는 ‘재물, 재산, 부(富)’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는가? 그것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 건강, 재능, 생명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인다. 사람의 세상 생활은 청지기의 생활과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불의한 방식으로 빚쟁이들에게 선심을 써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의 일에 힘씀으로 하나님과 친근해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가 재물로 구제와 선행에 힘씀으로 믿음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과 친근해지면, 우리의 구제와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자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대하며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10-12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지극히 작은 것’은 세상 재물을 가리키며, ‘큰 것’은 천국 보화를 가리킨다고 본다. 천국 보화와 비교할 때 세상 재물과 부(富)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재물’도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참된 것’은 천국 보화를 가리킬 것이다. 세상의 부와 재물은 헛되지만, 천국의 보화는 참되다. 또 ‘남의 것’도 세상 재물을 가리키며, ‘너희의 것’은 천국에서 받을 부(富)와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상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기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서라고 본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같이 주인의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충성된 청지기같이 돈을 바르고 충실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되고 교훈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을 바르고 충실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받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13-15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가증한 것]이니라.

주께서는 사람의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에 대해 좀더 말씀하셨다. 본절은 청지기 비유의 결론과도 같다. 집의 종들은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셈이 되고 한 사람을 중히 여기면 다른 사람을 경히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또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눅 9:23; 14:26, 33). 또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듣고 그를 비웃었다. 물질욕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고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도 배척하고 멸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악한 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오늘날도 사람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마음과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교만과 명예심이었다. 특히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일이다. 요셉이나 모르드개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자연스러운 상황을 주셔서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은 교만이요 명예욕이다. 주께서는 그것을 ‘미움을 받는 것’ 곧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6-17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별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는 요한의 때까지이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듯이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다(마 4:17). ‘나라’는 ‘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들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와 생명을 가진 자들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율법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주께서는 율법의 작은 한 부분도 폐지되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을 강조하셨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롬 10:4). 그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고전 1:30).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롬 6:13).

[18절]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께서는 사람의 도덕적 결함의 다른 중요한 한 요소인 정욕의 죄도 지적하셨다. 사람의 이 죄악성은 결혼 생활의 불신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음의 죄악이다. 또 남편에게서 버리운 이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 관계는 사람이 나눈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이혼과 재혼을 정죄하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3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합법적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이혼의 합법적 이유이다. 또 사별(死別)한 경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합법적 이혼을 한 경우, 재혼은 합법적이라고 본다. 또 성경은 이혼이 아닌 별거(別居)를 정죄하지는 않는다(고전 7:11). 특별한 경우, 성도는 별거하여 살 수 있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물질을 바르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이며, 우리는 단지 청지기 즉 관리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돈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욕심을 품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돈을 정당하게 벌어야 하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고 탐욕을 품지 말아야 한다. 아내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거나 집안일이나 자녀 교육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모든 것을 바르게 관리하고 그의 뜻대로 선하게 쓰되 특히 전도와 구제를 위해 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만과 명예심을 버려야 한다. 교만과 명예심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며 일종의 욕심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보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말고 또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27). 사도 바울도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교훈하였다.

셋째로, 우리는 악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악한 정욕은 부정한 욕망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으로 만족해야 한다(잠 5:18-19). 결혼한 이들은 결혼 관계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고,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혼자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형편과 처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고 간음의 죄, 음행의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간음하는 자나 음행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6:9-10; 갈 5:19-21; 계 22:15).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19-31절,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19-23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부스러기들]62)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는 그 거지를 동정하거나 돕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느 날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의 장례식은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졌다. 본문의 ‘음부’는 ‘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형벌과 고통의 장소이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것을 보면, 지옥은 낮은 곳에 있고 천국은 높은 곳에 있으며 천국과 지옥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 엘리야도 예수께서도 하늘로 올리우신 것을 생각하면 천국은 높은 하늘에 있고 지옥은 땅 아래, 지구 속 어떤 곳에 있는 것 같다. 지구 속에는 매우 뜨거운 불이 있다.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고 아브라함과 말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옥에서 천국을, 또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지옥에서 천국을 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24-25절]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고난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 부자는 지옥에서 불꽃 가운데서 심한 열기와 갈증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들 곧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러나 그때 그는 영적으로는 실상 빈곤하였었다. 그는 하나님도, 그의 계명도,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고 단지 죄 가운데 낙을 누리며 살았었다.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았었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의 몸에는 헌데가 있었고 먹을것도 없는 거지이었다. 그는 의식주에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알았고 믿었다. 물론, 가난한 자가 다 성경을 믿고 죽은 후에 위로와 안식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거지 나사로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자신의 허무함과 죄인 됨을 깨달았던 것 같고 하나님을 찾아 만났고 그를 믿었다. 실상, 이것이 외적인 부유함보다 인생에게 큰복이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그 부자는 죽은 후에 고통과 고민 가운데 있었고,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던 나사로는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누렸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몸이 죽은 후에도 의식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 있었다.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면, 만일 현세와 내세에 그의 공의로운 심판과 보응이 없다면, 인간 생활에서 종교와 도덕의 이유와 가치를 알 수 없고, 종교와 도덕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26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카스마 메가 에스테릭타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건너가고자 하는 자들이]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건너오고자 하는 자들도 할 수] 없게 하였느니라.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격은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거기에 들어간 영혼들의 상태도 고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몸의 죽음으로 그의 내세의 상태가 고정된다. 지옥에 들어간 이는 천국으로 건너올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간 이는 지옥으로 건너갈 수도 없다. 죽음으로 고정된 사람의 상태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의와 선을 행하라고 명하시고 불의와 죄에 대해 경고하시고 내세에서 그는 엄격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 보응은 엄격하지만 이미 공적으로 경고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공의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대로 내세에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27-28절]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이는]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하려 함이니이다].

지옥은 실재(實在)하는 곳이다. 그 곳은 악인들의 형벌의 장소이다. 그 곳은 불이 있는 곳이다. 지옥의 공포는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느껴왔던 공포이다. 모든 악인들은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다(계 21:8).

그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기억하였다. 자기에게 아무런 소망과 위로가 없음을 안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들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은 이 처지를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나사로가 세상에 다시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만은 이 곳에 오지 않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하였다.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당연히 그러한 소원을 가지며 호소할 것이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바로 그 이유이다. 죄를 회개치 않는 자마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사실은 우리가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9-31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는 말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으라’는 뜻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책에 증거된 복음을 듣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신약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아브라함은 말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정치 않았고 성경의 효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가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성경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신약교회시대에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성경주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도 구원은 기적 체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고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도 기적을 구하거나 전하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복음을 믿고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내세를 알고 준비해야 한다. 나사로는 죽은 후 천국에, 부자는 지옥에 들어갔다. 또 사람의 내세의 상태는 바꿀 수 없다.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 하고 가족들이나 이웃에게 전도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그들의 상태가 고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세가 있음을 알고 잘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부자같이 살지 말아야 한다. 그의 특징은 사치하고 연락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거나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유황불비로 멸망한 소돔 성의 사람들과 같았다(겔 16:49). 야고보는 사치하고 연락하는 악한 부자들을 책망했다(약 5:1-6). 그러나 의인 욥은 배고픈 고아를 먹이고 빈궁한 자에게 덮을 것을 주었다(욥 31:16-20). 우리는 악한 부자같이 사치 연락하며 이기적이게 살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구원의 길은 성경말씀뿐이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롬 1:16; 고전 1:21-2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막 16:15-16). 우리는 은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마 24:24; 살후 2:9-10).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10절, 죄와 용서, 믿음과 의무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범죄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사람은 악하고 무지해서 때때로 남을 범죄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범죄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죄는 사람을 멸망시키는 악이다. 자신이 범죄하면 멸망하듯이, 다른 사람을 범죄하게 하면 그를 멸망시키는 것이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2절]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범죄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 하나를 가리킨다. 교회 안에는 주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는 작은 시험이 와도 잘 넘어진다. 주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어린 신자 하나를 범죄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연자맷돌’은 ‘짐승이 돌리는 큰 맷돌’을 뜻한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아 나올 가망이 없다. 그것은 그런 죄를 짓는 일이 치명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증거한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고 강하시다. 그는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범죄하는 일은 이렇게 큰 문제이다.

주님의 표현이 강한 만큼, 이 말씀은 사람에게 있어서 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죄는 사람들을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을 주는 구원이다. 그는 이 구원을 위해 자기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사람의 죄악들로 인한 대가는 이처럼 매우 컸다. 우리는 범죄가 큰 문제이며 자신의 범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것도 큰 죄악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서가 아니고서는 씻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전통본문)63)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에피티마오)[책망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의 사과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면, 그는 신앙적, 도덕적 방종과 해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제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만일 우리가 형제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만일 우리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만일 우리에게 범죄한 자가 우리의 권면이나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7). 용서는 상대방의 회개 즉 상대방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전제(前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4절]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사람의 부족과 연약을 보인다.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도 자주 하고 사과도 자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방이 언제든지 사과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뜻이다(마 18:22). 또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이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의 중심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의 사과의 말에 근거하여 그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라고 본다.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서 필요한 한가지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도 서로의 실수와 부족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5-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큰 믿음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좀 있다고 생각되는 우리의 믿음도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이라는 것, 즉 심히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의 믿음이 심히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만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심히 작사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이 심히 작음을 인정하며 주님을 향해 또 사람들을 향해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7-9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감사]하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전통본문).64)

옛날에 종들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 밭에서 돌아와서도 금방 편안히 상에 앉아 음식을 먹지 못했고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들었고, 주인이 음식을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또 주인은 그의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옛 시대에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는 주인과 종들의 관계 이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들이며, 더욱이 우리는 그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은 신약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맡겨진 일을 행할 때도 우리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주신 은혜와 힘으로 했고 그때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목사들과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과 태도이다. 우리는 종의 정신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기며 일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죄를 범하는 자는 멸망한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며 지옥 형벌이다(롬 6:23; 계 21:8). 그러므로 소자 한 명을 범죄케 한 자는 차라리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면 그를 책망해야 하고 우리 자신이 범죄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가 그 죄를 회개하면 그를 용서해야 한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할 때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다. 우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큰 일을 행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만한 믿음도 없음을 깨우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성경을 주셨고(요 20:30-31) 믿음은 성경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견고해진다(롬 10:17; 눅 1:1-4). 또 믿음은 기도 생활로 강해진다(눅 18:8).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 읽고 기도함으로써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종의 자세는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무익한 종이며 우리의 한 일은 단지 당연한 의무를 수행한 것뿐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던져 드리는 것을 보았다(계 4:10-11). 그것이 종의 바른 마음이다.

 

11-19절, 한 나병환자의 구원

[11-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께서는 유대 땅의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남부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시는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동네 밖에서 살아야 하였다(레 13:46). 그래서 그들은 아마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큼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들의 나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긍휼히 여기심 받기를 구하는 자는 그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을 것이다.

[14절]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였다(레 14:1-9).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을 포함했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그 나병환자들은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가야 했을 것이다.

주께서 즉시 고쳐주시지 않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옛날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에게 나병의 고침을 얻기 위하여 온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였다(왕하 5:10).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들은 믿고 순종하였고 그때 그들은 병고침을 받았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시는 일이었다. 그는 말씀으로 그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의 말씀의 능력은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께서는 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 요한의 보냄을 받고 온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7:22).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어주셨다.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다른 이들은 기쁨과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병고침 받은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주신 구주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걸음을 돌이켜 예수께 와서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배척했었다. 주께서도 그를 ‘이방인’이라고 부르셨다(18절). 그러나 주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 오늘날 신약시대의 이방인 신자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얻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감사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다른 아홉 명의 환자들은 유대인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병 치료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다. 그들은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할 줄 몰랐다. 사람은 참으로 무지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도 돌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이 말씀은 그 나병환자가 나병 치료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얻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처럼 병자들을 고쳐주신 자는 없다. 그가 행하신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크시다.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과 병고침들은 그의 신성(神性)을 충분히 증거하며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신성(神性)을 확증하셨다.

둘째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오직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사람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사랑과 수고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웃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주시고 우리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지혜와 건강, 가정과 직장, 일용할 양식과 사회적 안정을 주신 하나님, 특히 우리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흘리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예수님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병의 치료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졌다. 영혼의 구원도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 옷과 같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람은 다 죄인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20-37절,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날

[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나라를 바랐던 것 같다. 오늘날도 자유주의적 교회는 경제적 평등 사회를 추구하고, 오순절파 교회는 병의 고침과 물질적 복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 내면적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과 구원으로 시작된다. 주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5). 사람은 중생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했다(골 1:13).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의 심령 속에 임하였다.

예수님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의 뜻을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속에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중생하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벧전 2:9; 계 1:6).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 운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지식과 인격과 삶이 불완전하고 구원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들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 곧 우리의 성화도 완전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죄성이 없고 흠과 부족이 없는 완전 성화된 개인과 완전케 된 사회와 세상이 될 것이다.

[22-24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날들](원문)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人子)의 날[날들](원문)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전통본문)65)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人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인자(人子)의 날들’은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하늘로 올리우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세계적 사건이 될 것이다.

[25절]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임하고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될 나라이므로 이 일을 위해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이 있어야 했다. 그는 실상 이 일을 위해 오셨다(마 20:28).

[26-30절] 노아의 때[날들]에 된 것과 같이 인자(人子)의 때[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날들]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人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주의 재림의 날은 노아의 때와 비슷할 것이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등 세상일에 분주하다가 홍수 심판의 멸망을 받았다. 오늘날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 가운데 낙을 누리고 살며 이 세상의 일들에만 분주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의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또 그 날은 롯의 때와도 비슷할 것이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일에 분주했고 심히 음란하고 죄악되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들만 소돔 성에서 구원을 얻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리는 유황불비로 다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도 비슷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되며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 곧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31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이다. 그 날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다 불타버릴 것이다(벧후 3:10-11). 그러므로 그 날에는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가 집안 물건을 가지러 내려갈 필요가 없고 밭에 있는 자는 집에 돌아가려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불태워질 때가 왔기 때문이다.

[32-33절]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구원하고자](전통본문)66)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요일 2:15).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인데, 우리는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의 진리만 붙잡고 인내하며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계 13:8, 10).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바른 믿음을 지켜야 한다.

[34-35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대 분리의 날일 것이다. 그 날 밤 함께 자던 자들 중에서 데려감을 당할 자도 있고 버려둠을 당할 자도 있으며,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키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남겨져 두려운 심판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7절]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소마)[몸]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주여, 어디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들림을 받은 자들의 집결지를 물은 것 같다. 주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일반적 사실로 대답하신 것 같다. 시체들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인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몸들을 위해서는 심판의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지만,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을 위해서는 영광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라는 뜻 같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하나님 없이 살던 자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그에게 이루어진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와 구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중생 곧 거듭남의 표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리될 것이다. 하나는 들림 받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에 남겨질 것이다.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지만, 지상에 남겨질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과 지옥이 예비되어 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함과 예수님 믿음과 순종으로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셋째로, 주의 재림 때 들림 받는 자들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위로와 영광을 누릴 것이다. 주의 재림의 때는 만유를 회복시키는 때이며(행 3:19-21) 영광의 천국이 이루어지는 때이다(요 14:1-6). 또 그때 주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영생할 몸으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빌 3:20-21). 우리는 세상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사모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

1-8절,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

[1-5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에이스 텔로스)[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우리는 낙망치 말아야 한다. 성도가 왜 낙망하게 되는가? 성도가 낙망하게 되는 것은 고난의 현실이 너무 커 보이고 자신의 부족과 무능만 생각하고 또 우리의 현실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현실이 작게 보이고 자신의 부족과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힘을 얻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고 자기가 백세나 되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아내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롬 4:18-21).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불의한 판사의 비유로 교훈하셨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판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그의 원수에 대한 그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얼마 동안 그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후에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 판사는 그 과부가 그를 끝까지 괴롭게 할 것을 염려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6-7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비록 오래 참으실지라도](전통본문, KJV)67)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판사는 판결하는 권한을 가진 자이다. 그는 죄인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고 극악한 죄인을 사형시킬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사람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크신 판사이시다. 그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마지막 날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질병이나 가난이나 기타 재앙으로 벌을 내리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판사가 아니시다. 그는 지극히 공의로우신 판사이시다. 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모든 일을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지극히 선하신 판사이시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시며(신 10:18) 어려운 자들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그러나 물론 그는 공의로 다스리신다.

또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과부와 같은 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택함 받은 자들인 것은 아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있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께 주신 자들, 곧 그의 양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요 10:27). 그들은 회개하고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억울한 일 때문에 밤낮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잘 들어주실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사모하며 찾는 것이다. 밤낮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 믿음이 작으면 조금 기도할 것이지만, 믿음이 크면 오랫동안, 많이,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참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이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는 구절은 전통본문에는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비록 저희에게 오래 참으실지라도”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 보기에 때때로 더디다.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때때로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다가 낙망하기 쉬우나 낙망치 말고 기도 응답을 기대하며 인내하며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人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속히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시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롬 12:19).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을 반드시 벌하실 것이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고(계 22:12) 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20). 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주께서는 반드시 속히 오실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그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속히 응답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더딜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으시고, 그의 시간표가 우리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완벽하고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조금 더 참고 기도하면 그는 ‘속히’ 우리의 기도 제목과 우리의 원통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성경에는 고난 중에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은 예들이 많다. 신약시대에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베드로까지 죽임을 당한다면 교회에는 큰 손실과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로, 헤롯이 그를 잡아내려 한 그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시켜 주셨고 원수들의 계획과 기대를 폐하셨다(행 12장).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다. 그 날에, 죽은 성도들은 살아나고 모든 성도들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의 세상은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물질적 부요와 평안, 그것과 더불어 생기는 육신적 쾌락과 죄악들이 믿음 없음의 큰 요인일 것이다. 세상 나라의 특징은 각종 불경건한 사상들과 종교들과 음행과 사치이다(계 18장). 가난과 고난과 질병은 오히려 사람의 구원과 참 믿음을 위해 유익하다.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 사람들로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고 음란하게 만든다.

주의 재림 직전은 믿음 없는 시대, 배교 시대가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 “[재림 직전에] 먼저 배도(背道)[배교]하는 일이 있고.”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어려운] 때가 이르리니.” 디모데후서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주께서는 멸망할 세상보다 교회를 더 염려하신다. 그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그들의 기도 생활이 식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 기도 생활은 믿음에 비례한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에서 믿음이 약해지지 말고 열심으로 밤낮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어려운 일에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자녀들이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다. 기도 응답은 때때로 더디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믿음이 견고해져야 하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

 

9-17절, 겸손과 순진함

[9-10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높은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이 명령을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키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 범하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위로 범하는 죄만 죄가 아니고 마음으로 범하는 죄도 죄이다. 탐심 즉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마음으로 범하는 죄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5:28),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3:15).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게 된다. 자기의 부족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보고 그를 멸시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큰 결함이 있을 수 있는데도 남의 결함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크고 작은 결점을 깨닫는다면 남의 결함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이야기를 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자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중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다. 바리새인은 그 당시 성경을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로 알려져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신 대상들 곧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반면에, 세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했었으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 있었다.

[11-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프로스 헤아우톤)[자기 자신에게](NASB)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에게 하는 독백과 같은 기도이었다는 뜻 같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자’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을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죄인들과 구별했다. 그는 또 자신을 성전 한쪽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와도 구별했다. 그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고 멸시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매우 경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금식은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의 십일조 생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누리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13-14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함을 자랑할 것이 없었고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과 자기 속에 죄악된 성질들을 많이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었다.

주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실 수 있다. 그는 그 세리가 그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평가하셨다. 그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경건하고 의롭게 보이는 그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가? 그에게는 자신의 죄성(罪性)과 죄인 됨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죄, 혹은 아는 데도 불구하고 의로운 척하는 기도를 올렸다면 위선의 죄, 또 남을 멸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가 있다. 사람은 자신이 꽤 의로운 줄 알고 자신을 높이면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고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배당에 드나드는 자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외적으로는 종교적 의식을 잘 지키지만 자신의 부족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세리처럼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 참된 신자이다.

[15-16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어린 아기들을 가진 부모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책망했다. 그들은 그 부모들이 예수께서 자기 아이들을 사랑해주시기를 원하는 욕심을 가지고 그를 번거롭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부르셨다. 그는 믿는 이들의 어린아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용납하셨다. 주께서 아이들을 용납하신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구약시대의 할례에 대한 규정에서 명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 그 아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거하셨다(창 17:10-14). 믿는 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는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이런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가 된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그 후에 그들을 교회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유아들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 표시로 교회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의 성품은 천국 백성에게 필수적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단순하고 순진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본다. 참된 믿음은 어린아이같이 단순함과 순진함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다.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서 그것을 잘 믿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잘 믿을 수 있고 그때 그는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수 있다.

경건했던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지 8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였다(대하 34:1-3). 사도 요한의 제자요 순교자인 폴리갑은 아홉 살에 하나님을 믿었고,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백스터는 여섯 살에, 18세기에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일곱 살에, 유명한 찬송저자 아이삭 왓츠는 아홉 살에 각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사람은 어릴 때에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고 그런 자는 커서도 그 믿음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 같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더기 같은 자신의 행위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우리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고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믿는 가정의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그를 영접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는 가정의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할례 제도의 근거이며 신약시대에 유아세례의 근거이다. 또 어린아이는 단순함과 순진함의 장점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순진하게 받아야 한다. 물론 그 말씀은 진실한 말씀이다.

 

18-30절, 영생의 길

[18-19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관원은 고급 공무원이며 지식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속이는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보았으나, 이 관원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보았고 영생의 길에 대해 물었다. 그는 현세를 넘어서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관원이 그를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단지 선한 사람으로 여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람은 다 악하다(롬 3:10). 사람은 죄성이 있어서 항상 선하게 살지 못하며 오직 거듭난 자는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조금 거룩과 선의 열매를 맺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뿐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딛 2:13; 요일 5:20). 하나님만 선하시며 죄와 불결과 악이 없으시며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다.

[20-21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이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율법의 내용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사실은 사도 바울도 증거하는 바이다(롬 10:5; 갈 3:12). 단지, 사람이 그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할 뿐이다.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힘썼던 것을 보면 그는 꽤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마가복음 10:21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 관원의 계명 준수는 실상 영생을 얻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완전한 의가 되기에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 관원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사람마다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관원의 경우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한 것이 부족이었다.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주님의 초청보다 더 컸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주님의 말씀은 그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재물을 초월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며 또 선행과 구제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선행과 구제의 실천은 그가 재물을 초월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둘째,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원적 선행과 구제에 대하여 천국에서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고전 9:17).

셋째,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께서는 아무에게나 이런 초청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특별한 초청이었다. 실상, 여기에 구원의 참된 길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시며 영생의 길이시다(요 3:16; 행 16:31; 롬 3:21-22). 우리는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하거나 사랑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 관원은 큰 부자이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재물을 버릴 수 없었다.

[24-25절]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저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전통본문)68) 가라사대 재물(국한문,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26-27절]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구원 얻는 것은 다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께 즉 하나님의 능력의 손안에 있다. 사람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28-30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 곧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인 신약교회가 우리 모두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 모두의 가족임을 뜻하신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가족이다(마 12: 50; 눅 8: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외롭지 않다. 또 그런 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복보다 더 귀한 복인 영생을 얻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영생의 길은 하나님의 계명 순종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관원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주의 명령을 지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지키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영생의 길은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예수님을 거절했으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롬 10:4).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헛된 줄 알아야 하고(시 39:5-7; 전도서) 재물을 가지고 우리보다 어려운 주위의 이웃을 위해 선행과 구제에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에 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와, 일용할 양식의 공급과, 심신의 평안과, 또 내세에 영광의 천국과 영생 등에 대한 약속이다. 돈 사랑을 버리고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확실히 영생의 길이다.

 

31-4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人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는 며칠 후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아시면서도 그리로 올라가셨다. 그때 그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人子)에게 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의 글인 구약성경은 번제 등 여러 가지 제사들이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 등의 예표들을 통해 또 직접적 예언들을 통해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구약의 모든 내용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될 것이다.

[32-33절] 인자(人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 곧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예표되었거나 예언된 바이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으시고 능욕을 받으시고 침 뱉음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표하였거나 예언하였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암시했다. 구약시대의 짐승 제사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유월절 어린양도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성막 제도도 메시아의 피 흘리실 속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더욱이, 이사야 53:5은 메시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과 죽음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또 스가랴 3:9도 메시아의 고난을 암시했다.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둘째로, 예수께서는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실 것이다. 이것도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이었다.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예언하였다(호 6:2). 이 예언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제3일의 부활로 표현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시작이며 그 증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죽음은 단지 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메시아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날 수 없고 그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메시아께서 그 몸이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행 2:25-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복음의 골자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고전 15:3-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이며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의 진실함을 확증하였기 때문이다.

[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의 말씀하신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

[35-37절]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 없었고 물질적으로 도와줄 가족도 없었다. 그는 구걸하는 거지이었다. 그 소경은 무리의 지남을 듣고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심을 알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불쌍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38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음을 나타낸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 예레미야 23: 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 소경 거지의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고 생각했고 그를 메시아로 깨닫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 소경은 지체치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다. 그것은 겸손한 부르짖음이었다.

[39절]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앞서 가는 자들의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꾸짖을 것이 아니라 그를 동정하고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믿음의 길에는 때때로 방해거리가 있고 그것은 때때로 먼저 믿는 자들의 잘못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경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중단치 않았고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질렀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운 방해거리나 문젯거리를 하나씩 극복할 때 더욱 강해진다.

[40-41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소경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다. 예수께서는 간구하는 자를 외면치 않고 불러주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는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오늘날도 모든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도, 구원도, 내세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것을 알고,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

[42-43절]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예수님을]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그가 “보아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예수께서 사람을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신적 구주이심이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사람을 불행에서 건져내시기에 유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나 구원은 단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구약성경은 예표들과 예언들을 통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또 그가 다윗의 자손이심을 증거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셨다는 것과 또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고난의 종이셨다. 그는 그가 친히 예언하신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받으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길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가 고난의 길을 가셨음을 알고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도우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다. 우리에게 큰 구원을 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다른 모든 문제들도 도우실 수 있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무슨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고침 받은 소경과 같이 오직 불쌍히 여기심을 구해야 한다. 그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믿음도 적고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도 보잘것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얻었고 구원 얻은 후에도 여전히 부족투성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응답을 구해야 한다(요 14:13-14).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0절, 삭개오를 구원하심

[1-3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예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셨다. 이 일은 여리고 성 안에서 되어진 일인 것 같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며 또 부자이었다. 세리는 로마 정부의 관리로서 세금을 징수하는 공무원이고 세리장은 그들의 수장(首長)이다. 당시에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되었다(7절). 그것은 그들에게 불법한 일이 많았음을 암시한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가 어렵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눅 18:24).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지 회개하고 구원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상종하지 못할 자로 여기며 그를 멀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다.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신 것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약간 알고 있었고 끌리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해 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주위 사람들 때문에 주께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4-5절]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행하는 길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꼭 보아야겠다는 열심이 있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이나 체면이나 혹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뽕나무’라는 원어(쉬코모라이아--전통본문)는 ‘시카모 무화과’ 혹은 ‘무화과 뽕나무’라는 말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그 뽕나무 아래에 도달하셨을 때 그를 우러러 보시며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인다. 그는 그의 신성(神性)의 지식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는 오늘날도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시고 구원하실 자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 그는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또 삭개오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고 보인다. 가정적 구원은 확실히 큰복이다.

[6-7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너무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마 그의 생각에, 거룩하신 예수께서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으시고 자기를 대면하시면 필경 책망하실 것 같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책망하는 대신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그의 이런 반응을 보면, 그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고 자기 집에 들어와 주신다니 그의 마음은 더욱 감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하여 수군거렸다. 사람은 상대방의 행위의 동기를 알지 못하고 수군거리는 일을 잘한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죄인과 친구가 되어 그의 죄를 인정하거나 그와 함께 죄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우리 자신의 제한된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강제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존칭 이상의 뜻이 있어 보인다. 사실, ‘주님’이라는 그 명칭은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신성(神性)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삭개오는 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만일 남의 것을 억지로 혹은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은 바른 회개를 보인다. 참된 회개는 죄의 청산이다. 예수님 앞에 선 삭개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적 감화와 성령의 내면적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9-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가정적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셨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고 죄를 청산하기를 결심하였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청산하기를 원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단지 사람들의 병들을 고쳐주거나 기적들을 행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지옥의 벌을 받을 운명에 처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죄인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고 그 집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를 구원하셨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의 주관심은 영혼 구원이었고, 그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9:13에 보면, 그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전통사본).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의 계승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사명을 이어받아 한 명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둘째로, 삭개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고 생각하였고 만나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오늘날 죄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즉 개인적 성경 읽기나 교회에서 성경적 설교나 교훈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디모데후서 3: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셋째로,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하며 회개는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회개의 한 열매는 구제이다. 구제는 세상 사랑, 재물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표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자와 통치자와 심판자이심을 믿고 세상의 것들은 헛되고 천국의 것들은 영원함을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악된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 참된 회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이다.

 

11-27절, 열 므나의 비유

[11-12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삭개오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그는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다. 그가 이 비유를 하신 까닭은 자기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지만,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영적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이 신약교회이지만,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다. ‘왕위’라는 원어(바실레이아)는 ‘왕국’(나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셨다. 그는 지극히 존귀하신 분,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요 1:1, 14). 그는 왕으로 오셨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왕으로서 통치를 하지 않으신다. 물론 지금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는 장차 다시 오심으로 그의 왕 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영광과 능력의 왕이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위해 먼 나라로 가실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가 부활 승천하셔서 가신 천국, 그가 지금 계신 그 천국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며 그가 왕위를 받아서 왕의 영광을 가지고 돌아오시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해가 걸릴 것 같다.

[13-14절]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그 귀인은 그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하였다. ‘그 열 명의 종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의 재능대로 어떤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 한 달란트는 60므나이며, 한 므나는 100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100일 품삯이었다.

그 귀인은 그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했다. 한 므나는 동일한 임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주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를 가리킬 것이다. 장사하는 것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주신 임무에 충성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귀인이 돌아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임무를 주셔서 주의 재림의 날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참 교회를 건립하는 일에 충성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백성은 그 귀인을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그 백성은 인류를 가리킨 것 같다.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적대적이다. 심지어 구약교회나 신약교회 조차도 때때로 배교적이고 불신앙적이며 불순종적이었다. 이것은 무지하고 죄악된 사람들의 본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변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무지하고 반항적인 이 본성의 병폐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15-17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불렀다. 주 예수께서는 영광 가운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미래의 확실한 사건이다. 다시 오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이 얼마나 충성되이 일하였는지 평가하실 것이다. 재림하신 주께서는 친히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말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말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비록 한 므나는 장사하기에는 별로 큰 자본은 아니었겠지만, 그 종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적지 않은 이익을 남겼다. 그는 놀지 않았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인은 그 첫 번째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주께서 충성한 제자들에게 내리실 상이다. 주께서 주실 그 상은 우리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18-19절]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두 번째 종도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는 비록 첫 번째 종처럼 열 므나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다섯 므나나 남겼다. 제자들의 열심과 충성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좀더 열심히 일할 것이고 다른 이는 그보다 좀 못할 수도 있다. 또 종들의 일한 정도에 따라 그의 일의 결과도 다를 것이다. 주인은 그 두 번째 종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과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게는 그들이 일한 만큼의 상이 주어질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의 행실의 정도에 대해 다른 상급을 말한다. 마태복음 16:27, “인자(人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전도자]와 물 주는 이[목회자]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20-23절]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이자]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세 번째 종은 그가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합당치 않은 생각을 하였다. 종의 임무는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그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 두려워했고 불평했고 부정적이었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이었다. 종의 임무를 하지 못한 그는 악한 종이었다. 그가 주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였다면 그 은을 은행에 두어 주인이 올 때 이자라도 받게 해야 옳았다. 그 종은 주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두려움과 불만을 가진 것뿐 아니라, 또한 지혜가 없었고 게을렀다.

[24-27절]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주께 대한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있는 자는 상을 받고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없는 자는 심판 날에 그가 가지고 있던 것조차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주인은 또 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았던 원수들을 끌어다가 자기 앞에서 죽이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순종했던 사람들의 결말을 보인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고 말했다(마 25:30). 그는 지옥의 형벌과 고통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왕권을 가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신약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은 미래에 있다. 그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의 재림의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계 22:20).

둘째로, 구원 얻은 성도의 지상 생애는 일하는 기간이다. 본문은 그것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장사는 이익을 남겨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성도로서 행해야 할 임무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도의 임무를 수건에 싸두듯이 싸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모든 성도에게 주신 임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며 참된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일들에 충성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고 그의 공의로운 보상과 보응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이며 다른 하나는 벌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있는 자 곧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있는 자는 천국에서 그 행한 대로,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을 받을 것이다. 그는 좋은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 곧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없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행한 대로, 그의 악함의 정도에 따라 지옥에서 엄한 고통의 벌을 받을 것이다.

 

28-48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28-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 중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신 것은 그가 말씀하실 일에 대한 두 증인의 증거를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그가 그 마을에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의 신적인 지식을 증거한다. 그는 멀리서도 그 나귀새끼를 아셨다.

예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뜻도 있지만(슥 9:9; 마 21:4-5), 또한 그의 겸손하심을 나타낸다. 또 그가 다른 사람의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것은 그의 가난한 삶도 보인다. 그는 온 세상의 소유자이셨지만, 이 세상에서 나귀새끼 한 마리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31-34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가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났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은 예수께서 그 나귀새끼의 참 주인이 되심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신가? 우리의 모든 소유물의 참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께서 참 주인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또 그 나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35-38절]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예수님을]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하늘 안에, 하늘 아래]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들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거나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편 것은 그들의 겸손함과 주님을 향한 경외심을 보인다. 또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이 보았던 모든 능한 일들 즉 기적들을 인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 아래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말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증인들이며 그 기적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레미야 23: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하늘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평안을 메시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바른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39-40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선생’ 정도로 알고 존경하였을지는 몰라도 그를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로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찬송과 고백이 정당함을 증거하셨다. 돌들은 이방인들을 표현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돌 같은 무가치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주실 수 있다.

[41-44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돌아보시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우심에 대해 본문 외에 두 번 더 증거한다. 한번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이었고(요 11:35), 다른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이었다고 보인다(히 5:7). 그는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그 성이 멸망할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되었고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에 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내다보셨다. 그것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성은 여러 날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 거민들과 자녀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했고 성전과 집들은 다 무너졌고 불태워졌다.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고 죽인 결과는 그렇게 비참하였다.

[45-46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전통본문)69)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집이다. 그러나 당시에 성전은 그렇지 못하였다. 성전 안에 소나 양들을 파는 자들이 있었다. 성전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위한 소나 양들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 그것은 도적질이나 강도질과 같았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어느 교회가 장로와 권사 같은 직분자들을 세우면서 혹은 병고침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헌금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강도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자하신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성전을 향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다(요 2:17). 성전의 청결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문제이었다.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 교회에서 모든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오류를 제거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 교회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47-48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단지, 그들은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그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였고 함께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두 명의 제자를 보내어 나귀새끼를 끌고 오게 하시면서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 그 나귀새끼는 주인이 있는 나귀이었다. 33절,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나귀의 참 주인이셨다. 그는 그 나귀뿐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인이라는 말은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천지만물의 주인은 없다.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다.

둘째로, 모든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왕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즉 그는 신적 왕이시다. 그것은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신적인 왕께서 메시아로 오실 것을 예언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다윗 왕으로 표현된 메시아의 강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육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심령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계명을 순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며 서로 사랑함을 실천케 될 것이다. 주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인정하고 고백한 것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 때문이었다. 또 성경은 그의 기적들에 더하여 그의 부활을 그 증거로 추가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가 신적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새 세계를 시작하기 위해 오신 신적인 왕이시다.

셋째로,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미워하고 시기했고 배척했고 그를 죽이려고 공모하였고 그 일을 성취하여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시기와 배척을 받으셨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셨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고 배척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었다. 요한복음 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음을 알고 이제 고난을 각오하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

 

20장: 변론하심

1-18절, 포도원 비유

[1-2절]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때 하루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가까이 와서 그의 권세 혹은 권위의 출처를 질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나 기적들을 행하실 때나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실 때 권위 있게 행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단지 그에 대한 비난거리를 찾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것 같다. 정말 믿고자 하는 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 수 있었다.

요한복음 7:16-1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교훈은 하나님의 교훈이셨다. 사도행전 10:38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이라”고 증거하였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일하셨다.

[3-8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임박함과 각 사람의 회개의 필요성을 외쳤다. 거짓 선지자들은 부드러운 말을 했고 심판과 회개를 외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는 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다 인정한 바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세례는 분명히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것 곧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대답을 회피한 것은 그들의 비겁함을 보인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이 참 선지자임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예수님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고, 또 “내가 보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셨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께서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시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말하였다(요 1:29, 32-34).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함을 아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과 같다(마 7: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함과 자신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증거하셨다.

[9-12절]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한 사람’ 곧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 곧 구약교회를 가리킨다. ‘농부들’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왕들과 방백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주인이 얻기를 원한 ‘포도원 소출’은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 즉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과 이웃 사랑과 선행을 가리킬 것이다. 주인이 보낸 ‘종’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여러 번 자기 종들을 보내셨으나,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거절하였다.

[13-16절]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자기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말과 행위가 어떤 권위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선지자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者)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자(獨生子)] (전통본문)70)께서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또 그는 자신을 죽일 그 지도자들의 결말도 증거하셨다. 주인은 와서 그들을 다 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17절]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시편 118:22의 말씀은 메시아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머릿돌은 벽을 쌓는 데 기준이 되며 두 벽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돌이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택자들의 죄를 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그는 택함 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셔서 한 교회가 되게 하셨다. 신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터 위에 튼튼히 세워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18절]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심판 사역을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완악한 죄인도 그가 깨뜨리시면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부서져야 하고 우리의 새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깨어지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다니엘 2장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채석된 돌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을 쳐서 부수니 그것은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단 2:34-35). 그것은 신적 메시아의 구원 사역을 보였다.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켜 의인 되게 하시고 세상 나라가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신다. 온 세상에서 택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셨고 기적을 행하셨다. 그는 성육신 하신 자 곧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자이시며(요 1:14),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자이시며(요 3:34) 그가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심으로써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자이시며(행 10:38) 그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자이시다(골 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해주셨다(눅 3:33).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들었다(눅 9:35).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0:31은 “이것[요한복음]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셋째로,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영접했고 믿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제 예수님 믿는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하여 잘 지어져 가야 하고(엡 2:20-22), 교회의 목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말했다(엡 4:11-16). 이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성화이다.

 

19-44절, 변론하심

[19-22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교묘하게 그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정탐자들을 보내었다. 그 정탐자들의 말은 옳은 말이었으나,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 믿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독립을 갈망하며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찬성하면 친(親)로마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며,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면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머리를 썼다.

[23-26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왜 나를 시험하느냐?](전통본문)71)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畵像)[얼굴]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아셨고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데나리온은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이었다. 동전이나 은전에는 당시 로마 황제의 얼굴과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나타내었다.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한 영토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이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세상 나라에 속한 국민인 한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13:7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므로(시 24:1) 또 우리는 그를 섬기는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십일조와 감사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27-33절]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파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행 23:8).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비슷했다. 이 세상은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이며 모든 사람은 죽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부활과 천국을 믿지 않고 이 세상만 믿으니, 참으로 허무한 자들이다. 그들이 언급한 모세의 법은 ‘수혼(嫂婚) 제도’라고 불리는 법으로 신명기 25:5-6에 있다. 이 법은 결혼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처음 낳은 아들로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법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식이 없이 죽는 사람의 가문이 없어지지 않게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오실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진 법이었다고 보인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사실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부활 때 결혼 관계가 있다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 경우에 대해 질문했다.

[34-3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해 몇 가지 증거하셨다. 첫째로, 복된 부활은 합당한 자들만 누릴 것이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5:28-29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고 복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요 3:5).

둘째로, 부활한 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은 세상에서만 필요하고 천국에서는 필요치 않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자녀 출산이 필요치 않고, 부활한 몸은 육신의 정욕과 죄성도 없을 것이다.

셋째로, 부활한 자들은 다시 죽지 않는다. ‘천사와 동등하다’는 말은 사람이 천사처럼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천사처럼 결혼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국에는 사망이 없고 질병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계 21:4).

[37-40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께서는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증거하셨다. 그는 부활에 대해 직접 증거하는 구절(사 26:19; 단 12:2)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이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에 대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 속에 죽은 자의 부활의 진리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 즉 죽은 인물을 기억하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은 다 죽었지만, 그 영들은 천국에 살아 있고 그 육체들도 어느 날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의인들의 영광스런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부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 소망을 확증하셨다.

[41-4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이제 예수께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심으로 그들에게 한가지를 질문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23:5,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께서 다윗의 주님이실 것도 예언했다.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이사야 9:6,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다윗의 가지’는 그의 인성(人性)을, ‘다윗의 뿌리’는 그의 신성(神性)을 보인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두 영역에서 살고 있고 그 두 영역에서의 그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있다. 우리는 주일을 온종일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로 지키며 소득의 십일조 이상과 감사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또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포함한 모든 의무를 행해야 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둘째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으나,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도들의 복된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부활의 능력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확증이다. 악인들의 부활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이르는 부활이지만, 의인들의 부활은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영생할 복된 부활이다. 의인들의 부활의 몸은 썩지 않는 몸, 아름다운 몸, 강한 몸, 죄성이 없고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영적인 몸이다(고전 15:42-44).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이시며(마 1:1) 또한 ‘다윗의 뿌리’(사 11:10)와 ‘다윗의 주’(시 110:1)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이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으시나 신성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으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며 우리의 기쁨과 위로와 힘과 도움이 되신다. 그는 어떤 어려운 환경여건에서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와 힘을 주실 수 있다.

 

20:45-21:4, 외식하는 서기관들, 한 과부의 헌금

[45-46절]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조심하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외모를 중시하며 외식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도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딤전 2:9). 또 예수께서는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것은 명예욕과 교만이다. 명예욕이 있고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며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모르는 자들이다.

[47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오이키아스)[집들]을 삼키며 외식으로(프로파세이)[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형벌]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외식하는 서기관들은 과부의 집들을 삼켰다. 참 경건은 어려운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 선한 마음으로 나타난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외식하는 서기관들은 또한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였다. 성도가 진심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약 3시간이나 기도하셨다. 또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신 적도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한 내용이 없이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의 받는 형벌이 더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나 학력이나 재산 같은 외적인 조건을 크게 여기지 말고 그가 가진 바른 지식과 사상,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 바른 인격성과 도덕성을 크게 여기고 귀히 여겨야 한다.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1-4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하나님의](전통본문)72)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헌금으로 십일조와 감사예물을 드리게 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10분 1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10분 1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행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 때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말아야 하였다(출 23:15). 잠언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가 성전 봉사의 일을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이게 하셨다(민 18장).

십일조와 첫열매 등 헌금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었다. 말라기 3:10,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잠언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헌금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특히 고린도후서 8-9장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헌금은 (1) 하나님의 은혜이며(8:1; 9:14), (2) 간절히 소원할 만하며(8:4), (3)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가능하며(8:5), (4) 진실한 믿음과 순종과 사랑의 증거라고 말하면서(8:8; 9:13), 그것을 “풍성하게 하라”고 교훈했다.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부자들은 헌금함에 헌금을 많이 넣었던 것 같다. 그는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도 보셨다. 렙돈은 유대인의 동전으로서 당시 통용되던 돈들 중에 가장 가치가 적은 돈이다. 1렙돈은 128분의 1 데나리온이었다. 1데나리온을 10만원쯤으로 보면, 그 과부는 이천원쯤 헌금한 셈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하나님의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부자들은 풍족한 처지에서 헌금하였으나 그 과부는 어려운 처지에서 그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절대 평가를 하지 않으시고 상대 평가를 하신 것이다. 즉 그는 그 헌금을 그의 소득과 재산 정도에 비교하여 평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헌금 액수만 보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재산이나 수입 정도에 비추어 보신다. 이 가난한 과부는 지나칠 정도로 헌금하였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십일조를 언급한 것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면서 멜기세덱에게 자기가 얻은 노획물의 10분의 1을 드린 것이었다(창 14:20).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감사 행위이었다. 창세기 28:22에 나오는 야곱의 십일조 서약도 자발적인 것이었다.

구약의 헌금 규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정신에 근거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자식이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듯이,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의 주 되심에 대한 인정과 감사의 표시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사모하므로 금 3천 달란트(약 100톤)와 은 7천 달란트(약 240톤)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뒤를 따라 나라의 지도자들과 관리들도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해 많은 금액을 즐거이 드렸다. 그때 다윗은,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대상 29:11, 14). 그렇다! 헌금은 우리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들 중에서 얼마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하나님의 헌금”이다.

이런 말씀들을 살펴볼 때, 본문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된 헌금의 귀한 본이다. 그의 헌금은 십일조 정도가 아니었다. 비록 금액은 보잘것없어도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며 과부의 집들을 삼키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는 외식자들이며 세상의 명예욕과 교만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경건한 자들이 아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고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약 1:27). 우리는 외식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외식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좋은 인격이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마태복음 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또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2:9-10,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 또 우리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참된 경건은 좋은 인격으로 나타난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헌금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헌금은 성도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표시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가 간절히 소원할 만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헌금의 규례는 십일조와 헌물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취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약시대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풍성하게 드려야 한다. 그것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 이상이라고 본다. 참된 경건은 헌금으로도 나타난다.

 

5-38절, 주의 재림을 대비하라

[5-8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美石)과 헌물(獻物)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그러므로](전통본문) 저희를 좇지 말라.

예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날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때의 징조로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9-11절]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는]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무서운 질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날과 함께 세상 종말의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시며, 민족들 간에와 국가들 간에 전쟁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인류는 20세기에 와서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처참한 전쟁을 경험하였고 이제 3차 세계 대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또 처처에 큰 지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큰 지진들은 20세기 이후 더 빈번해졌다. 그는 또 기근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전 세계에는 8억명 이상이 기아 상태에 있다고 한다.73) 또 그는 무서운 질병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류는 고혈압, 암 등의 질병은 물론, 에이즈나 코로나 전염병 등을 경험하고 있다. 또 그는 하늘에 무서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세계에는 폭풍, 홍수, 폭설, 폭염 등의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12-19절]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준비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얻으라](전통본문).74)

예수께서는 또 먼저 핍박과 순교의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핍박과 순교의 역사이며 아직도 지구의 여러 곳에서는 핍박과 순교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들 중 몇몇은 순교를 당할지 모르나, 대다수는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계 13:10; 14: 12).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부활의 몸으로 영생에 이를 것이다.

[20-21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그것과 자신의 재림을 연관시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유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산으로 피신하였고 성 안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성밖으로 나갔다.

[22절]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보응]의 날이니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말씀들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연약함을 보였고,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께서 오셨는데도 그를 영접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가장 극악한 범죄 행위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상당한 보응과 벌을 내리실 것이다.

[23-24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그 환난의 날에는 임신한 여인들과 젖먹이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피신하거나 먹을 양식을 얻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또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이방 나라들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에 칼과 기근에 죽은 유대인들이 110만명 이상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9만 7천명이었다고 한다.75) 특히,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어 교회 안에 들어오기까지라는 뜻일 것이다.

[25-26절] [그리고] 일월성신(日月星辰)[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주님의 재림 사이에는 긴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주께서는 그 간격을 무시하시듯이 말씀하셨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 하늘에서 불붙은 칼과 혜성(彗星)과 불빛과 병거와 군대 등이 보였다고 하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런 내용을 전하였다고 한다.76)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에 더 놀랍고 두려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27절]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러한 징조들이 있은 후에, 주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마 24:30; 행 1:9-11; 계 1:7). 그의 재림은 그의 초림(初臨)과 너무 대조될 것이다. 초림 때에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그 어린 아기는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이셨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위엄과 영광이 넘칠 것이다. 그는 심판하시는 왕의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이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救贖)이 가까웠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우리의 몸의 구속(救贖)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롬 8:23-24). 주의 재림 때에 우리의 몸은 죄성이 전혀 없는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분발하고 힘을 내어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의 어려운 일들로 심신이 연약해질지라도 우리는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한다.

[29-31절]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무화과나무는 여름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어 가을에 추수한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싹이 나는 것을 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징조들은 거짓 그리스도들의 나타남, 전쟁들과 지진들과 기근들과 악한 질병들, 핍박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들 등이다. 오늘날 그 징조들은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32-3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주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증거한다.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의 예언은 그가 말씀하신 지 약 40년 후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또한 이 세상을 가리키며 주의 재림 직전에도 비슷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덧붙여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하신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천지는 없어져도, 주의 말씀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34-35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덫같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세 가지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등이다. 방탕함은 과도한 쾌락의 추구를 가리킨다. 사람이 어떤 즐거움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또 술취함도 성도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술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전 6:9-10). 또 생활의 염려도 성도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생활의 염려는 실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이다.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덫과 같이 갑자기 임할 것이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人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장차 올 멸망을 피하고 영광의 구주 앞에 기쁨으로 서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대환난을 통과할 것이다(마 24:21, 29; 행 14:22; 살후 2:1-3; 계 7:14.). 그러나 깨어 있는 자들은 그 대환난에서 멸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계 13:10; 14:12).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며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능력을 간구하며 얻는다.

[37-38절]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은 많은 이단사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고 거짓된 기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우리는 바른 교훈으로 거짓 목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징조들을 살피며 핍박 중에서도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재림의 징조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환난과 핍박 중에도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조심해야 한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물이다. 참된 믿음은 경건한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과도한 쾌락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과 근심걱정을 조심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생활은 성경 읽고 기도하며 성경 교훈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복습하고 그 내용을 다 믿고 순종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며 다시 결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능력을 간구하며 얻어야 한다.

 

22장: 잡히심

1-23절, 마지막 유월절 식사

[1-2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놓여나오기 전날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장자 재앙을 내리신 날을 기념한 절기이다. 그 날에 애굽 사람들의 장자들은 다 죽었으나, 심판의 천사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집문의 상하와 좌우 기둥에 발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건너갔기 때문에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라고 부른 것이다. 유월절은 무교절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공적인 전도사역 기간 중 아마 네 번째인 유월절이 가까웠다(요 2:13; 5:1; 6:4; 11:5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까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선택된 지도적인 닌물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과 회원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성경 사본들을 만드는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롭게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연구하고 있었다. 의롭고 선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악한 일이었다. 또한 백성의 여론을 의식해서 그럴듯한 명분을 찾아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은 더욱 악한 일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를 죽이려 한 것은 가장 큰 악이었다.

신약성경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까닭을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마 12:14; 요 5:16 전통본문). 둘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요 5:18; 마 26:65-66). 셋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을 악하다고 하시므로 그를 미워하였다(요 7:7). 넷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마 27:18; 막 15:10).

[3-6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동의하고](NASB, NIV) 예수[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택하신 사도들인 열둘 중의 한 사람의 배신이었다. 그는 일반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의 기적들을 다 보았을 것이고 인격적 감화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상식과 양심을 벗어난, 배신이라는 악한 행동을 하였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하자, 그들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했다. 마태복음 26:15에 보면, 유다가 먼저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들은 은 30을 주었던 것 같다(NASB, NIV). ‘은 30’은 은 30스타테르(120데나리온)이든지 아니면 은 30세겔(60데나리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유대 지도자들과 약속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백성의 반대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민첩하게 처치할 시간을 찾고 있었다. 유다는 확실히 돈을 사랑했고 3년간 따라다녔던 주님을 배신했다. 하나님 없는 자들, 경건을 저버린 자들의 특징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즉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의 이유를 몇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그의 불신앙이다(요 6:64). 그는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 둘째는 그의 돈 욕심이다(마 26:15; 요 12:6). 그의 돈 욕심이 결국 그를 배신자가 되게 하였다. 셋째는 사탄의 활동이다(눅 22:3; 요 13:27). 악한 일 배후에는 언제나 사탄의 활동이 있다. 넷째는 하나님의 작정이다(눅 22:22).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있다.

[7-13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유월절과 무교절은 본래 시간적 차이가 있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며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간이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로 보았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은 시간적으로 붙어 있다. 유월절의 저녁이 끝나면 무교절이 시작된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때때로 동일시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계획한 일과 유월절 양 잡는 날은 일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과 예표가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처럼 택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구원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나 그 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갖춘 한 큰 다락방을 제공받아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였다. 그 준비 과정에서도 예수님의 신적 지식의 영광이 드러났다.

[14-20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열두](전통본문)77)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나를 기억하면서 이를 행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이 마지막 유월절 음식 들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속죄사역을 이루셔야 했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장차 천국에서 기쁨을 충만히 누릴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16, 18절). 하나님의 나라는 두 단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신약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물론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떡을 가져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그는 유월절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실 것이다. 에베소서 5:2, “그는[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주께서는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성찬은 주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의식을 행해야 한다. 이 의식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 있다. 즉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신 일을 기억하는 데 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저녁 먹은 후 예수께서는 잔도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는 유월절 식탁에서 마시는 포도즙이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자신이 내일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피로 표현하셨고 그 피는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그것이 율법이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며 그것이 복음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둘 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피로 죄사함을 얻는다.

[21-23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人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그 유월절 식탁 자리에 있었다. 주께서는 “인자(人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큰 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죄는 큰 죄이었지만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선하고 악한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일들이 된다. 범죄의 책임은 분명히 사람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와 죄악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사람들의 악한 행위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패케 하지는 못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구하였다. 이웃을 죽이거나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더욱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미움과 시기와 악독을 버리고 믿는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죽이지 말고 그런 악한 일에 동참하지도 말아야 한다. 

둘째로, 가룟 유다는 믿음이 없었고 돈에 대한 욕심과 사탄의 시험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딤전 6:10). 우리는 돈 욕심을 버리고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야고보서 4:7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한다.

셋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가 흘리신 피는 새 언약의 피이었고 우리는 그 보혈로 죄씻음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늘 감사하고 우리의 온 마음과 몸과 힘과 생명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 또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 다시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그의 대속의 은혜를 배반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넷째로,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다 이루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시다. 가룟 유다의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물론 가룟 유다는 그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실패하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렵고 힘든 환경여건에서도 낙망치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굳게 믿어야 한다.

 

24-46절,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24-27절]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恩人)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우두머리]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이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있음이노라].

예수께서 조금 전에 자신이 한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 때에 제자들이 누가 크냐 다투었으니 참으로 사람은 부족한 존재이다. 제자들의 문제점은 명예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한 데 있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문제점이다. 교만은 사람 속에 가장 뿌리깊은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딤전 3:6). 세상에서는 큰 자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지만, 교회에서는 큰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마 23:11-12).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사람이 되어 자신을 속죄제물로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또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빌 2:5-8).

[28-30절]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주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오해와 비난과 미움을 당하셨으나,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했다. 주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보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나라를 그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며, 그들로 장차 충만한 즐거움과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주를 위해 일한 일꾼들은 자기의 일하는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7-8).

[31-34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베드로를 시험하였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고백했으나 그는 그 날 밤 주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것은 큰 실수와 범죄일 것이다.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범죄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활동은 제한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 1:12; 2:6).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서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연약해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으나, 죄를 깨닫는 순간 그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버리고 그것을 떠나야 한다. 우리는 회개한 후에야 다른 이들을 굳세게 할 수 있다.

주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의 중보기도는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다. 주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생명줄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믿음 없으면 영생도 없다(요 3:36).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는(요일 5:4) 이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35-38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열두 사도들은 주의 명령대로 전도의 길을 떠났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 우리가 믿음 중심,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만 산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것과 입을 것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물론, 제자들은 계속 기적적인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기적들에 관해 말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제자들에게는 궁핍과 핍박과 죽임 당함도 있을 것이다. 이 후에 제자들은 부지런히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하고 정당한 인간적 방편들을 무시하지 말고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은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또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메시아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을 것이 기록되어 있다(사 53:12). 그러나 여기에 대속(代贖)의 이치가 있었다.

[39-41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께서는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습관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구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의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는 습관 등은 좋은 습관이며 믿음의 성장에 유익하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께서는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는 죄악된 일들과 마귀의 시험들이 많다. 이것들은 우리의 연약하고 부패한 본성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거역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성도가 죄 짓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기도하는 자는 깨어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고 죄를 피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이다. 바울도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행 20:36; 엡 3:15). 우리는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에 대하여 많이 증거한다(시 3:4; 18:6; 27:7; 28:1; 30:2; 40:1; 렘 29:12). 주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끈질긴 강청의 기도와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다(눅 11:8; 18: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늘 기도하되 시시때때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42-44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고통 가운데](KJV, NASB, NIV)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셨고 그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보다 언제나 더 지혜로우시고 선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힘을 구해야 한다.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그의 힘을 도왔다. 예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고 땀은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 ‘힘쓰고 애써’라는 원어는 ‘고통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된다. 우리도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특히 고난과 환난의 날에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45-46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해 잠든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주께서 잡히실 날 밤이었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주를 진실히 믿고 따랐던 그들, 3년간이나 주님의 친 음성으로 은혜로운 교훈의 말씀을 받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하였다. 사람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 우리의 믿음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쳐 복종시키는 연습, 자기 부정과 순종의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겸손히 서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서로 섬길 수 있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의 차이점이어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들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며 선전한다. 그러나 교회는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친히 섬기는 자로 오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온전히 주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그의 겸손과 헌신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생명줄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나,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을 심어주셨다. 그러나 사탄은 그 믿음을 파괴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신다. 우리는 그의 기도와 함께 우리 자신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기를 늘 기도해야 한다. 사람은 연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마음이 해이하면 죄에 떨어지기 쉽다. 우리는 시험에 넘어져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말씀의 교훈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간섭하심을 구하여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고(눅 21:36)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쉬지 말고 기도하고(살전 5:17) 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교훈한다(엡 6:18).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47-71절, 잡히심, 심문 당하심

[47-48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人子)를 파느냐 하시니.

가룟 유다는 주께 입맞춤으로 그를 악한 무리에게 넘겼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그 무리와 약속한 ‘군호’(sign)이었다(마 26:48; 막 14:44). 그는 그 무리에게 예수님을 확인시켜 그를 잡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거짓되고 위선적인 인사이었다. 3년간 주와 동행하며 그의 의롭고 선한 인격과 교훈과 행동을 친히 보았던 유다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악한 유대 지도자들 편에 서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49-51절]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요한복음은 검을 쓴 자가 시몬 베드로라고 증거한다(요 18:10). 그는 의롭고 선하신 주님을 잡는 무리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빼어 주님을 잡는 사람을 쳤다. 그것은 주께서 잡히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워 사형 선고를 받고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후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말씀하셨었다(마 20:18-19). 그는 잡히셔야 했고 죽으셔야 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가실 길이었다.

주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시며 대제사장의 종의 떨어진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그는 자기를 잡는 자까지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의 악행을 참으셨다. 그는 천사들을 동원할 권세가 있으셨으나 그것을 쓰지 않으셨다(마 26:53). 도리어 그는 그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여기에 그의 긍휼과 신적 능력이 다시 증거되었다.

[52-53절]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어제까지 예수께서 성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 앞에서 그를 잡을 만큼 악하게 행동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양심은 그런 정도만큼 그들을 제재하였다. 그러나 이제 악한 자들의 때가 왔다.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왔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때가 왔다. 그들의 양심은 통제력을 잃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고 있었다.

[54-60절] 예수를[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비자(婢子)[여종]가 베드로의[그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그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 사람들은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고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다. 그는 장담했던 대로 주님 가까이에서 그와 함께 당당히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한 여종이 베드로가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며 말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하였다(마 26:69; 막 14:66, 67). 요한복음에는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8:17). 베드로는 그 여종의 말을 즉시 부인하였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그때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마 26:72).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말하였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세 번째에는 베드로가 [아마 자신에 대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 26: 74; 막 14:71).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때에 닭이 곧 울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고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사람에게 행위의 의(義)라는 것은 없다. 모처럼 쌓은 것 같은 의(義)도 한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사람은 의가 없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왔었다. 그는 믿음이 없었고 중생치 못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수는 믿음이 있고 중생한 자에게 있는 연약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54절부터 62절까지의 전통본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7번 나온다(54, 55, 58, 60, 61, 61, 62절).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연약한 본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 담대하고 끝까지 충성한 증거자가 되었다.

[61-62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뜰에 있었던 것 같고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들으셨던 것 같다. 특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목소리는 주님께도 들릴 만한 목소리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주께서는 그의 하는 말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그의 눈은 베드로의 눈과 마주쳤을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과 주께 대한 불신실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통곡이었을 것이다.

[63-65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얼굴을 때리고](전통본문)78)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얼굴을 때리고 물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또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했다. 예수께서는 그런 희롱과 매맞음과 모욕을 당할 잘못을 한 적이 없으셨으나 무지하고 악한 자들은 그에게 그런 악을 행하였다. 사람은 참으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으셨다(사 53:7).

[66-68절]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예수님을] 그 공회로 끌어들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요 놓아주지 않을]79) 것이니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확인하고 믿으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실상,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벌써부터 결심하고 있었다(눅 19:47-48; 20:19).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은 무지하고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3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회개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모양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아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들의 경건한 모양은 위선에 불과하였다.

[69-70절]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人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법정 앞에서 자신에 대해 엄숙히 증언하셨다.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 하신 그의 증언은 자신의 신적 인격과 메시아 신분에 관한 것이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청에 대하여, 그는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말로 긍정하셨고,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분명히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전에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의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마 16:16).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 참 선지자시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요, 우리를 다스리시고 원수 마귀로부터 지키시는 참 왕이시다.

[71절]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예수님은 그가 친히 증거한 그 분이시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증거한 바로 그 분이 아니시라면, 그는 선한 선생이 아니고 사기꾼이나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엄숙한 재판석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께서 진실을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신약성경은 무엇보다 첫째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요 20:30-31).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와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 음성으로 그 사실을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과 포도주 기적과 떡 기적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 등은 다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했다. 또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은 그의 신적 인격의 최종적 확증이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라고 말하였다(행 17:31).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욕과 조롱을 받으셨고 매를 맞으셨다.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고난을 각오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또 그는 주님 때문에 비방과 핍박을 당하면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시며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본받아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베드로는 그 밤에 주와 함께 깨어 기도하지 않다가 주께서 잡히시는 때 멀찍이 주를 따랐고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비겁하게 부인했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2-33).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함으로 항상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3장: 죽으심

1-25절, 정죄 당하심

[1-3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마태복음 27:1에 보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대 나라를 통치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최종적인 재판의 실권이 있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정죄하도록 머리를 썼고 그렇게 하면 일반 무리들이 로마 총독의 결정에 도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 죽이려 하였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제출한 고소 내용은, 첫째로 이 사람이 우리의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셋째로 그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비난이었다. ‘미혹한다’는 원어(디아스트레포)는 ‘타락시킨다’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셨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뿐이지 그들을 타락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 마음이 거짓되고 완악해서 예수가 백성을 타락시킨다고 고소한 것이다.

두 번째 고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운동도 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그에게서 비난거리를 잡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눅 20:25).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나라에 세금을 내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롬 13:7).

세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왕이시다(사 9:6-7; 렘 23:5; 30:9; 겔 34:23-24; 호 3:5; 마 2:2).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된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그들의 세 가지 고소 내용 중 세 번째 것에 대해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셨다. 그는 유대인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엄숙히 맹세하며 증거하셨듯이, 로마 총독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신 것이다. 그는 이 두 사건에서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세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히 그 내용이 쓰여 있다. 그의 왕국과 왕권은 영적 의미가 있었다(요 18:36). 그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며 그것은 물질적 풍요를 포함할 것이지만, 현재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하는 영적 나라이다.

[4-7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것은 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빌라도는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이성적이고 더 양심적이었다. 그의 판단에 예수는 죽임을 당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시한 고소 내용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가르친 것이 백성을 소동케 하고 선동한 것인가? 그 고소가 옳지 않다고 느낀 빌라도는 그 재판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며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 그 헤롯은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 안디바이었다.

[8-9절] 헤롯이 예수를[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의 소문은 일반 대중 속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고 헤롯 왕궁에까지 퍼졌다. 또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눅 8:3). 요안나는 자기 남편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며 또 그 남편 구사는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했을 것이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께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헤롯의 관심은 기적 행하심 같은 데 있었고,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진리에 있지 않았다.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예수께서는 고소당할 어떤 약점이 있으셨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엄숙한 재판정을 악용하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지도자의 지위와 인간적 꾀를 가지고 의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더욱 미워하신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저버린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악하였고 타락한 교회는 참으로 가증하고 위선적이었다.

[11-12절]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런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고 그것을 참으셨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고난들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전하게 하는 데 유익하다.

[13-17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심문]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도 그러했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 올려보냈음이라].80)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더라](전통본문).81)

빌라도는 또 예수에게 죽일 죄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그의 판단은 그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바른 판단이었다. 예수님께는 죽일 죄가 없었다.

[18-23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그들과 대제사장들의]82)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며 충동했다(마 27:20; 막 15:11). 또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은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요 19:12).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교묘히 선동하였고 총독 빌라도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7:24).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 총독 빌라도를 압박하였다. 거기에는 이성도, 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24-25절]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言渡)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마가복음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했다고 표현했다(막 15:15). 유대 백성의 뜻 배후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뜻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속에는 예수께 대한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알고 있었다(마 27:18; 막 15:10).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백성의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시기했던 것 같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다.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할 극악한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판결은 법대로나 이성대로나 양심대로 된 판결이 아니었다. 그의 판결은 정의와는 상관없었고 단지 백성의 뜻에 맞춘 불의한 판결이었다. 세상 법정에는 이런 일들이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을죄가 없으셨고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께서 죽을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판단하였고 또 세 번이나 증거하였으나, 빌라도는 결국 의로우신 예수님을 정죄하였고 그 대신 죄인인 바라바를 놓아주었다. 여기에 대속의 이치가 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의인의 죽음만 남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많은 사람들을 대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속의 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둘째로, 타락한 유대 지도자들의 양심은 이방인 총독 빌라도의 양심보다 더 더러웠고 무리들의 양심도 더러웠다. 빌라도는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한 일에 대하여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고 선을 택하는 바른 마음이다. 바른 마음에서 바른 판단이 나오고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나 더러운 마음에서는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므로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른 마음을 지켜야 한다.

셋째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재판관의 위치에서 그의 직권을 남용하였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거슬러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불의한 판사라는 오명을 그의 생애와 역사에 남겼다. 만국 교회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신구약성경의 교훈대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26-43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

[26절] 저희가 예수를[예수님을] 끌고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마 27:32 각주를 참조)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예수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더라](원문, KJV, NASB).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 요한복음 19:17에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오셨다고 증거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앞쪽을 짊어지시고, 시몬은 십자가의 뒤쪽을 짊어졌던 것 같다.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를 위해 십자가를 함께 질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로마 군병들이 시몬을 억지로 잡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다고 말하며(마 27:32; 막 15:21) 또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보인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을 계기로 그와 그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던 것 같다.

 [27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사형장으로 가고 계셨던 의롭고 선하신 주님을 보고 여인들은 슬픔과 애통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진실히 믿은 여자들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수많은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은 이렇게 눈물과 통곡의 길이었다.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동정적 눈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암시하셨다.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는 공범(共犯)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인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 악한 행위에 대해 그들과 그들 자녀들이 하나님께 받을 벌이 얼마나 클 것인지!

[29-31절]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날이 될 것이다. 아들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 죽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의 일이 오히려 큰 슬픔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어떻게든지 피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푸른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질 악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큰 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엄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로부터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혔다.

[32-33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와 함께 끌려가니라. [저희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께서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다른 두 행악자들도 사형을 받으러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형수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들에게 심히 부당한 취급을 받으셨다.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집행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두 행악자의 십자가도 그의 좌우에 세워졌다. ‘골고다’라는 원어(굴골렛)는 ‘해골’이라는 뜻이다.83) 그것은 그 곳이 사형장이었고 해골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곳 지형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그 두 사람은 흉악범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 큰 못들이 박혔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러나왔고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3시부터 9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고 증거한다(막 15:25, 34).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예수께서는 큰 고통 중에 죽어가시는 중에서도 그를 못박는 자들이 자기들의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해 그러하니 용서해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지(無知)가 변명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지식을 가지고 범하는 죄보다 작은 죄일지라도, 무지의 죄도 죄이다.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그의 겉옷을 넷으로 나눠 가졌고 통으로 짠 그의 속옷은 제비 뽑아 가졌다(요 19:23-24). 시편 22:18은,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도 벗기움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에게 이런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35-37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다. 그들은 의분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관원들도 비웃었고 군병들도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희롱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왕관도 없고 왕국도 없고 군대도 없는 가련한 왕처럼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단지 조롱거리이셨다.

[38절] 그의 위에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전통본문)84)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한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한다(요 19:20).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으로서 사실상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 죄패가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모든 세상 사람들, 즉 당시에 헬라어를 쓰던 일반 대중이나 라틴어를 쓰던 지식인이나 히브리어를 쓰던 유대인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참으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 예수께서는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고통과 수욕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얻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를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매우 악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는 중한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둘의 생각은 서로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오만불손하게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였다.

[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그 사람을 오히려 꾸짖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받는 형벌이 자신들의 행위에 합당한 것임을 인정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행한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큰 악을 행해 사형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바른 반성과 뉘우침이 있었고 또 예수께 대한 바른 생각과 판단이 있었다. 그가 이런 뉘우침과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엡 2:1).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롬 3:11).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인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42절] 가로되 예수여[예수께 가로되 주여](전통본문),85)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 행악자는 바른 뉘우침을 가졌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의탁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세상에 다른 어느 곳에도 진리가 없지만,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며 그를 믿은 그 행악자에게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들어간다. 악을 행한 자는 지옥에 들어간다(눅 16:22-23).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낙원은 천국을 가리킨다(고후 12:2, 4). 그 회개하고 믿은 행악자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주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문은 열려 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날도 죄인이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 행악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악행으로 사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선행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옷과 같다(사 64:6).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고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 한 행악자의 구원은 이 사실을 잘 보인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의 요지이다.

본문은 또 몇 가지 부수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죄 때문에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두려워하며 회개하고 울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눈물로 회개한다면, 우리는 심판 때에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울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판 날에 재앙을 두려워하며 통곡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우리는 무지한 원수들을 용서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우리를 미워하고 해치려는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회개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강도는 죽는 순간 그 영혼이 낙원에 들어갔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낙원은 천국이다. 의인들의 영혼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쉬며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몸이 부활해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그넷길이다. 우리는 영광의 내세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44-56절, 예수께서 죽으심, 무덤에 묻히심

[44-45절]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당시 유대인들의 제6시는 정오이다. 예수께서는 제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막 15:25)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었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으며 오후 3시까지 그러하였다. 그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그때의 세상의 어두움을 잘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막 15:3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요 1:29).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다(갈 3:13).

예수께서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이 은혜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특히,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지성소](KJV, NIV)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던 곳에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 없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신약성도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셨음으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은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했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사람의 영은 불멸적이다. 사람의 영은 몸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내세가 있다. 사람은 죽을 때 그의 영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자의 영은 죽을 때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영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스데반은 죽을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행 7:59). 베드로전서 4:19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말했다.

[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그 된 일’이란 세 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짐과 성소 휘장이 찢어짐 등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마 27:54; 막 15:39). 사형집행관이었을 그 백부장은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의로운 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깨달았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때에 저 이방인은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 양심적인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48-49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관원들은 비웃고 군병들은 희롱했지만(35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은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동정심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여자들 가운데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리고 살로메 등이 있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7:56; 막 15:40).

[50-51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불레 boulhv)[계획]와 행사에 가타[옳다고]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유대인의 공회 즉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존귀한 공회원(막 15:43)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이었다. 악한 자들이 가득하였던 그 시대에 선하고 의로웠던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할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었다. 그는 동료들이 그 악을 계획하고 행할 때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는 자이었다. 그 당시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은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38).

[52-53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요한복음 19:38에 보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었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숨겼었으나, 이제 예수님의 죽음 후에 겁없이(막 15:43)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의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한 그때에 그가 예수님께 동정적 행동을 하는 것은 그의 신분에 위험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는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출교를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마음으로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행동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기를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사(葬事)를 위해 요셉을 예비하셨고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5:44에 보면, 요셉의 요청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안치했다(마 27:60). 장사(葬事)는 죽음의 확증이다. 그는 장사되셨다. 예수님의 무덤은 다른 시체가 없는 새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그 무덤에서 부활하신 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의 장례식에는 거창한 장례 의식이 없었다. 그의 시체는 그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으로 옮겨졌고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자들이 멀찍이 뒤따라간 조촐한 장례 행렬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확실히 쓸쓸한 장례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무슨 예식이든지 거창하게 하려 하지 말고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례식도 찬송과 기도, 간단한 권면이나 말씀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54-56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이 날은 예비일이었고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주간 안식일의 예비일인 금요일이라고 보인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는 말은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그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그들은 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연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나 내세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의만 의지하여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례를 준비하셨다. 그는 그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필요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한 일을 적절한 때에 준비하시고 도우시고 이루신다. 그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에벤에셀의 하나님(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사용하셨다. 아리마대 요셉은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선과 악를 분별하는 바른 생각을 가졌고,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으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고,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선한 수고와 봉사를 하였다. 우리도 혼란한 마지막 시대에 바른 생각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한 수고와 봉사를 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24장: 부활하심

1-12절,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

[1절] 안식 후 첫날(테 미아 톤 삽바톤)[주간의 첫날](KJV, NASB) 새벽에 이 여자들이 [어떤 다른 사람들과 함께](전통본문)86)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 새벽에 경건한 여자들은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다. 본문 10절은 이 여자들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이들이라고 말한다.

[2-3절]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예수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했었다고 증거한다(마 27:66). 마가복음에 보면, 그 여자들은 그 새벽에 무덤에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의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걱정하였다(막 16:3).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이미 굴리어 옮겨져 있었다. 마태복음은 큰 지진이 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마 28:2). 그들은 그 무덤에 들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뵈지 않았다. 본문은 예수님을 ‘주 예수’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다. 주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그 빈 무덤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이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증거이며 중요한 증거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정들을 하였다. 어떤 이는 예수께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신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빌라도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고 증거한다(막 15:44-45). 또 기진맥진하였을 그가 그 무거운 돌을 굴려내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 그의 제자들이 그런 예수를 부활하셨다고 속여서 전파하였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 나중에 그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도적질하였다고 가정하였다. 마태복음은 유대 지도자들이 군병들에게 그런 거짓말을 퍼뜨리라고 했고 그런 말이 유대 사회에 퍼졌다고 말한다(마 28:11-15). 그러나 선생님의 시체를 감춰 놓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런 경우이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셨고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8:44).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 일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순교까지 하였다. 그들이 거짓을 위해 그런 고난을 받고 순교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빈 무덤을 증거하였고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 외에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다.

[4절] 이를 인하여 근심할(디아포레오)[당황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그 여자들이 이를 인하여 당황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태복음은 주의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의 형상이 번개같고 그의 옷은 눈같이 희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8:2-3). 마가복음도 흰옷 입은 청년이 나타났다고 말한다(막 16:5).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도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제자들 곁에 나타났었다(행 1:10). 또 고넬료가 제9시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볼 때에도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홀연히 나타났었다(행 10:30).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천사들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었고 롯에게 나타났었으며 야곱에게도 나타났었다.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천사들이 그 여자들에게 나타났다.

[5-8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人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었다. 마태복음은 수직하던 자들도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한다(마 28:4). 천사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며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밝히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계실 때에 세 번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은 이 일들을 잘 증거한다. 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人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人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마가복음도 비슷하게 증거하고(막 8:31; 9:31; 10:33-34), 누가복음도 9:22에 한 번 기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고 그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 여자들도 천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9-12절]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호세이 레로스)[쓸데없는 이야기같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들에게 고하였다. 마가복음은 그들이 처음에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말한다(막 16:8). 마태복음은 그들이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해 증거한다. 28:8-10,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은 이 모든 일, 즉 예수님의 빈 무덤과 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갈릴리에서의 그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 천사들의 말과 돌아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뵈온 일을 다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제자들에게 고하였을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쓸데없는 이야기같이 보여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신 바를 믿지 않았고 기억하지 못했고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 아침 여자들의 빈 무덤에 대한 증언과 천사들의 증거를 직접 전해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참으로 마음이 어둡고 무디었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 여자들의 말을 확인하려 하였다. 베드로는 확실히 믿음이 있었고 그의 믿음은 그의 인간적인 불신앙과 회의를 극복하게 하였고 빈 무덤의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가 무덤에 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도 같이 갔고,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만 놓여 있고 그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은 것을 보았다(요 20:6-7).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다. 주께서 부활하신 새벽에 그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그의 무덤이 비었음을 보았고, 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들었고, 또 베드로는 직접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이 비었음을 보았다. 사복음서는 그 빈 무덤을 증거한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증거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특징이다. 세계의 10대 종교들 중, 다른 종교들의 창시자들과 달리, 기독교는 창시자의 무덤이 없다. 기독교는 창시자의 무덤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가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셨다는 증거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증거이다.

셋째로, 제자들은 심히 불신앙적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에 대해 무지했고,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이나 하신 예언을 잊어버렸고, 빈 무덤과 천사들의 말을 전하는 여자들의 말을 들은 후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은 심히 불신앙적이고 증거들을 잘 살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말씀과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35절,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13-17절]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60스타디아, 약 11킬로미터)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너희가 길 가면서 슬픈 얼굴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전통본문).87)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25리(60스타디아), 약 11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1스타디온은 약 185미터임). 그들은 길에서 ‘이 모든 된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다. ‘이 모든 일들’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신 일, 삼일 후 여인들이 그의 무덤이 비었음을 본 일,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일, 사도 베드로가 그 빈 무덤을 확인한 일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토론할 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슬픈 얼굴로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무어냐고 물으셨다. 그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빈 무덤과 천사의 나타남에 대한 말들도 믿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오직 슬픔과 근심만 있었다.

[18-21a절]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행위와 말](전통본문)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그것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슬픔과 낙심과 혼란과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다. 그들이 생각한 구원은 그가 유다 나라를 이방나라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건져주시고 또 유다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기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산산이 다 깨어졌고 절망과 혼란이 그들을 덮쳤던 것 같다.

[21b-24절]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예수님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글로바는 또 그 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그는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그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살으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는 것과, 제자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의 말들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내용들의 진실성을 믿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더디 믿음을 지적하시며 성경을 설명해주셨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다. 요한복음 5:39,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성경에 짐승의 피 흘림이 있는 제사 제도, 번제단과 성소 휘장에 피 뿌림이 있는 성막 제도,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유월절 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했다. 또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 예언했다.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실 것이다.

[28-32절]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축복]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변화된 몸이셨다. 그를 목격한 것은 연약한 사람들의 환각 작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제자들, 즉 두 증인들이 증거한 확실한 객관적 사실이었다.

[33-35절]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증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은 단순히 환영이 아니었다. 그는 두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며 대화하셨다. 그는 그들과 한 집에 들어가 저녁 식탁에 앉으셨고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주셨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일을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도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확실히 부활하셨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의 예언을 이룬 일들임을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어보내시면서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은 메시아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어린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는 메시아의 죽음을 암시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언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후에 부활하심으로 영광에 들어가셔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자이시며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로마서 1:4,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도행전 17:31,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둘째, 그것은 그의 죽음이 속죄적 의미가 있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셋째, 그것은 새 생명과 영생과 천국을 보증한다. 베드로전서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36-53절, 제자들에게 나타나심과 승천하심

[36-37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유령]으로 생각하는지라.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셨다. 그가 죽으신 후 슬픔과 낙심과 불안 가운데 있었을 제자들에게 그는 평안을 기원하심으로 위로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고 유령으로 생각하였다.

[38-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디알로기스모이)[생각들, 변론들, 의심들]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단순히 영이 아니셨다. 그의 몸은 손과 발을 가진 몸,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던 바로 그 몸,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의 연약하고 누추한 몸도 장차 그의 몸과 같이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44).

[41-43절]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과 꿀벌집](전통본문)88)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시므로 자신의 부활, 곧 그의 육체적 부활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부활하신 그는 단순히 영이 아니시고 음식을 먹으실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생명강가에서 나는 열두 가지 과일을 먹게 될 것이다.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하셨듯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되고 예표되었던 모든 내용들은 다 이루어져야 하였다.

[45절] 이에 저희 마음(누스)[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일깨워주실 때 우리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성경책이 필요하고 또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셔서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을 주신다.

[46-47절]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회개와 죄사함이 그의 이름으로]89)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되었으며 또 그것이 합당하니](전통본문).90)

메시아에 관하여 성경이 기록한 바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그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많이 예언하고 또 암시하였다(짐승 제사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 등). 또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암시하였다(시 16:10; 110:1; 호 6:2). 둘째는 회개와 죄사함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회개와 죄사함을 목표로 한다. 회개와 죄사함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모든 족속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죄사함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그의 중보 사역에 근거하여 그의 권위로 전파될 것을 보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여 그들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다. 증인에게는 자신의 달변이 중요하지 않고 단지 증거해야 할 내용에 대한 충실한 증거가 중요하다.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증거하면 된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부여된 임무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달변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오직 그들이 보고 들었던 바를 충실히 증거해야 했다.

[48-49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 성](전통본문)91)에 유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의 증인으로 그들이 해야 할 바는 그에 대한 사실들을 충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1-2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증인들은 용기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증거할 내용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며 주께서도 성령의 오심에 대해 많이 증거하셨다(요 14-16장). 주께서는 친히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요 15:26).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령과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셨다(행 1:4, 8).

[50-51절]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92)시니.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셔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요 11:18). 그 곳은 감람산 기슭이었다(행 1:12). 주 예수께서는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셨고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에 관해 교훈해주셨었다(요 11장; 마 24장). 그는 베다니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것은 그가 부활하신 지 40일 후의 일이었다(행 1:3, 9). 부활하신 주께서는 이처럼 승천(昇天)하셨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가 이전에 쓴 책(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고 말한 후,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 증거하였다(행 1:9).

[52-53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93)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찬송하며 찬양하니라].94) [아멘].95)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스승으로 섬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였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그들이 늘 성전에 있은 것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주의 명령 때문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부활하셨다. 그는 단순히 영으로가 아니고 손과 발이 있는 몸, 그러나 영화롭게 된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몸을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과 꿀벌집을 잡수셨다. 그것은 그의 부활이 단순히 영이 아니고 몸의 부활임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우리는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자이셨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의 예언을 이룬 일들임을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또 회개와 죄사함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도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제자들이 이 일에 증인이며 그가 약속하신 대로 오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입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죄사함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셨다.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다.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며 또 오른손으로 일곱 별들[지상 교회의 목사들]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들[지상 교회들] 사이에 다니시는 자라고 증거하였다(계 1:17-18; 2:1). 또 신약성경은 승천하신 주께서 구원 얻은 성도들을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시고 중보사역을 하신다고 증거한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히 7:25) 또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고 말하였다(히 9:24). 그는 지금도 온 세상과 만국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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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yz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Tertullian Diatessaron 등.

2) Byz (syrp s) copbo arm (Diatessaron Origen3/5) 등이 그러함.

3) Byz A D itd 등이 그러함.

4) Byz A syrp copbo-mss 등에 있음.

5) Byz A C it syrp copbo-pt 등이 그러함.

6)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7) Byzpt A D lAD ita d ff2 vg syrp 등에 그러함. 그러나 Byzpt Lectpt itb it(e) 등은 “그 이상은 아람이요 그 이상은 요람이요”라고 되어 있음.

8)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pt) arm Origen1/2 등.

9) Byz A it vgcl syr(p) Origen1/2 arm 등에 있음.

10) Byz A it (copbo-pt) 등에 있음.

11) Byz A vgcl syrp copbo-mss Irenaeuslat 등에 있음.

12) Byz A syrp copbo-pt 등에 있음.

13) 어떤 유력한 영어성경들(NASB, NIV)은 몇 개의 고대 사본들에 근거하여 ‘유다 여러 회당에서’라는 본문을 택했으나,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라는 전통본문의 고대적인 지지는 충분하다.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arm 등. 또 문맥적으로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39를 비교해봐서나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라는 본문이 옳다.

14) Byz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 arm에 있음.

15) Byz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pt arm 등에 있음.

16) Byz A C (D) ita b d e ff2 syrp arm 등에 있음.

17) Byz A it vg syrp 등에 있음.

18) Byz A C it vg arm 등에 있음.

19) Byz A C D ita d ff2 vg arm 등이 그러함.

20) Byz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arm Origen Diatessaron.

21) Byz א A C D W ita b d e ff2 vg syrp s copbo arm Diatessaronarm 등.

22) Byz A C (D itd) vg syrp arm Diatessaron 등.

23) Byz A C itb 등에 있음.

24) Byz א A W itb vgcl syrp s copbo-mss 등.

25) 칼빈, 박윤선 등.

26)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copsa-ms bo-pt Origengr 2/3, lat 등.

27) Byz A (D) vg syrp s arm 등에 있음.

28) Byz A W syrp c s Diatessaronsyr 등.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40여km 떨어진 얍복강 부근의 마을이었다고 함. 마가복음 5:1도 ‘가다라’라고 함.

29) Byz א A C W ita b ff2 vg syrp c copbo Origenlat 등에 있음.

30) Byz א A C D it vg syrp 등이 그러함.

31) Byz A (C* D) W (ita b d ff2 vg) syr cop Diatessaronsyr arm 등.

32) Byz A C W syrp 등에 있음.

33) Byz A W it vg syrp 등에 있음.

34) Byz A C W (ita b e ff2 vg) syr(p) (copbo-mss arm) 등이 그러함.

35) Byz A C* W itb e vg syrp c Diatessaron Clement Tertullian 등.

36) M.

37) Byz א* A 등.

38) Byz A C D W ita b d syrp 등에 있음.

39) Byzpt (D) ita b (d) e vgcl ww syrp c copsa-pt bo-pt 등에 있음.

40) Byz A C W syrp 등에 있음.

41) Byz p45 75 א A C W ita b e vg syrp c copsa bo arm 등에 있음.

42) Byz א A C W syrp copbo Irenaeus Clement Origen Tertullian 등.

43) Byz א A C W syrp c copbo Irenaeus Clement Origen 등이 그러함.

44) Byz p45 A D syr 등이 그러함.

45) 이찬영, 성경지리총람, 267-269쪽.

46) Byz p45 75 A C* W vg syrp c copsa 등이 그러함.

47) Byz A C D W it(a) b d e (ff2) vgmss syrp c copsa bo 등에 있음.

48) Byz א* A C D W itb d e ff2 i vgmss syrp copbo 등에 있음.

49) Byz A C D W itb d ff2 i vgmss syrp copbo-mss Diatessaronsyr 등.

50) Byz א A C D W itb (d) vg syrp (c) (copbo) 등에 있음.

51) Thayer의 신약 헬라어 사전. 이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왕하 1:23)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KJV). ‘바알세붑’은 ‘파리들의 주’ 곧 귀찮은 파리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신이라는 뜻일 것이다.

52) ‘손을 씻는다’는 원어(밥티죠 baptivzw)는 ‘세례준다’는 단어인데, 이 말은 ‘물에 담그다’는 뜻 외에, ‘씻다, 깨끗게 하다’는 뜻이 있다.

53) Byz A (D) W it syrp copbo-pt 등에 있음.

54) Byz A (D) W it vg syr copbo-ms 등이 그러함.

55) Byz A C (D) W vg syr(p) 등에 있음.

56) Byz p45 A W itb d e ff2 i vg syrp c s arm Diatessaronsyr Tertullian 등이 그러함.

57) Byz p45 vid A D W it vg syr 등이 그러함.

58) Byz A D W it syrp c copbo-pt 등에 있음.

59) Byz W it vg syr(c s) copsa-ms bo 등이 그러함.

60) 전통본문은 ‘아니하냐’를 생략함. Byz p45 A W it vg syrp s 등.

61) TR 본문(KJV)은 ‘나귀’라고 되어 있으나, 전통적 다수사본들의 본문은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Byz UBS p45 75 A B W ite syrp copsa 등.

62) Byz A (D) W ita d vg syrp copsa-ms bo-pt arm Origen 등이 그러함.

63) Byz (D) itd e vgcl copbo-mss 등에 있음.

64) Byz A D W itb d ff2 i vg syrp 등에 있음.

65) Byz A (D W*) ita (b) d (e ff2) vgmss (syrp) 등이 그러함.

66) Byz א A W ita b e ff2 i vg (copbo) arm 등이 그러함.

67) Byz W it 등이 그러함.

68) Byz A D W ita b d (e) ff2 i vg syrp c s (arm Diatessaron) 등.

69) Byz A (C) W vg (syrp c s) 등이 그러함.

70) Byz A W ita b e ff2 vg syrc arm Irenaeus 등에 있음.

71) Byz A C D W it vg syr 등에 있음.

72) Byz A D W ita d e ff2 i vg syrp Origen Cyprian 등에 있음.

73) 조선일보, 1998. 12. 7, 11쪽.

74) Byz א D W itd i Origen 등이 그러함.

75) J. C. Ryle,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II, 373.

76) J. C. Ryle, Ibid., II, 365.

77) Byz A C W it vg syrp copbo 등에 있음.

78) Byz A* (D) W it vg 등에 있음.

79) Byz A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arm 등에 있음.

80) Byz A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arm) 등에 그러함.

81) Byz א W itb e ff2 vg syrp arm (19절 후--D itd syrc s) 등에 있음.

82) Byz A D W itd syrp (c s) copbo-mss arm 등에 있음.

83) 영어성경은 해골이라는 말을 Calvary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의 calvaria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84) Byz א* A W itb d e ff2 vg syrp 등에 있음.

85) Byz A W it vg syr copsa-mss bo-pt 등에 있음.

86) Byz A W (syr copbo-pt) 등에 있음.

87) Byz W ita b ff2 vg syrp (c s) arm 등이 그러함.

88) Byz it(a) b ff2 vg syrp c copbo-pt arm geo Justin 등에 있음.

89) Byz A C D W ita b d e ff2 vg syrs 등이 그러함.

90) Byz A W vg syrp copsa-ms 등에 있음.

91) Byz A syrp copbo-mss 등이 그러함.

92) Byz p75 A B C W vg syrp copsa bo 등에 있음.

93) Byz p75 א A B C W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94) Byz A W vg syrp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95) Byz A B vg syrp copbo-mss Diatessaron 등에 있음.